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이면 우리 시대의 문명에 회의를 품어야 자연스럽다. 토목과 디지털로 이루어낸 문명이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준 건 사실이다. 보릿고개를 경험한 70, 80대는 밥 굶는 고통을 면한 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행복하다 찬양한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의문을 키우는 현상들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경인일보 기자들이 최근 만난 대학가의 아웃사이더들이 대표적이다. 주변이 소외시킨 왕따가 아니라 스스로 주변과 담을 쌓은 자발적 독거 군상들이다. 그들은 오롯이 제 한 몸만 건사한다. 취업을 위해 친구를 끊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벗어나 도서관에 처박힌다. 학벌과 스펙사회에서 이런 친구들이 취업하기 유리하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 절망한다. 그들을 고용한 기업들도 난감해진다.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그들의 사회성 결핍이 기업의 소셜네트워크를 해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엮여 드라마를 만드는 무대가 세상이라는 진리를 세상에 나가서 마주치니 불행한 일이다.
우리 시대의 눈부신 물질 문명이 패륜의 에필로그로 훼손되는 이유는 문화결핍 때문이다. 물질과 기술과 제도가 정신문화를 압도하며 질주하는 세월동안 인간적 품위는 퇴적을 거듭해 화석으로 굳어버린 결과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 시대를 암울하게 만드는 온갖 패륜을 목격할 때마다 수 많은 대책을 마련하고 돈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발본에 이르지 못한다. 애초에 인성의 문제를 제도와 예산으로 교정하려는 발상 자체가 글러먹은 탓이다. 복지 담당 공무원과 경찰을 지금의 몇 배로 늘려도 칠곡과 울산의 계모를, 게임중독 아빠를,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막을 수 없다.
문화가 유일무이한 해법이다. 세계적 성공사례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 시스템을 뜻한 건조한 스페인 단어가 지금은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무상음악 교육'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문예부흥운동이다.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1975년 시작한 엘시스테마는 마약과 범죄의 수렁에 빠져 인성을 잃어가던 베네수엘라 빈민 청소년들에게 악기를 쥐어주고 음악을 가르치는 프로젝트였다. 35만명의 불우 청소년들이 흉기 대신 악기를 잡았고 마약 대신 음률에 취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30대 초반에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로 성장한 구스타보 두다멜이 엘시스테마의 성취를 상징한다. 독재자 우고 차베스는 엘시스테마의 열렬한 후원자. 정부사업으로 만들어 예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일부에서는 독재자와 엘시스테마의 동거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엘시스테마의 성취가 보여주는 문화의 위력 만큼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국도 엘시스테마를 도입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보다는 빈곤층이 얇아서인지 관련 예산을 찾아보기 힘들다. 경기문화의전당이 2011년부터 도내 저소득층 아동 600명으로 구성한 '경기-삼성 드림어린이합창단'. 명칭에서 보듯 삼성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이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수렁에 빠진 우리 문명을 문화의 지렛대로 견인해내야 한다. 우리 대통령이, 도지사, 시장, 군수가 차베스보다는 난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나.
/윤인수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