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규 / 경제부장
지난 주말 춘설(春雪)을 만끽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봄기운이 완연해 겨우내 눌렸던 기지개를 켜 보자는 마음에 산을 찾았다가 정상부근에서 난데없는 눈바람을 맞았다. 순간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앙상한 가지에 살포시 들러붙은 눈발들이 만들어낸 자연의 조화는 긴 겨울을 보내는 작별의 아쉬움이라도 노래하듯 등산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때가 때인지라 광교산 비로봉 정상 정자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산행객들은 이내 춘설을 감상하며 산아래에서 치열하게 아귀다툼하는 선거판 이야기부터 풀릴 기미조차 안 보이는 끝없는 불황 터널에 갇힌 생활이야기, 북한이 4월 광명성 3호 위성발사 강행을 운운하면서 불어닥친 불안한 한반도 정세이야기, 전세가격이 폭등해 신혼집을 구할 수가 없다는 새내기 예비부부들의 고달픈 이야기 등 아름다운 춘설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무겁고 어두워 보였다.

대한민국의 2012년 3월 봄 끝자락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연일 보도되는 내용은 밝은 미래 청사진이 없다. 핵안보정상회의로 주최국가인 대한민국에 세계 58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 정부와 대통령은 손님맞이 행사로 분주할 뿐이다. 지난해 G20 정상회의에 이어 각국 정상들이 대한민국에 대거 모이는 행사도 건국 이래 최대규모일 정도로 우리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중요한 쾌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국민들은 별로 신이 나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대사(大事)를 온 국민이 응원하며 가슴 뿌듯한 벅찬 감동이 있을 법도 한데 주변에서 만난 대다수 사람들이 "그건 나와 상관없는 정부 일이다"며 선을 긋기 일쑤다. 오히려 이 일보다는 최근 아시아계 최초로 세계은행 총재에 취임한 김용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된단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대한민국을 빛낸 위인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에 자극이 더 강해 보인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을 보고도 밝게 웃지 못하고, 국가대사에 무관심할 정도로 고개를 돌리는 국민들만을 탓할 일도 아닌 듯하다. 지난 15일 우여곡절 끝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가 발효됐다. FTA에 적극 찬성도, 반대입장도 아니었던 대개의 일반인들은 "평소 가격이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못 냈던 명품 생활용품을 값싸게 살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에 매장을 찾았다가 오히려 실망만 하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예비엄마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수입산 유모차 스토케, 오르빗, 부가부, 맥클라인 등 유명브랜드의 경우 현지보다 오히려 2배 이상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독점적인 유통구조를 갖고 있는 이들 해외브랜드는 FTA 발효에도 불구하고 자녀모시기 경쟁이 치열한 한국시장에서는 배짱 장사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FTA 발효 수혜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보금자리주택 건설로 안정적인 서민임대주택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집이 필요한 서민들은 비싼 분양가에 꿈을 접어야만 하는 현실이다. 여기에 DTI(총부채상환율) 규제로 인한 주택담보대출은 기대할 수도 없어 실거래 시장이 얼어붙어 있다. 가계부채가 엄청나 규제가 불가피하다지만 절박한 서민들은 비싼 이자를 감수하고 2금융권을 맴돌고 있다.

공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서민을 위한다며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입주예정자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현안은 입주기간이 민간기업보다도 촉박하다는 것이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분양한 공동주택의 경우 최장 32일로 입주기간을 정해 민간기업이 60일을 주는 데 비해 절반수준으로 짧다. 가뜩이나 주택경기 불황에 살던 집이 잘 팔리지 않아 입주자들이 높은 연체이자율(9~13%)을 부담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들은 척도 안 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금회수율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게 이유다. 이런 입주민 쥐어짜기 경영은 공기업이 할 일이 아니다. 내년 봄에는 여유로운 춘설을 감상할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