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라면상무', '빵회장' 폭행 사건에 이어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에 물품을 강매한 사실까지 뒤늦게 알려지면서 왜곡된 갑을 관계에 대한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쟁과 효율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계약관계가 '권력관계'로 변질됐다고 지적하면서도 시민들의 분노가 감정싸움으로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논문 대필에 점심값 대납까지…"억울해도 참아야" = 7일 포털사이트, 트위터 등에 따르면 최근 왜곡된 '갑을 관계'에 대한 폭로가 계속되면서 가슴 속에 눌러 담아왔던 일반인들의 피해 사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다음 아고라에는 지난 5일 본사와 대리점 뿐 아니라 대리점과 배달 직원 간 갑을 관계 횡포도 심각하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아이디 succ****인 누리꾼은 "배달원으로 일하려면 대리점에 보증금 100만원을 내야 하고 이를 못 내면 한 달에 20만원씩 공제해야 한다"며 "이는 아프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배달을 못 나가면 수당을 떼기 위한 보증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달원들은 하루 만원이 너무나 큰 사람들인데 이는 정말 너무한 처사 아니냐"며 목청을 높였다.

홍보대행사에서 일했던 허모(35)씨는 "계약을 맺은 대기업 홍보실에서 자신들이 만들어야 할 보고서까지 우리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며 "입찰이 마무리될 때쯤 전혀 새로운 계약 내용을 마음대로 집어넣는 경우도 있었다"고 꼬집었다.

다른 홍보대행사에 일하는 장모(42)씨는 "접대는 물론 자신이 다니는 야간대학원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조사를 시키고 심지어 대필까지 은근히 요구하기도 했다"며 "지금도 그 회사는 쳐다보기조차 싫을 정도"라며 고개를 저었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김모(36)씨는 "점심약속을 한 고객이 느닷없이 자기 지인들을 불러 함께 밥을 먹고서는 식사 값을 떠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보험계약을 유지하려면 고객 비위를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 산하연구소에서 일하는 김모(38)씨는 "업무 협조 차 정부부처에 들어갈 일이 있는데 약속을 하고 가도 2~3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나이도 한참 어린 사무관이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쟁·효율성만 강조하면서 관계 왜곡" = 전문가들은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자율적으로 맺은 계약이 강제적인 주종(主從)관계로 변질되면서 최근처럼 왜곡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상황에 따라 누구나 갑과 을이 될 수 있지만 80% 이상이 '나는 을'이라고 생각할 만큼 본인도 때로는 갑이라는 생각을 못한다"며 "경쟁을 강조하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심해졌고 결국 을로서의 억울함과 분노도 더 커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이어 "나의 억울함만 부각하는 것보다 남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면서 정당화되지 않은 권력을 마구 행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적 평등 뿐 아니라 정신·문화적 평등이 중요한데 최근 사례는 문화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진단했다.

전문가와 누리꾼들은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갑을 문화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도 군중 심리에 기대 감정싸움으로 비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단기적으로 이른바 '갑'들의 의식 변화가 중요한 데 이를 위해서는 언론이 공론의 장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갑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공론장에서 의제로 살아있게 된다면 갑의 성찰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군중심리도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군중의 감정 드러내기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는 강모(26)씨는 "외국 고객사들과 일할 때는 서로를 동등한 파트너로 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갑을 관계가 없다"며 "단순히 주고받는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서로 협력한다는 생각을 갖는 문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