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이 안나 XX놈아, 판사가 물어보면 들었다고 해 무조건. 엉? 엉?"
1999년 개봉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이 영화는 인천과 인연이 깊다. 이 영화에서는 재개발되기 전의 수도국산 달동네를 비롯 신흥동 창고지역과 인천항 하역장 등 인천 곳곳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상으로만 보면 인천의 '기록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단지 인천의 곳곳을 앵글에 담았다고 해서 이 영화와 인천의 인연을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인천에서 찍은 영화가 한두편인가. '장군의 아들'을 비롯해 '북경반점', '고양이를 부탁해' 등 영화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드라마를 찍을 때도 방송국의 촬영장비와 배우들이 자주 인천으로 출동한다.
정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인천'의 인연을 말하고 싶은 부분은 영상이 아니라 시나리오에 녹아 있는 형사들의 생활상이다. 이 영화에서는 미화되거나 꾸며지지 않은 인천 한 경찰서 강력반 형사들의 모습이 스크린을 채운다. 좀 과장된 표현이 없진 않지만 말투나 행동거지로 볼 때 영화속 그들은 깡패와 구분이 안간다. 더 나아가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들고 '설쳐대는' 모습은 조폭을 방불케 한다. 걸쭉한 육두문자가 섞인 협박과 회유로 범인을 다루기도 하고 '집단 폭행'으로 자백을 받아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물적 감각으로 집요하게 범인을 추격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많은 경찰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딱 우리들 얘기네!" 등의 이야기가 술자리의 안주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영화가 리얼리티 측면에서 여느 형사 영화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 크랭크 인을 1년여 앞두고 이명세 감독이 인천서부경찰서를 찾았다. 당시 영화 '형사수첩'(가제)의 시나리오를 구상중이었던 그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형사들과 함께 생활해보고 싶다는 뜻을 경찰서에 전달했고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알려졌던 영화감독과 강력반 형사들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명세 감독은 한달간 강력반 형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인 검거 현장을 누볐다. 간혹 '여관방에 묵고 있는 범인을 검거할 때 이 감독이 한몫(?) 했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무용담'도 들렸다.
"민간인을 데리고 다니는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당시 강력반장에게 던진 기자의 질문에 그는 오히려 "사람도 없는데 잘됐어. 그 사람 형사해도 될 것 같아"라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시나리오이다 보니 러닝타임 내내 형사들의 땀냄새가 풍길 수밖에.
실제로 기자는 영화를 보았을 때 평소 경찰서를 출입하면서 보고 들은 강력반 형사들의 모습을 제대로 배우들의 연기에 투영시킨 감독의 능력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저 배우는 아무개 형사 같았고, 이 배우는 그의 동료 같았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등 그들이 평소 농담 삼아 하는 말도 대본으로 각색되니 명대사로 들렸다.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들은 '무끼(むき)'로 불리곤 했었다. '방향' 또는 '방면'이란 뜻의 이 일본말은 어떤 직종에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인다. 이 감독이 영화 제목을 '형사수첩'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바꾼 것은 '형사 무끼'들과의 동고동락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조폭 때문에 인천 경찰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는데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인권이 중시되면서 범인을 잡는 데 '인정사정 보지 않는' 형사들이 설자리를 잃어서일까? 어떤 때는 영락없이 형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경험담에 귀기울이던 시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