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총리후보 청문회 순탄치만은 않아 보여
황희, 구설속 태평성대·이원익, 믿음속 난세극복
나라와 국민위한 재상모습 한번쯤 보고 싶을뿐


조선시대 명 재상을 말할 때 사람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무래도 황희일듯 하다. 태종 때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아들인 세종 역시 자신의 세자 책봉에 반대해 유배 중이던 그를 복직시켜 중용했으니, 당대를 대표하는 명망가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장수한 재상답게 황희는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느냐는 질문에 조심스레 답하는 농부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거나, 다투는 여종들의 하소연에 모두 ‘네 말이 옳다’고 말했다는 등의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청빈과 멸사봉공의 표상으로 알려진 명성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추문도 적지 않았으니, 실제 황희가 아전을 때려 죽인 사위의 살인사건을 은폐하고 권세를 이용해 친인척들의 부패를 덮으려 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거나 죄지은 여자를 집에 숨겨주며 간통했다는 얘기에까지 이르면, 과연 이 사람이 곧은 인품과 청렴의 대명사로 불리는 게 가당한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생긴다.

대중적 인지도에선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오리 정승’ 이원익은 여러모로 황희와 견줘지는 인물이다. 정유재란 이후 영의정에 오른 그는 거친 세파 속에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할 때도 각각 첫 재상으로 선택됐다. 황희의 앞뒤 맞지 않는 청빈이 ‘작위성’ 논란을 빚고 있는 데 비해, 그는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떨어진 갓을 쓰고 지내 아무도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얘기가 실록에 기술돼있을 만큼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겸양과 자기 검열에도 누구보다 철저해 무려 18회나 사퇴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황희가 여러 가지 이유로 미화된 청백리였다면, 이원익은 죽기 전 ‘절대 후하게 장사 지내지 말라’고 유서를 남길 만큼 능력과 청빈을 함께 갖춘 명재상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대체적 평가다.

관점에 따라 평가는 제각각이겠으되, 이 두 재상 모두 흔치 않은 장기 재임 정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황희는 90세의 나이로 죽기 3년 전까지 무려 18년이나 영의정으로 재직했다. 여러 가지 비위·청탁 논란에 휩싸여 파직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복직했고, 세종이 빛나는 치적을 남기며 성군으로 추앙받게 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원익 역시 선조와 광해군, 인조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판이한 임금 3대에 걸쳐 영의정을 6차례나 지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두 사람 모두 탁월한 업무 능력과 바른 성품, 그리고 왕의 절대적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조시대와 비견할 일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 아래 국무총리는 가히 ‘잔혹사’라 불릴 만큼 곡절의 연속이었다. 초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 도덕성 논란 끝에 낙마한 이후 정홍원 총리의 사퇴, 안대희·문창극 후보자의 낙마, 이완구 총리의 사퇴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에서의 총리·총리 후보자들은 치적은 고사하고 국민들이 채 이름을 외울 시간도 없을 만큼 초 단명과 낙마를 거듭했다. 공백기를 거치며 지명된 황교안 총리 후보자 역시 임명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본격적인 청문 절차에 들어가기도 전에 야권은 벌써부터 공안검사로서의 전력과 고액수임료 기부 약속 이행 여부, 병역기피 의혹, 종교 편향 논란 등을 가려내겠다며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다.

박 대통령은 그를 집권 후반기 안정적으로 국정을 펼칠 적임자로 꼽으며 신뢰를 보냈다. 재상의 자리 보전이 전적으로 왕의 신뢰 여부에 좌우됐던 왕조시대와 달리, 황 후보자의 총리 임명은 날카로운 검증 공세를 어떻게 극복해내고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낼지에 달렸다. 그건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 번이라도 낙마해야 하고, 굳이 문제 될 게 없다면 소모적인 정쟁의 도구가 돼서도 안된다.

국민들은 다만, 황희가 숱한 구설을 딛고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것처럼, 이원익이 백성들의 믿음 속에 난세를 극복해냈던 것처럼, 오랜 시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재상의 모습을 이 시대에도 한 번 쯤은 보고 싶을 뿐이다.

/배상록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