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총을 쏘며 달려드는 느낌에 방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집과 처자식을 두고 서울역, 신촌 등에서 노숙해야 했어요. 80년대 말부터 반복된 이 생활은 작년까지 계속됐죠."

유동우(63)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쓴 '어느 돌멩이의외침'은 유신시대 노동현장 수기이자 대표적인 금서로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이 책은 1970년대 중반 인천의 한 섬유기업에서 일하던 유씨가 인권 유린과 노동 착취를 일삼는 회사와 맨몸으로 싸운 투쟁기를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글이다.

1977년 '월간대화' 1~3월호에 처음 연재되면서 노동자와 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돼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197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다.

"몰래 책을 제본해서 팔던 대학생들이 수익금이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어요. 책을 다시 내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공부도 제대로 못 한 노동자가 쓴 글이라 부끄러워거절했었지요."

사측과의 싸움은 유씨가 해고되는 것으로 끝이 났고,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79년 신군부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유씨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에 가담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으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는 1981년 6월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민병두 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이른바 '학림사건'의 시작이었다.

"두 눈을 가린 천을 풀어보니 사방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방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냐'라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그러면 사회주의자네'라며 구타가 시작됐죠. 그 방이 7년 뒤 박종철 열사가 숨을 거뒀던 바로 그 509호입니다."

고문은 한 달여간 계속됐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 재판에서 집행유예를받고 풀려났지만, 그 반년 남짓한 시간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구속 이력 때문에 정규직 취직은 불가능했다. 공사장일, 모텔청소원, 주차관리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고문 후유증 탓에 적응이 쉽지 않았고, 잦은 노숙으로주변으로부터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유씨는 지난해 말 지인의 권유로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치료를 받으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치료 과정에서 그는 개인의 문제로만 여겼던 여러 증상이 대부분 고문의 후유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올해 초 고(故) 김근태 의원 추모식 등 공식석상에 스스로 참석할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그는 9일 "70년대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쌍용차 사태에서도 나타나듯 노동운동은 노동자에게 절박한 생존의 문제예요. 이는 학생운동과 분명히 다른 노동운동만의 특징이죠. 이 절박함은 70년대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노동운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