▲ 윤인수 (지역사회부장)
[경인일보=]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에서 구제역과의 전쟁이 한창이다. 전장의 일선에 선 공무원, 수의사, 축산농민들은 보이지 않는 적, 구제역 바이러스를 퇴치하느라 전력을 쏟고 있다. 전쟁의 피해 당사자인 축산농민들은 방어선 안에서 스스로 유폐를 자청한 채 역병의 소멸을 고대하고 있다. 비장하고 결연하다. 전쟁은 목숨을 요구한다. 공무원들의 과로사가 잇따른다. 신체적 부상을 겪은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생목숨을 매장하는 스트레스다. 매몰되는 소, 돼지의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악몽으로 재현된다. 살처분 현장에 동원된 공무원, 수의사, 축산농민들이 겪고 있는 구제역 트라우마다. 이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프로그램이 절실할 정도이다.

구제역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현장의 지휘관인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병영일기(?)를 보면 안다.

#조병돈 이천시장의 전자서한. "닭 한 마리 잡아보지 못한 직원들도 있을텐데 살처분이란 혹독한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 내 심정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프다. 살아있는 가축을 매장하며 직원들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잘 안다. 30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하고 4천200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했다는 보고를 처음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인재 파주시장의 병영시(구제역2). "아이와 어미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목장주는 함께 묻어달라고 구덩이에 뛰어든다/ 비명소리는 다 어디가고 철새만 조용히 하늘을 날고 있다/ 순진이, 워낭이, 영롱아 식은재를 휘젓듯이 죽은 가축의 이름을 찾는다…손가락 잘리고 소에 깔려 허리 다쳐도 무죄의 공무원들은 방역에, 매몰작업에 연말도 잊었다…"

#홍승표 파주부시장의 칼럼(경인일보 기고). "구제역 종식을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현장은 비장합니다. (중략) 살 처분에 나섰던 시청 팀장은 모친이 위독하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도 작업장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다며 끝까지 작업에 참여해 동료들을 울컥하게 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돌아가셨고 30일 장례를 마쳤습니다."

#황은성 안성시장의 문자메시지. "한파가 몰아치는 추운 날씨에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초소 근무하는 공직자들에게 시장으로서 해 줄 것이 없어 안타깝다. 하얗게 내리는 눈 속에 구제역이 묻혀버렸으면."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 첫 양성판정을 한 11월 29일로부터 두달이 지난 지금. 구제역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남한 전역으로 확산됐다. 소, 돼지가 300만 마리 가량 살처분됐고, 2조2천억원의 물적피해와 104명의 공무원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파주와 김포 같은 곳은 전쟁이 사실상 종식됐다. 바이러스가 깃들 생명들이 씨가 말라서다. 비참한 현실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의 뒷북과 정치권의 때늦은 앙앙불락이 그것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25일 구제역 확산원인 및 전파경로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요점은 첫 양성판정 2주일 전 구제역이 발생했으나 부실한 검사장비와 검역체계로 인해 악마의 바이러스를 전국으로 유출했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새해예산안 처리와 국무위원 청문회에 몰두하느라 구제역 전쟁에 국력을 집중시키는 일을 외면했다. 야당은 정부의 구제역 대응을 질타하면서도 국회를 여는 일에 신중했다. 지난 27일 열린 당정회의는 가관이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난데없이 '도둑론'을 거론하며 정부 보상비가 새는 것만 걱정했다.

전국이 구제역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국민을 힘들게 하는 트라우마는 정치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늘 늦고, 편향적이며, 말이 앞서고, 소란스럽고, 대책이 없다. 그들은 갈등세포를 무한분열시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이들을 제자리에 세울 백신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