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권의 '재정 절벽(fiscal cliff)' 협상은 세계 경제·금융계가 숨죽이고 지켜본 한편의 드라마였다.

아무도 협상을 성공적으로 타결하는 게 쉬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티파티(tea party)의 '벌떼 지원'을 등에 업은 강경파가 대거 당선돼 하원을 장악한 뒤로 의회와 버락오바마 행정부가 사사건건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번 재정 절벽 협상도 데드라인(지난해 12월 31일 밤 12시)을 넘김으로써 미국경제를 리세션(경기후퇴) 국면으로 다시 한 번 몰아넣는 것은 물론 세계 경제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오랜만에 정치력을 발휘했다.

백악관과 행정부, 민주·공화당 지도부는 협상 테이블에 나서는 선수의 교체를 거듭하는 마라톤협상을 벌여 마침내 재정 절벽에 굴러 떨어질 시간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합의에 성공했다.

1일(현지시간) 미국 언론 등에 따르면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가장 큰 고비는 지난해 12월 28~30일이었다.

애초 오바마의 협상 파트너였던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연소득 100만달러 이상의 부자 증세안을 담은 '플랜B'를 밀어붙이다 무산돼 뒷전으로 물러났고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이 협상 전면에 나섰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28일 밤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에게 던진 안에 들어 있던 내용은 75만달러 이상 소득계층에 대한 세금 인상이 고작이었다.

장기 실업수당 연장 지급도 없었고 근로장려 세액공제(EITC) 등 저소득층을 위한 세제 감면 혜택도 포함하지 않았다.

30일까지 몇 차례 공방이 오가고 나서 이번엔 오바마 진영의 주연 배우가 바뀌었다.

리드가 빠져나오고 조 바이든 부통령이 대신 들어갔다.

매코널이 새로운 '춤 상대'가 필요하다고 한데 따른 것이다.

20여년을 상원에서 함께 보내면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바이든과 매코널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취해진 '부시 감세안'을 두 차례 연장하고 지난해 국가 채무 한도를 상향조정할 때 협상 당사자로 핵심 역할을 했다.

30일 매코널이 부자 증세 기준을 55만달러로 낮추고 상속세를 올리는 안을 내놨지만, 연방 정부의 예산 자동 삭감, 즉 시퀘스터(sequester)를 연기하는 문제로 협상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이날 밤 8시 오바마와 선임 보좌진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 모여 매코널에게 최후 통첩할 대안을 논의했다.

최소한 부자 증세 기준을 40만달러 내지 45만달러로 하고 장기 실업수당 지급 및 시퀘스터 발동 시기를 1년간 연장해야 한다는 게 오바마의 의중이었다.

이를 놓고 바이든과 매코널은 31일 새벽 0시45분 마지막 통화를 할 때까지 협상을 계속했다.

오바마와 바이든은 그 직후인 새벽 2시 집무실에서 만났고 상원 민주당의 법안 초안 작성 작업이 시작됐다.

바이든과 매코널은 아침 6시45분 다시 논의에 들어가 대부분 사항에 합의했고 2012년 마지막 날의 나머지 시간은 교착 상태에 빠진 시퀘스터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

31일 밤 9시 바이든과 매코널은 전화로 시퀘스터를 2개월 늦추기로 하고 이른바'바이든-매코널 합의안' 타결에 완전히 성공했다.

바이든은 오밤중에 의사당에 건너가 일부 볼멘소리를 하는 민주당 상원의원까지달램으로써 이번 협상을 통해 미국민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상원은 데드라인을 넘겨 1일 새벽 2시께 찬성 89명, 반대 8명의 압도적인 표차로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실질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형식적 또는 기술적으로 재정 절벽으로 굴러 떨어진 셈이다.

새해 첫 날 공화당이 다수 의석인 하원으로 공이 넘어갔다.

처음엔 하원에서도 무난하게 처리될 것이란 낙관적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하원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의원에게서도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원 민주당의 잡음은 '해결사' 바이든이 다시 나서자 단박에 잠잠해졌다.

반면 베이너와 에릭 캔터 원내대표가 소집한 공화당의 비공개 의원총회는 오바마나 상원 지도부에 대한 성토장과 다름없었다.

상원 합의안에 연방 정부의 예산 감축 계획이 부실하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캔터조차 상원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베이너는 3천억달러 규모의 재정 지출 삭감안을 포함한 수정안을 공화당이 통과시킬 수 있다면 이를 투표에 부쳐 가결 처리한 뒤 상원으로 되돌려 보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원안을 원안대로 찬반 표결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결국 공화당 지도부는 수정안이 당내에서조차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슬그머니 이를 철회했다.

표결에 부쳐진 원안은 1일 밤 11시께 찬성 257명, 반대 167명으로 다소 싱겁게 통과됐다.

지난 몇 달간 세계 증시를 좌지우지한 워싱턴 정치권 주연의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오바마는 하원이 법안을 처리한 직후 앞으로 벌일 시퀘스터 및 국가 채무 한도 상향조정 협상은 "좀 덜 드라마틱했으면 한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겨울 휴가 일정을 중간에 자른 게 아쉬운 듯 하와이로 또 떠났다. /워싱턴=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