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농림부장관 역임 농지개혁 등 업적 남겨
이승만 정권 맞선 대통령후보… 간첩죄로 희생
市 재평가 구상 미흡… 온전한 죽산의 부활 기대

7월 말이면 꼭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죽산 조봉암. 일제강점기에는 공산주의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해방 직후엔 극적인 전향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 정권에 맞선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던 그가 1959년 7월 31일 전격적으로 사형을 당했다. 정권은 그를 간첩죄로 옭아맸다. 누구도 그 올가미를 벗겨주지 못했다. 사법부조차도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 푹푹 찌던 한여름 그의 주검은 문상조차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시간인 지난 2011년, 죽산을 그렇게 보냈던 우리 대법원은 그의 간첩죄가 억울한 누명이었음을 자인했다.

1965년 7월 언론인 수십 명과 대학 교수 몇이 모여 ‘해방 20년’이란 책을 냈다. 말 그대로 해방 이후 20년간 벌어진 굵직한 사건 사고를 정리한 것이다. 내용 중에 ‘진보당 사건-죽산 사형’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사건 전말을 풀어내면서 말미에 ‘…이리하여 조봉암은 가고, 조봉암 없는 진보당은 명맥조차 유지할 수 없이 깨어지고 말았다’고 썼다.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또 죽산이 만든 진보당의 강령과 조봉암의 이력을 자세히 싣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집필진은 이 글을 통해 죽산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다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산 사형일을 이틀 앞둔 29일, 죽산이 해방 이후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인천시 중구 참외전로 244번길 옛집 주변은 그저 썰렁하기만 했다. 죽산은 일제가 주택개량 사업으로 이 동네에 지은 부영(府營) 주택에 산 적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시영(市營) 아파트’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터를 다진 똑같은 양식의 집들이 5~6채가 죽 늘어서 있었다. 일제 시기 주택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그 집들이 몇 채 남지 않았다. 한쪽 끝 집은 헐려 고추밭으로 변했고, 다른 쪽 끝은 빌라가 들어섰다. 가운데 세 채만이 남았는데, 한 곳은 빈집이었다. 죽산이 살던 집에는 그나마 다행히 누군가 여전히 살고 있었는데 이 집이 언제까지나 버티고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게 보였다. 이마저 헐린다면 죽산의 숨결을 떠올릴 몇 안 남은 기념물이 또 사라지게 된다.

죽산의 삶을 좇다 보면 그는 우리를 여러 갈래로 안내한다. 독립운동사로, 공산주의 운동사로 이끌기도 하고, 정당 변화사를 들여다보게도 한다. 친일 논란에도 휩싸여 있기는 하지만 그는 분명 ‘과(過)’보다는 ‘공(功)’이 많은 삶을 살았다. 그가 농림부 장관 시절 입안한 농지개혁법은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6·25 전쟁 당시 농민들이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게 연구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라면 조봉암은 ‘건국의 장관’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죽산의 고향 인천에서는 작년부터 ‘인천의 가치’란 말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인천의 가치’를 새롭게 다듬겠다는 것이 인천시 정부의 구상이다. 그런데 정작 지난 1년 동안 죽산을 ‘인천의 가치’로 이야기 하는 인천시 공무원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죽산은 간첩’이란 이미지가 그들의 뇌리에 아직도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인천의 가치’는 ‘좌’나 ‘우’, 어느 한 쪽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천의 가치’를 온전히 지닌 죽산의 부활을 기대한다.

/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