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융합기술·서비스의 집약체인 '구글 글라스'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안경'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규제 탓이다.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이와 유사한 위치정보 기기나 서비스를 개발하려고 해도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와의 협력이 원천 봉쇄돼 있는 것이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통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자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라는 구호가 무색해지는 상황이다.

23일 ICT업계에 따르면 지도 데이터를 해외로 반출할 수 없도록 한 우리 정부의 규제 때문에 구글 글라스를 국내에 들여와도 핵심 기능은 이용하지 못한다.

구글 글라스는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영상을 위성위치확인체계(GPS)의 위치정보와 결합하고, 이 결과를 지도 데이터베이스(DB)와 대조해 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건물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목적지를 설정하면 현재 위치와 교통 상황을 종합해 최적 경로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기능도 탑재했다.

문제는 '측량 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측량법)'에 따라 국내의 지도 데이터를 국토교통부 장관의 허가 없이 국외로 반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구글은 지도 서버를 미국 등 해외에 두고 서비스를 운영해 국내의 지도 데이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토교통부 산하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은 '국가 안보상 중대한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5년째 이 데이터의 반출 승인을 거부하고 있다.

구글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MS), 야후, 애플 등 다른 세계적 서비스 업체들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이들 업체가 해외 서버로 반출을 요청한 지도 데이터는 네이버·다음 등 국내 포털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당국의 검토를 거쳐 민감한 정보는 이미 제외돼 있다.

이 때문에 안보를 이유로 지도 데이터 반출을 금지하는 정부 정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업계와 소비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세계 어디서나 국내 포털을 통해 아무 제약없이 볼 수 있는 데이터인데도,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외국계 ICT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규제에 대해 "국내 업체를 보호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국가 안보 때문일 수도 있다"면서도 "(어느 쪽이든) 과도하고 구시대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규제가 지속한다면 구글 글라스는 물론이고 앞으로 상용화할 무인 자동차, 시각장애인 안내 응용프로그램(앱) 등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꼽히는 기술들도 모두 우리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거나 글로벌 사업화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크다.

구글 글라스 상용화가 예상되는 올해 말 이후 이 기기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올 외국인 관광객들도 불편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지도 DB를 활용한 지리정보체계(GIS) 콘텐츠 사업과 지리기술·지리공간사업 분야의 발전에도 많은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옥스퍼드 대학 경제연구소인 옥세라(Oxera) 등에 따르면 지리정보 사업은 세계적으로 연간 2천700억 달러(약 302조2천650억원)의 가치가 있으며 900억 달러(약 100조7천550억원) 규모의 고용 효과가 있다.

마치 2007∼2009년 우리나라가 각종 규제를 내세워 애플 아이폰의 국내시장 진입을 막는 '정보통신 쇄국정책'을 폈으나 국내 모바일 산업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계기가 됐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른 ICT 업계 관계자는 "창조경제를 한다더니 곳곳에 규제 투성이"라며 "불필요한 규제는 걷어내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ICT 업계는 "피부에 와닿게 규제를 확 풀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언급이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문제에도 적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