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된 서울 강서구 재력가 송모(67)씨가 남긴 뇌물장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뇌물장부를 토대로 공무원 수뢰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서울 남부지검이 장부에 등장하는 수도권 검찰청 A 부부장 검사 이름 옆에 적힌 금액을 파악하는데 혼선을 겪자 '축소 수사' 논란이 일었고, 결국 대검 감찰부가 직접 A검사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송씨 살인사건을 수사한 강서경찰서가 처음부터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있는 장부 사본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숨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경찰 내부에서 장부 사본이 있다는 사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를 둘러싸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16일 검찰과 경찰 등에 따르면 남부지검이 확보한 장부는 유족이 일부를 수정액으로 지우는 등 훼손한 상태에서 전달돼 검찰이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한 반면, 경찰은 훼손 이전의 깔끔한 형태의 장부 복사본을 갖고 있어 검찰보다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검찰이 언론에 A검사가 받은 금액이 '2차례 300만원'이라고 밝히자 곧바로 "장부에 적힌 금액이 1천만원이 넘는다"는 내용의 경찰 정보가 보도되는 기막힌 형국이 벌어졌다.
이에 발끈한 검찰이 경찰에 장부 사본을 갖고 있으면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경찰은 일관되게 "장부 사본은 없고 경찰관이 장부를 보면서 주요 내용을 메모한 것밖에 없다"고 버텼다.
다급해진 검찰이 15일 장부를 훼손한 유족을 불러다 추궁하는 과정에서 강서경찰서가 사본을 갖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그날 사본 전체를 제출받았다.
결국 경찰은 사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없다고 거짓말을 한 모양새가 됐다.
강서경찰서의 상급 기관인 서울지방경찰청과 경찰청은 "전혀 몰랐다"며 다분히 놀라는 기색이다. 심지어 강서서가 검찰에 사본을 제출한 사실도 사후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청 관계자는 "15일까지 강서서에 사본이 있다는 보고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했고, 본청 관계자도 "우리도 정확한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청이 이제야 파악한 바로는 강서서는 송씨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3월 4일과 그로부터 3개월 후인 지난달 19일 두 차례 장부를 입수해 사본을 만들었다.
3월에 만들어진 사본은 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경찰서 캐비닛에 보관하다가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검찰이 가져간 사본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강서서는 지난달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자 송씨와 김 의원의 금전거래 내역을 확인하려 장부를 유족으로부터 다시 받아 사본을 하나 더 만들었다.
강서서는 주요 내용을 정리해 상부에 전달하면서 사본에 대해서는 "폐기했다"고보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강서서는 사본 두 개를 모두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상부에대한 명백한 허위보고로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청 수사과가 뇌물장부에 대한 내사 착수를 발표하고 주변인 조사에 나선 이후에도 강서서가 사본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수준의 직무유기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장부에 기존에 알려진 5명의 전·현직 경찰관 외에 추가로 경찰관의이름이 등장해 이를 덮으려고 상부에 요약 보고만 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한다.
상황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서울청은 "살인사건 수사가 일단락되는 대로강서서를 상대로 수사 전반에 대한 감찰을 벌여 보고누락이나 허위보고 등이 있었다면 상응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청의 감찰 방침에도 불구하고 경찰 수뇌부도 장부 복사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은 여전하다.
검사를 비롯한 공무원과 정치인이 등장하는 대형 뇌물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뇌물장부의 실루엣을 보고도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그 장부에는 경찰관의 이름도 올라 있기에 경찰로선 장부 전체 내용이 매우 궁금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