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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상철 칼럼] 근대적 한국인, 근대적 대한민국

    [윤상철 칼럼] 근대적 한국인, 근대적 대한민국 지면기사

    '계단주의'라는 경고문을 흔하게 발견한다. 영어식 표현인 'Watch your Step!'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계단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기에 의미의 맥락은 달라진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당신의 행동에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이를 계단으로 해석한다면 비탈길, 젖은길, 자갈길 모두에 각각의 주의표시를 해야할 판이다. 이와 달리 물품이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점에서 '선반 주의'가 아니라 '머리 주의'라고 씌어 있는 곳들도 종종 발견된다. 다른 예로 테니스 동호인들은 자신의 공이 네트에 걸리면 "오늘따라 네트까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우리식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독특한 표현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피동적이고 방어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자유로운 행위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은 없다. 자신의 행위를 구속하는 외적 요인을 강조하고 자신을 그 피해자 혹은 '을'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른바 '구조'를 개인의 행위를 제어하는 한계 혹은 개인 자유의 한계로 이해하고 인식한다. 반면 자유로운 개인과 주체적, 자발적 행위를 강조하는 미국인들은 '구조(structure)'라는 단어의 개념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개인들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의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어떠한 합의와 보상의 방식을 통하여 그 한계들을 돌파하는 방안을 찾는다. 한국인 피동적이고 방어적 세계관국가간 충돌, 외부 요인 먼저 인식 개인 혹은 국가간의 충돌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뭔가에 의한 좌절을 먼저 인식한다. 사람간의 정당한 이해갈등을 흑백논리 등을 통해 하나의 적대로 이해한다. 자본가들이 적이 되거나, 국가 혹은 국가의 현실적 구성원이 적이 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근대국가는 종종 자본가, 지배세력, 기득권을 보호하는 적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한 통일운동가이자 종교인은 '벽도 밀면 길이 된다'는 말로 분단의 장벽을 넘고자

  • [윤상철 칼럼] 이성과 과학 대신 감성과 선동이 넘쳐

    [윤상철 칼럼] 이성과 과학 대신 감성과 선동이 넘쳐 지면기사

    한국노총 금속노련의 간부가 철탑 고공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에 한국노총은 공권력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불참하고 탈퇴를 저울질한다. 민주노총 또한 올해 초 정권퇴진운동을 선언하였으니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노동계의 강도높은 반정부투쟁에 대해 정부는 엄정한 법집행을 예고하면서 노정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여당은 생산성 향상에는 무관심하면서 정치투쟁과 불법파업을 일삼는 특권세력에게 엄정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 야당은 노동계의 파업과 정치투쟁을 '노란 봉투법' 등으로 오히려 후원하고자 한다. 이 간부의 농성은 임금교섭과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요구하는 포스코 하청사 '포운'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이 400일을 넘겨 장기화된 데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천막농성이 왜 발생했는지, 그 해법이 있는지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노총간부의 농성이 불법적인지 아닌지는 따지지도 중시하지도 않는다. 모두 묻어버리고 사태 발생의 이유도, 문제 해결방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패싸움이 거대한 사회적 합의를 대체할 뿐이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가 임박하였고 여야를 넘어서 사회적 이슈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급식에 대해 방류시점부터 전수 방사능 검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소금사재기' 사태가 발생하며 소금거래액이 8배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다. 전교조는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서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일부 정당은 '후쿠시마 오염수 저지 TF'를 가동하고 있다. 문제발생이 임박했는데 해결책도 없이 뒷북만 치고 있다. 日 오염수 방류 임박 사회이슈 진화IAEA 중간보고서 공신력 폄하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중간보고서는 일본 도쿄전력이 오염수 샘플에서 방사성 핵종을 측정분석한 방법은 적절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곧이어 동일한 내용의 최종보고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고, 심지어 이 기관의 공신력을 폄하하기도 한다. 조사에 참여한 IAEA 산하연구소와 한국, 미국,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 5개국의 실험실의

  • [윤상철 칼럼] 민족과 통일을 잊으면

    [윤상철 칼럼] 민족과 통일을 잊으면 지면기사

    한반도를 중심으로 신냉전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동맹과 러시아, 중국, 북한의 국가사회주의 동맹이 맞서는 형국이다. 양 동맹 사이를 배회하던 한국이 한 축에 정착하면서 이 대립구도가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20세기 초반 영·일동맹이나 러·일간의 한반도 분할 시도 등에서 보이듯, 북방국가들과 해양국가들 간의 대립구도에서 한반도는 늘 중요한 메뉴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이 구도에 늘 긴박되어 있었고, 남북분단과 두 국가형성을 낳았다. 통일정부수립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46년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정부를 구성했고 뒤이어 남한은 1948년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였다. 두 개의 한국은 이 대립구도 하에서 각자 독자적인 국가형성의 길을 밟아갔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를 수용하고 북한은 인민민주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체제를 수용하여 그 안에 각각의 대중들을 포섭해갔다. 뒤섞인 이념과 대중들은 두 국가 체제를 용인하지 못했고 두 국가의 내부에서 혹은 두 국가 간에 내전을 벌였지만 이 대립구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남한은 한동안 자유민주주의적 해양국가동맹의 나라로 커 나가는 듯했다. 정치적 독재이든, 경제적 발전국가이든, 자유주의적 군부체제이든, 보수적 민주주의체제이든 지향하는 정치체제와 국가동맹은 일관되었고 상당한 수준으로 정돈된 대중들은 그 체제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러나 감성적 민족주의와 통일이 다시 대두되고 체제변경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반일종족주의와 반미제국주의가 떠오르면서 다시금 내전의 양상을 만들어 나갔다. 냉전적 대립구도의 완화와 사회주의블록의 와해, 그리고 글로벌 시장 통합이 그러한 공간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정치엘리트 이념으로 대중 지배뿐 그들을 위한 정치·행정에는 소홀 잠정적으로 국가는 국민을 위한 최선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그 국가는 국민에게 더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는 '상상의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한반도의 한 국가는 민족을

  • [윤상철 칼럼] 불완전한 국가체제, 불안정한 민주정체

    [윤상철 칼럼] 불완전한 국가체제, 불안정한 민주정체 지면기사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한 뒤에 열린 한일정상회담을 둘러싼 여진이 여전하다. 민족주의적 정서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아가 한-미-일과 중국-북한 사이의 진영간 충돌 모습도 보인다.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 지소미아 정상화 등 한일 양국간의 난제들을 풀기 위한 해법에 대해 여야간에 극단적인 이견을 보이는 배경에는 또 하나의 '그레이트 게임'이 도사리고 있는 듯 보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외교-안보적 사안에 대해서는 여야간에 이견을 내지 않으며, 서로 갈등하다가도 외교적 중대국면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북한과 중국, 미국과 일본 등에 관련된 입장들이 극단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상충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기자는 사실을 보도하고, 학자는 진실을 토로하고, 정치인은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데 반해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고, 학자들이 이념의 주구들로 전락하고, 정치인이 집단적 사익을 위해 국익을 외면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철저히 국가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국제관계에서 한국 내에는 여러 개의 국익, 국익으로 덧씌워진 사익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대한 이념·사회적 합의 전혀없어조그만 갈등에도 큰 충돌로 이어져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국가형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국익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그 외교적, 안보적 실행에 있어서도 극단적 이견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한국이 단일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거나 여전히 분화하고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조선에서 명과 청 사이에서 동요하거나 주전론과 주화론 사이에서 갈등했던 사실은 독자적인 국익이나 국가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바와 같다. 현재의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늘 불완전한 국가형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측면도 존재한다. 한국은 북한을 배제한 자기충족적인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을 통합하고자 적극적으로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로 인해 한국 내에서 북한에 대한 극단적인 이견은 동일한 국

  • [윤상철 칼럼]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사회적 고립

    [윤상철 칼럼]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사회적 고립 지면기사

    대한민국에서 '고독사'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항에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된다. 다른 나라에도 이러한 법률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고독은 중대한 사회문제임이 분명하다. 고독사는 노년의 경제적 빈곤이나 청년의 장기실업 등이 낳는 사회적 고립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산업사회와 도시화, 그리고 익명의 대중사회로 변모하는 현대사회에서 고독한 개인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은 이미 1950년에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에서 현대적 고독을 설파한 적이 있다. 그는 시대변화에 따른 미국인의 성격변화를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그리고 '외부지향형'의 3단계로 구분하고, 특히 외부지향형은 또래 집단이나 친구집단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으로 타자들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으로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회성으로 정의한 바 있다. 다른 맥락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의 역사적 변환을 공동체적 '기계적 연대'의 사회에서 개인적 '유기적 연대'의 사회로 설명한다. 현대의 개인들은 인식하기 어려운 관계의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갑작스런 사회변화 극복 어려웠고개인·자유주의 확산 분리 더 심화스스로 대응하는 가치관·삶 갖춰야 산업화된 도시의 한국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명절이면 부모와 고향을 찾아 밥상에서 주고받던 설민심이나 추석민심이 정치적 풍향을 예고해주는 시대는 이미 사라졌다. 나이 든 사람들은 부모와 고향을 잃었고, 젊은 사람들은 그보다는 같은 세대 간의 랜선과 미디어를 통한 횡적 커뮤니케이션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집산주의적 문화가 짙게 자리잡고 있었던 한국사회에서 그 공동체적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던 개인들에게 갑자기 불어 닥친 산업화와 도시화는 극복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여기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분리와 고

  • [윤상철 칼럼] 실용적 권위주의로의 회귀?

    [윤상철 칼럼] 실용적 권위주의로의 회귀? 지면기사

    화물연대의 총파업이 정부의 업무개시명령과 함께 16일 만에 종료되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후속 파업들의 여진은 남아있지만 대중들의 냉랭한 시선과 더불어민주당의 동요와 퇴각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노란봉투법' 개정이 불투명해지고 '불법적' 노조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압력이 현실화되면서 노동조합의 환경이 더 열악해질 수 있다. 화물연대의 요구는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와 적용품목 확대'였지만 관련 사안들이 두루 당사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경제가 처할 물류대란을 우려하는 여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민주화 이후의 역대 정부들은 다원민주주의 하에서 목소리가 큰 사회집단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미봉적 해결을 취했던 데 반해, 현 정부는 '공정과 상식' 그리고 법치의 이름으로 이에 전면 대치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지탱가능한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드러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실용적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양상이다. 과거에 '유신체제'와 '관료적 권위주의'를 만들어냈던 한국의 국가가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로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시도는 대통령탄핵으로 붕괴하였지만 문재인 정권의 정책적 난맥상은 '비효율적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체제, 정치·경제조직 동반한쪽 파국땐 전체 사회 붕괴 이어져국가공격에 포퓰리즘 지속 불가능 민주주의체제는 자원분배를 둘러싼 국가 성원 간의 전쟁을 선거로 대체하는 체제이다. 역사적인 민주화 이행의 과정을 보면 전제적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 물리적 폭력을 통한 지배를 포기하는 한편, 저항적 피지배세력 역시 대중동원을 통한 정치적 폭동을 자제하면서 선거를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교체를 수용하는 거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에 가능해진다. 이 과정을 통하여 사회경제적 자원의 정치적 분배 및 재분배가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민주화 이행의 초기에는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을 넓혀주기만 해도 충분했던

  • [윤상철 칼럼]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삶

    [윤상철 칼럼]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삶 지면기사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언론과 학계에서는 코로나 이후의 사회적 삶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가 코로나 특유의 비대면 대화를 통해 자못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근본적인 변화가 이미 발생했고 설사 코로나가 종결되더라도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견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자기 나름의 삶을 회복해갔다. 코로나 이전에 비해 위축되어 있었지만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는 물리적으로 뛰어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뛰어넘는 '소통'능력을 잊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소통을 넘어서 집단지성의 창의성 또한 꿈틀거리는 본능이었다. 마스크에 호의적이지 않고 자유를 중시하는 서구인들이 축구와 야구 경기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또 한 번의 유행을 경고하는 와중에서도 활기에 넘쳐 있어서 이미 코로나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하다.사회 마다의 역사와 문화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 적응하는 방식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코로나가 다소 약해지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 이전의 삶을 다시 드러냈다. 한국인들처럼 집단주의적 심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강제적(?) 격리를 규범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과거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심도있는 교류방식을 만들어낸 듯하다. 향후에 한국인들은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하고 즐기는, 그러나 그 규모는 친밀도 높은 소수를 취하는 변화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재유행 경고에도 서구인들은 활기결혼정보회사 '동질혼' 늘어나고고독한 시민은 가족과 소통 갈구 결혼정보회사를 통한 동질혼이 상당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20대 중후반에 이루어지는 결혼에는 스스로의 사회적 교류와 감성적 유대가 중요했다면, 30세를 훌쩍 넘겨 이루어지는 결혼은 긴 사회적 단절과 과도한 직업활동으로 인해 이들을 엮어주는 제3의 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잠깐이나마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적 교류의 장을 제한했었다는 편의적 설명이 억지스럽지만 부가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방식이 압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배경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혼정보회사

  • [윤상철 칼럼] 다규범사회, 무규범사회

    [윤상철 칼럼] 다규범사회, 무규범사회 지면기사

    보호종료아동(?)의 연이은 불행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이 사회문제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안이 아니다. 두 청년의 죽음으로 촉발되었으나 주기적으로 제기되었고 그 대안들이 재탕삼탕 거론되었으니 말이다. 또 한번 신문과 방송을 소비하다가 사라져 갈 것이다. 이들을 담당했던 구청 아동복지과 직원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경제적 추가 지원이 아니라 정신적 멘토라고 말한다. 아마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예산을 증액하는 수준에서 생색만 내고 덮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18세를 넘어선 사회적 성인인 이들에게 정신적 멘토링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이들을 아동취급하는 언론의 시선도 그렇거니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시절에나 필요할 듯한 수준의 멘토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마땅치 않다. 젊은 대학생들에게 부모나 교수들, 심지어 선배들조차 영향력있는 타자들이 아닌 이 사회에서 과연 멘토링이 가능할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 아무런 규범도 없는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른바 아노미현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이끄는 옮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상태이다. 사실은 극심한 사회변동으로 다양한 규범들이 충돌하면서 사람들이 어느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에밀 뒤르껭이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러한 아노미상태에서 자살, 범죄 등과 같은 사회적 일탈이 발생하고 그러한 일탈행위들이 전면화되면서 사회적 해체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로버트 K. 머튼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는 문화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간의 괴리로 인해 일탈이 발생하고 사회적 통합이 지연되는 상태를 아노미로 보았다 민주화운동 시절에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은 민주주의라는 문화적 목표를 위하여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적 수단을 거부하는 개혁의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승에 대한 예를 취하고 도로교통법을 준수함으로써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의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여당대표, 일탈적 행위 인정보다는'당내 권력갈등 피해' 동정

  • [윤상철 칼럼] 팬덤과 진영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몰락

    [윤상철 칼럼] 팬덤과 진영의 정치, 그리고 정치의 몰락 지면기사

    더불어민주당의 젊은 비대위원장은 '당을 위기에 빠뜨리는 강성 팬덤 대신 국민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가는 혁신'을 촉구했다. 아마도 정치인에 대한 팬덤은 정치를 비이성화, 극단화, 폭력화 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몰락시킬 수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팬덤 정치는 그 발생과 고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그 대상이 비도덕적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릇된 정책과 정치로써 국가와 국민의 파탄을 초래해도 팬덤의 정서는 가라앉지 않는다. 지지자에 대한 팬덤은 그 반대자에 대한 공격적 비난과 폭력적 증오로 나타나기 쉽다. 어느 쪽이나 비이성적 진영론으로 포장된다. 진영대립의 어느 쪽인가가 중시될 뿐 진영 자체의 정치적, 이성적 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더 심각한 결과는 한 진영의 팬덤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진영도 팬덤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팬덤과 팬덤의 대결은 정치와 정책을 극단화하고 대화와 토론의 민주주의를 협애화하고 타협과 조정의 정치를 타락시킨다. '팬덤 vs 팬덤'은 정치·정책 극단화대화·토론의 민주주의 협애화 시켜 새로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30% 초반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조만간 국정운영 동력은 동요할 거라고 예견된다. 보수와 중도 유권자들조차 등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야당 지지자들의 95% 이상이 '묻지마 반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그들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지지한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하기도 한다. 취임 초반의 정치적 허니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170석에 이르는 야당은 여당의 115석을 제외한 나머지를 아우르는 의회독재조차 가능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보다 훨씬 손쉽게 탄핵을 할 수 있다는 협박이 나돈다. 언론 역시 새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과거에도 우리 정치사에 유사한 상황은 존재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보수 정치세력과 보수 언론에 의해 조롱당하다시피 했다. 대통령 폄하가 국민스포츠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명박 대통

  • [윤상철 칼럼] 어떤 '자유'?

    [윤상철 칼럼] 어떤 '자유'? 지면기사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독특한 취임사가 관심을 끌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들은 대부분 각 영역별 공약들로 구성되어 있던 데 반해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대한민국의 체제와 국제사회의 연대를 이끌어갈 보편적 가치인 자유, 인권, 공정,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특히 무려 35번이나 사용된 '자유'는 이전 정부가 시도했던 헌법개정안에서 삭제되었던 표현으로 두 정부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취임사들은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데 사용했던 공약들을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확장하였다면,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념 및 가치의 측면에서 대선캠페인의 연장 선상에 있다.그렇다면 이 취임사의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법제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헌법 전문의 영문번역에 따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자유와 권리'(freedom and rights), '자유와 행복'(liberty and happiness) 등에서 '자유'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통령 취임사의 다중적인 자유는 대부분 'freedom'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쉬는 곳…'의 자유와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방치된다면 나와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의 자유는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 '자유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기회가 보장되어야…'는 표현은 더 근본적으로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을 언급하고 있다. 현 사회 '자유로운 시장' 기준에서자유가 답-자유만이 답 아니라는사람들간 격렬한 진영 갈등 만연 한국어로 똑같이 '자유'로 표현되지만 영어의 'Freedom'과 'Liberty'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Freedom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로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