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페셜

  • "빼앗긴 자치권 회복, 지자체 중심 테이블 확대를"
    기자들의 기억법

    "빼앗긴 자치권 회복, 지자체 중심 테이블 확대를" 지면기사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下)] 시민 힘으로 되찾아야 구로차량기지 이전 반대운동 등민의 모으는 움직임 꾸준히 존재"국가중심 개발 대신 '민의' 청취"경기도 위성도시들이 국가 주도의 개발에 시달려온 것은 어쩔 수 없는 과거다. 하지만 경기도 지자체와 시민들의 지방자치 정신이 성숙해짐에 따라 이제 도시개발의 자치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 또한 국가가 인정해야 하는 '시대적 흐름'이다.이러한 흐름에 따라 자치권을 빼앗긴 공간에 대해 해당 지자체를 중심으로, 민주적인 토론과 열린 협의가 가능한 협상 테이블이 확대돼야 한다는 게 시민들과 경기도 지자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시민들 스스로 되찾는 '도시개발 자치권', 시민 사회 움직임 주목 도시개발 자치권을 되찾기 위해 시민들 스스로 민의를 모으는 움직임은 경기도 내 곳곳에서 꾸준히 있어왔다. 광명 밤일마을에서 주도했던 '구로차량기지 이전 반대운동'이 대표적이다.박철희 구로차량기지이전백지화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위원장은 밤일마을에서 나고 자란 광명토박이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지켜봐 온 광명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서울에서 소화하기 힘든 각종 혐오시설이 떠밀려오는 경우를 종종 접했다.박 위원장은 차량기지가 들어서면 도덕산의 허리가 끊길 것을 우려했다. 도덕산은 하안동, 철산동, 광명동을 가로지르는 광명의 주요한 생태 통로다. 그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주민총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고 박 위원장과 마을 주민 4명이 주축이 돼 국토교통부 전략환경영향평가서를 분석했다.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시민들의 입장을 모은 의견서를 국토부, 기재부, KDI 등에 수차례 전달했다.이 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커지자 광명시도 나서기 시작했다. 광명시도 2019년 5월 시민과 힘을 합해 차량기지 이전을 막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해 12월 광명시가 함께하는 민관정 공대위로 전환됐고 집회와 현수막을 비롯해 시민들의 손편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지 이전 반대의 목소리를 표현했다.그 결과 2020년 9월, 정부는

  • 국가가 방치한 '보람채'… 보람 찬 가치 발견한 주민들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下)]
    기자들의 기억법

    국가가 방치한 '보람채'… 보람 찬 가치 발견한 주민들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下)] 지면기사

    시민 힘으로 되찾아야 광명 낡은 아파트 "역사 이어야"반년간 1만2천명 서명운동 성과민심 확인… 市 부지개발 적극적 나고 자라야지만, 애향심이 발휘되는 건 아니다. 직장 때문에, 결혼을 해서, 혹은 집값에 밀려, 다양한 이유로 이주했고 정착했지만 그 삶이 이 곳에서 계속된다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게 애향심이다. 경기도의 '위성도시'들이 도시를 개발하는 데 갖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바탕에 시민들이 있었고, 애향심이 원동력이 돼 국가주도 개발의 불합리성에 맞섰다. 이렇게 시민주도로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움직임들이 최근들어 늘고 있다. 김성동씨는 매일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보람채 아파트가 궁금했다. 광명 한복판에, 낡은 아파트가 너른 부지를 차지한 채 방치된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알아보니, 국가소유의 땅이라 광명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란 걸 알게 됐다. 고심 끝에 그는 기획재정부로부터 보람채 아파트를 돌려받자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일일이 시민들을 만나 보람채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제는 광명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그의 용기있는 움직임에 하나둘 시민들이 움직였다. 그렇게 광명 하안2동과 4동 시민 16명을 주축으로 한 시민모임이 탄생했다. 시민모임 회원들은 밤낮없이 광명시내를 돌며 서명운동에 매진했다.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에게 다가가 보람채의 역사를 설명하고 설득했다. 함께 마음을 모은 끝에 6개월만에 광명시민 1만2천여명이 서명하는 성과를 이뤘고 지난해 11월 기획재정부에 전달됐다. 이렇게 시민 간의 연대는 정부에 빼앗긴 지자체의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동력이 됐다.김씨는 "우리가 큰 힘이 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광명 한복판에 건물이 흉물로 남아 있는데, 시에서 개발을 하고 싶어도 광명 땅이 아니다 보니 건드리지도 못하는 게 안타까웠고 그런 마음들이 모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 힘입어 광명시도 현재 보람채 아파트 부지의 개발과 관련해 적극적으로 뛰

  • 애향심이 움직였다, 멈춘 지역의 시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3)]
    기자들의 기억법

    애향심이 움직였다, 멈춘 지역의 시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3)]

    나고 자라야지만, 애향심이 발휘되는 건 아니다. 직장을 다니기 위해, 결혼으로 인해, 혹은 집값에 밀려, 다양한 이유로 이주해왔고 정착했지만 그 삶이 이 곳에서 계속된다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게 애향심이다. 경기도의 '위성도시'들이 도시를 개발하는 데 갖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바탕에 시민들이 있었고, 애향심이 원동력이 돼 국가주도 개발의 불합리성에 맞섰다. 그리고 이렇게 시민주도로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움직임들이 최근들어 늘고 있다. 김성동씨는 매일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보람채 아파트가 궁금했다. 광명 한복판에, 낡은 아파트가 너른 부지를 차지한 채 방치된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알아보니, 국가소유의 땅이라 광명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란 걸 알게됐다. 고심 끝에 그는 기획재정부로부터 보람채 아파트를 돌려받자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오가는 길에 수풀가득한 채 방치된 보람채 아파트를 보면서도 무엇인지 잘 몰랐던 광명시민들에게 일일이 보람채를 설명했다. 길 건너 옛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광명에 지은 임대아파트이면서 이후엔 서울 관내 직장에 재직하는 저소득 여성노동자를 위해 운영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이제는 보람채가 광명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용기있는 움직임에 하나 둘 시민들이 움직였다. 그렇게 광명 하안2동과 4동 시민 16명을 주축으로 한 시민모임이 탄생했다. 시민모임 회원들은 밤낮없이 광명시내를 돌며 서명운동에 매진했다.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에게 다가가 보람채의 역사를 설명하고 설득했다. 함께 마음을 모은 끝에 6개월만에 광명시민 1만2천여명이 서명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렇게 시민 간의 연대는 정부에 빼앗긴 지자체의 '개발 자치권'을 되찾는 동력이 됐다. 성동씨를 비롯한 시민모임은 지난해 11월 보람채 소유주체인 기획재정부에 서명부를 전달했다. 성동씨는 “우리가 큰 힘이 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광명 한복판에 건물이 흉물로 남아 있는데, 시에서 개발을 하고 싶

  • '도시개발 족쇄' 걸린 위성도시의 비애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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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개발 족쇄' 걸린 위성도시의 비애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中)] 지면기사

    양주 치매안심마을·고양 기피시설 광명시 겪은 문제 유사 사례 다수주민 목소리·직접 대안 제시 희망적수도 서울의 위성도시라는 임무를 부여받아 성장한 경기도 내 여러 시·군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광명시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다. 광명시는 서울 개봉지구의 일부로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도시로 형성됐고, 철산리는 서울 구로공단을 배후로 하는 택지지구로 개발됐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서울의 위성도시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 목동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을 대거 수용한 역사는 성남시의 역사와 닮아있다. 성남시도 서울시가 설치한 '광주대단지 사업소'를 통해 철거민 집단 이주로 조성됐다.광명 보람채 아파트와 같이 서울시에 부족한 인프라를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가 도시개발에 족쇄가 걸린 사례는 양주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양주시 내에 위치한 '용산구민 휴양소'를 두고 서울시 용산구가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과 동떨어진 개발계획을 세우면서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2000년대 후반 서울시 각 구에서 구민 휴양소를 만드는 게 유행처럼 번졌는데, 용산구는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에 '용산구민 휴양소'를 조성했다. 서울 동작구가 안면도에, 서초구가 강원도 횡성, 용산구가 제주도에 자치구민을 위한 휴양소를 마련했던 것도 이즈음이다.용산구민 휴양소가 들어선 기산리는 마장호수와 기산저수지 등이 인근이어서 양주시의 주요 관광자원으로 꼽힌다. 2017년 2월 용산구민 휴양소는 폐업했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용산구는 방치된 시설을 활용해 치매안심마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양주시민들은 요양시설이 난립해 도시환경을 저해할 것을 우려했다.결국 양주시는 2019년 치매마을 건립 반대 주민 의견을 모아 용산구에 통보했고, 이듬해에는 양주시의회가 치매마을 건립 철회 촉구 의견을 낸 바 있다.용산구는 양주시를 상대로 건축협의 부동의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의정부지법은 2022년 8월23일 양주시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법원은 지자체법과 건축법에 근거해 건축물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허가권자,

  • 서울 역할·기능 대신한 건물들, 흉물 전락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中)]
    기자들의 기억법

    서울 역할·기능 대신한 건물들, 흉물 전락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中)] 지면기사

    세월 지나 철거도 어려운 상황 배후지역으로 한때는 호황 누려 광명 중심에 지은 보람채아파트독자적으로 활용 못하고 공동화 한때 경기도 주요 시·군들은 위성도시로 불렸다. 성남시는 인구를 분산할 목적으로, 과천시는 중앙행정수요를 나눠지면서 서울의 '위성도시' 기능을 했다.지금은 경기도 시·군을 위성도시로 일컫는 사람은 없지만, 서울과 그 주변을 부속으로 나눠 사고하는 경향은 여전히 지방자치의 발목을 잡고 있다.광명 보람채 아파트는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산업화를 위한 도시개발과 안정적인 노동력 수급이라는 대의를 위해 광명시가 개발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명시 역시 갈대가 무성한 습지에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로 성장하는데 산업화 시기 주어진 그 역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한때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술 한 잔을 기울일 곳으로 광명시를 찾았으니 서울 배후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늘어난 인구 역시 서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이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본격화되고, 자신이 사는 지역을 더 나은 환경으로 가꾸려는 시민의식이 성숙하면서 서울 배후지역이라는 인식은 수도권 지자체가 공통으로 겪는 비애가 됐다.보람채 아파트는 광명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역에 방치됐고, 광명시가 독자적으로 활용방안을 세울 수 없는 도심 속 공동(空洞)으로 남았다.안전한 광명을 위한 시민모임 김성동 대표는 "40년이 넘도록 시민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고, 도심 흉물로 전락해 시민들의 걱정거리가 됐다"며 "하루빨리 철거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되돌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박승원 광명시장도 "앞으로 기업들이 많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는 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공간으로 (보람채 아파트)부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도시개발 족쇄' 걸린 위성도시의 비애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中)]) /김성주·공지영·이시은기자 ksj@kyeongin.com구로공단 여공 기숙사 광명

  • 위성도시, 내가 아닌 내 이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2)]
    기자들의 기억법

    위성도시, 내가 아닌 내 이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2)]

    한때 경기도 주요 시군들은 위성도시로 기능했다. 성남시는 서울시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할 목적으로, 과천시는 중앙행정수요를 과천정부종합청사가 나눠 짊어지며 서울, 중앙을 중심으로 한 '위성도시'로 불렸다. 이밖에도 화장장이나 쓰레기소각장 등 일부 기능을 나눠 가진 시군도 적지 않다. 이제 경기도 시군을 위성도시로 일컫는 사람은 없어도 서울, 중앙과 그 주변을 부속으로 나눠 사고하는 경향은 여전히 남아 성숙한 주민의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제 3기 신도시를 지정할 당시에도 주민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보람채 아파트는 이 같은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물과도 같다. 보람채 아파트는 광명시의 도시개발사를 담고 있다. 서울의 부속도시로 구상된 광명시가 독립해 성장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태생적 비애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광명시의 시 승격을 담은 1981년 7월 법률 제3425호가 나오기 전까지 광명시는 시흥군에 속했다. 앞서 1963년 9월 발표된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건설부 고시 제547호)에는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가 편입돼 주택지구로 개발됐다. 이 과정에서 서울 목동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을 대거 수용한 역사는 성남시의 역사와 닮아있다. 성남시도 서울시가 설치한 '광주대단지 사업소'를 통해 철거민 집단 이주로 조성됐다. 지자체 간 협의가 필요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중앙의 필요로 도시개발계획이 세워질 때여서 행정구역은 큰 의미가 없었다. 현재 철산동 일대인 광명리가 서울 개봉지구의 일부로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철산리는 서울 구로공단을 배후로 하는 택지지구로의 개발이 계획됐다가 시 승격 이후 완성됐고, 서울시 통화권(지역 번호 02)에 편입됐기 때문에 광명시는 하나의 독립된 지자체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행정구역만 분리됐을 뿐 사실상 서울시에 종속된 부속도시와 같은 모양새였다. 광명시 퇴직 공무원 A씨는 “1981년 광명시청이 개청해 여러 지역에서 공무원들이 광명시로 전입했는데, 한동안 곧 서울시로 편입될 것이라는

  • 섬처럼 덩그러니… 경기도 아닌 경기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1)]
    기자들의 기억법

    섬처럼 덩그러니… 경기도 아닌 경기도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1)]

    꽤 오랫동안 우리 마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을과는 선이 그어져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공간들이 경기도 곳곳에 있다. 국유지이거나 서울시가 소유한 땅들인데, 이들의 기능은 오로지 국가, 서울시민을 위한 것들이다. 워낙 오랫동안 그래와서 '그러려니'하며 살았다. 그렇게 서울 변방, '위성도시'로 태어난 숙명을 안고 참아왔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도시와 시민은 성장했다. 이제 경기도의 도시들은 독립된 자치권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확립했고 주도적인 도시개발이 가능해졌다. 경기도 도시들이 빼앗긴 '도시개발의 자치권'은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일당 3천300원, 월급 9만9천원.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밤 10시는 넘어야 끝이 나는 근무. 40여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오정애씨는 참 고되고 힘들었어서, 이보다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산다고 했다. 정애씨는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과 모습을 바꾼,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86년, 스무살을 막 넘긴 즈음부터 8년여간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보냈던 그는 우리가 한번쯤 들어 본, 이른바 '여공'으로 불린 청년노동자다. 그리고 가진 것 없던 그 시절,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쥐어준 것이 3년간 살았던 광명 보람채 아파트였다. “구로공단에는 주로 전자회사, 봉제공장들이 많아서 거의 여공들이 일을 했어요. 가리봉역에 내리면 우르르 쏟아지는 여자애들에 떠밀려 공장까지 쭉 내려가는 풍경이 있었죠.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가리봉 시장 쪽에 가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아주 좁은 방들이 늘어서있는데, 화장실도 없고 몸 하나 뉘일 공간 정도.. 화장실은 보통 1층 공용화장실 하나로 같이 쓰는데, 그렇게 열악한데도 월세 아끼겠다고 2~3명씩 같이 살았어요." 이런 집들을 '닭장집'이라고 했고 또 가장 열악했다. 회사·구로공단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들도 간혹 있었지만, 수준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정애씨도 한때 공단 기숙사에 기거한 적이 있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방에 8~10명까지도 살았어

  • 청년의 꿈 머물렀던 '보람채' 이제는 방치된 '도심 속 섬'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上)]
    기자들의 기억법

    청년의 꿈 머물렀던 '보람채' 이제는 방치된 '도심 속 섬'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上)] 지면기사

    2015년 폐쇄 이후 고시원 등 이주 서울시, 기재부 잠실 땅과 맞교환"광명에 있지만 단절된 공간" 기억2018년 원점 회귀 후 또 6년 흘러 보람채 아파트의 정식 이름은 '서울시립미혼여성근로자임대아파트'. 이름처럼 보람채 아파트는 애초의 취지가 구로공단 여성근로자에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1986년 근로청소년 임대아파트로 총 4개동이 1차 준공돼 총 200세대가 입주하며 약 1천명 정도가 살았다. 보람채가 아니라면, 당시의 주거환경이 워낙 열악했기에 수요는 계속 증가했고 1988년 5개동이 추가 준공되며 총 450세대로 늘어났다.■ 세월이 흘러도, 가진 것 없던 청년의 기반정애씨가 살았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후반까지는 정애씨와 같은 공장 노동자들이 대다수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며 디지털산업단지로 구로공단이 변화했고 입주할 수 있는 대상도 넓어졌다. 서울시내 업체 소속, 28세 이하 미혼 근로여성이면 누구나 입주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은 월급 100만원 초반대의, 가난한 여성청년들이 대상이었다.실제로 보람채를 위탁운영했던 한국청소년연맹이 발간한 '서울특별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 35년사'를 보면 2000년대 초반 입주자들 학력은 약 56%, 절반이상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청년이었고 초대졸 이상이 41%로 그 뒤를 이었다. 처음 입주했던 1980년 후반, 중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 공장에 취직한 여공들보다 학력 수준은 올라갔지만 학력별 임금 격차가 심했던 2000년대 초반을 감안하면 임금수준은 여전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21세기에서도 보람채는 가난한 청년노동자들의 '기반'이었다. 당시 임대보증금은 13평형이 23만7천220원, 월 임대료는 7천900원으로 매우 저렴했다. 이때에도 1세대에 4명이 함께 살며 난방·수도·전기·가스사용료와 같은 관리비는 함께 납부하며 부담을 줄였다.가난한 여성청년노동자에게 든든한 바탕이 돼줬던 보람채는 2015년 폐쇄됐다. 딱 서른해 동안, 제 몸 하나 뉘일 곳 없던 낯선 서울 땅에 엄마 품 같은 따

  • 15평 '대궐'서 쏘아 올린 작은 희망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上)]
    기자들의 기억법

    15평 '대궐'서 쏘아 올린 작은 희망 [자물쇠 걸린 땅 '도시 개발 자치권'·(上)] 지면기사

    꿈, 추억 그리고 '보람채 아파트' 40년전 구로공단 청년노동자들닭장집·기숙사 등 좁은 곳 생활철산리에 생긴 아파트 들어가자한 집 5~6명 지내도 '여유' 생겨보금자리 마련 기반 돼 준 공간 꽤 오랫동안 우리 마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을과는 선이 그어져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공간들이 경기도 곳곳에 있다. 국유지이거나 서울시가 소유한 땅들인데, 이들의 기능은 오로지 국가, 서울시민을 위한 것들이다. 워낙 오랫동안 그래와서 그러려니하며 살았다. 그렇게 서울 변방, '위성도시'로 태어난 숙명을 안고 참아왔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도시와 시민은 성장했다. 이제 경기도의 도시들은 독립된 자치권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확립했고 주도적인 도시개발이 가능해졌다. 경기도 도시들이 빼앗긴 '도시개발의 자치권'은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 편집자 주일당 3천300원, 월급 9만9천원.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밤 10시는 넘어야 끝이 나는 근무. 40여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오정애씨는 참 고되고 힘들었어서, 이보다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산다고 했다. 정애씨는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과 모습을 바꾼, '구로공단'에서 일했다. 1986년, 스무살을 막 넘긴 즈음부터 8년여간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보냈던 그는 우리가 한번쯤 들어 본, 이른바 '여공'으로 불린 청년노동자다. 그리고 가진 것 없던 그 시절,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쥐어준 것이 3년간 살았던 광명 보람채 아파트였다. "구로공단에는 주로 전자회사, 봉제공장들이 많아서 거의 여공들이 일을 했어요.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가리봉 시장 쪽에 가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아주 좁은 방들이 늘어서 있는데, 화장실도 없고 몸 하나 뉘일 공간 정도…. 화장실은 보통 1층 공용화장실 하나로 같이 쓰는데, 그렇게 열악한데도 월세 아끼겠다고 2~3명씩 같이 살았어요." 이런 집들을 '닭장집'이라고 했고 또 가장 열악했다. 회사·구로공단에서 제공하는 기숙사들도 간혹 있었지만, 수

  • 대화포비아, 중도 모르는 중도… 그럼에도 직면할 이유 [20대 무당(無黨)을 찾아서(2·끝)]
    기자들의 기억법

    대화포비아, 중도 모르는 중도… 그럼에도 직면할 이유 [20대 무당(無黨)을 찾아서(2·끝)]

    이럴바엔, 차라리 입을 다물겠다. “왜 토론하지 않을까?" “왜 무당층이 됐지?" 라는 질문에 지난 1편에서 우리가 만난 20대 청년들은 '침묵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결론내렸다. 전략적 침묵을 선택한 이유는 꽤 납득할 만했다. 온라인이 더 편한 20대에게도 작금의 온라인 공론장은 불편하다. 불편한 배경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극단적으로 나뉜 소수의 부류가 공론장을 지배하면서 이들의 짠 프레임에 의해서만 이야기가 오고간다는 것이다. 논리적 타당성을 따지거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고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만 모든 이야기가 오가니 '대화를 하는 게 피곤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여기에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성역'이 생겨버린 현상도 심각하다고 했다. 젠더, 진영, 계층 등 사회구성원을 분류하는 모든 지점에서 '절대 지켜야 하는' 선이 그어지고, 다원화된 사회에 이분법식 접근만 강화되면서 차라리 입 다물고 사는 게 속 편한 세상이 된 셈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더 큰 문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온라인 현상이 오프라인의 공포로 전염되며 일종의 '대화포비아'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끼리만, 상대의 생각을 잘 아는 이들끼리만 정치사회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리고 이런 현상과 '20대 무당(無黨)'층이 늘어나는데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고도 말했다. 취재팀은 당사자 격인 20대의 '자가진단'을 듣고 이 현상을 둘러싼 '공론장'을 더 확대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토론주의자' 이준석 개혁신당 국회의원에게 20대 무당층을 물었다. 또 '프로보커터' '급진의 20대' 등 20대와 정치를 연구하는 김내훈 작가를 만나 현상을 어떻게 진단하는지 물어보았다. 아래는 이들의 인터뷰를 주요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나무위키에 기대 설명 넘기고 급발진… 20대도 문제 있다 대학생들 토론하는 모습 보면 나무위키의 장점란과 단점란이 싸우는 듯. 1차 소스 모르는 '밀키트 토론' 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