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간 공문서 제목 목록을 모두 보내라.", "최근 1년간 외부에 발송한 문서를 모두 보내라."

국정감사 시즌을 맞아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자료제출 요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국정감사장에서 피감기관에 대한 감사를 위해 필요한 자료도 있지만 업무 파악과 관련이 없는 자료들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 변함없는 과다·중복 자료 요구

27일 각 부처 및 관련 기관에 따르면 한 정부부처 관계자 A씨는 최근 국회 의원실로부터 10년간 연구용역 발주 내역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공기업인 B사는 2009년부터 2014년까지 5년간의 전화요금 상세 내역, 2010년 이후 입사한 전 직원의 최종학력 현황에 대한 제출 현황을 제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A씨는 10년간 연구용역 발주 내역의 양도 방대할 뿐더러 매년 치러지는 국정감사의 취지가 지난 1년간의 행정부의 업무에 대한 엄정한 평가인 만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자료를 요구한 의원실의 보좌진과 통화해 대상 기간을 절반으로 겨우 줄일 수 있었다.

국세청의 경우 국세기본법에 따라 외부 공개가 법으로 금지된 특정 회사나 개인의 과세정보, 세무조사 내역 등에 대한 자료제출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납세자에게 보낸 1년치 안내문이 1만건을 훌쩍 넘는데, 이를 제출하라는 요구도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의 경우 최근 이슈가 됐던 톱스타 송혜교씨에 대한 세무조사 자료 일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관련된 세무조사 자료 일체 등의 자료 요구가 많았다.

한 관계자는 "국세기본법에 따라 특정 회사나 개인에 대한 세무조사 여부도 확인해 줄 수 없는데, 이런 요구가 오면 참으로 난감하다"며 "직접 전화를 걸어 사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계속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정부부처의 산하기관에는 최근 3년간 채용공고, 응시자 지원서, 응시자 채점표, 연봉계약서를 책자로 만들어 제출하라는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응시자 지원서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가 들어 있어서 이 산하기관 담당자는 난감해하고 있다.

이런 무리한 자료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획재정부 6급 주무관인 C씨는 지난해 국감 시즌에 "최근 10년간 공문서 제목 목록을 전부 다 보내라"는 한 의원실의 요구에 아연실색했다.

실·국별로 연간 수천건이 될 공문서 10년치를 취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은 물론 보좌진이 '5일이내'라고 기한을 못박았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유사한 자료를 각각 요청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요구 양식이 조금씩 다르므로 공무원들은 일일이 자료를 만들 수밖에 없다.

공무원노조는 이런 문제점들을 고려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당시에도 '묻지마 자료요구'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지만 올해도 변화의 조짐은 없는 상황이다.

지난 25일 중앙행정기관공무원노동조합이 성명을 내고 "보복성 자료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새정치연합 김우남 의원을 비판한 것도 과도한 자료제출 요구를 잘 드러내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공무원노조에 따르면 김 의원은 지난 6월 16일부터 두달간 기재부에 716건의 서면질의를 했다.

공무원노조는 "지역구인 제주도에 대한 여객선 운임지원 등의 개선요구를 기재부가 거부한데 대한 보복성 자료제출 요구"라고 비판했으나 김 의원측은 "답변이 불충분하고 논리적 타당성이 결여된 내용이라서 재질의가 불가피했다"고 반박했다.



◇ "행정력 낭비 극심" vs "현안질의는 의정활동"

이런 자료요구는 행정력 낭비로 이어지고 있다.

공무원들의 입장에서는 국정감사는 물론 국회 상임위, 예산안 심사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법 조항이나 시간상 제약 등으로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료 작성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정부 부처 사무관은 "자료 요구량을 줄여 달라고 의원 보좌관에게 전화를 하니 '당신 국장에게 전화해 보겠다'고 하더라"며 "무리한 요구가 오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댄다"고 말했다. 결국 이런 요구에 다른 업무도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각 부처는 국정감사 시즌에 돌입하면 상당수 직원이 거의 매일 밤 12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고 있다. 주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료를 준비하는 날이 다반사다.

결국 정부 부처는 국감 시즌만 되면 본연의 업무보다는 국감자료 작성 등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부처 D과장은 "막상 우리가 밤새워 만들어 제출한 자료 100건 가운데 국정감사에서 언급되는 것은 많아야 5건"이라고 허탈해했다.

기재부 5급 사무관인 E씨는 "의원실의 자료요구를 탓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복요구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입법부와 행정부 모두의 업무 효율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병완 공무원노조 사무총장은 "올해도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되는 상황이다. 공무원 업무를 마비시킬 정도"라며 "의원들도 지역구 등 개인적인 입장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에서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자료 요구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행정부의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자료제출 요구는 의정활동의 일환"이라는 원론적 견지를 견지하고 있다.

공무원노조 환경부 지부는 최근 국회 환노위 야당측 간사인 새정치연합 이인영 의원과 면담을 갖고 "너무 무리한 자료요구는 지양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일리는 있지만 정부 자료를 토대로 국정감사에서 질의하는 것은 국회의 의무이자 권리인 만큼 서로 협조하자"고 답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무리한 자료 제출 요구는 극히 일부의 경우로 봐야 할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의회가 행정부의 독주나 전횡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국정감사도 이뤄지는 만큼 법적인 문제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료를 은폐하지 말고 최대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