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박원순 서울시장이 1999년에 쓴 책의 제목이다. 소크라테스, 예수, 잔 다르크, 토머스 모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역사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판의 중심 인물들의 약전이다. 책 제목은 토머스 모어의 말에서 따왔다. 16세기 영국의 가장 총명하고 양심적인 법률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모어는 당시 국왕 헨리 8세의 이혼과 결혼,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빚어진 로마교황청과의 결별 등에 이르기까지 헨리의 행태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왕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모어는 단두대에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박원순 시장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해학에 넘치는 말을 쏟아낼 줄 알았던 모어의 기지에 반했든지, 아니면 법률가로서 자신이 가장 닮고 싶은 선배 법률가로 토머스 모어를 점찍었든지, 책의 제목을 모어의 단두대 앞 이야기에서 따왔다. 박원순 시장은 '여기 그 비겁자들의 이름을 적어 역사에 남긴다'면서 모어에게 유죄평결을 내린 열한 명의 배심원단 이름을 책 속에 열거했다. 역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런 박원순 시장에게 실망이 크다. 인천 서구 수도권매립지 문제 때문이다. 여기에는 서울의 쓰레기를 절반 가까이 묻고 있다. 인천의 쓰레기는 채 20%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경기도 쓰레기다. 이 쓰레기 매립지는 1989년부터 2016년까지만 쓰기로 했다. 법률적으로 생활폐기물은 발생지의 지방단체장이 발생지에서 처리하는 것이 의무다. 그렇지만 서울시는 인천의 쓰레기매립장을 계속해서 쓰려 하고 있다. 규정대로 한다면 수도권매립지는 2016년 이후에는 용도폐기돼야 한다. 서울시는 이미 대체매립장을 찾아나섰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는 이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마치 수도권쓰레기매립지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다. 1988년에 2천만㎡가 넘는 '김포매립지'를 동아건설로부터 환경관리공단이 450억원에 넘겨받았는데, 이때 서울시가 300억원을 부담했다. 나머지 150억원은 환경부가 댔다. 서울시가 지불한 300억원은 순수한 서울의 지방비가 아니었다. 담배소비세가 지방세로 전환되면서 생긴 수익 중 일부였을 뿐이다. 당시에 인천시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관할구역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데, 돈까지 투자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되자 국가가 나서서 150억원을 낸 것이다. 이 150억원은 인천시나 경기도에 대한 국고보조금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수도권매립지는 서울시의 재산이 될 수는 없다.

지난달에 새누리당·민주당·인천시 등 인천지역 여야정 협의체가 '수도권매립시설에 있는 모든 폐기물처리시설을 2016년 12월에 사용이 종료되도록 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처음 쓰레기를 매립할 때 매립지는 인천이나 경기도 양쪽 모두의 변방에 불과했다. 그 주변에 사는 사람도 극소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구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0년 전에는 바로 코앞에 청라경제자유구역까지 생겨나면서 주민들이 크게 늘었다. 쓰레기매립지를 처음 만들 때와 지금은 모든 조건이 딴판으로 달라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20년 넘게 서울시의 쓰레기매립으로 인한 고통과 피해를 당해 온 인천시민에게 더 이상 그 고통과 피해를 안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가 지금의 서울시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법과 양심에 따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행동하고 그로 인해 목숨까지 내던질 줄 알았던 모어라면 당연히, "우리가 배출한 쓰레기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면서 그에 맞는 새로운 방안을 마련했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제라도 양심과 법률에 따라 서울의 쓰레기 문제 해결에 나서주길 바란다. 아니, 더 이상은 서울의 쓰레기를 인천에다 갖다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천땅에 서울의 쓰레기를 묻는 반양심적 행위를 끝낼 역사적 책임이 박원순 시장에게 있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