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출연진이 모두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할 때까지도 성냥공장에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작가는 부조리로 얼룩진 '사회'가 성냥공장 화재의 범인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진짜 방화범을 가려내는 일을 관객의 판단과 상상력, 즉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불은 누가 질렀습니까? 뮤지컬에서 확인하세요!'라는 문구에도 불구, 정작 불을 낸 인물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만 성냥공장의 화재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암울한 시대상황,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 치는 여공들의 절규, 공천에서 탈락한 악덕 고용주의 분노와 성냥공장의 부도…. 이처럼 무대 속 성냥공장에는 화재의 인과관계를 가늠케 해주는 일종의 '발화요인'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성냥공장 아가씨는 '누가 불을 질렀는가'보다는 '왜 불이 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인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그리 중요한 화두가 아닌 듯싶다.
지난 주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관람한 뮤지컬 '성냥공장 아가씨'는 참으로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성냥공장 아가씨'는 대한민국 산업 근대화를 온 몸으로 일궈낸 어머니, 언니, 누나들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군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저속한 가사가 말해주듯, 성냥공장 아가씨는 놀림감 이미지로 굳어져 있던 게 사실이다. 이 작품은 성냥공장 아가씨인 어머니, 언니, 누나들에게 보내는 반성문이다. 공연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아가씨들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내가 부끄럽다. 아가씨가 아닌 사람들이 마땅히 부끄러워할 일이기에 그네들을 무대로 불러낸다'는 작가의 글에 공감이 갔다.
한편으로는 뮤지컬 '성냥공장 아가씨'를 보면서 뜬금없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40년 전 성냥공장이라는 공간과 현재를 접목시켜 본 것이다. 당시 성냥공장의 모습과 현재 우리사회의 모습이 상당부분 겹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40여년 전, 성냥공장의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어린 여공들이 있었다면 지금 편의점에는 시급 몇 천원에 울고 웃는 알바생 또는 88만원 세대가 있다. 여공들이 궁핍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치마 밑에 성냥 한 통씩을 훔쳐서 퇴근하듯이 지금도 분유값 때문에 도둑질을 하는 생계형 범죄자가 상당수다. 매년 추석을 앞두고는 성냥공장처럼 임금체불 사업장의 숫자가 신문지면에 오르내린다. 불평등과 계층간 갈등,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불거져 나오는 공천을 둘러싼 정치권의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엇비슷하다. 분명 삶의 질은 나아졌다고 하는데 사회의 틀은 40년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더 나아가 최근 앞다리가 세 개 있는 기형 맹꽁이의 등장으로 관심이 집중된 인천 부평구의 부영공원과 성냥공장이 닮은꼴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주한미군 반환공여지인 부영공원은 지난해 유류와 중금속뿐 아니라 다이옥신 등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토양오염이 확인된 지역이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발화요인과 맞물려 성냥공장에서 '화재'라는 재앙이 발생했듯이 부정적인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부영공원에서 기형 맹꽁이가 나타난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물론 기형 맹꽁이 한 마리 발견됐다고 해서 원인을 토양오염으로 단정짓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성냥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있었듯이 부영공원에도 기형 맹꽁이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감출 수 없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성냥공장 아가씨에서 '방화범이 누구인가'보다 '화재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졌듯이 '기형 맹꽁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는 게 부영공원이 처한 현실은 아닐는지.
뮤지컬 '성냥공장 아가씨'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유쾌하다. 시련을 딛고 새로운 꿈을 꾸는 이들의 노래와 춤에 객석도 들썩인다. 작금의 현실도 그랬으면 좋겠다.
/임성훈 인천본사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