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수 (지역사회부장)
[경인일보=]분노한 민심.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유일한 권력이다. 현재 민심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민하다. 육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먼 바다에서 잔뜩 몸을 낮춘 거대한 쓰나미와 같다. 어떤 상대든 민심을 거슬렀다가는 베어지고 휩쓸려 나갈 수밖에 없다.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걸려들었다. 천당 아래 분당에서 칼을 맞았고, 강원도에서 쓰나미에 휩쓸렸다. 유시민은 김해을에서 피를 철철 흘렸다. 하지만 이번이 그렇다는 것이고 다음번 표적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민의 분노는 지금 표적이 없다. 도대체 옳고 그른 자들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라 꼴은 더러워지니, 그 분노가 맹목적이다.

국가는 신뢰의 총합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민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신뢰 속에서 공존한다. 미국이 파키스탄에 특수부대를 파견해 오사마 빈라덴을 살해했을 때 미국인들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환호했다. 전세계의 양심들이 국제법을 들먹이며 미국의 패권적 태도를 비난해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실행한 미국을 환호한다. 남에게는 불편할지 모르나, 미국과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신뢰의 확인이자 정의이다.

국가와 국민의 상호신뢰를 중개하는 것이 바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이다. 3부의 권력자들은 국가와 국민 사이에서 국가가 국가답게, 국민이 국민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신뢰를 중개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신뢰의 중개자인 만큼 그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면 국가와 국민 사이가 불편해지고 혼란에 빠진다. 그런데 지금 3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신뢰도는 얼마나 될까. 어느 재벌회장의 말처럼 "낙제의 수준을 겨우 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행정 권력에 대한 국민불신은 해방공간 이후 심화돼왔다. 독재, 쿠데타, 대통령 친인척 비리로 얼룩진 권력의 역사는 존중받아야 할 권력을 쓰레기 통에 처박아 버렸다. 노무현은 이상의 과잉으로 불행한 대통령이 됐고, 이명박은 과도한 성과주의로 비판 받는 중이다.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서툴러 점점 남이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고 갈파한 마키아벨리의 어록은 역대와 현재의 권력 모두에 꼭 들어맞는다.

입법권력 또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연명해온지 오래다. 저질, 저차원, 안하무인, 이기주의, 붕당주의…. 그들은 이제 스스로 구원할 자정능력이 없다. 지금 한나라당은 보수의 가치를 재건하는 일이 아니라, 향후 권력의 향배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야당은 몰가치적인 야당연합으로 찢어진 대권그물을 깁느라 주야로 바쁘다. 국민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법부? 전관예우는 여전히 서슬이 퍼렇고, 판사에 따라 형량이 들쑥날쑥에, 서민이 변호사의 조력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3부 외에 현대국가 시스템에서 또 하나 신뢰의 상징이 있다면 바로 금융이다. 자본이동의 신뢰가 깨지면 변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마저도 깨졌다.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우리의 사회유지 시스템이 이미 오래 전부터 붕괴중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리배가 은행을 경영하고 정부가 법률로 설치한 감독기구인 금감원 출신 감사들이 뒷배를 봐주는 먹이사슬. 이것만도 기막힌데, 과연 드러난 것이 전부일까 하는 의심이 국민의 심사를 더욱 번거롭게 한다. 깨놓고 말해 시중은행과 증권회사, 보험회사들은 괜찮은 것인지 의심이 드는 게 상식 아닌가.

지금 국민들은 신뢰할 수 없는 행정권력, 입법권력, 사법권력, 자본권력이 짬짜미해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것으로 의심하면서 분노하고 있다. 권력은 이런 국민의 의심을 어떻게 거둘 수 있을까. 혁명에 버금가는 자기 개혁 말고는 방법이 없다. 책임전가나 기만, 깜짝 이벤트로 잠재울 민심이 아니다. 국민은 산업화와 선진화의 그늘에서 번진 부정과 부조리의 실체를 간파한지 오래다. 그래서 혁명에 준하는 개혁청사진을 요구하고 있다. 답하는 자들은 살 것이고 거부하거나 침묵하는 자들은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