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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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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균열은 폭발하고 통합은 멀어 지면기사
미국의 대학원에서 저명한 노교수의 사회학 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다. 사회균열이 정당 및 정치적 대표성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강의 중간중간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여학생은 젠더적 시각에서 이를 재해석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교수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지만, 교수와 여학생의 관점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들은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감시하듯이 지켜보고 있다고 더러 푸념하기도 한다. 최근 벌어진 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거친 공방도 우리 사회의 젠더갈등이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균열은 비단 젠더균열만이 아니다. 군부권위주의체제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민주 대 반민주의 사회균열은 거의 30여 년을 지배했고, 그러한 균열에 기초한 정치적 언어들이 여전히 사용된다. 기득권 적폐세력이니 신적폐세력이니 하는 언어들은 상대를 경제적, 정치적 독점세력으로 다중적으로 규정하지만 민주 대 반민주의 프레임을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면서 한국 현대정치사를 가로지르는 가장 구조적인 균열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지역균열이다. 이 지역균열은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산업화기의 불균형발전과 광주의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지역차별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발전단계가 부분적으로 제4차 산업혁명에 이르고, 경제가 저성장기조를 유지하면서 일자리와 주거공간을 둘러싼 세대균열 또한 엄청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취업난과 불투명한 미래전망을 내세우지만 나이든 세대들은 그들의 지위를 과도한 기득권으로 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양 세대를 만족시키려는 포퓰리즘적 대안은 현 정부 하에서 그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성장과 환경의 균형에 초점을 둔 생태주의적 균열 역시 그 뿌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탈원전을 둘러싼 갈등은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대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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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법의 지배, 정치보복과 적폐청산 지면기사
최근 적폐청산인가 정치보복인가를 둘러싸고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문재인 대통령간에, 그리고 여야간에 격렬한 공방이 일었다.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윤 후보는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 관여 안 하는 시스템에 따른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분노를 표명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여당은 정치보복을 예고했다고 비판했고, 야당은 원칙론적 표명에 명백한 선거개입이라고 반박하는 등 여야간에 확전이 거듭되는 듯싶더니 점차 잠잠해졌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1달 남기고 양 진영이 벌인 지지자 결속용 선거전략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거나 내로남불식 전략의 한계였다는 등으로 해석되고 말 일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저서에서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상호관용과 제도적 권력행사의 자제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또한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사회구성원들에게 규범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민주주의 자체가 심지어 적대 세력간에 평화적 공존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세력에 대한 상호관용이 부재할 경우에는 선거가 아닌 내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설사 내전에 이르지 않더라도 이른바 '적폐청산'과 같은 정치보복이나 극단적인 진영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정치적 상대를 민주주의 체제의 구성원이 아닌 배제되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가장 심각한 국가기구 파괴는'검찰개혁' 미명 그나마 남아있던법 수호세력 검찰마저 종속시킨 일 그렇다면, 정치세력이나 사회세력의 불법적인 행위조차 무조건 관용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를 바로잡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요소는 이른바 '법의 지배'이다. 법 자체가 경기의 규칙이고 그 법의 지배는 규칙을 어기는 구성원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제도적 자제력을 상실하고 정치적 이념이나 이익에 따라 최대주의적 법률해석에 의거해 권력을 남용하고, 그로 인해 다른 구성원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요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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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국가행정 부재의 정치 지면기사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가르친다. 국가와 정치는 그러한 계급투쟁의 내용이자 외양이라고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계급이 사라지고, 국가와 정치도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설사 그러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삶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분배를 해결하는 행정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구를 알 수 없고 적정한 분배를 가늠할 수 없고 사람들의 계획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질 행정은 고도의 계산과 방정식을 해결해야 하는 수학, 통계학과 이를 일선에서 전달해야 하는 엄청난 행정요원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과 정치는 이러한 복잡한 사회측정의 대체도구로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최근에 'K방역은 없다'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K방역은 과연 존재했나?'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의료방역정책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질문은 코로나19 방역정책이 누구 혹은 어떤 기구에 의해서 분석되고 입안되고 집행되었는가의 문제이다. 군복을 걸친 오바마 대통령이 전체 작전을 지휘하는 군지휘부의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다소 생경한 사진을 목도했던 우리 국민들은 K방역도 전문가들의 주도하에 과학적 근거에서 진행되었던가 묻고 있다. 의료전문가와 보건행정가들이 전면에 나서는 듯하지만, 최종 단계로 갈수록 정치적인 결정과 정치적 홍보가 주도하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정치 과잉의 나라에서 의료정책의 전문가들은 최종적으로 결정된 정치방역을 정당화하는 도구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를 거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발전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의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써 인간의 경제적 삶의 질을 높인다고 한다. 그 높은 생산력을 이루기 위해서 높은 노동생산성은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노동규범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고도의 관리감독체제하에서 가능할 뿐이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건너뛰기 위한 스타하노프운동이나 대약진운동, 천리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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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법적 정의와 정치적 올바름 지면기사
제20대 대통령선거 캠페인은 이미 시작되었고 다양한 정책들이 정책공약으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여당 후보가 '음식점 허가 총량제'를 언급했다. 외식업을 비롯한 자영업 전반의 과당경쟁이라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음식업자들에게 다소 매력적인 정책공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거론되듯이 한국의 자영업 비율이 OECD 최상위권인 이유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인도 대안도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자유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헌법적이고, 국가의 제도적 권력을 자제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발상처럼 보인다. 검찰총장 출신의 야당후보는 그의 총장 취임사에서 "형사법집행은 국민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국민의 권익침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공익적 필요에 합당한 수준으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대강을 말한 바 있다. 그는 국가권력이 어디까지 행사되고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민주주의체제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설사 헌법과 법률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도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은 제도적 자제력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공약은 민주주의체제를 일탈하게 된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대선 공약 언급 음식점허가 총량제反헌법적 전체주의 발상처럼 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치주의와 법률적 정의를 벗어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법적 정의야말로 매우 보수적이고 최소한적이어서 이를 넘어서는 정치적 정의 혹은 비전,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이 심지어 통치차원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있다. 앞서의 여당 후보는 청년 기후활동가들과의 만찬에서 "공동체의 합의된 룰을 일부 어기면서 이 주장을 세상에 알리는 것조차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혹은 "그런 식의 삶도 응원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가령 석탄발전소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스프레이칠을 해 벌금형을 선고받는다든가 대통령이 지나갈 때 도로에 뛰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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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근거없는 신뢰, 묻지마 지지 지면기사
현재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를 이미 치르고 있다. 각 정당들은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내부 경선의 과정에 있다. 정당의 당원이나 선거인단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정당 경선과정에 참여하면서 잠재적인 예비후보들을 둘러싸고 온갖 논란들을 일으키고 있다. 도덕적 검증의 와중에 다양한 이슈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법적 판단을 거쳐 규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꼬리 자르기를 하거나 나중으로 미뤄지기도 한다. 과거 수서사건이나 BBK사건, 그리고 현재의 대장동 사건 등처럼 뒤로 미뤄지거나 최소한으로 무마된다. 그 결과 유권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곤 한다. 대장동 사건에 대해서 여당 지지자의 80%는 '국민의힘' 게이트라 생각하고, 야당 지지자들의 80%는 이재명 게이트라고 생각한다. 사법적인 조사와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쉽게 그 향방을 알 수 있고 그와 관련된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도덕적 결함이나 법률적 일탈을 판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과 국민들은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이슈들은 정치적 지지의 제한된 기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무슨 판단 기준을 가지고 정치인이나 정당을 신뢰하고 지지하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국민도 경선 참여… 이미 대선 돌입대부분 이슈 사법적규명 가능 불구모호 처리·지연·꼬리 자르기 무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대한민국은 저신뢰국가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사법체계 등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의 수준도 OECD 최하위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사기, 무고, 위증 등의 범죄가 가까운 나라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지지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역사의 종말'의 저자로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나며 사회적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경제적 자산"이라고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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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언더독, 아웃사이더, 그리고 반민주주의 포퓰리스트 지면기사
우리나라의 대통령선거는 그야말로 총탄 없는 전쟁이다. 온갖 네거티브와 마타도어, 심지어 정치공작까지 공공연하게 횡행하고 있고,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치적, 정책적 논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어설픈 도덕논쟁이 선행한다. 뒤처져 있던 언더독 여당 후보가 부상하고, 제3지대 아웃사이더 후보가 제1야당의 선두주자로 나서면서 그 전쟁은 훨씬 복잡해졌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대선 이후의 상황을 더 우려하기도 한다.2016년 미국 국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 경험이 전혀 없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존중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독단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일부 미국인들이 우려한 대로 트럼프집권은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왔고 그 상흔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미국 헌법이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들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실제로 200년 넘게 견제와 균형의 매디슨 시스템은 지탱되었으며, 남북전쟁과 대공황, 냉전과 워터게이트도 이겨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정치체제가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과거 미국 사회에 견제와 균형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당 간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력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편, 이제는 배타적 진영논리와 뿌리깊은 양극화가 이러한 정치적 자원들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하였다. 트럼프 집권 美 민주주의 쇠퇴불러국내도 미래를 위한 대선 논쟁 뒷전국민들 내부 주류 재생산 거부 상황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떨까? 현 정권은 정권 내내 상대 정당을 적폐로 규정하고 그 청산과 개혁(?)을 고집했다. 그 결과 태극기부대와 이른바 대깨문이 주도하는 극단적인 진영갈등이 정치를 지배했다. 더불어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정책은 소득과 자산 모두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양대 정당은 그들 간의 선거경쟁결과와 무관하게 대중적 신뢰를 잃어갔다. 그 결과 여당은 비주류세력에서 자신들의 후보를 내야 했고, 야당은 외부에서 후보를 영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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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정명(正名), 제자리 찾기 지면기사
유가의 '정명(正名)'사상은 원래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즉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관점을 취한다면, 어떤 이름이나 직함이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 혹은 기능적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탈근대사회 혹은 탈진실사회로 오면 다분히 규범적이고 기능주의적이고 정당성 있는(legitimate) 이름은 사라지고 만다.과거에 우리 사회가 극심한 정치사회적 위기에 처하면, 권위주의 정권과 야권의 지도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사회원로들을 만나면서 그 해결의 출구를 찾았다. 그 원로들은 정치적 파벌을 초월한 품격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 그러한 원로들은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이제 그 원로들을 찾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뒷배경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원로로 삼는다. 그 원로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는 책략만 돋보인다. '6인회', '7인회', '원탁회의' 등은 실재하는지조차 모호하였다.산업화와 민주화는 경직되고 단편적인 사회를 훨씬 자유롭고 복잡하게 변화시킨다. 더 많은 집단들과 개인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만큼 문제도 다층적이고 그 해법도 섬세해야 한다. 그만큼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하고 그 전문가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역시 높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문가들이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의 병풍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나아가 스스로 포퓰리스트가 되고 있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정책적 합리성을 결여한 정치적 선택들에 대해서 전문가들도, 정부관료들도 더 이상 맞서지 않는다.사회운동은 어떠한가? 환경운동가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과학적 분석보다는 위기담론으로 대처하여 스스로의 성가를 높이려는 아마추어들인 경우가 많다. 지구가 소빙하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연구는 돌이켜보지 않고 지구온난화와 탄소중립만을 외친다. 저렴한 전기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기후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가 성폭력피해자와 여성인권유린 사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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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대통령을 뽑는다? 지면기사
이제 차기 대통령선거까지는 불과 9개월이 남았다. 집권을 꿈꾸는 대선 후보들이 여야를 통틀어 20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느 대통령 선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우리 사회의 운영, 진로, 대안, 나아가서 이른바 시대정신이나 그 실현의 방식이 생각보다 더 다양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단순히 정치적 권력만을 원할 수도 있고, 새롭게 고양된 국가와 국민을 만들기 위하여 헌신할 수도 있지만 상호 중첩되어 있는 상황에서 쉽게 판별할 수는 없다. 존경할 만한 자질도 무용할 수 있고, 권력의지만으로는 국민에게 무의미하기 마련이다.대선 후보들은 먼저 국민들을 대상으로 대중적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당내 경선을 통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속 정당의 국회의원 및 당협위원장 등의 지원을 바탕으로 당원들의 지지를 동원하는 한편 교수, 언론인, 전직 관료 등 전문가들을 폭넓게 동원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냄으로써 유권자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이 전문가들은 대부분 현재 정치권에 몸을 담고 있거나 장차 정치인 혹은 임명직 관료를 꿈꾸고 있는 정치적 계급들이다. 후보들은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권위의 기반을 확장하고자 한다.이어서 혹은 동시에 도덕적 검증과 정책적 검증이 진행된다. 각각 소속 정당과 국민 전체를 향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소 엇박자가 나기 마련이다. 당내 파벌의 소속과 충성도가 거론되기도 하고, 특정 정치적 사건에서의 대응 전력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민심과 당심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상황에서는 다소 복잡한 정치과정이 진행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관 청문회에서 거론되는 부패비리전력, 친인척비리, 범죄경력 및 품성 등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국민들에게 중시되는 도덕성 검증기준은 이미 기존의 인사청문회에서 현재의 여권에 의해 묵살되었던 탓에 대선후보에게도 제대로 적용될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정당 간 경쟁에 의해 후보의 경쟁력을 우선하다 보면 도덕성 기준은 형해화될지도 모른다. 여기에 국민들의 감성적인 성향과 진영논리가 횡행하다 보면 더욱 미미해질 수도 있다.더불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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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 이른바 "이준석 현상" 지면기사
구체적인 현실 인식하는 수준 높고마냥 수구 기존 보수들과 많이 달라사람들 촛불정부의 '민주개혁' 실망양대 정당 기대감 없는 세력 돼버려이제 국민들 변화할 사람에게 의지최근 야당인 국민의힘 당 대표선거를 둘러싸고 언론의 관심은 이준석 후보에 집중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우리 사회의 큰 변동의 징후로 지목하고 있다. 그가 국회의원 경험조차 없는 30대 젊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도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몰린다. 대통령 후보들의 동정이나 여론조사마저 한 정당의 단기 대선용 당 대표 선출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예비경선을 1위로 통과한 그가 본선에서도 그 기세를 더하여 고리타분한 보수정당의 수장으로 자리 잡는다면 국민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한 언론인은 '이준석 현상' 때문에 '그 당이 재미있어졌다'고 말한다. '수구꼴통'으로 불렸던 정당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고, 기대마저 드는 정당이 된 것이다. 이준석이라면 대통령과도 기념사진 이상의 뭔가를 만들어내고,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이 국민의힘 입당을 마냥 주저하지 않으리라 지적한다. 국회의원 한 번 당선된 적이 없어서 '구상유취'한 '정치적 미성년자'라고 하기엔 그만큼 모든 사안에 대해 일관성도 있고 구체적 경험적 대안도 있는 그리고 누구와도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을 많이 보지는 못했다. 너무 편파적이어서 공정한 대선후보 경선관리를 하지 못할 거라 우려하기도 하지만, 진중권이나 박근혜를 대하는 그의 자세에서 불공정성을 찾기 어렵다. 너무 젊어서 국회의원들이 대표로 모시기는 어려워 당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나이든 대표 밑에서도 별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던 직업국회의원들이 굳이 나서서 할 일도 없다. 가끔 그에게 '가볍고 싸가지 없는' 우파 유시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재능과 언변이 뛰어나 말하기를 즐겨할 뿐, 정말 '싸가지 없는' 토론 상대자를 사회자에게 떠넘기는 수준의 예의를 보여주곤 했다.정치인으로서 그에게 사람들은 무슨 기대를 할까? 그는 일단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고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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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20대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지면기사
'이대남' 심리적 기대와 생활수준미래전망 사이 상대적 박탈감 느껴왜 사회적 차별 받아야하는지 울분'고립무원' 상태 기회평등 약속하면그나마 기꺼이 마음 줄 수 있을 것'이대남'이 최근의 화두다. 그 구성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지만, 사람들은 지금의 '이대남'과 수년 전의 '이대남'을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한때 현 정권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세대들이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사실에 놀라움을 드러낸다. 과거의 '이대남'이 보여준 모습이 세대적 특질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현상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은 아직 토론 중이다.구조적으로 사회변동, 특히 계층 간 사회이동을 보는 사회학자의 눈에서 보면 '이대남'이 처한 현실은 예측 가능하고 필연적이기도 하다. 여야의 일시적 처방들이나 정책들도 이 구조적 사회변동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 구조적 사회변동이란 계층구조가 어느 정도 안정화된 이후의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계층이동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중류층 부모의 자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하층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류층 부모의 자식들 가운데 일부는 중류층으로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중산층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경제성장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어야 한다. 과거 586세대들이 경제성장과정에서 대거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듯이 인구의 증가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저성장의 국가에서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인구증가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를 중류층에 머무르게 하는 경제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지금의 20대는 50대 부모들 품안에서 자랐다. 권위주의시대에 태어나 민주화와 정보화, 세계화의 와중에서 살아왔던 부모들은 경제성장의 단꿀을 맛보면서 대부분 계층상승을 경험했던 세대들이다. 그들은 민주화의 짐을 지고 투쟁하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아파트와 차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집값 상승의 혜택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