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 金大中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오기전 오래 살았던 동교동과 일산의 자택에는 '김대중 이희호'라는 이름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金 대통령은 부인 李姬鎬 여사를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로 생각한다고 말해 왔고, 이 문패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922년 수송동 외가에서 6남2녀중 장녀로 태어난 李 여사는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명문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문과,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이어 당시에는 드물게 램버스대, 스카렛대 등 미국에서 유학까지 한뒤 귀국, YWCA총무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신세대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런 李 여사가 金 대통령과 만난 것은 '운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62년 李 여사는 金 대통령의 신념과 관용, 멋에 이끌려 “이 사람은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석패한 그는 朴正熙 대통령의 정적으로 몰렸고, 이후 납치, 망명, 투옥, 연금으로 이어지는 형극의 길을 걷게되면서 李 여사의 삶도 암울한 시련의 늪으로 빠져든다.
 李 여사는 유신의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金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은뒤 미국망명길에 오르던 82년까지의 기간을 '외롭고도 잊혀진 곳에 있었던 세월'로 기억하고 있다.
 YWCA상임위원으로 사회활동을 하던 李 여사의 등 뒤에는 늘 감시와 미행의 검은 눈길이 따라다녔지만, 金 대통령을 대신해 때로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李 여사는 金 대통령의 95년 정계복귀이후에는 측근들이 감히 진언하지 못하는얘기들을 그때 그때 귀띔해 주었고 대통령부인이 된 뒤에도 매일 저녁 조간 가판을 체크해 金 대통령에게 조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金銀煥기자·eh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