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동인천역 지하상가 공중화장실은 중·고교생들의 '탈의실'이었다. 밤이 되면 학교 수업을 마친 청소년들이 몰려 와 교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당시 인현동을 중심으로 한 동인천 일대는 청소년을 상대로 영업하는 호프집이 밀집해 있었다. 유흥업소마다 입구에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지가 붙었고 인근에 파출소도 있었지만 업소 안은 늘 10대들로 붐볐다.

1999년 10월 30일. 토요일이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수놓은 인현동 거리의 한 호프집에 그날도 청소년들로 북적거렸다. 학교 축제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려는 인근의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160여㎡(50평) 남짓한 2층 호프집에 120여 명이 몰렸다. 이 호프집은 주변 다른 업소보다 술값이 싸고 청소년들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지 않아 인기를 끌던 곳이었다.

오후 6시 55분께 호프집 스피커의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펑'하는 폭발음이 들였다. 이어 여기저기서 "불이야"라는 고함이 음악 소리를 깔아뭉갰다.

지하 1층 노래방에서 시작된 불은 계단을 통해 삽시간에 2층 호프집으로 올라왔다. 성난 화마는 걷잡을 수 없었고 아비규환의 참극이 빚어졌다.

57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사상자만 130여 명에 달했다.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로 유치원생 등 23명이 숨진 지 불과 4개월 만에 다시 일어난 대형 참사였다.

참사는 관행에 따라 저질러온 악습의 검은 속살을 잇달아 드러냈다.

해당 호프집의 불법영업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경찰관들이 무더기로 징계를 받았고 결국 당시 경찰청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유흥업소 담당 공무원들이 대거 형사 처벌을 받았다.

15년이 지났지만 유족들은 마르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고통을 참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등 최근 들어 잇따라 일어난 대형 사고들을 볼 때면 옛 생각에 가슴이 시리다고 했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의 이모(64)씨는 29일 "사고 소식을 뉴스로 볼 때마다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며 말을 잊지 못했다.

유족들은 아이들이 술집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했다.

막내딸 잃은 다른 이모(66)씨는 "사고 장소로 인해 오해를 받는 게 딸을 잃은 것만큼 힘들었다"며 "음료수만 먹거나 건전하게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유족들은 장학회를 만들어 10여 명에게 3천만 원가량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을 도왔다.

그러나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서 매달 만나 모임을 하는 유족회 회원도 사고 초기에 비해 절반가량 줄었다.

유족회원 30여 명은 오는 30일 오전 참사 15주기를 맞아 인현동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인근 위령비에서 합동추모식을 연다.

추모식이 끝나면 유족들은 참사 희생자들의 유골을 뿌렸던 팔미도 앞 해상으로 배를 타고 이동해 헌화하며 고인들의 넋을 달랠 예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