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기태·은영씨 부부
상해 사건 경찰서 입건
사연알게된 공공기관들
경제적 지원·심적 치료
혼인신고 10년만에 예식
자살·해체 위기 가정에
현실적 정책·관심 절실
"신랑과 신부는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까?"
지난 7일 낮 12시 인천시 남동구의 한 예식장. 주례 선생님의 질문에 신부 은영(30·가명)씨는 한참 동안 눈물을 훔치다가 "네"라고 겨우 대답했다.
평소 우렁찬 목소리의 신랑 기태(31·가명)씨도 이날 만큼은 목이 메이는 듯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 온 지 10년 만에 특별한 결혼식을 올렸다.
연두색 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은 딸 지혜(10·가명)양과 지선(5·가명)양은 아빠와 엄마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조촐했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뜻깊은 예식이었다.
지난 3월 초 은영씨는 '상해 피의자'로 경찰에 입건됐다. 피해자는 남편 기태씨. 기태씨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이를 말리는 은영씨를 때리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은영씨는 사건 당일 방문을 걸어 잠근 뒤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자살을 기도했다. 은영씨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곧바로 의식을 찾았다.
깨어나자마자 화를 내는 남편에게 같이 죽자고 칼을 휘둘렀는데, 남편이 그만 칼날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날 경찰에 신고한 것은 첫째 딸 지혜양. 지혜양과 지선양에게 아빠와 엄마의 다툼은 일상이었다.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노출된 자매는 점점 말수를 잃어갔다.
은영씨는 2년 전에도 자살 기도를 했다. 은영씨가 자살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고통이었다고 한다.
남편 기태씨는 전과자라고 해서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세차장과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며 가정을 꾸려갔다.
하지만 원룸 월세를 내기도 빠듯했다. 자녀들 출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월세집 보증금을 빼서 쓰다보니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게 됐다.
일거리가 없는 날이면 기태씨는 어김없이 술을 마셨고, 은영씨는 우울감에 빠졌다.
인천부평경찰서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민정 경사는 "상해 피의자로 입건된 은영씨를 조사하던 형사과에서 상담을 요청했다"며 "알코올중독인 기태씨, 생활고와 가정폭력에 시달려 우울증을 앓는 은영씨,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던 지혜·지선양에게 외부의 지원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부평서는 부평구청, LH, 동주민센터 등에서 실시하는 경제적 지원제도를 찾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가정폭력상담소도 연결해줬다.
기태씨에겐 알코올중독상담을, 은영씨에게는 우울증 치료를, 지혜·지선 자매에게는 미술치료를 받도록 지원했다. 이를 통해 가족은 경제적·심리적 안정을 되찾았다.
기태씨와 은영씨가 10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새롭게 잘살아보자'는 다짐을 한 계기가 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9월 10일을 '세계자살예방의 날'로 정하고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은영씨 가족에 대한 공공기관의 관심과 지원은 '자살'과 '가정해체'의 위기에 놓인 부부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했다. 자살기도자, 가정폭력피해자 상담을 맡고 있는 박 경사는 "자살을 예방하려면 정부차원의 큰 정책보다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세계자살예방의날 앞두고 열린 특별한 결혼식
가난·폭력·자살기도… 벼랑끝가족 '재기의 웨딩마치'
입력 2013-09-1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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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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