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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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서로를 위로한 '마주침'… 남겨진 세월을 위한 변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속 추모 지면기사
안산주민·유가족 목포기행 동행 "공원 반대하지 말걸" 오해 확인인천선 생존자 참여 작품 전시회"도움 보답해야" 봉사활동 지속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학생의 유해만 들어온다"거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에 들어선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 대부분이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은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라고 뒤늦은 마음을 표했다. 일반인 희생자가 중심인 인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올해 2월 1일부터 15일까지 부평아트센터 갤러리꽃누리에서는 '그날의 사람들, 오늘의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추모관)이 주최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념전시회였다.세월호 생존자인 김병규씨를 포함한 제주시 생존자 7명,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가족 14명이 만든 작품 63점이 전시됐다.추모관은 개관 이후 지역사회와 호흡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안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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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일상 속 추모' 위해… 걸어가야 할 길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동네 곳곳에서 이뤄진 유가족과 주민들의 만남 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당한 아이들의 유해만 들어온다는 것’,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라는 것’.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들이 대부분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조은정 학생의 엄마 박정화씨는 “생명안전공원을 무조건 반대했던 주민들이 막상 세월호 선체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행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 - 목포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 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센터는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다. 힐링센터 0416쉼과힘.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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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후 새로운 시작… 공동체 회복하는 '희망의 마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 속 추모 지면기사
고잔문화복지센터 '목포기행' 기획 명성교회·연세대·선부복지관 협력유가족-주민 안정 프로그램 다양예산문제 어려움에도 필요성 제기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유가족과 지역주민 사이에 생겨난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다.이렇게 유가족과 지역주민들 간 접점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안산 곳곳서 일어났다. 상록구 반월동에 거주하는 이연우씨는 참사 1년 후 지역아동센터서 열린 유가족 간담회에서 마르고 기력 없는 모습의 유가족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반월동에 사는 '엄마'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분향소에 밥을 지어 보냈다. 또 마을 축제, 자치회 행사마다 유가족을 위한 부스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공방 수업을 열면 416공방에 부탁해 유가족들을 강사로 초청했다.고잔동에는 마을걷기 프로그램 '같이걷자'가 운영 중이다. 시민들은 마을해설사와 함께 고잔복지센터·원고잔공원·단원고등학교·화랑유원지 등 고잔동 곳곳을 돌며 세월호참사로 인해 달라진 마을에 대해 듣는다. 눈에 띄는 건 마을 해설사다. 참사 직후 단원고에서 6개월 동안 급식봉사를 한 향미씨와 참사로 아이를 잃고 또 아이가 생존한 지인을 모두 아는 용정씨 등 고잔동 주민 6명이 마을해설사로 나섰다.■ 공동체 회복 시급한데 줄어드는 예산유가족과 주민들이 스스로 관계개선에 노력한 건 피해자 보상, 기억교실 이전 등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이 격화되며 공동체 회복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안산시민의 심리안정과 공동체 회복을 국가의 책임으로 의무화한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을 제정했고 안산시도 2017년부터 '공동체회복 프로그램(희망마을사업)'을 본격 시행했다.이런 노력 덕에 안산 내 마을공동체 사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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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 - 홀로코스트 기록 '네개의 방'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역사는 반복된다는 서늘한 진실… '끝없는 증언'으로 새겼다 독일 정부 제안, 메모리얼 지하에 정보관바닥엔 희생자 일기·편지 등 이야기 가득4가지 공간 따라가며 공감 "가슴 미어져"애도 방명록에 한글로 "기억하겠습니다"2천710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지하의 정보관은 희생자의 이야기로 메워져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관람객에게 닿아 분노와 슬픔으로 표출되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이 된다."두세살 남짓 되는 어린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야외 캠프용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울고 또 울고 비명을 지른다. '엄마, 엄마,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군인들은 끊임없이 총을 쏘고 그 총소리는 잠시나마 아이들을 침묵시킨다.""나는 그 옆에 쓰러졌고 그의 시체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목에 총을 맞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끝날 것이야'. 이제 죽음 속에서도 인내가 피어난다. 진흙과 섞인 피가 흘러 내 귀에서 마르고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보관을 찾은 관람객은 바닥에 있는 희생자의 일기와 편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쪼그려 앉곤 했다. 곳곳에선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지상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는 사뭇 다른 무거운 분위기다.정보관은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소상히 서술하는 공간으로 시작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학살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을 지나면, '차원의 방', '가족의 방', '이름의 방' ,'장소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네 개의 방이 차례로 등장한다.관람객은 '차원의 방'의 손글씨 편지와 일기를 통해 희생자의 공포에 공감한다. '가족의 방'에서 소개되는 유대인 15가구의 해산·추방의 기록을 따라가며 안타까움은 극대화된다. '이름의 방'에서는 학대받은 유대인들의 이름·출생연도·사망연도가 동시에 네 개의 벽에 투사되며 그들의 짧은 일생을 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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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집시·장애인 학살 잊지 않기 위해… 자랑스러운 건물옆 '수치 기념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국회의사당·베를린필·티어가르텐 공원 등일상속 받아들여져… 한국 '님비'와 달라"역사적 사건 대하는 방식 변화 고민해야"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주변에는 또 다른 추모 공간들도 곳곳에 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길을 건너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학살된 집시를 위한 추모 공간'(사진)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베를린 필하모닉 건물 옆에는 '안락사 학살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시민들이 조깅을 즐기는 티어가르텐 공원 안에는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곳곳에 있는 추모 공간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만큼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베를린 시민 일상의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나가다가도 들러 이들의 역사를 마주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독일의 추모문화는 한국과 달리 일상과 붙어 있다. 마치 '님비현상'처럼 추모 공간을 기피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가였지만,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기억 문화'가 가장 발달한 국가가 됐다.다만, 지금은 관광지로서도 추모 공간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되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건립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우베 노이마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재단 이사는 기념관 건립 15주년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수치의 기념비'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매년 거의 50만명 이상이 찾는 인기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며 "이는 우리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이들과 미래 세대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과 맞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할 것이다. 출판물 또는 이벤트를 통해 젊은 세대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말했듯, 추모 공간의 형태가 국한될 필요는 없다.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모 공간의 의미가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다.세월호 참사 희생자 지상준군의 엄마 강지은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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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질문에… 시민의 뜻모아 '기억의 조각' 빚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지면기사
설립 과정 민간 주도… 정치권까지 합심10여년 시간 '정치적 논쟁' 좌초 위기도독일에 대한 이해 일부로서 의미 갖게돼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설립 과정에서 시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정치권에서도 뜻을 모았다는 특징을 가진다.1988년 처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제안한 것은 저널리스트 레아 로쉬였다. 그는 역사가 에버하르트 야켈과 함께 시민단체 '퍼스펙티브 베를린(Perspektive Berlin)'의 요청을 받아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당초 이들은 베를린 남부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이후 헬무트 콜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던 인근 부지 제공에 동의하면서 지금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다.퍼스펙티브 베를린은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서명을 모았고, 1999년 독일 연방의회는 기념비와 이를 관리할 재단을 설립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후 건축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피터 아이젠만이 선정되는 등의 논의를 거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2005년 5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69주년에 맞춰 개관했으며, 기념비 설립이 제안된 지 17년 만이었다.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할 점은 시민사회가 주도한 서명 운동과 시민 발의 결의안이다. 시민사회가 지식인들과 뜻을 모아 의견을 전달한 과정이 있었기에 독일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물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또한 설립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94년 개최된 첫 공모전의 당선작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념비 건립 사업까지 좌초될 위기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두고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순탄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시민사회가 합심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완성됐고, 베를린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었다.베를린 투로대학(Touro College Berlin)의 유대인 연구 전공 스테판 렌슈테트 교수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건립 과정을 볼 때, 거의 모든 경우에 추모와 추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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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수도 한복판 우뚝 서있는 2710개의 비극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지면기사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600만명 유대인 학살 비석 미로처럼 배치도심 위치 조성 일상 속 스며든 휴식공간'희생자 엄숙해야…' 통념 깨고 자유로움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회색빛 콘크리트 비석 2천710개가 줄을 지어 박혀있다. 파릇파릇한 초록잎과 선선한 봄바람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4월의 날씨와 대비되는 회색빛 풍경이다. 지난 14일 찾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주말을 맞아 관광객과 베를린 시민들로 붐볐다. 이들은 회색 비석을 가로질러 들어가며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사색에 잠기며 혼자 걷기도 했다. 미로같은 비석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 놀라는 이도 꽤 많았다. 꺄르르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얼핏 들린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비석 높이는 제각각이다. 0.2~4.7m까지 다양하다. 초입에는 성인 기준 종아리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낮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석은 점점 크고 높아져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정도가 된다. 지형 또한 특이하다. 마치 파도가 치는 듯 땅이 울퉁불퉁하다. 굴곡진 땅 위에서 웅장한 회색 비석에 둘러싸여 있자니, 답답하고 억눌리는 느낌까지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치 지하로 가라앉는 듯하다. 하지만 추모공간이라고 해서 엄숙하기만 한 분위기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추모 공간의 통념을 깨고 베를린의 일상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은 자유롭게 추모한다. 가장자리의 낮은 비석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도, 가족들과 빵과 음료를 나눠 먹기도,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비석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다.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의 일상에 섞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표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불과 1.2㎞, 국회의사당과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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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히로시마의 추도시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지면기사
고요 속의 기도… 참사를 마주할 용기는 평화를 향한 의지 평화기념공원내 추도관 자리잡아중심에는 희생자 추모 연못 조성사망자 상징한 벽돌 14만개 빼곡분위기 경건, 사진촬영조차 조심"온전히 기도할수 있는 공간 필요" 세월호 유족들 염원하는 곳 닮아8시 15분. 큰 부채꼴과 작은 부채꼴이 어긋난 모양의 연못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시간을 나타낸다. 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에 멈춰있다.중심에 있는 연못은 원자폭탄의 폭심지를 상징하며, 물을 찾다가 죽어간 원폭사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연못으로 희생자들에게 물을 바친다는 의미다.지난 12일 찾은 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사진을 촬영하는 소리조차 추모객에게 방해될까 우려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만 감돌았다.지상 1층에서 추도 공간인 지하로 내려가는 길엔 원폭이 투하된 시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상세히 적혀있다. 원폭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하면서 지표면 온도가 섭씨 4천도에 이르러 14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처참한 피해 상황과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메시지들이 벽면을 따라 쓰여져 있다.벽에서 천장을 떠받드는 12개의 기둥은 원폭의 희생이 있었던 슬픔과 현재의 연결을 의미한다. 기둥 앞에 나무 의자를 둬서 추모객들은 의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도를 하거나 생각에 잠기곤 한다.국립 히로시마 평화기념 희생자 추도관은 지난 1994년에 제정된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지원에 관한 법률'에 기초해 조성됐다. 법안은 원자폭탄 투하 후 50년을 맞아 피폭자에 대한 보건, 의료 및 복지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됐다.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원폭사망자 추모 시설을 빠르게 설치하도록 결정하고 피폭자와 사망자의 유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설이 되도록 추도관을 만들었다. 추도관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설계한 단게 겐조가 설계해 곳곳에 디자인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연못을 중심으로 벽면에는 피폭 후 거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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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폭이 투하됐는가'… 자국민 희생시킨 침략국가의 반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6)] 지면기사
반핵 의지 담은 평화기념자료관 도시 파괴과정 3D 영상으로 생생히유품에는 피해자·기부자 이름 알려입구에 가장 최근 핵실험 날짜 표기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고 일본 국민들을 진정한 '치유'로 이끈 평화기념공원의 자료관은 원폭의 참상을 적극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지난 12일 방문한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 2층에 마련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 재현 3D 전시관을 관람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원자폭탄의 참상2분 정도의 3D 영상에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한가운데 떨어진 원폭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CG로 합성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영상과 함께 전시관엔 폭발음과 피해자들의 비명들이 섞여 재생돼 그 파괴력과 잔혹함을 더욱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3D 전시관을 빠져나오면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전경이 이어진다. 흑백에 폐허가 된 도시, 오직 철근만 남은 건물, 모두 불타버린 나무들. 이날 이어지는 사진들을 보는 관람객들은 사진을 촬영하거나 잡담을 하는 대신 숨죽이며 그 참상을 지켜봤다. 자료관 곳곳에는 '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는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소녀의 유품이 된 자전거와 더불어 누더기가 돼버린 피해자들의 옷가지, 그들이 착용한 장신구 등 원폭이 떨어진 날 일상을 보내던 히로시마 시민들의 실상이 그대로 보였다. 원폭의 피해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강력히 경고되고 있었다. 3층 전시관에는 원폭 투하 이후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자료들이 이어졌다. 인체가 방사능에 노출돼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긴 소년, 팔과 다리가 썩어가 온종일 누워 고통 속에 노출된 한 청년. 특히 피폭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사진 다수가 미성년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관람하는 이들 중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 반성·다짐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자료관자료관을 가득 메운 관람객 대부분은 미국, 유럽 등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적대적 관계였던 국적이다. 참사의 원인인 원자폭탄으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시민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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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폭심지옆 공원서 평온한 일상… 원폭 상흔이 평화의 상징으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5)] 지면기사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일본 히로시마 에도시대부터 번화한 곳, 한순간 폐허정부 '특별법' 만들어 도시부흥 지원잔디밭·느티나무 사이… 시민들 휴식'순령' 희생자 위령비앞 관광객들 추모강제동원 피해자 등 한국인 위령비도기념공원 인근에 참상 알리는 미술관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참상을 알리는 원폭돔 너머에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엔 평온함만이 맴돌았다.푸른 잔디밭과 느티나무들 사이로 고등학생 무리가 자전거 벨소리를 울리며 달리고, 시민들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피크닉을 즐긴다.지난 12일 찾은 평화기념공원엔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시민들과 희생된 영혼의 평화로운 휴식을 기리는 상징들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종이학을 두손 높이 들고 있는 어린이 동상. 두 남녀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있는 기념비.'순령'이라고 적힌 위령비 앞에서도 관광객들은 생수병을 올려두고 두손모아 기도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모든 사람들이 물을 찾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위령비 앞에 생수병을 올려둔다.평화에 깃댄 공원은 시민의 염원, 지자체의 의지, 정부의 지원으로 일상 속의 추모공간이 된 동시에 도시 재건의 발판이 됐다.■ 도시 재건의 상징이 된 평화공원1945년 8월 6일 8시 15분, 지금의 평화기념공원 위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고 히로시마 일대는 폐허가 됐다. 공원이 있는 자리는 에도 시대부터 1920년대까지 히로시마의 번화가였다.그로부터 4년 뒤인 1949년 8월 6일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평화기념도시건설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해 히로시마의 재건을 위해서 국가 예산을 투입했다. 특별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주민투표를 무조건 진행해야 하는데 찬성이 90% 이상으로 도시 재건에 온 히로시마 시민의 염원이 담겨있었다.당시 히로시마는 특별법으로 도시 재건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학예사 코야마 료는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히로시마시에서 자체적으로 부흥도시계획을 추진했는데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별법 없이는 추진이 안될 정도로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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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의지로 지켜낸 '돔'…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면기사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히로시마 하면 떠오르는 '원폭돔' 1966년 보존 필요성 제기, 자발적 모금1989년 내부 부식 소식에 다시 뜻 모아참사의 기억 딛고 '치유'… 자부심으로앙상한 뼈대만 남은 지붕. 잔뜩 찢겨 색이 바래져 버린 외관의 콘크리트.곳곳에 난 균열로 지지대에 아슬하게 버티고 서있는 기둥.지난 19일 방문한 일본 히로시마 '원폭돔'은 외관의 모습과 원폭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화기념공원' 한쪽에 우두커니 있었다.원폭돔 건물 사이를 3분 넘게 가만히 응시하던 한 서양인은 조용히 카메라를 들어 순간을 담는다. 그 주변의 한 일본 주민은 폐허가 됐던 현장과 피해자들의 사진을 양손에 들고 "잊지 말아달라"고 서글피 외치고 있다.누군가에겐 잔혹한 기억을 못 잊고 울부짖을 수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추억의 장소가 되는 이중적인 공간.사망자 14만명. 당시 히로시마 인구가 30만인 점을 감안하면 순식간에 인구 절반 가까이 사라지게 만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평화기념공원과 원폭돔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참사에 직격당했던 일본 국민과 히로시마 시민들을 진정한 '치유'로 이끈 기제가 됐다. 방치될 수도 있었던 참사의 흔적인 원폭돔은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보존과 관리에 힘썼다는 점에서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의미가 크다.원폭돔은 1945년 8월 6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직접적으로 타격된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워 강한 폭격을 맞은 건물이다. 도시가 재건됨과 동시에 1966년 원폭돔 보존에 대한 필요성 여론도 높아지며 일본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모금 운동을 시작해 6천600만엔(약 6억원)을 모았다.이후 히로시마시의회는 원폭돔 보존 결의안을 채택, 정부까지 나서 '원폭돔 보존 프로젝트'에 돌입했는데, 1989년 돔 내부 부식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또다시 히로시마 주민들을 중심으로 모금 운동이 시작돼 3억9천500만엔(약 36억원) 이상이 전달됐다.민관이 합심한 결과, 1996년 히로시마 원폭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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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동 화재 57명·금양호 침몰 9명… 추모비만 쓸쓸 지면기사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세월호 이전 인천의 참사들 존재 이유 잘 모르거나… 접근 어려워"추모 통한 기억, 트라우마 해소 도움"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 이전에도 인천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들이 있었다. 인천 곳곳에서 위령탑 건립과 추모제 개최 등의 방식으로 참사의 기억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지만 한계도 있다.1999년 발생한 인천 중구 인현동 화재는 57명이 숨진 대형 참사로 기록됐다. 그해 10월 30일 인현동 한 상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2층에 있던 10대 중·고교생 등 57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쳤다. 인천시교육청은 청소년들의 문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2004년 참사 현장 인근에 학생교육문화회관을 세웠다. 당시 문화회관 뒤편에 추모비만 설치됐을 뿐 참사 내용을 기록한 안내판조차 없었다. 청소년 등 방문객들도 왜 이곳에 문화회관이 생겼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이 지난 2023년에야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요구로 참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설치됐다.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 이재원 회장은 "문화회관 내부에 상설 추모 공간이 마련되길 원했지만, 흐지부지됐다"며 "올해가 참사 25주기인데 시민들이 참사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된다"고 토로했다.2010년 3월26일 서해 최북단 섬인 인천 옹진군 백령도 앞바다에선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었다. 실종자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가 4월2일 인천항으로 복귀하던 어선 98금양호가 외국 화물선과 충돌해 선원 9명이 숨졌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은 이듬해 중구 역무선부두 한편에 마련됐다. 하지만 인천 시민조차 이를 잘 모른다. 최근엔 98금양호 희생자 위령탑으로 향하는 길목이 공사로 막혀 조문하기도 여의치 않다. 금양호 선장이었던 고(故) 김재후씨의 동생 김재흥씨는 "선원 유가족들이 따로 기일을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가족 간 교류는 거의 끊긴 상태"라며 "사고 당시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잊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2011년 7월 강원도 춘천에선 산사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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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자 확인 필수로, 화물 고박 철저히… '인천국민안전체험관' 조성, 수십만 발길 지면기사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변화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은 세월호가 출발한 곳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는 인천이라는 도시에도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10년 전인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인천~제주 카페리(여객과 자동차를 실어 운반하는 배) 뱃길은 끊겼다.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7년여 만인 2021년 이 항로에 선사 '하이덱스스토리지'가 카페리를 투입해 운항을 시작했으나, 초기부터 선박 이상 등 차질을 빚었다. 선사는 휴항과 재개를 반복했고 결국 항로 운영을 포기했다.인천은 섬이 많은 해양도시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승객 안전 등 선박 관리 체계가 대폭 개선됐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리 여객선에 탑승하는 모든 사람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 탑승객 명단과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등 국내 승선 관리의 허점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정부는 구조 활동 초기에 큰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선박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화물 고박 점검 등도 더욱 철저해졌다.해양경찰청은 세월호 탑승객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박근혜 정부 당시 해체됐다가 문재인 정부 때 부활했다. 해경은 그동안 수색·구조 등 현장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도 커졌다. 2021년 인천엔 '인천국민안전체험관'이 들어섰다. 인천시가 건립한 이 체험관은 선박과 항공기 사고, 화재 등 각종 재난재해 상황을 체험하고 적절한 대응법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개관 첫해인 2021년 6천888명이던 방문객은 지난해 11만4천82명으로 많이 늘었다. 누적 방문객은 21만명을 넘어섰다. /정운·백효은기자 jw33@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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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치유하다 '인천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4)] 지면기사
박지영 승무원·이광욱 잠수사 등 봉안 중앙엔 세월호 모형·사고전 CCTV 영상제자들과 찾은 교사 "잘 몰랐던 학생들도일반인 희생자 사연 들으며 더 관심 가져""이맘때면 떠난 어머니 더 그리워져…""며칠 있다 온다던 아들…" 유족들 아픔계속된 '사회적 참사' 위로·연대 구심점"추모공간, 안전위협 인지 시각적 의지"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 만인 2016년 4월16일 인천 부평구 승화원(인천가족공원)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문을 열었다. 정부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설립한 첫 추모 공간이다.■ 일반인 희생자들을 기리다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는 세월호 탑승객과 선원 등 43명, 사고 직후 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민간 잠수사 2명 등 일반인 희생자 45명 중 44명의 봉안함이 안치돼 있다. 일반인 희생자 중에는 여행을 떠난 가족, 환갑을 맞이한 동창생, 출장길에 오른 직장인 등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교사들을 구조하려다 탈출하지 못하고 끝내 숨진 승무원 박지영씨 등 의인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추모관은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와 희생자 유품 등이 전시된 추모실, 일반인 희생자들의 봉안함이 있는 안치실로 나뉘어 있다. 추모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중앙에 있는 세월호 선체 모형이다. 세월호 도면을 토대로 원래 크기의 68분의1로 줄인 모형 내부엔 방문객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넣어둔 노란 리본이 가득하다. 벽면에 붙은 16개 CC(폐쇄회로)TV 화면은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침몰 7분 전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전거 전국 일주 마지막 여행지로 제주도를 정했던 동호회원의 자전거 헬멧, 제주도로 출장을 가던 직장인의 사원증, 가방에 넣고 꺼내 읽던 책 등 일반인 희생자들의 유품도 전시돼 있다.세월호 참사 2주기에 맞춰 2016년 개관한 추모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개관 이듬해인 2017년 1만7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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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추모관, 사회적 참사 '기억과 연대의 장' 거듭나야" 지면기사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4)] 참사 후 10년, 인천의 추모 공간 부평 승화원서 일반인 희생자 기려10周 맞아 기능 확대 필요성 제기시민공동체 유대감 형성 기여 강조인천 부평구 승화원(인천가족공원)에 조성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 추모관)은 사회적 참사를 다룬 인천지역의 유일한 '추모관'이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추모관의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2016년 문을 연 추모관은 지난해 2만여 명이 방문하는 등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다양한 교육·행사를 진행하기엔 협소하다. 전시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개선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추모관에서 일하는 서미랑씨는 "공간이 좁아 학생들이나 단체객이 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교육을 진행할 공간이 없다"고 했다. 이어 "안전교육을 실시하거나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다면, 더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매년 추모관을 찾는다는 최우연(62·경기 화성)씨는 "내부 전시품이나 조형물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며 "개관 이후 추가로 드러난 사실이 있음에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인천에선 중구 인현동 화재(1999년), 금양호 침몰(2010년) 등 세월호 이전에도 여러 참사가 발생했지만 추모관이 조성되지 않았다. 인천 연수구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지만 국가 간 전쟁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추모관과 성격이 다르다. '추모'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위령탑 등도 규모와 시설 측면에서 추모관과 기능을 달리한다.이러한 점에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을 '연대의 장'으로 확대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 움직임은 시작됐다. 추모관은 지난 2022년 '5·18, 4·16 삼행시 백일장'을 열었다. 이 행사는 세월호 참사와 1980년 5월18일에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추모관은 세월호와 다른 참사에 대한 기록·기억을 공유하고 알리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추모관 전태호 관장은 "세월호 시민행진, 추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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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안산 지역사회에 숙제 안긴 '두 개의 화랑유원지'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3)] 지면기사
추억의 화랑유원지… 추모의 화랑유원지… 시민과 함께 쉴 곳은 어디… 세월은 기억의 바다를 건너는중 상이군경이 일군 땅, 도심내 휴식처로1998년부터 공원화, 각종 시설 들어서오토캠핑·바비큐 파티 등 저마다 추억세월호 비극후… 정부합동분향소 설치4년간 73만여명 조문… 공간 성격 변화일부 시민 "유원지 뺏겼다" 불편 호소'생명안전공원' 조성 결정에 갈등 고조"일상속에서 안전한 세상 함께 꿈꾸길"설치 반대 이웃 설득 이어가는 유가족"우리 장례문화 달라지는 계기 될수도"60대 중반의 형철(가명)씨는 1983년 안산에 정착했다. 막 조성되기 시작한 반월시화국가산업단지에 일자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군 제대 후 무작정 안산으로 왔다. 공장일은 고됐다. 주 6일 근무는 기본이었고 철야근무도 종종 있었다. 그런 형철씨에게 유일한 낙은 쉬는 날, 화랑유원지에 놀러가는 것이다. 일주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공간이었다. 회색빛 공장만 가득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놀거리와 볼거리를 주는 곳. 일주일에 딱 한번 쉬는 그 하루, 가족과 함께 화랑유원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거나 화랑호에서 낚시를 하며 휴일을 보냈다. 형철씨의 고된 청춘을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안산을 닮은, 시민의 휴식처 화랑유원지도심 한복판에 유원지가 있는 도시는 안산이 유일무이하다. 화랑유원지가 처음부터 유원지는 아니었다. 1956년 6·25 참전 상이군경 20여명이 안산시로 이주해 땅을 조성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엔 '화랑농장', '화랑저수지', '화랑낚시터'로 불렸다. 하지만 1986년 반월국가산단 배후도시 안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화랑유원지로 불리게 됐다.지금의 공원 형태로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98년이다. 1980~90년대부터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늘어나자 안산시 차원에서도 시민들이 맘껏 쉬고, 체육활동을 하고, 바비큐 파티를 할 규모를 가진 공원이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안산이 대체로 논밭이거나 황무지였고, 고잔신도시는 개발 중인 단계였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찾아 휴식을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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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온전히 작별하지 못한 세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2)] 지면기사
참사후 10년… 아픔의 안산 안산에서 400㎞ 떨어진 먼 바다은사님·선배 하루아침 잃은 참담함4월 벚꽃 보는 일조차 죄책감 느껴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자동차로 '400㎞'를 달려야 갈 수 있는 바다. 그 먼 바다에서 안산의 아이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안산의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안산 시민들은 뜬 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아파서 눈물만 났다. 참사는 모두의 아픔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원고 희생학생들은, 지난 10년 안산 시민들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애도의 시간"세월호 침몰" 대학교에서 한창 수업을 받던 지원(30·가명)씨에게 짧은 문자가 왔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원씨는 그해 초 단원고를 졸업하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다. 친구는 지원씨가 단원고 졸업생인 것을 기억했다. 지원씨는 서둘러 뉴스를 검색했다.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안심했다. 큰일은 없겠지 싶었다. 점심시간 즈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남윤철 선생님이 세월호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남 선생님은 지원씨가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반장이었던 지원씨를 늘 믿어주며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은사다. 곧장 단원고로 달려갔다. 학교 강당에서 밤을 새며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다. 끝내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 배가 침몰한다는데 단원고 같아" 그 날 정진(57)씨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아들이 보낸 메시지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곧장 전날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전날 저녁을 먹으며 아들은 "엄마 형들이 배타고 수학여행 간대"라고 말했다. 정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왜? 비행기 놔두고 배를 타"라고 답했던 기억이다. 제주도가 고향이었던 정진씨는 배가 무서워 비행기를 타고 오갔었다. 큰일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함께 예배를 드리던 단원고 부모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큰일이 벌어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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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우리도 살아야지" 속절없이 흐른 세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2)] 지면기사
참사후 10년… 갈등의 안산 1년 지나도록 도시 전체가 추모·애도일상 제지·취재 쇄도… 일부 지쳐가 ■ 사그라드는 추모참사 이후 1년쯤 지나자 사회는 참사의 슬픔을 잊어갔다. 전국에서 줄을 잇던 조문객도 많이 줄어들었고 점점 잊혀갔다. 안산 시민들만 일상에서 세월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안산은 도시 전체가 여전히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가에선 음악도 틀지 못했다. 안산시에서 자중해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죽었는데 노래가 나오냐"는 시선이 두려웠다. 1년 내내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단원고 인근 빌라들을 시시때때로 찍어갔다. "안산이 아파트도 없는 동네인 것처럼, 일부러 건물에 금 간 부분만 찍어서 전국에 내보내는게 상처였다"고 토로했다. 동사무소, 문화체육센터 등 공공에서 하던 주민프로그램도 모두 취소됐다. 봄이 되면 더 그랬다. 거의 매일 기자들과 외부 사람들이 오가니 오히려 주민들은 외출을 꺼렸다. 이때를 두고 주민들은 "마을에 웃음이 없고 암울했으며 특히 4월엔 밝은 옷도 입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여전히 추모와 애도가 이어졌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랑유원지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반대하는 지역주민… 서운한 유가족계속된 집회·현수막… 상권 위축시켜피해보상금 관련 유언비언 등 난무서로에게 상처뿐인 일련의 사건·사고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선체 인양, 희생자 유해 수습 등 참사를 둘러싼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정부와 갈등을 겪는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온라인을 통해 동네에 떠돌면서 시민들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안산에 산다고 하면 세월호 얘기부터 꺼내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안산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세월호가 서두에 나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다. 추모집회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일부 시민들의 생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잔동·호수동·중앙동 일대 상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근심이 쌓여갔다. 참사 당시 생업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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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항 '팽목기억관' 지키는 유가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1)] 지면기사
'제대로 된 공간' 숱한 약속… "외면 말고 반성, 함께 고민을" 분향소 희생자들 사진 빼곡·진한 향 냄새추모객들의 방명록 속 '잊지 않겠다' 새록안산·서울·진도 합동분향소 하나씩 철거팽목기억관만 유가족 30여명 교대로 지켜불법시설 인지에도 미조치 난처한 진도군2019년 전남지사 4·16기록관 발표 긴 기다림작년말 국민해양안전관 오픈 '불통' 확인만해수부 '생명기억관' 내년 9월께 용역 결과 그 바다에 아직 배가 있다. 배는 더이상 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아직 그 배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이 그 바다에 있다. 도시에도 아직 배가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모두의 마음 속 그 배가 여전히 그 도시를 부유한다.그렇게 10년이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그 장면들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날 출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구해냈더라면, 그래서 살렸다면, 그간의 4월은 모두에게 흩날리는 벚꽃인양 내내 아름다웠을 것이다.10년 동안 끊임없이 잊으라고 채근했다. 잊지 않는 마음을 오해하고 모독하기도 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잊지 않는 게 아니다. 잊히지 않아서 잊지 못한다. 가족은 더 그렇고, 친구도 그러하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기억하면서 추모하고, 추모하면서 일상을 무사히 지내는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추모'에 대한 지난 10년을 반추하며 추모와 일상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2014년 4월 16일, 깊은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수습되던 곳, 비명과 오열이 가득했던 팽목항은 이제 이름도 진도항으로 바뀌었다. 바뀐 이름처럼 진도항을 다시 찾았을 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반짝이는 윤슬과 보글대는 파도소리가 아름다웠다. 그 곁에 4·16 팽목기억관이 있다. 4·16 팽목기억관이라 적힌 푯말이 가리키는 곳에 컨테이너 4개가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었다. 분향소로 사용되던 팽목기억관, 팽목강당,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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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방치되고 폐쇄된 세월호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1)] 지면기사
강산은 변했는데 세월은 그대로다 치우지 못하고, 치유도 못한 '악몽의 10년' 겨우 뭍으로 건져 올린 선체… 목포신항에 있지만 펜스에 가려져본래 하얗고 파랗던 빛 잃고 잔뜩 녹슬어 성한 곳 하나 없는 모습'잊지 않겠다' '돌아와라'… 은색 철창 마디마디 노란리본 그대로안전 이유로 내부 출입 금지… 추모할 수 있는 공간 부재 아쉬워 그 바다에 아직 배가 있다. 배는 더이상 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아직 그 배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이 그 바다에 있다. 도시에도 아직 배가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모두의 마음 속 그 배가 여전히 그 도시를 부유한다.그렇게 10년이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그 장면들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날 출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구해냈더라면, 그래서 살렸다면, 그간의 4월은 모두에게 흩날리는 벚꽃인양 내내 아름다웠을 것이다.10년 동안 끊임없이 잊으라고 채근했다. 잊지 않는 마음을 오해하고 모독하기도 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잊지 않는 게 아니다. 잊히지 않아서 잊지 못한다. 가족은 더 그렇고, 친구도 그러하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기억하면서 추모하고, 추모하면서 일상을 무사히 지내는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추모'에 대한 지난 10년을 반추하며 추모와 일상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 관련기사 3면(진도항 '팽목기억관' 지키는 유가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1)])편집자 주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됐다. 3년이 지나고 세월호는 겨우 뭍으로 건져올려졌다. 그리고 지금은 목포신항에 있다.지난 8일 저녁 9시께, 목포신항에서 장희윤(26)씨를 만났다. 희윤씨는 봄이 되면 목포신항을 꼭 찾는다고 했다. 7년째 목포신항에 있는 세월호를 보기 위해서다. 이날 저녁에도 희윤씨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세월호 거치현장을 찾았다. 노란 리본이 둘러진 펜스 틈새로 세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