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운 여대생 신분증으로 새 삶을 살려다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30대 임신부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서울남부지법 형사2단독 김석수 판사는 남의 신분증으로 각종 신분증들을 발급받고 금융권에서 대출까지 받은 혐의(사기·사문서위조·주민등록법위반 등)로 기소된 김모(32·여)씨에 대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5일 밝혔다.

판결문과 검찰, 경찰에 따르면 김씨의 삶은 '상실'로 점철된 인생을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었다.

김씨는 중학교 시절인 1997년 괌 대한항공 추락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다.

보상금으로 시가 10억원짜리 아파트에서 사는 등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김씨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우울증을 앓았던 김씨는 결혼을 통해 새 삶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임신한 몸으로 이혼해 또다시 가족을 잃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개명을 했지만 그렇다고 삶이 바뀌지 않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김씨는 2009년 우연히 주워 보관하던 음대생 이모(26·여)씨의 지갑을 떠올렸다.

이 순간, 김씨는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이씨의 인생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 10월 지갑 안에 있던 이씨의 학생증을 이용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면서 이씨의 인생을 '복제'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김씨는 이씨로 행세했다. 이씨의 이름으로 휴대전화 2대를 개통했으며 통장을 개설했고, 증권계좌도 만들었다.

한 은행에서는 원래 이씨의 이름으로 개설돼 있던 통장과 연결된 체크카드를 발급받아 빵과 음료수 등 식료품을 샀다. 현금 75만원을 인출하기도 했다.

김씨는 여권을 발급받기로 마음먹고 구청에 찾아가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변했다"고 둘러대며 여권을 발급받았다. 수수료도 이씨의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김씨는 이씨가 다니던 학교의 인트라넷, 이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메일 등을 뒤지고, 비밀번호도 바꿨다.

김씨는 제2금융권에서 이씨의 이름으로 600만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결국 이 대출이 김씨의 발목을 잡았다. 대출통지서를 받은 이씨의 가족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한 범인 추적에 나서 김씨를 검거했다.

당시 김씨는 경찰에서 "어렸을 적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음악을 전공한 이씨의 삶이 너무 행복해 보여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거 당시 임신 4개월에 우울증을 앓고 있던 김씨에 대해 경찰은 불구속 수사도 고려했으나 혐의가 14개에 달해 영장을 신청했고, 결국 김씨는 구속돼 기소됐다.

하지만 딱한 사정을 참작한 법원의 판결로 김씨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김석수 판사는 "명의를 도용당한 이씨와 합의하고 범행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모두 회복된 점, 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어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점, 건강상태가 좋지 않고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