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재벌 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제민주화' 논의가 화두로 떠오르자 대기업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궁지에 일부 기업은 "소나기는 일단 피해가라"는 격언에 따라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하는 등 여론을 의식한 자발적인 선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들은 "현재 정치권이 추진하는 경제민주화는 기업 죽이기와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한편에서는 재계와 정치권이 한발씩 양보하자는 '타협안'을 거론하는 등 돌파구 찾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초조한 기업들..지배구조 개편 등 '선제 대응' = 4일 재계에 따르면 경제민주화 논의가 뜨거워지자 기업들은 주된 비판 대상이 됐던 총수 중심의 기업구조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서둘러 손질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더 큰 공격을 당하기 전에 자발적인 해결 의지를 보여주려는 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SK그룹은 경영시스템을 각 계열사의 자율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로 개편하기로 했다.

   '따로 또 같이 3.0'으로 명명한 이러한 경영시스템이 시행되면 지주회사는 그룹차원의 경영 또는 의사결정에서의 역할이 줄게 된다.

   SK는 세계적인 경기침체 등 경영 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각 계열사 중심의 글로벌 성장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재벌 개혁의 분위기에 대해 수긍하는 논리가 다소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계열사 자금 횡령 혐의로 기소돼 선고공판을 앞둔 최 회장은 여야 대선후보들이공통으로 내놓은 '재벌 총수의 기업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라는 공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라그룹은 정몽원 회장이 주력 계열사인 만도의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고 전문 경영인인 신사현 부회장을 자동차 부문 총괄 겸 만도 CEO로 선임했다.

   회사 측은 내부적인 인사 조치라고 설명했으나 업계는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선제 조치에 나선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룹의 두 축인 자동차 부문과 건설 부문 중 하나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해 책임 경영을 강화한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한진그룹 역시 순환출자 단계 축소에 나섰다.

   최근 대한항공이 비상장 계열사인 한진관광을 흡수합병하기로 해 순환
출자 구조를 한단계 줄이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가능성도 높였다.

   이번 합병에 따라 한진그룹 계열의 순환출자구조는 '한진→대한항공→한진관광→정석기업→한진'에서 한진관광이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 합병이 진행되면 대한항공은 이제까지 없던 한진 지분 1.43%를 확보하게 돼 상호출자제한을 어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진 역시 대한항공 지분을 9.72% 보유하고 있어 서로 출자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한 관계자는 "법상 6개월 내에 해소하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안을 곧 마련해 처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구속된 김승연 회장의 석방에 안간힘을 기울이는 한화그룹도 오너가 사법부의 처벌에 비교적 자주 노출된 대기업으로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재벌개혁에 대한 주문에 남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분위기 쇄신과 함께 사회의 요구에 발맞추는 차원에서 그룹 경영에 관해 어떤 식으로든 김 회장이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도 주변에서 나온다.

   ◇'집중포화' 재벌 2세 행보도 타격 = 빵집 등 서민업종 진출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총수의 자녀들도 경제민주화 바람에 잔뜩 웅크리는 분위기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9월 20일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제빵업체 신세계SVN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신세계가 판매수수료 특혜를 주는 등 부당 지원했다"며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하기 불과 2주 전의 일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올해 초부터 '재벌 빵집 논란'으로 비판을 받아온데다 공정위 발표까지 이어지면 여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할 수 있다는 분석에 신세계가 발빠르게 움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인사철을 맞아 주요 기업의 총수 2세들이 이번 연말 인사에서 승진할 지 여부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삼성의 경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3일 귀국하며 정기인사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가운데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부회장 승진과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사장승진도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 등의 인사도 관심의 대상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인사에서 2세들의 전격적인 승진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대기업의 관계자는 "경제민주화 논의가 가열되며 재벌들의 눈치 보기가 극심해졌다"며 "굳이 2세들을 진급시켜 눈총을 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 측은 지금 인사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은 모두 확정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하며 올해 인사 시기 등은 예년과 다른 점이 없을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많은 국민이 출자구조 등의 문제보다 '부의 대물림'이라는 알기 쉬운 얘기에 더 큰 반감을 느낀다"며 "2~3세들의 행보가 극도로 위축될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경제단체, 해법 찾기 '골몰' =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는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의를 '대기업 때리기'로 규정하며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를 동원해 반대 뜻을 밝히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달 논평을 내고 "대선 후보들이 주장하는 순환출자 규제, 지주회사 규제 등의 정책은 대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일자리 창출을 어렵게 한다"며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반시장적인 규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경련은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금지, 지주회사 행위 규제 등 그동안 여야가 경제 민주화와 관련해 발의한 법률안에 대한 '검토 의견'을 홍보 자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보다는 경제단체가 여론에 저항하는 데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며 "이럴 때일수록 단체들이 소위 '총대'를 메고 강경한 발언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관된 반대의견 속에서도 재계와 정치권이 조금씩 양보하자는 '타협안'도드물게 나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단체들이 그만큼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17일 서울상공회의소 회의에서 회장단은 "경제민주화 입법을 통한 급격한 경제정책 변화는 성장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도 "양극화 해소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는 다소 누그러진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동근 대한상의 부회장은 "경제민주화를 대놓고 반대하는 게 아니다"라며 "바로 입법화하기보다는 일단 경기침체기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