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늘 개항도시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1883년 제물포 개항과 함께 힘 있는 외국세력이 인천으로 밀려 들어왔다. 구한말 정부는 이들 세력에게 제물포 항구 부근의 전망 좋은 땅까지 제공했으니 바로 조계지다. 그곳에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도 터를 잡고 1888년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78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1년 5월에 그 대불호텔의 유구(遺構)가 출토됐다. 원래 있던 건물이 헐리고 빈 터로 남아 있던 공간에 상가건물을 신축하려고 터파기 공사를 시작하면서다. 일대 사건이었다. 33년 동안 묻혀 있던 대불호텔의 숨결이 되살아난 순간이기도 했다.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로 1918년께는 중국 상인들에 의해 북경 요리 전문점으로 기능이 바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던 중화루로 새 단장하기도 했다. 한반도 첫 호텔에서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기까지의 과정은 우리 근대사를 농축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식민지 항구도시에서 외국인을 위한 호텔로 출발한 대불호텔이 경인철도 부설과 러일전쟁 이후 외국인들이 급격히 줄면서 1907년께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고 문을 닫고 말았다. 그 10여 년 뒤 중국인 수십 명은 일본 조계지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이 건물을 사들여 중국 요리 전문점을 열었다. 인천이 짜장면의 원조도시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대불호텔 건물에 스며 있는 역사는 한·중·일 근현대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로 바로 연결하는 통로라고 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대불호텔 터에서 유구가 발굴됐지만 문제는 그 땅에 있었다. 상가 건물을 지으려던 토지주는 재산권 행사를 못하게 돼 고통을 받는다고 하소연이었고, 문화계에서는 대불호텔의 가치를 생각할 때 그 터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땅 주인의 재산권과 문화 유산 보존권 사이에서 충돌이 생긴 것이다.

그러던중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김홍섭 인천 중구청장의 동생이기도 한 토지주가 그 터를 내놓기로 했다고 한다. 유구가 발굴된 지 2년이 넘는 동안 방치돼 있던 이 터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이다. 이제는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대불호텔 터를 잘 활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자리가 인천이 외세 문물의 결집처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