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오후 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옛 '대불호텔(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 터'에서 호텔 기초부분인 것으로 보이는 붉은 벽돌 구조물이 드러나 공사중이던 상가건물 터파기 공사가 중단됐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경인일보=정진오기자]"(1887년 건축에 착수, 1888년에 낙성시킨) 그 당시 가장 하이칼라로 지었노라는 이 벽돌집이 처음부터 외국인 특히 한국을 찾아드는 구라파인 혹은 미국인 상대의 양식 호텔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천 향토사 연구자인 최성연 선생은 1959년에 낸 '개항과 양관역정'이란 책에서 '대불호텔'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성연 선생은 책이 나오던 당시에 인천에 서구식 호텔이 한 곳도 없다는 점을 애석해 하면서 "양식 호텔을 두 채나 지니고 한국식 혹은 일본식 고급 여관 수십 채와 고급요정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흥청대던 그 당시와 30만 인구를 뽐내는 인천일망정 한 집의 버젓한 양식 호텔이 없는 오늘과 비겨보면 야릇한 느낌이 없지 않다"고 적기도 했다.

24일 당국으로부터 신축공사 중지명령이 내려진 '대불호텔터'는 인천 개항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대불호텔은 1880년대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숙박업(호텔) 역사의 첫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호텔이 중국음식점 '중화루'로 바뀐 뒤로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도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개항 당시에 조성된 외국인 조계지 내에서의 일본인과 중국인 상인들의 모습도 유추하게 하고, 경인철도 개통으로 인천에 번창하던 숙박업이 급속도로 퇴조하고 그 대신 전혀 새로운 음식문화(자장면)가 자리잡게 된다는 점도 대불호텔과 중화루의 역사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대불호텔 등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불호텔의 설계도라든지, 실측도조차 없어 사진으로 겉모양만 살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번에 대불호텔터에서 나온 유구는 대불호텔의 규모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이다. 또한 이번 유구 출토는 대불호텔, 중화루 등과 관련한 본격적인 연구에도 불을 지피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상임연구위원은 '인천 대불호텔·중화루의 변천사 자료연구' 논문에서 "대불호텔의 운명은 제국주의 공간정책과 식민도시의 산업구조의 변동이 초래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의 하나이고, 대불호텔을 계승한 중화루는 한국 화교사회의 변천을 읽을 수 있는 시금석이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