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기지였던 ‘문학산 군부대’ 기능 상실
‘새로운 인천의 모습’ 디자인 하기를 바라
해방이후 풀지 못한 숙원 이루는 계기될 것


비류 백제의 전설을 간직한 문학산 정상에 광복 70주년 기념탑을 세우라니,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할 것이다. 인천 문학산에서는 참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군부대가 철책으로 산 정상을 막고는 있는데, 정작 그 안에 군인은 없다. 그 부지는 당연히 국방부 소유일 것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인천시 땅이다. 점유 비용도 내지 않고 있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점은, 군부대가 어떻게 문학산에 소유권 변경이나 점용료도 없이 지금껏 눌러앉을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인천시 관계자가 없다는 데 있다. 미군 부대가 먼저 들어섰다는데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쳤으며, 어떠한 부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무기 체계를 갖고 주둔했는지 정도는 땅 주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1965년 말, 의사이자 사진작가 이종화 선생이 10여 년의 발품을 팔아 정리한 향토자료 사진집 ‘문학산’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당시 윤갑로 인천시장이 그 책의 서문을 썼다. 윤갑로 시장은 ‘비록 국방상 불가피하였다고는 하지만 2000년의 이끼가 낀 갖가지 유물과 산성, 그리고 봉화대까지를 삽시에 잃었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하기 그지없다’고 애통해 했다. 이종화 선생이 1952년에 답사할 때만 해도 돌로 쌓은 외성은 그나마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하고, 토성인 내성은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았던 듯하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는 임진왜란 때 문학산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것으로 전해지는 김민선 부사(府使)를 기리는 안관당도 있었다고 한다. 이종화 선생이 답사할 때는 안관당이 파괴되어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김민선 부사의 사당을 그냥 놔두었을 리가 없다.

이종화 선생은 사라지기 전의 문학산의 모습만을 남긴 게 아니라 또 다른 이야깃거리도 전하고 있다. 사진집 ‘문학산’에는 ‘해방 후 이 산 위에다 해방탑을 건립하기로 추진되어 그 도면이 인천시장 댁에 걸려 있었는데, 그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대목도 들어 있다. 해방과 함께 인천시민들은 임진왜란 승전의 땅 문학산에 해방탑을 세워 일제에 짓눌려 온 민족정기를 고취하고자 했다. 그러던 것이 미 군정 시기의 혼란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59년, 느닷없는 군부대 공사가 시작되었다. 1958년 가을, 인천시는 문학산성 동문(東門)을 보수해 새로 세우기까지 했다. 검여 유희강의 글씨가 새겨졌다. 인천예총의 전신인 문총(文總) 회원들은 안관당지에 위령탑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군부대 주둔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공사를 벌였다. 산 정상부를 싹둑 잘라 평평하게 만들었다. 문화재가 온전할 리 없다. 당시 사진을 보면 문학산의 모습이 처참할 지경이다.

이제, 미사일 기지로 쓰이던 문학산 군부대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문학산 북쪽에 머물던 인천의 도심이 송도신도시며, 영종도 신도시, 청라 신도시 등으로 크게 확장되면서 지대공미사일 기지의 역할을 외곽지역으로 넘겨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광복 70년, 올해야 말로 해방 직후 만들었다던 그 ‘해방탑’의 도면을 다시 꺼내 들고 문학산에 새로운 기념탑을 우뚝 세울 때다. ‘인천의 가치’를 들고 나온 유정복 시장 아래에서의 인천시는 2천년 전의 비류도 불러내고, 한반도에서 몇 안되는 임진왜란 승전의 혼령도 불러내고 하여 새로운 인천을 디자인하기를 바란다. 문학산의 ‘광복 70년 기념탑’은 해방 이후 지금껏 풀지 못한 숙원을 이루는 길이 될 것이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