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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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햄버거, 꺼지지 않는 불빛… 설렘 가득했던 ‘평택국제중앙시장’ [레트로K: 보통의 역사]
36년의 참혹했던 일제 치하, 광복을 가슴에 안고 희망과 혼란이 공존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벌어진 잔혹한 내전, 깊은 상흔만 남은 채 폐허가 된 한반도. 20세기가 시작된 후로 장장 반세기를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과 그럼에도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희망이 교차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죠. 감히 가늠해보건대 1950년대는 결국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랬던 시대에 평택국제중앙시장은 유일하게 눈과 귀와 코를 사로잡는 공간이었습니다. 1958년에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한 평택국제중앙시장은 1952년 오산공군기지가 송탄에 건설되면서 미군 주둔지가 형성됐고, 이들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들어서며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헐벗던 시절이었죠. 유일한 소비자였던 미군을 잡기 위해 미군부대 앞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고 송탄역 철로길을 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연히 소비 공간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시장이 형성되자, 점차 보통의 우리도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생필품을 구하기위해 오는 큰 상권이면서도, 사실 이때부터 평택국제중앙시장을 찾는 일은 놀거리 볼거리 하나 없던 흑백시절에 '컬러TV'를 구경하는 일과 같았다고 볼 수 있죠. 여기 오면 다 구할 수 있어요 오랫동안 국제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해온 정창무 평택국제중앙시장 상인회장의 기억도 그랬습니다. “미군기지가 생기면서 신장쇼핑몰이라고 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하나 둘 늘어난 거리가 생겼어요. 그땐 우리가 워낙 못 살때잖아요. 그런 경제규모로 비교해보면, 주한미군 씀씀이가 (우리한텐) 엄청나니까 정말 좋은 상권이었죠. 오죽하면 그때 이 시장을 부르는 별명이 '달러박스'였어요. 그렇게 물건들이 넘치고,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내국인을 상대로 한 중앙시장이 같이 생겨났구요. 그땐 아무것도 없을 때잖아요. 근데 여기에 오면 다 구할 수 있으니, 그때 규모가 엄청 컸어요.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다양성'의 상징… 원조 식당들 즐비 수제 햄버거·피자 1세대들 모였던 곳 미군 양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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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다라이 넘치던 사리포구, 추억은 협궤열차 타고 떠났나 [레트로K: 보통의 역사]
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 100여척 배 오가던 안산 마지막 포구 이방인에게 보금자리 되어준 곳 저는 '안산토박이'입니다. 안산에서 태어나 안산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서른해 동안 안산 곳곳을 누비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안산의 아들'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그 덕에 레트로K 안산편 취재에 참여했습니다. 안산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저도 불과 30년 전까지 안산에 어업을 하던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어촌보다는 '공업도시', '계획도시', '이주민의 도시', '세월호의 도시'가 제게 더 친숙하기 때문이죠.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한 공업도시 안산은 대표 관광지인 대부도가 있어 서해와 밀접한 바닷가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엔 대부도로 소풍을 많이 갔습니다. 방아머리 해수욕장에서 밀물 땐 물장구를, 썰물 땐 갯벌 체험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돼서는 광활한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구봉도 낙조 전망대도 여러 번 갔죠. 이들 대체로 안산 중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은 가야 하는 지역입니다. 그렇게 보니, 안산의 본질은 '어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성곶포·조구나루·원당포·별망포구·사리포구 등 조선 후기 때부터 번성했던 포구와 나루가 한둘이 아니죠. 외곽지역에서만 어업을 했던 건 아닙니다. 시 중심부에서 차로 10분,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사동 호수공원도 한때는 주말에 많으면 수천 명이 찾는 포구였습니다. 포구의 이름은 사리포구. 30년 전까지 이 공원에 100여척이 넘는 배들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사리포구는 1950년 형성돼 1999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87년 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배들이 경기만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제대로 된 어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50년 가까이 안산 시민과 경기도민의 일터이자 관광지였던 사리포구는 안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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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고유명사 안양1번가, 청춘 사진첩 닮은 그 길 [레트로K: 보통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은 '경부선'. 세로로 길쭉한 우리 국토의 중추선을 따라 서울 용산에서 부산까지 연결된 길입니다. 경부선은 산넘고 물건너 걷거나 말타고 서울서 부산까지 가던 구시대의 종식을 의미했죠. 경부선을 따라 수많은 '교통 요충지'들이 탄생했고 요충지마다 행정이 커지고 상업이 융성해졌으며, 산업도 발달했습니다. 안양이 '별의 순간'을 맞는 시점도 바로 이때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길, 그 첫번째 길목이 바로 '안양역'이기 때문입니다. 1905년 안양역은 경부선이 만들어지는 그 시기에 함께 건설됐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생전 본 적도 없는 기차라는 것을 타고 사람들이 내리고, 또 기차를 타기 위해 사람이 모였습니다. 사람이 모인다는 건 곧 도시의 발전과 직결됩니다. 근방에 있던 시장, 음식점, 여관 등 상업시설들이 안양역 인근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세를 몰아 경기 중부지역의 경제중심지라 불렸던 '군포장'이 안양역 인근으로 옮겨왔고 그게 '안양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행정도 마찬가지입니다. 1973년 안양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시흥군 안양읍에 속했는데 시흥군청이 서울 영등포에서 1949년 안양역 인근으로 이전하면서 안양은 명실상부 경기중부 행정의 중심지 역할까지 도맡게 됩니다. 군청에 교육청, 읍사무소, 경찰서 등 공공기관들이 역사 맞은편에 줄줄이 자리를 잡았고 주변으로 식당과 유흥주점, 상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한번쯤은 들어본 '안양1번가'의 시작입니다. 안양1번가는 지금도 건물 곳곳에 걸린 간판들에서 '잘 나갔던' 그 시절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1번가 콜라텍' '1번가 노래방' 등이 상점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안양을 비롯해 군포, 과천 등 경기 중부지역 주민들에게 안양1번가는 젊음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불립니다. 그래서 안양1번가에는 청춘들의 재밌는 추억이 많습니다. 1970년대 안양역에 지하철이 개통되며 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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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서 떼온 소시지, 이 추억 들어가야 부대찌개지 [레트로K: 보통의 역사]
“엄마아빠 손 잡고 오던 꼬마가 훌쩍 커서 아이들 손 잡고 찾아오는 때가 많아요. 맛있게 먹고 돌아서면서 '이 맛이 그리워 왔다'고 말할 때 뭉클하죠. 우리 의정부 사람들이 임신했을 때 가장 생각나는 맛이라고, 그래서 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된장찌개 같이 누구에게나 '생각나는 맛'이 있습니다. 그리움을 담은 음식들이 그러하죠. 그 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엄마아빠와 함께 먹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이 지상최대 목표였던 지난 날들 속에 우리 도시들이 옛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은 없겠죠.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은 유년의 그리움을 안고 '어른이(어른+어린이)'들이 아이와 함께 다시 찾아오는 추억입니다. 1983년부터 이 골목에서 부대찌개 식당을 운영해온 진미식당 김용만 사장님은 반가운 어른이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어렸을때 부모님이랑 와서 부대찌개 먹으면서 우리 가게랑 같이 성장한 손님들이 어린시절 맛을 찾아서 다시들 많이 와요.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가게를 하다보니까 좋은 게 그런거네요." 김용만 사장님의 말씀처럼 이 골목의 풍경은 변한 것이 크게 없습니다. 의정부를 잘 모르는 기자가 경인일보 사진 DB에 남아있는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 사진 하나 들고 도착했을 때, 단박에 “여기다" 하고 찾아낸 이유죠. 바로 아래, DB에 간직했던 사진은 90년대 초 촬영한 의정부 부대찌개골목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 부대찌개 골목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면 흘러간 세월만 느껴질 뿐, 정겨운 그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니, 옛 이름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식당들이 눈에 띕니다. 진미식당, 한양식당, 오뎅식당, 형네식당.. 진미식당 김용만 사장님은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아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26살때부터 어머니 도와서 식당을 했으니 오래됐죠. 저희가 시작할 땐 오뎅식당, 주민식당, 형네식당 이렇게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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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K
월급날, 데이트, 하굣길에… 우리에겐 ‘남문’이 있었다 [레트로K: 보통의 역사]
우리는 유독 평범하게 사는 일, 보통 사람으로 사는 일에 인색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특별한 장소를 가야 할 것 같으며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해야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의 SNS에 그 특별함을 게시하고, 남의 SNS에 게시된 특별함을 소비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죠. 물론 평범한 건, 지루할지도 모릅니다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들이 쌓여야 특별하다고 느낀 '하루'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평범함들이 모여 특별한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평범이 없다면, 특별도 없는 셈이죠. 세간을 뒤흔드는 사건과 경기도·인천의 특별한 이슈의 '과거'를 찾아 떠났던 레트로K가 시즌2 '보통의 역사'로 다시 시작합니다. 79년 경기도·인천 대표 정론지 경인일보의 기록 속에 숨겨 둔 '보통의 일상'을 공개합니다. 우리의 기록과 함께 경인일보 독자들이 간직해 온 보통의 추억도 공유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깃든 공간도 좋고 소중한 추억 속 만남의 장소도 좋습니다.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이 살았던 일상의 이야기도 환영합니다. 레트로K 기사의 댓글로 참여해도 좋고 경인일보 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 레트로K 게시물, 카카오톡 제보를 통해 여러분의 추억을 제보해 주세요. 자, 지금부터 '보통 사람' '평범한 일상' '소중한 추억'을 찾아 출발합니다. “어디서 볼까" “일단, 남문 중앙극장 앞에서 보자" 수원에 살았거나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도시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누군가 만나야 한다면 두말 않고 외치던 그곳.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대문이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팔달문을 중심으로 경기남부 최고의 상권이 형성됐던 수원 '남문상권' 한가운데, 중앙극장이 있었습니다. 수원 중앙극장은 수원에선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핫'했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1952년에 수원남문 상권 중심부에 가건물을 지어 시작한 수원 중앙극장은 1960년대 조금씩 위상이 높아졌고 1970년대, 8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2009년 폐업까지 수원 대표극장의 명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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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레트로K] 1월1일 새해연휴, 3일 쉬던 ‘신정’이 있었다
1949년 양력설 '신정'을 3일 명절 지정 음력설 '구정' 쇠던 관습 계속되자 1980년대 구정 되살리기 움직임 1989년 신정·구정 명칭 대신 '설날'로 고유 이름 되찾아 “신정에 어디 가세요?" “구정에 고향 내려가시나요?" 요즘 MZ세대는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설날의 낯선 이름. 양력설(1월1일)을 뜻하는 '신정'과 음력설을 뜻하는 '구정'은 모두 우리 민족 대표 명절인 '설날'을 말한다. 설날 자체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지닌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우리 전통으로는 음력으로 날을 세왔던 만큼 음력설을 새해로 보고 설 명절을 보내왔는데, 1949년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지며 양력 1월1일, 신정을 3일 설 연휴로 지정했다. 하지만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관습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부는 양력·음력 2번 모두 쉴 수 없다는 '이중과세' 원칙에 따라 양력설을 공식적인 설 명절 연휴로 지정한 대신 음력설인 구정은 공휴일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생일도 음력으로 지내는 한국인의 DNA에서 쉽사리 음력설인 구정 풍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신정 대신 구정을 진짜 설 명절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1983년 1월4일자 경인일보에는 '신정, 설 기분이 안난다'는 기사가 실렸다. 양력과 음력으로 설명절을 두번 세는 '이중과세'를 지양하자는 움직임에 따라 그간 양력설인 신정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됐다. 1984년 12월22일자에는 '구정 공휴일 지정키로' 기사가 실렸는데, 이때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설' 명절 연휴의 시작이다. 1985년 2월21일자 경인일보에는 “역시 설 기분이 난다"는 구정, 지금으로 치면 설 명절을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구정이라 불리다가 조상의날, 민속의날 등으로 바뀌던 설날은 1989년, 고유명칭인 지금의 '설날'로 제이름을 찾았다. 1989년 1월14일자 '구정 이틀 연휴, 설날 개칭' 기사에는 이같은 내용이 실렸다. 이렇게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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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레트로 K] 비행기도 숨죽이게 만든 ‘수능, 그 전설의 시작’
올해 수능은 유독 말이 많았다. 수능 100일께 남겨두고 별안간 정부가 킬러문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가 하면 사교육을 뿌리 뽑겠다며 학원가 세무조사를 실시했고 기어코 킬러문항을 출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기습적으로 정했다. 수능시험은 시험보기 전 몇달 바짝 준비하는 시험이 아니다. 짧게는 고등학교 길게는 초등학교부터 이어지는, 흡사 마라톤과 같은 긴 여정인데, 결승선에 다다를 때쯤 심판이 룰을 바꾸겠다며 정지휘슬을 분 셈이다. 정부의 기습적인 '수능 방향 틀기'에 입시만 보며 전력질주 하던 학생과 이를 뒷바라지 하던 학부모들이 황당을 넘어 분노하기까지 한 건 그런 이유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렇듯 수능날은 다가왔고 시험은 치러졌다. 킬러문항이 사라진 자리에 준킬러문항이라는 고난이도 문제들이 대거 등장했다. 변별력을 두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게 출제위원들의 항변이다. 이로 인해 '만점'이 딱 1명 뿐인 수능이라는 역대 기록을 세웠고 1,2명만 죽이는 킬러문항 대신 다수를 죽이는 준킬러로 '역시 입시는 사교육'이라는 공식만 더 선명하게 해준 꼴이 됐다. 이번주 레트로K는 대학입시시험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수능의 역사를 따라가봤다. 1993년은 학력고사 시대를 끝내고 처음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해다. 이때는 수능을 2회에 걸쳐 보았는데 여름에 1차, 겨울에 2차 시험을 본 뒤 우수한 성적을 기준으로 입시에 적용하는 시스템이었다. 1993년 8월 4일자 경인일보에는 '수능시험 시기·횟수 불합리' 기사가 실렸다. 첫 수능을 보름 앞두고 우려와 긴장의 목소리가 높은 학교 현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a href="http://www.kyeongin.com/paper/view/1993/08/20?pageNo=14" class="ix-editor-text-link" target="_blank"><b style="color: rgb(107, 173, 222);">1993년 8월 20일 지면보기 클릭</b></a> 이때 수험생과 교사,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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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레트로 K] ‘서울의 봄’ 영화가 끝나도 단죄 없는 현실은 계속된다
1997년 12월 22일 안양교도소에서 전두환씨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97.12.22 /경인아카이브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씨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는 날 안양교도소. 1997.12.22 /경인아카이브 오랜만에 극장가가 한국영화 한편으로 훈풍이 불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입소문을 타면서다. SF, 액션 등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아닌 ‘시대극’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건 “총이 있다면 쏴서 죽이고 싶었다”는 살벌한(?) 관람평이 말해주듯 치가 떨릴 만큼 사실적인 배우들의 연기가 엄청난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12·12사태가 일어난 그날 밤을 다뤘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우리 사회를 후퇴시킨 현대사의 비극이다. 12·12사태를 시발점으로, 5·18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 죄없는 이들이 독재에 스러져 간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각색된 영화지만, 영화 역시 때론 역사를 기록하는 수단이다. 1979년 12월 12일 이후 40년도 넘게 흐른 지금 이 시점에,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을 지금의 청춘들까지 영화에 열광하는 데는 어쩌면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역사가 현재에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불안 탓일 지 모른다. 이번주 레트로K는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온 독자를 위해, 단죄의 역사를 찾아봤다. 민주당은 부천시민운동장에서 1212군사반란자 재판회부를 위한 국민궐기대회를 열었다. 1994.12.3 /경인아카이브 1995년 12월 1일자 ‘전·노씨 신군부 군사반란 입증 주력’ 기사는 검찰이 1995년 11월 30일 12·12 재수사를 발표한 배경과 향후 전망을 설명했다. 1995년 11월 30일자 경인일보 지면보기 클릭 검찰의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가 착수됐다. 검찰의 이번 재수사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쿠데타의 주역들에 대해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뜻이며 5·18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검찰이 정치권보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앞서 12·12 관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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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레트로 K] 김포에서 태어난 검단면, 인천에서 검단동이 된 사연
국민의힘이 쏘아올린 '김포시 서울 편입' 논란이 난리다. 해묵은 논쟁인 줄 알았던 경기남·북도 분리 논의가 민선8기 들어 본격화됐고, 경기북부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전보다 훨씬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와중이었다.예나 지금이나 행정구역 개편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산업화시대가 종식된 후 보수·진보 할 것 없이 국토 개발에 대해선 '균형'에 방점 찍은 지 오래됐고, 최근엔 지방소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정책적 숙의 과정 없이 일단 '던지고 본' 측면이 강해 '서울시민'이란 타이틀을 미끼 삼아 수도권 민심을 잡으려는 총선카드로 오해받기 딱 좋다.일단 논란 자체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경기도 뿐 아니라 인천까지 들썩이며 수도권을 헤집고 있다. 모두 가능한 이야기일까, 과연 그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궁금이 커졌다.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열심히 옛 기사를 뒤져보았다. 그리고 김포군 검단면에서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이 된 사연을 찾았다. 서울시 김포구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검단동의 과거와 현재는 엿 볼 수 있으니.(1994년 9월 8일 지면보기 클릭) 1994년 9월 8일자 경인일보 '인천광역화 경기·인천 입장' 기사에는 경기와 인천의 행정구역 개편 문제가 보도됐다. 이때의 시작은 인천 '광역화'를 통해 수도권 서부벨트를 개발하고 '21세기 환태평양 경제권 중핵도시'로 성장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무부는 김포군, 옹진군, 강화군, 시흥시 전역을 포함하는 안과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양촌리 일부를 포함하는 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편입을 반대하는 경기도와 찬성하는 인천시를 사이에 두고 내무부의 고민이 깊다는 게 기사의 골자다. 여기서 눈 여겨볼 건 이 대목이다.'한편 경인지역 정치권에서는 양 지자체간의 영역분쟁에 일체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추이를 관망한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이 개입할 경우 국가경쟁력 강화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행정구역 개편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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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레트로 K] 인현동 화재참사 24주년… 증명이 필요한 슬픔은 없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던가/그럴리 없다고/그럴수 없다고/우리들은 모두 머리 저어 '말도 안돼'만 외쳤던 그날!…너희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무너지고 무너지는 세상에/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단다''이제 세상은 몇 번이나 더 무너져야만 할까/벌써 그리운 이름 된 너희들을 생각하며…용서하렴 무기력한 선생님을/진실로 너희를 사랑하지 못한 어른들을/너희에게 더 많은 사랑 주지 못했다고 우시는 부모님을/너희와 그 고통의 순간 함께 하지 못한 우리들을/너희를 보호하지 못한 현실을' - 희생학생들이 다녔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국어교사의 추도시1999년 화재로 57명 숨진 사건대부분 인천지역 중·고등학생市 '술 마신 학생 잘못' 책임 돌려"폐쇄명령처분… 책임 없다" 주장 2022년 이태원 참사… 반복된 비극피해자 향한 시선은 비정하기만1999년 10월 30일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의 한 호프집에서 불이 났다. 유난히 날이 좋았던 10월의 마지막 주말, 인천지역 상당수 고등학교들의 가을축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친구들과 재밌게 놀 생각에 신나고 들뜬 마음으로 가득했을 주말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이 사고로 57명이 목숨을 잃었고 7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인천지역의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이었다.11월 1일자 경인일보에는 참담했던 그날의 현장이 생생히 담겼다. "불길은 놀라운 속도로 혀를 낼름거리며 지하계단을 타고 호프집의 유일한 출입구 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독한 유독성 가스를 내뿜으면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이들은 죽음이 다가오는 줄 몰랐다. 그러다 누군가 "불이야, 대피, 대피"라고 외치면서 실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호프집 내부는 완전 전소되지 않고 출입구 쪽을 중심으로 불에 그을린 상태로 연기만 자욱해 사상자들은 대부분 유독가스에 질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자들은 출입구 반대쪽 주방에서 50여명, 테이블 사이 3개 통로에서 20여명씩 무더기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바닥에는 운동화와 가방, 깨진 맥주잔, 휴대폰 등이 널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