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100여 년 전 인천과 지금의 인천을 비교하다 보면 이 말이 실감이 난다. 제물포 개항 직후 인천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 1번지였다. 그러던 인천은 경인철도 개통(1899년) 이후 그 명성을 서울에 내줘야 했다. 그 뒤로 인천은 줄곧 서울의 변방으로 치부되고는 했다. 이 인천에 거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다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기 시작한 것이다. GCF(녹색기후기금) 본부와 세계은행 한국사무소가 인천 송도에 다음달 4일 동시 출범한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와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등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빅샷(big shot)'들이 이날 대거 인천을 찾는다. 인천에 둥지를 틀었거나 유치가 확정된 국제기구는 총 12개나 된다. 인천이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된 것이다. 이들 중 주요 기구는 서울과의 유치경쟁에서 승리한 것들이다.

시곗바늘을 125년 전으로 돌려보자. 1888년 11월 9일, 한국 최초의 공원 설립작업이 시작됐다. 미국, 러시아, 영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이 인천시 중구 응봉산에 각국공원(만국공원)을 만들기로 서명한 것이다. 'The Public Garden'이라고 했고, 우리는 이를 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으로 불렀다. 1897년 서울에 만들어진 탑골(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빨랐다. 인천의 각국공원은 1914년 외국인 거류지 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관리권이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명칭도 서공원(The West Park)으로 바뀌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만국공원(The International Park)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지금은 1957년 맥아더 동상을 세우면서 붙여진 자유공원으로 불린다.

세계 각국은 왜 인천에 만국공원을 만들었을까. 이는 1883년 개항과 함께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국가들이 인천에 자국민들이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조계지를 설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특히 당시 인천에는 일본, 중국, 영국, 러시아 등의 영사관도 있었다. 말 그대로 인천은 동아시아 근대 외교의 중심 무대였으며, 아시아와 유럽 문화가 어울리는 문화의 기항지였다. 인천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과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유럽권이 공존하는 다인종 도시이기도 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인천은 불행히도 서울에 많은 것을 빼앗겼다.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서울에 집중하는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인천은 어느 순간 외교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문화적 국제성은 시들어갔다. 게다가 서울을 위한 수많은 혐오 시설을 인천이 홀로 감내해야 했다. 공단과 발전소, 유류저장 시설은 물론이고 쓰레기 처리장까지 온갖 기피시설은 인천에 다 몰려 있다. 바다가 있고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였다.

수십년 동안 서울의 위성도시로 기능하고, 그렇게 인식되어 온 인천이 최근 몇 년 사이 잃어버렸던 '국제성'을 찾기 시작했다. 10여개의 유엔기구를 포함한 국제기구가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국제적 이벤트가 잇따라 인천에서 열린다. 당장 내년에는 아시안게임이 개최되고, 2015년에는 유네스코가 주최하는 세계교육회의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유네스코는 또한 인천을 2015년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하기도 했다. 2014년과 2015년은 인천을 세계에 알리고, 인천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인천 내부에 있다. 인천의 문화를 굳건히 발전시켜야 세계 각국의 문화를 잘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백범 김구가 말했듯이 '높은 문화의 힘'이 필요하다. 인천시의 내년도 예산안 짜기가 막바지다. 가용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각 실무부서에서 요구하는 예산액이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특히 문화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추세라고 한다. 인천의 문화인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도로를 새로 내고, 건물을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화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당국자들은 잘 헤아려야 한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