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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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K
[레트로 K] 헤매는 '수도권 교통문제' 걸어온 길 돌아보니
경기도와 인천이 풀지 못하는 난제 중의 하나가 바로 '교통'이다. 애초에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인천의 교통망이 구성되는 측면이 강한데다, 날이 갈수록 경기도와 인천의 거주 인구가 늘어나면서 교통수요가 증가하는데 근본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땜질식 처방만 계속되면서 이제는 '총체적 난국'이 돼버렸다.문제는 총체적 난국이 길어지면서 수도권 지역 간 갈등만 커지고 있다는 점. 그중에서도 가장 큰 갈등요인은 '지하철'. 워낙 정책 수요가 크니, 정치권에선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지하철 공약을 내세우지만 선거가 끝나면 모르쇠로 일관하기 일쑤다. 기대로 잔뜩 부풀었던 지역민들의 허탈감만 커졌고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서 이제는 그 화살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 지하철역을 내가 사는 동네로, 우리 집 앞에 끌어와야 한다며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데, '동족상잔'같은 비극이 옆동네, 같은 동네에서도 왕왕 벌어지는 게 경기도·인천의 현실이다.[[관련기사_1]]경인지역의 열차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 서울 근처에 있는 덕(?)에 아주 일찍부터 열차가 도입됐다. 일제강점기에 경인선을 필두로 안양·수원·오산·평택 등을 오가는 경부선이 오갔다. 의정부와 동두천, 연천 등을 오가는 경원선도 경기북부를 지나갔고, 구리·양평 등 경기 동부에는 중앙선을 타면 오갈 수 있었다. 안성선도 있었는데, 충청남도 천안에서 안성까지 운행하는 열차였다.수인선과 수여선의 협궤열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열차의 목적은 오로지 '일제의 수탈'이었다. 쌀, 소금을 비롯해 각종 자원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대량 수송이 필요한 열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열차들이 운행됐다.특히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수원과 여주를 오가는 수여선은 용인과 이천, 여주의 질 좋은 농산물을 수원으로 옮겨 일본으로 수송해갔고, 폐선된 후 다시 재개된 수인선의 경우 소래포구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수송하려는 목적으로 부설돼 일제강점기의 아픔으로 기억된다.열차 이후 경기도와 인천에 들어온 것은 전동차다. 주로 서울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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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레트로 K] 예약 따윈 없다! 귀성하려면 노숙도 불사했던 '추석 이야기'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엔데믹 후 처음 맞는 추석 인데다, 공휴일이 겹친 황금연휴가 되면서 기대감도 크다. 코로나19의 전례 없는 팬데믹을 겪은 지난 3년간 우리네 추석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그래도 추석은 여전히 가족의 정을 만끽하는 소중한 명절이기 때문이다.특히 길어진 추석연휴 덕에 고향을 찾는 가족들이 많아지면서 기차표를 미리 예매하려는 이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역 앞에 길게 줄 서서 기다리던 예전과 달리, 최근엔 100% 온라인 예매로 기차표를 살 수 있게 됐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 이미 '클릭전쟁'이 벌어졌고 아쉽게 예매에 실패한 이들은 KTX 홈페이지를 들어가 취소표 구하기에 발을 동동 굴렀다.심지어 중고거래 플랫폼엔 '웃돈'을 얹어 추석 기간 지방을 오가는 기차표를 판매한다는 글들이 올라오자 철도공사 등에서 단속 강화를 외치고 있다. 당연히 암표를 판매하거나 구입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추석을 앞두고 고향으로 가려는 분주한 움직임들은 다시 돌아온 우리의 명절을 실감케 한다. 1993년 9월 28일자 17면 (지면보기 클릭)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상저온 탓으로 아직 추수를 마치지 못한 농가가 많은 우리 마을에서도 추석을 맞이하는 설렘은 예년이나 다름없다. 어렵게 구한 햅쌀로 송편을 빚고, 동네추렴으로 큰 돼지도 두어마리 잡아 나누었다" 1993년 9월 28일자 경인일보는 시리즈물인 '낙향일기'를 통해 1990년대 추석을 맞은 수도권 농촌 지역의 풍경을 그렸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모두 서울로 보낸 윤씨네 집에서는 추석때만 되면 큰 잔치를 치르는 집처럼 부산스러워진다. 며칠 일찍 내려온 큰 딸이 장만해온 찬거리들과 밭에서 거두어 들인 채소와 나물, 생선과 고기 등을 10여명이 훨씬 넘는 대식구들의 식사와 차례준비로 떠들썩 하다. 큰 아들과 둘째가 추석 전날 내려오고 손자손녀들과 어울리다보면 정말 사람사는 집처럼 느껴진다. 이제 노인이 다 된 윤씨 내외에게는 일년에 두세번 모이는 이런 명절날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추석을 맞은 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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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레트로 K] 청소년의 방패인가 칼인가… 학생인권조례 '10년 기록'
2023년, 교사의 죽음으로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이 10년만에 다시 불붙었다. 아이들을 사랑했던 교사가 아이들을 위해 손수 꾸미고 가꾸었던 교실 안 작은 공간에서 생을 마감한 사건. 우리의 교육현장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 원인을 두고 당장 학생인권조례가 지목된 것이다. 경기도는 대한민국 학생인권조례의 시초가 된 곳이다. 그 출발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었을까. 그리고 조례가 정착되는 과정에 작금의 교육현장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을까. 10년을 거슬러 올라가, 경인일보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 살펴본다. 인권보호 vs 탁상행정 2010년 8월 16일자 22면 (지면보기 클릭) 2010년 8월 16일자 경인일보 기사에는 ‘내년 초중고 체벌금지. 인권보호 vs 탁상행정’가 실렸다. 요지는 학생 인권보호를 위해 경기도교육청이 2011년부터 도내 모든 학교에 학생체벌을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일선 학교에선 ‘학교 현장을 모르는 탁상행정 아니냐’는 비판여론이 일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를 도입한 당시 김상곤 교육감은 “군에서도 언어, 신체폭력이 사라지고 있는데 학교에서 교육이란 명분으로 체벌을 용인해선 안된다”며 “학생인권조례안을 도의회에 제출할 예정이고 내년부터 시행되도록 준비기간을 가질 것”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다. 도교육청은 체벌금지의 대체프로그램으로 ‘독후감, 봉사활동, 과제물 부과’ 등의 지덕벌 제도와 그린마일리지, 이른바 상벌점제 도입을 고려했다. 이전인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경기도를 강타했다. 학생인권조례의 초안에는 ‘모든 체벌과 집단괴롭힘 금지/과도한 휴대전화 규제금지/머리카락 길이 제한을 포함한 두발 및 복장 개성실현/수업시간외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대체과목 없이 특정 종교과목 수강 강요금지 등 종교의 자유/빈곤학생 등에 대한 교육복지권/학생자치활동 및 학칙 제개정 등 현안참여권/징계방어권’이 포함됐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일부학생들 중엔 조례가 이미 시행된 것으로 착각해 교사들의 생활지도에 반발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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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레트로 K] 침묵으로 숨어버린 악인들 '묻지마 범죄의 역사'
특별한 것 없는 여느 날이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고, 평소 걷던 길을 그냥 걸었으며, 아침에 널어둔 빨래를 걷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을 뿐인 '보통날'이었을 것이다.2005년 4월 19일 인천 남구 용현동 호프집에서 박씨는 지인과 술 한잔 기울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았지만 일면식도 없는 김씨가 뜬금없이 박씨의 뒤통수를 빈 맥주병으로 때리며 공격하기 전까지 박씨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2008년 5월 15일 19면 (지면보기 클릭)2008년 5월 10일 인천 중구 도원동 주택가를 걷던 스무살 여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양쪽 허벅지를 찔렸고 집 앞에서 가족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던 28살 여성도 같은 괴한에게 오른쪽 허벅지를 찔렸다. 무차별적으로 여성들의 다리를 찌른 후 범인은 달아나 버렸다.2013년 8월 18일 빨래를 걷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던 50대 여성은 이웃집에 살던 중학생이 수차례 찌른 칼에 쓰러졌다. 다행히 또 다른 이웃이 이를 보고 신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 사건들 모두 그간 경인일보에 보도된 '묻지마' 범죄 사건이다. 예를 든 사건이 3건 일뿐, 경인일보 기사 DB 검색을 통해 찾아낸 묻지마 범죄 사건은 훨씬 더 많다. 사회면 한 귀퉁이에 조용히 실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을 뿐, 지난 시간 쭉 누군가는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을 공격했다. 2012년 8월 22일 1면 (지면보기 클릭) 2012년 8월엔 기어코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은 하도 끔찍해서 이름도 붙었다. '강남진 묻지마 흉기 난동사건' 2012년 8월 21일 오전 0시55분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의 한 주점에 흉기를 들고 들어간 강남진은 여주인을 성폭행하려다 문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놀라 여주인의 목 부위를 찌른 후 달아났다. 도망가는 길 문 앞에서 마주친 손님의 복부를 찔렀고 오전 1시5분께 정자동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대문이 열려 있는 주택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때마침 거실에 있던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자 흉기로 가슴과 복부를 10여차례 찔렀고 비명소리에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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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K] 여름아 부탁해 '직장인의 휴가'… 90년대 피서는 어땠지?
직장인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때는 여름 휴가다. 요즘은 연차를 사용하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고 여름휴가라고 해도 꼭 여름 성수기에 가야 하는 압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 되면 슬그머니 생각나는 것이 휴가인 건 어쩔 도리가 없다.최근 경제가 악화되면서 여름 휴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또 다른 한편에선 엔데믹 이후 처음 맞는 여름인 만큼 해외로 '보복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아 인천공항이 북새통을 이룬다는 말도 들린다. 상반된 풍경에 씁쓸함을 자아내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 양극화는 더 커진다. 25년 전, 대한민국을 뒤흔든 경제위기 'IMF'의 여름 풍경도 비슷하다.휴가를 갔다 오면 자리가 없어질까봐 말도 꺼내기 어렵다1998년 7월 15일은 그 전년도인 1997년 국가부도, 이른바 IMF체제 속에 처음 맞이한 여름이었다. 이때의 직장인에게 여름휴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언감생심이었다.1998년 7월 15일자 (지면보기 클릭)당시 경인일보 기사의 제목은 'IMF시대 [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여름휴가 눈치껏 반납'. 제목 아래엔 작은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날개가 달린 책상이 둥둥 떠 날아가고 이를 바라보는 직장인이 "휴가 달라 하면 혹시 내 자리가.." 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등장한다. '연말까지 5백명을 줄이겠다고 발표한 S기업의 경우 올해부터 연월차 수당 없이 2주간의 휴가를 사용 해야 하지만 아직 누구도 여름휴가를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김모 과장은 "감원이 코앞에 닥쳤는데 무슨 배짱으로 1주일씩 휴가를 가겠다는 얘기를 꺼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민간기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 IMF로 인해 구조조정의 공포를 겪는 것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 통폐합, 민영화 등 공공분야 구조조정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등장하던 시기, 휴가를 권장해도 서로 눈치를 보며 휴가원을 제출하는 사람이 없다고 묘사했다.한 공무원은 인터뷰를 통해 "정원감축에 대한 명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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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K] 수도권 폭우의 역사 '그때 그 시절 물난리'
경인일보는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78년간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신문은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경기도와 인천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경인일보의 역사가 경기도와 인천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토록 소중한 신문은 지금도 '경인일보 자료실'에 차곡차곡 모아 정성껏 보존하며 경기도사, 향토사 등 각종 연구의 귀중한 토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아울러 보존하는데 그치지 않고 옛 신문을 디지털 자료로 복원하는 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이제 보물 같은 그 역사를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레트로 K'를 시작합니다. 경인일보와 독자가 함께 쌓아올린 모두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읽고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첫 걸음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주1990년 9월 12일자 (지면보기 클릭) 1990년 9월 9일부터 11일, 경기도, 인천 지역에 내린 비는 '폭우'였다. 1990년 9월12일자 경인일보는 '물바다가 된 경기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노아의 방주처럼 사흘 간 내린 비를 '대홍수' '사상최악의 폭우'라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당시 사흘간 의왕시에 내린 비의 양은 610㎜로, 전국 최고치를 기록했고 수원·성남·안산·군포·광주에도 500㎜이상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한강이 범람해 제방이 무너지고 그 물이 고양시(당시 고양군)을 덮치면서 원당·신도·일산 등 7개 읍면이 침수되고 1만1천689가구, 4만5천8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인명피해로도 이어졌다. 이 비로 경인지역은 9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이 역시도 아직 피해 상황이 제대로 복구되지 못해 정확한 집계가 되지 못했음을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984년 9월 3일자 (지면보기 클릭) 1990년 9월의 대홍수는 1984년 9월에 발생했던 홍수를 기억해냈다. 이날의 기사에서 '이번 집중호우는 그 양상이 1984년 9월의 홍수 때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미리 대비하지 못함을 탓했다. 1984년 9월의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