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5]광주시 실촌읍 하열미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5]광주시 실촌읍 하열미리 지면기사

    [경인일보=]하열미 마을은 이천 방향으로 3번 국도를 따라가다 실촌읍사무소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98번 지방도로 좌우측에 들어선 조그만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중·하 3개의 동으로 구분됐고, 1914년에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열미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960년대들어 현재의 상·하열미리로 정착하게 됐다. 하열미는 능성구씨(綾城具氏), 상열미는 동래정씨, 중열미는 진주강씨가 많이 살지만 집성촌 성격은 많이 약해졌다. 마을 유래와 관련해 위쪽 능성구씨 묘역의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혈(燕尾穴)'로 부르다가 열미리(悅美里)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곳은 구씨만이 모여 사는 자연마을이었다가, 최근들어 공장과 연립주택 등 현대적인 시설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마을 규모는 최근 유입인구가 크게 늘어 약 200호 정도이다. 특히 마을 위쪽에 성남~장호원을 잇는 곤지암4터널이 통과할 예정으로 마을 안과 밖에서 큰 변화가 진행 중이다.# 공동체 문화를 지켜온 사람들이 마을의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능성구씨라는 단일 집성촌으로서 공동체문화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을 입구의 보호수는 500년 넘은 수령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신앙을 담은 당산목이자 주민의 쉼터로서 구심점 역할을 해 왔고, 건너편 산은 '거무래산'이라 하는데 산에 올라가 땔나무조차 베지 않을 정도로 신령스럽게 여겼다고 한다.마을 주민의 품성으로 구성서(65)씨는 '구무악(具無惡)'이라 하여 "구씨 사람 중에 악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예전부터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자식교육에는 유달리 신경을 썼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은 종중을 이끄는 종손 구교운(65)씨가 조상을 현양하는 사업과 함께 장학회 운영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마을의 공동체문화는 구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구자학(65) 현 이장과 1972년에 혼인한 여류시인 허정분(58)씨는 마을 구석구석을 안내하면서 지명유래, 문화유적, 인물, 마을신앙 등을 설명해 줄 정도로 마을문화에 정통한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4]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4]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지면기사

    [경인일보=]#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곳1973년 시로 승격한 후 쉼 없이 발전을 거듭한 부천시. 그 내부적으로는 아파트 숲을 이룬 신시가지가 있는가 하면, 노후 주택이 밀집해 뉴타운사업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그리고 이 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곳이 그 북쪽 끝에 있다. 바로 '대장동'이다. 대장동은 옛날에 큰 장군이 난 곳이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큰 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곳은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어느 드라마 혹은 어느 그림 속 장면에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어느 방향에서든 대장동으로 가는 길은 좁다. 김포공항 서남쪽 오쇠삼거리 방향에서 들어가는 길이 그나마 넓은데, 중앙선조차 없는 좁은 길을 따라서 마을 안으로 가다 보면 마주 오는 차량을 피해서 비켜서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 길은 적잖이 운치가 있다. 도로변에 늘어서서 기다란 가지를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이 오가는 이를 반기며 1970년대 지방 중소도시의 변두리 어느 동네를 향해 추억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그렇게 버들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학교가 보인다. 덕산초등학교 대장분교다. 서울시와의 경계에, 인구 87만여 명의 도시이자 이렇다 할 농어촌지대도 없는 부천시에 분교라니 조금은 의외다. 2층 건물인 본관에 부속건물이 딸린 대장분교는 여느 시골마을의 작은 학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현재 이 학교에는 5학급에 14명의 학생이 다니고 3명의 교직원이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 개교한 지 50여 년이 되어 가는 이 학교는 1997년에 덕산초등학교에 병합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이었으나 진학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줄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도 교직원 1인당 학생 수가 5명이 채 못 되고 각종 교육시설도 잘 갖추었으니 어느 사립학교 부럽지 않을 만하다고 한다.# 대장들을 황금들판으로 바꾸어 준 '대부둑'대장분교를 지나 마을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세느 강변'이라고 이름 붙은 한 음식점 간판이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3]김포시 양촌면 구래리, 오라니 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3]김포시 양촌면 구래리, 오라니 마을 지면기사

    # 아파트 숲으로 포위될 구래리 마을[경인일보=]김포시는 지금 혁명(?)을 치르고 있다. 김포시 신도시(약 1천만㎡, 5만4천709세대)와 택지개발로 들어설 아파트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포신도시 중심지로 예정되어 있는 양촌면 구래리 마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한해가 넘었다. 구래리 마을 뿐만 아니라 구래리와 맞닿아 있는 마산리와 양촌면 소재지 양곡리도 아파트가 들어서는 택지개발이 진행 중이다. 더욱이 면소재지인 양곡리는 뉴타운 개발지역으로 지정돼 양촌면은 그야말로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하는 가히 혁명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양촌면은 김포반도의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독특하다. 바로 바다와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한강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촌면을 통과하지 않고는 강화나 김포의 다른 지역인 대곶면, 통진읍, 하성면, 월곶면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양촌면 구래리 마을은 지리적으로 김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난 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검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구래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포에서 제일 높은 '수리너머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은 많이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버스가 올라가다 중턱에서 엔진이 꺼져 승객들이 밀고 가야할 만큼 고개가 높았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수리너머 고개에 산적이 있어 20명 이상이 모여야 안심하고 넘을 수 있다하여 '스무너미 고개'라고 했다고 한다.구래리 마을은 남동쪽으로는 가현산과 필봉산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지 위에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가현산을 마주보고 있는 지형적 위치 때문에 많은 등산객과 약수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마을 한복판을 쉴 새 없이 지나쳤었다. 마을이 있던 그 자리는 현재 집들이 모두 사라져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모래 사막처럼 돼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황토 벌판에 흙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만이 먼지를 날리며 다니고 있다.구래리 마을이 법정리로 가장 먼저 등재된 문헌은 광무 3년(1899)에 나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2]여주군 점동면 도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2]여주군 점동면 도리 지면기사

    # 도리(道里)의 유래[경인일보=]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과 안성에서 흘러온 청미천이 만나는 곳에 아담한 마을 도리가 있다. 도리는 되래, 새말, 사장골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마을 이름의 유래로는 마을 바깥 쪽 도호동(桃湖洞) 사람들이 옮겨와 살았다 하여 도래(桃來)라 부르다가 지금의 큰 마을인 되래가 되었다는설과 여러 차례의 전란 속에서도 화를 모면했던 경험에서 환란이 되돌아 나간 지역이란 뜻으로 되래라고 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터전임을 말해주듯 강변 경작지에서는 지금도 선사시대 주거지와 유물들이 발견되곤 한다. 마을 동쪽의 신선바위와 서쪽의 아홉사리 길은 한양과 충주를 이어주던 중요 길목이자 절경을 간직한 곳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흥 민씨들의 집성촌인 도리는 5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느티나무 가지마다 매미소리 요란하고 푸른 들판 가득 벼와 감자, 옥수수가 영글며 맑은 강에선 피라미와 매자가 뛰노는 푸근한 곳이다.# 아홉 굽이 아홉사리 길 도리와 흔암리를 잇는 강변길이 아홉사리다. 좁고 험하며 아홉 굽이를 구불구불 돌아나가게 되어있어 아홉사리란다. 아홉사리 고개에는 매년 9월 9일 아홉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서려있다. 아홉사리 고개를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한다. 과객들도 사라지고 주막도 없어진지 오래지만, 배 삯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걸어서 한양으로 오가던 길,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이 길을 400여년 전에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록에 남아있다. 때는 조선 광해군 시절. 서얼을 차별하는 국법에 불만을 품은 이른바 여강칠우(驪江七友)가 여주 땅에 살고 있었다. 태종이 만든 서얼금고법은 양반의 첩자손은 영원히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비록 명종 때 양첩의 자손에 한하여 증손자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자격을 주었고 인조 때 천첩의 자손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문무과 응시기회를 주었으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1]이천시 마장면 관3리 상송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1]이천시 마장면 관3리 상송마을 지면기사

    # 한적한 전원마을이 군부대 이전지역으로이천시 마장면 북쪽 외곽에 우뚝 솟아 신둔면, 광주시 도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양각산(羊角山)은 뾰족하게 생긴 두 개의 봉우리가 양의 뿔 같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양각산 남쪽 산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관3리 상송마을은 조선 성종때 이름난 학자인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를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늘 조용하기만 했던 관리 일대가 2007년 9월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군부대 이전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됐다.문제의 발단은 이해 4월 정부가 신도시 개발계획으로 이 지역에 있는 특전사를 비롯한 군부대들을 이천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일어났다. 후보지로 지목된 신둔·백사면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천시민들의 맹렬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결국 이천시는 지역개발에 따른 인센티브를 조건으로 군부대 이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이전지역이 마장면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번에는 마장면 주민들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대부분이 농사꾼인 주민들에게 '데모'란 TV를 통해서나 구경했던 먼 남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들 머리띠를 두르고 피켓을 흔들면서 난생 처음으로 데모란 것을 하게 됐다. 조상 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온 고향이 아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이, 이들을 낯설기만한 시위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우여곡절 끝에 주민들은 지역발전이란 명분을 내건 시의 방침을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고, 이렇게 특전사의 마장면 이전계획이 확정되었다. 군부대가 들어서게 될 지역은 마장면 관리와 회억리를 중심으로 양촌리, 장암리 일부를 포함한 330만㎡이다. 그중에도 관2리의 압실과 장자울, 회억리의 회다리는 머지않아서 지도 속에서 사라질 판이다.그런데 올해 초, 국방부가 군부대 이전 백지화를 발표해서 또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이 때는 이미 토지보상이 거의 마무리되어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백지화 발표는 얼마 안가 다시 취소됐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이렇게 줏대 없이 갈팡질팡하는 정책 때문에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0]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60]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 지면기사

    # 학처럼 고고한 마을, 꼿꼿한 기개도 서려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앞에는 구봉산(465m), 서편에는 쌍령산(491m), 북쪽에는 문수산(403m)이 에워싼 마을이어서 산골 같은 느낌도 든다. 걸어다니던 시절에는 이 마을이 길목이었다. 즉, 구봉산과 문수산이 한남정맥에 들고 용인에서 안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문수산과 쌍령산 사이로 났으므로 길손들이 쉬어가던 마을이었다. 그 산길을 최근 터널로 뚫었는데 자동차로 달리면 2분도 채 못가는 1.5㎞지만 산을 넘던 시절에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던 고갯길이었다. 와우정사에서 원삼면으로 넘어가는 '곱든고개'에 견주어 이 고개는 '작은곱든고개'라고 했다. 한남정맥의 정기를 타고 났는지 이 마을에서는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가 짧은 인생을 마친 오달제(1609~1637)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지금도 집 자리며, 강당 자리, 연못 자리 등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자리에는 다른 집들이 들어섰는데 강당 자리 부근에는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들이 지금도 여러모로 쓰여서 예사롭지 않음을 드러낸다. 오달제 선생이 누구인가? 25세 때 장원급제하고 28세인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맞서 조선의 기개를 당당하게 드러낸 삼학사(윤집, 홍익한, 오달제) 중 한 분이다. 그는 청나라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孤臣義正心無?)/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聖主恩深死亦輕)/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最是此生無限慟)/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北堂虛負倚門情)'라는 시를 지어 당시 사람들을 꽤나 울린다. 또 부인인 의령 남씨에게 보낸 시에서도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 금슬은 구구 비둘기/ 만난 지 2년 만에 만리 밖 헤어져서/ 백 년 살자던 약속 무너졌네/ 길이 멀어 편지도 보낼 수 없고/ 산이 높아 꿈길도 더디구나/ 내 목숨 나도 모르는 일임이여/ 뱃속의 아이 잘 길러주오' 그 유복자는 딸로 태어나 가계는 양자로 이어갔다. 시신도 청나라에서 수습하지 못하게 해 모현면에 있는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9]광주시 장지동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9]광주시 장지동 지면기사

    광주시 장지동은 광남동에 속한 6개 법정동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앞가지(前枝里)·뒷가지(後枝里)·담안(墻內洞)·절골(寺洞) 등 4개의 구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크게 개편되면서 마을 이름에서 '장'과 '지'를 따서 장지리(墻枝里)로 통합,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지리적으로는 직리천과 중대천이 나란히 흐르다가 경안천과 만나는 3번 국도와 43·45번 국도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며, 뒤로는 남한산에서 뻗어온 낮은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싼 배산임수의 남향이다. 그간의 개발때문에 좌청룡·우백호의 날개가 없어진지 오래고, 동 전체를 가로지르는 '성남~장호원' 국도 공사를 비롯해 마을은 '언제나 공사중'이다.도농복합지역이 그렇듯이 이 마을 역시 역사 향기 가득한 전통문화의 흔적과 산업화·도시화의 행보가 공존해 있다. 다양한 세거성씨의 사례, 마을신앙 및 놀이, 다양한 문화유적, 도로망과 신축 건물로 대변되는 개발 바람 등 과거와 현재, 보존과 개혁이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급하게 충돌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숨어 있는 전통문화산업화·도시화가 대세라 하더라도 마을 안쪽을 살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경안중학교 뒤쪽에는 구석기 유적을, 담안에는 고인돌과 동래정씨 사당과 묘역을, 태봉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태를 묻은 곳 등 다양한 문화유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마을의 기원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세거성씨로는, 절골에 고령박씨를 비롯하여 한산이씨·함양박씨·전주이씨, 앞가지에 광주안씨·밀양박씨·의령남씨·이천서씨, 뒷가지와 담안에 동래정씨 등이 꼽힌다. 특히 동의 중심 마을인 앞가지와 뒷가지는 '형제 마을'로, 두 마을 주민들은 마을 동산 밤나무에 올라 밤을 따거나 다양한 놀이문화를 공유해왔다. 음력 정월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함께 지내는 전통을 이어왔으나, 뒷산 허리가 개발로 절단된 후 그 명맥이 끊겼다. # 충신 정뇌경과 불천지위장지동 곳곳에는 조선시대의 왕족에서 문신까지 많은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뒷가지에 묘가 있는 정홍익(鄭弘翼·1571~1626)은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8]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8]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지면기사

    원미동은 1980년대 수도권 소시민의 삶을 다룬 소설 '원미동사람들'의 무대로 알려진 곳이다. 1973년 7월 1일 부천시 승격과 더불어 원미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이곳은 '조종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토박이들은 '조마루'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조마루사거리, 조마루삼거리, 조마루 경로당, 그리고 꽤 알려진 감자탕집 간판이 옛 이름을 알려준다. 두 번째로 원미동을 찾은 날, 필자는 조마루의 유래를 알고 싶어 제일 먼저 조마루 경로당에 찾아가 보았다. 담소와 화투놀이로 바쁜 노인들 사이에서 토박이를 찾지는 못했으나 19살에 이곳 전주 이씨 집안에 시집 와서 63년을 살았다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10원짜리 화투놀이에 몰두하던 할머니는 이것저것 알고픈 필자의 바람과는 달리, 긴 물음에 "조씨가 원래 조마루, 여기를 개통을 했대"라는 짧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토박이들은 마을 뒷산 즉, 원미산을 '멀미'라고 불렀다는 말을 덧붙였다.이곳이 왜 조마루라는 이름을 얻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할머니의 말처럼 조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조마루로 불렸다거나, 마루란 꼭대기, 으뜸, 높은 것 등을 뜻하므로 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렸다는 해석이 전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멀 원(遠)' '아름다울 미(美)'를 사용한 것은 '멀미' 혹은 '멀뫼'라는 우리말 이름을 일제강점기에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 되었다고 전한다.# 개구리주차장, 사과나무골목, 시장통경로당에서 나와 왕복 2차로에 불과한 원미로를 걷다 보니 좁은 도로 양편이 한쪽 바퀴를 인도에 걸친 채 주차된 차량들로 가득했다. 소위 개구리주차로 불리는 주차 방식이다. 이러한 주차 방식이 없었다면, 주차전쟁이 이곳 주민들의 중요한 일상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나는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개구리주차를 허용했고, 그 이름마저 '개구리주차장'으로 부른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개구리주차장을 지나서 원미산 방향의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낮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7]여주군 강천면 도전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7]여주군 강천면 도전리 지면기사

    # 도전리(道全里)의 형성도전리의 제일 위쪽인 됫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도전리 전경은 좌측으로 당산(唐山), 우측으로 보금산(寶金山)·마감산(馬甘山)이 아늑히 동네를 감싸고 있어 마치 어머니의 품을 연상하기에 알맞게 펼쳐져 있다. 삶이 힘들어질 때 어머니를, 고향을 그리워하듯 달려가 안기고 싶은 곳이기에 예부터 이곳은 피난처요, 기도처로 알려졌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1기가 존재하고 있어 이곳에 사람들이 터잡고 산 것이 꽤 오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도전리에서 발견된 20여기의 도자기 가마터와 그 가마터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들은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이르는 시기의 것들로, 600년 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살면서 도자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던 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골골마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수녀회 피정의 집, 스승예수의 제자수녀회 피정의 집, 성 바오로딸 수녀회 분원, 장애인들의 쉼터인 라파엘의 집, 여러 개의 천주교 신자 집단 거주지 등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영혼의 피난처, 구원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도전리의 지명은 도성촌(道城村)·탑전동(塔前洞)·원심이(遠深)·전거론리(全巨論里)로 불리는 4개의 자연부락 중 도성촌과 전거론리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 여주 천주교회의 초기 전래지 도전리를 소개하면서 천주교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1801년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한창이던 때, 조정의 관리로 있던 정도마가 동생과 처 그리고 두 아들 등의 식솔을 거느리고 양평 양동(楊東)을 거쳐 원주 구제(지정면 판대리)에 정착했다.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던 정도마 형제는 어느 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천주교도를 밀고하는 밀정을 만나 부득이 형제가 헤어지게 됐다. 그해 여름에 나졸들이 정도마를 잡으러 나타나자 정도마는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집에 남아있던 그의 처 임가타리나는 "내가 천주학을 하니 나를 잡아가라"며 남편 대신 붙잡혀 순교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정도마는 작은 아들만을 데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원심이로 숨어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6]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6]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지면기사

    # 대명포구가 그리운 김포사람들'대명항'은 김포시의 유일한 항구이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특색을 갖고 있다.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한우물(한정·寒井) 마을과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내진을 잇는 나루로서 대명나루·대명포구·전막진·점막·점막개나루라고도 불렀다.땅모양이 대망(이무기) 모양처럼 곶이 되었다고 해서 대망고지·대명꾸지·대명곶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해안선 제방 축조로 인해 땅 모양은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지지자료의 포구편에 보면 '전막(全幕)이 대명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 마을의 이름으로는 처음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전막(全幕)은 점막(店幕)이다. 즉 예전에 음식을 팔고 나그네를 유숙시키는 집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식사하는 곳을 '한바'라 하고 이것이 '한정(寒停)'이 되었다가 '한정(寒井)'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김포사람들에게는 '대명항'이라는 말보다는 '대명포구'라는 말을 더욱 정스럽게 느끼고 있다.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심적으로는 왜 '포구'를 '항'으로 바꾸게 되었는지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다. 예전 대명나루는 강화도 초지리와 인천을 왕래하던 도선이 있어서 여객의 왕래가 빈번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명항에 여객선이 없다. 뿐만 아니라 바닷가를 들어가려면 군인 초소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등록된 어부만 출입할 수 있다. 김포지역 3면(김포는 3면이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가 철조망으로 담이 쳐져있는 이유가 북한의 간첩이 뭍으로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철책선으로 둘러싸여 있은지 40여년의 세월이 강과 바다의 문화를 간직해왔던 김포사람들의 일상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다. # 새롭게 관광지로 태어난 대명항5~6월이 되면 대명항에는 사람들이 떠들썩하다. 어촌계가 그 어느 때보다 바빠지는 시기로 '밴댕이철'이기 때문이다. 작은 어항이지만 고기잡는 배가 80여척이 되고 어부는 300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운영하는 어판정은 43개나 된다. 물때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에 5t의 밴댕이 어획고를 올린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5]의왕시 학의동 백운호수 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5]의왕시 학의동 백운호수 마을 지면기사

    # 산에 둘러싸인 호수마을-그림 속을 거닐다광교산이 한남정맥의 수많은 산 가운데 가장 큰 산으로 등극되는데에는 배후의 산들이 든든하게 받쳐주기 때문이다. 광교산(582m)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여 마루금을 밟으면 곧 백운산(564m)이요, 또 한 시간 남짓 동북쪽으로 가면 바라산(428m)이다. 또 바라산에서 북쪽으로 국사봉을 거친 산맥은 이내 청계산으로 향한다. 가히 수도권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허파 산군이라 하겠다.산이 크고 깊으면 골짜기도 많고 사람들 삶의 터전도 많은 법 아닌가?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는 옹기종기 마을들이 들어서고 그 마을 하나하나가 역사를 이끌어간다. 백운산과 바라산을 낀 골짜기들이 물을 오롯이 모아 생긴 저수지가 의왕시 백운호수이다. 1953년 축조되었으니 전쟁 중에도 수자원 관리를 위해 애쓴 정성이 갸륵하다. 저수지 아랫녘의 드넓은 벌말(평촌)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또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당시만 해도 문전옥답이던 논과 밭을 희생시킨 것이다.백운저수지 맑은 물로 인해 벼 포기 잘 자라던 평촌이 아파트 숲으로 자라나면서 이곳 백운저수지도 변화를 겪었다. 1993년 겨울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바라산까지 산행을 한 은성기(50) 씨의 증언에 의하면, "배고픔을 달랠 곳이 없어 저수지 옆 구멍가게에서 겨우 요기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또 꽁꽁 언 저수지를 가로질러 인덕원으로 가서 버스를 탔다고 했다. 그러나 은씨가 다녀간 다음부터 음식점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이제는 호수 주변과 인근 골짜기까지 포함해서 모두 100여 곳이 성업중이다. '저수지'라는 농경사회의 용어보다는 '호수'라는 휴식 공간 용어로 바뀐 것에서도 변화를 느끼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삶도 또한 더욱 그러했겠다.# 오랜만에 옛집 툇마루 앉아서백운저수지가 축조될 때 저수지 위쪽 백운산 아래 속말에도 한 채의 집이 지어졌다. 만 2년에 걸쳐 튼실하게 지은 집인데 백운호수 마을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음식을 판 집이기도 하다. 상호보다 백운호수 보신탕집으로 더 알려진 곳이었는데 이제는 밥을 파는 평범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4]이천시 설성면 금당2리 당전골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4]이천시 설성면 금당2리 당전골 지면기사

    # 단오제로 사라진 세시풍속 되살려단오하면 언뜻 떠오르는 정경이 있다. 녹음이 짙은 바위 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냇가에서 저고리를 벗어부친 농염한 여인네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젊은 미인 하나가 고혹적인 자태로 그네를 타고 있고, 삼단같은 검은 머리채를 땋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혜원의 유명한 그림 속의 풍경이다.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수릿날, 중오절, 천중절이라고도 하여 팔월한가위,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명절 중 하나였다. 혜원의 풍속도처럼 이날은 특히 여인네들이 두터운 인습과 고된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모처럼 벗어나는 날이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밖에 나가 그네를 뛰고, 음식을 장만해 물가를 찾아서 물맞이로 하루를 즐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단오절 풍속이 지금은 농촌에서조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단오는 원래가 중국에서 시작된 명절이었다. 그것이 우리나라를 거쳐 섬으로 건너가서는 오늘의 어린이날 풍습으로 굳어지게 됐다. 일본의 어린이날은 우리처럼 양력 5월 5일이다. 그런데 명칭은 어린이날이지만 이날은 남자아이들을 위한 날이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날이 별도로 있다. 어린이날이 가까워지면 일본의 가정에서는 잉어 모양을 한 깃발을 높은 장대 끝에 매달아서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데 이것을 '고이노보리(鯉のぼり)'라 부른다. 이날 창포잎을 넣은 창포탕에 목욕하는 풍습도 단오절 풍습이 전해진 것이다.이천시 설성면 금당2리 당전골에서도 옛날에는 해마다 빠짐없이 단오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 있는 성호저수지 옆에 부락민들이 모여 물고기랑 민물새우를 잡아서 천렵으로 하루를 즐겼던 것인데, 술취한 마을 남자들 몇이서 뱃놀이를 하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후로는 중단되고 말았다.20여년 동안 중단됐던 단오절 마을잔치가 올해부터 '당전골 단오제'란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당전골 단오제는 원래 단오날인 5월 28일에 열기로 하고 홍보물을 만들고 초청장을 돌리는 등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국민장이 시행되는 바람에 5월 30일로 날짜를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3]광명시 광명7동 원광명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3]광명시 광명7동 원광명 지면기사

    # 광명시의 유래가 된 시흥 괭메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한 광명시의 광명동과 철산동 일대는 1968년에 서울시 도시계획지구에 편입됨으로써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됐다. 그로 인해 1970년에 시흥군 서면에 속하던 이곳에 광명출장소가 설치됐다. 1979년에는 그 나머지 지역이 소하읍이 되었고, 1981년에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이 합해져 시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광명시가 출범했다.그렇다면 광명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옛 광명리에서 비롯된 것일 터인데, 그곳은 7개 동으로 나뉜 현재의 광명동 중 어디일까?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보니 광명리라는 매우 큰 마을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광명7동, 그 중에서도 '원광명'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 마을이 본래부터 원광명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이 이름은 광명시의 모태가 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졌을 뿐이다. 이곳 토박이들은 본디 괭메 혹은 괭멩이로 불렀는데, 이는 광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다른 마을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토박이들은 과천과 양천의 광명리와 구분할 때에는 특별히 시흥 괭메라고 부른다.이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월의 풍상을 견뎌 온 고목들이 있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 도덕산 자락에 수령 500여년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마을에서는 음(陰)씨 성을 지닌 내시가 마을을 개척했고, 그가 이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은행나무는 경기도 지정 보호수이지만, 마을 내는 물론이고 나무 바로 앞에까지 난립한 공장들이 자태를 가리고 있어 아쉽다. 이외에도 수령 300여년이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한 주민은 이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거나 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정성껏 모신다고 한다.# 구렁골을 경계로 확연히 달라지는 경관광명동은 많은 단독주택과 아파트 단지로 가득한데, 어찌된 일인지 원광명만은 이곳에서 유일한 자연마을로 남아 있다. 원광명이 속한 광명7동은 도시화되기 이전에는 원광명과 새터말로 나뉘어 있었다. 새터말은 시립중앙도서관 쪽에 해당하는데, 두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2]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2]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지면기사

    # 여흥민씨와 능현리(陵峴里)영동고속도로 여주 IC를 나와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 사거리 오른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명성황후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여주가 명성황후의 고장이며,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생가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명성황후가 태어난 능현리는 섬락리(蟾樂里)라 불렸다. 명성황후 6대조인 민유중(閔維重)의 묘소가 금섬망월형(金蟾望月形)이라는 명당이어서 동네이름이 섬락리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민유중의 묘에서 마주보이는 안산은 아미사(蛾眉砂)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초승달 혹은 눈썹모양의 아미사는 왕비사(王妃砂)라고도 하는데 풍수상으로 안산이 아미사의 형태를 띠면 여자 후손이 귀하게 되거나 왕비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민유중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이 좌참찬 진후(鎭厚)이고 둘째딸이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다. 진후는 이조판서 익수(翼洙)를 낳고 익수는 대사성 백분(百奮)을 낳고 백분은 이조참판 기현(耆顯)을 낳고 기현은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을 낳았다. 민유중이 죽자 숙종은 장인의 묘를 관리할 수 있도록 묘막을 지어주었고 이후 민유중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능현리에서 살게 됐다.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吳熙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후사를 두지 못하였다. 해주 오씨와 사별한 민치록은 1851년 9월 25일 두 번째 부인인 한산 이씨(뒤에 한창부부인)에게서 명성황후를 보게 된다.# 명성황후와 관련된 기억들능현리에는 명성황후의 어릴 적 이야기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다. 불과 150년 전의 이야기이므로 꽤 신빙성이 있을 듯싶다. 명성황후는 무척 영리했다고 한다. 한번 본 책이나 사람을 잊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내는 솜씨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딸에게 아버지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고 많은 독서를 통해 식견을 갖추게 된 명성황후는 고종을 도와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명성황후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머리를 땋아 댕기를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1]이천 대월면 군량리 자채방아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1]이천 대월면 군량리 자채방아마을 지면기사

    # 넓은 들 동쪽끝으로 양화천이 감돌아 드는 곳자채방아마을 이천 대월면 군량리는 마을 앞을 양화천이 감돌아 흐르는 아늑한 농촌마을이다. 마치 정지용 시의 한 구절처럼 어린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마국산에서 발원한 양화천을 끼고 김안제들을 비롯한 넓은 들판이 펼쳐있어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쌀은 우리 민족의 주식이며 피와 살이다. 이천은 예부터 쌀이 유명한 고장이었다.'광주 분원 사기방아, 여주 이천 자채방아'라는 민요의 구절처럼 품질 좋기로 이름난 이천쌀의 대명사가 자채쌀이었다.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해서 씨를 뿌려, 칠월 칠석 무렵이면 거두는 올 벼의 한 품종이었던 자채는, 조선 성종때 강희맹이 지은 농서인 '금양잡록'에 처음 이름이 보인다. 19세기 초반에 나온 '행포지'에는 '이천과 여주 사이의 비옥한 땅에서 잘된다'고 했으니, 예부터 자채의 주산지가 이천지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밥맛이 유별나게 좋아서 진상미로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자채는, 그러나 수확량이 보잘 것 없고 재배 방법도 까다로웠다. 결국은 60년대 후반에 당시 군사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다수확 신품종 장려에 밀려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자채벼는 멸종되었지만 지금도 이천쌀은 우리네 식탁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일등미로 대접받고 있다.자채방아마을의 원래 이름은 '군들'이다. 이 마을이 지난 2002년에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자채방아마을이란 새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군량리는 옛날 자채벼를 심고 가꾸면서 불렀던 일노래인 '자채농요'가 잘 보존돼 내려온 곳이기도 하다.군들에 대한 어원은 분명치 않지만 '기름진 들'을 뜻하는 우리말로 여겨진다. 군들의 한자 차용어가 군량리(郡梁里)이다. 한자의 뜻을 억지로 풀어서 군의 대들보같은 마을이라느니, 군에서 놓은 돌다리가 있었다느니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이천에서 18년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곳이 군량리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뚜렷한 근거를 찾을 수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0]의왕시 부곡동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50]의왕시 부곡동 지면기사

    의왕시 부곡동은 한남정맥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수원의 광교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서 지지대 고개를 만들고, 의왕의 고고리 고개를 건너 오봉산으로, 또 경부철도 옆 골프장을 지나 수리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줄기는 모두 한남정맥이다. 오봉산 아래 남쪽이 의왕시 부곡동이고 기찻길 건너 부곡동은 군포시 에 속한다. 두 부곡동은 사실 한 마을이었는데 경부선 철로가 놓이면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한 셈이다. 의왕시 부곡동은 행정단위의 명칭이고 법정동은 이동과 삼동, 월암동, 초평동 등이 소속되었다. 부곡(富谷)이라는 이름답게 번성한 마을인데 이는 경부선 철로와 관계가 깊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한적한 시골에 기차가 가끔 지나는 정도였지만 1944년 부곡역이 들어서고 영업을 시작하면서 이 주위는 판도가 바뀌게 된다. 부자 골짜기로 차츰 변해간 것이다. 게다가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되고 난 뒤에는 더더욱 발전의 속도를 높이게 된다. 그뿐인가 수도권 열차 화물기지가 되어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이고 정기화물회사와 택배회사, 쇼핑센터 등의 창고가 주변을 에워싸기도 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그 때 그 시절한남정맥을 넘어가는 지지대고개가 수원과 의왕을 구분하듯이 수원역에서부터 숨 가쁘게 올라온 열차가 한 숨 쉬어가는 곳이 또한 부곡역이었다. 열차가 얼마나 천천히 언덕길을 올랐으면 열차에 매달려 한참을 가다가 뛰어내릴 정도였을까? 또 기차레일 위에 대못을 얹어놓고 열차가 통과한 다음에 찾아보면 납작한 칼 모양으로 짓눌려져서 장난감 대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기찻길 옆에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던가? 극성맞게 뛰어놀던 곳이 기찻길이었다. 레일에 귀를 대보면 열차가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도 알았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여객차인지 화물차인지도 구별해 내는 감식가이기도 했다. 쓸 만한 깡통 하나 주워서는 '망월'을 돌리기도 하였고, 어느 곳이나 기찻길 옆 마을의 아이들은 비슷했을 것이다. 필자의 소년 시절은 부곡역 아래 밤밭(수원시 율전동)이 주 무대였고 기찻길은 놀이터였다. '기찻길 옆 오막살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9]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두월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9]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두월마을 지면기사

    초월읍 신월리는 조선시대 내내 신단리(新丹里), 두월리(斗月里), 탄동(炭洞) 등 3개 마을에 해당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로 신월리(新月里)가 되었고, 각각의 마을은 현재 1·2·3리로 구분된다. 그 중 중심마을인 두월마을을 다녀왔다. 3번 국도 이천방향으로 가다가 용수리에서 좌회전해 지방도를 이용하거나, 광주시내에서 퇴촌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의 지월교를 거쳐 지월아치교를 건너면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펼쳐진 지방도 좌측에 '두월마을(두둘기)'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두월마을에서는 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무갑산(578m)이 한 눈에 보인다. 이 산의 유래로는 임진왜란 당시 항복을 거부한 무인들이 은둔했다는 설, 산의 형태가 갑옷을 두른 것 같다는 설, 그리고 삼신할머니가 한양에 삼각산을 만들려다 이미 있는 것을 알고 "아이고! 무겁다"하며 내려놓았다는 설 등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관내 문화계 인사들 중에는 남한산이 남한산성 때문에 지명도는 더 높지만 광주의 주산(主山)은 무갑산이며, 그 산세의 정기를 언급하는 이가 많다. 그 까닭인지 광주에 소재한 중·고교 '교가'에 무갑산이 유난히 많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 건너편 굴다리를 지나서 가장 높은 산자락에 올라가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 전경을 보며, '신월리에서 보는 무갑산 전경이 제일 빼어나다'는 지적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신월리는 외부에서 불어닥친 산업화·도시화라는 '광풍' 앞에 옛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려는 내부의 '미풍'이 공존하는 장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 현장을 입체적으로 그려보자. # 두월마을의 터줏대감 신월리에는 각 마을을 대표하는 성씨가 있다. 1리 두월마을에 광주이씨(廣州李氏)·여흥민씨(驪興閔氏)·전주이씨(全州李氏), 2리 신단마을에 밀양박씨(密陽朴氏), 3리 탄동에 인동장씨(仁同張氏)가 그것이다. 이 중 광주이씨는 현재 23대(약 450년 이상), 여흥민씨는 15대(300년), 전주이씨는 8대(150년) 정도 이어져 왔다. 토박이인 이동희(69)씨에 의하면, 두월마을은 100여 호에 달하지만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8]안양시 동안구 평촌신도시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8]안양시 동안구 평촌신도시 지면기사

    # 알뜰시장이라는 이름의 정기시장평촌의 아파트 숲을 헤매다가 초원부영3차아파트단지에 천막이 늘어선 모습이 보이기에 그곳으로 가보았다. 금요일마다 서는, 규모가 꽤 큰 아파트 알뜰시장이었다. 아파트 알뜰시장은 매주 정해진 요일에 개설되는데, 평촌 신도시처럼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많은 곳에서 주로 나타나는 시장이다. 이러한 형태의 시장은 아파트단지 주민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저런 문제점으로 인해 폐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민들은 알뜰시장을 이용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시장 개설로 얻은 수익을 아파트내 공동체 활동의 주요 재원으로 사용한다.이 아파트의 알뜰시장에서는 단지 안쪽을 향해서 뻥튀기·이불·과일·옥수수빵·보석·상·분식·어물·채소·잡화·도넛·젓갈·액세서리·화훼를 파는 천막과 좌판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에 학습지 판매사원도 자리잡고 있었다. 적지않은 주민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중간쯤 자리 잡은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천막에 손님이 가장 많았다. 필자도 출출하던 참이라 그곳에 가서 떡볶이를 시켜서 한 입 가득 넣고, 함께 딸려나온 어묵 국물을 마셨다. 온몸 가득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장터를 보니 몇몇 품목에는 손님이 꽤 드나들었다. 흔히 알뜰시장의 기본 품목이라는 채소·어물·과일·분식이 그러했는데, 이들 품목이 모두 있어야 구색을 갖춘 알뜰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그에 비해서 다른 품목에는 손님이 가물에 콩나듯 했다. 그중 머리띠와 핀 등의 액세서리를 파는 점포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상인이 앉아있기에 말을 걸어 보았다. 이름은 윤종갑. 거주지는 안양인 그 상인은 도넛과 꽈배기를 만들어 파는데, 액세서리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사도 봐줄 겸 쉴 겸해서 앉 아있다고 했다.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파트들을 옮겨가며 장사를 한다. 월요일에는 의왕, 화요일에는 수원, 목요일에는 인천, 금요일에는 안양, 토요일에는 의왕에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장사를 하고 수요일에는 장소를 정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시장은 실물경기의 척도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7]이천 산수유마을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7]이천 산수유마을 지면기사

    # 원적산 너른 품에 안긴 오붓한 마을 셋이천의 북쪽은 원적산과 정개산이 서로 이어져서 병풍을 두른다. 이 산줄기는 북쪽의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모아서 신둔면과 백사면, 그리고 여주군 흥천면의 평야를 적시며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또 산줄기는 이웃한 여주와 광주의 경계가 되므로 고갯마루는 이천의 관문이 되기도 한다. 산에 오르면 남한강의 이포나루와 이천 시내가 모두 보여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천년 고찰이라는 영원사가 원적산의 주인처럼 들어앉았는데 산중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터전이 넓다. 계곡을 따라 영원사에 이르는 길도 완만한 경사에 거의 직선으로 길이 났으므로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 영원사를 산행 출발지로 삼는다. 주차장이 넓어서 주말이면 대형버스도 여러 대씩 주차한다. 이곳에서 만난 이천시민 주공규(51)씨는 "원적산과 정개산을 거쳐 넋고개 주변의 동원대학 앞까지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산길을 되돌아오면 8시간 정도 걸린다"며 "산행을 꾸준히 해서 씨름선수 같았던 몸집이 이젠 유도선수처럼 되었다"고 하고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봄의 전령 샛노란 산수유 꽃 원적산 영원사에서 보았을 때 왼쪽은 송말리이고 오른쪽은 도립리와 경사리가 이웃한다. 이 세 마을이 봄마다 분주하다. 바로 '이천백사산수유축제'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벌써 열 번째의 축제를 치러냈으니 그 성숙도가 무르익었다. 전봇대마다 걸린 현수막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띄웠는데 산수유 꽃처럼 노란색 바탕에 글을 썼다. 가로수 또한 아직은 어리지만 죄다 산수유나무로 심어서 듬성듬성 노란 꽃을 피워냈다. '산수유 꽃 필 때는 바람도 노랗게 물든다'고 한 시인의 정서가 그대로 전달된다. 매화며 산수유,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목련 등 봄꽃은 모두 이파리보다 꽃을 먼저 내민다. 긴 겨울의 썰렁한 뒤끝을 한 번에 채우려는 욕심이 앞서서 그런가 보다. 산수유는 매화보다는 늦지만 강렬한 노란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낸다. 두 번 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꽃받침이 벌어져 그 속에서 꽃망울이 나오고 이

  •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6]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경인일보 창간 49주년 기획 마을&삶·46]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지면기사

    서하리는 338번 지방도를 따라 경안동에서 퇴촌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서하교 좌측에 위치한 초월읍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서하(西霞)'라는 지명은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확인된다. 문구 자체로는 '칠사산(七寺山·364m) 서쪽 방향의 아름다운 노을'이란 뜻이지만,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면 '경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안개가 자주 끼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서하동의 일부는 현재의 서하리로, 또 다른 일부가 무갑리로 통합된 사실을 제외하면 수백년 동안 그 땅에 그 지명이 고스란히 유지된 셈이다.가구수는 2009년 현재 주민등록상 100여 호가 넘지만 실제는 80여 호에 달한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외관도 농촌의 모습을 온전히 지켜왔다. 현대 들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광주 전체 상황을 고려하면 개발바람에서 비켜서 있는 곳이다. 칠사산의 끝자락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팔당호의 상류 방향으로 경안천이 휘돌아 감싸안은, 한마디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이다.# 작지만 큰 마을, 사마루의 어제와 오늘 이곳에는 사마루(四馬樓)와 안골(安谷),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주민 대부분은 사마루에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고려 말에 충신 4명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돌아보니 마치 누각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졌다. 이곳에 처음 입향(入鄕)한 성씨는 창녕조씨, 전주이씨 등이고 이후 차례대로 여러 성씨가 들어왔지만, 이서용 이장에 따르면 "예전부터 고만고만한 성씨가 다양하게 모여사는 각성받이 마을"이었다고 한다.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마을 구성원들의 전출입이 신도시개발 만큼이나 잦았다. 토박이만 살던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90년대 초중반으로 수서지구와 인근 하남시의 개발로 창우리 출신 주민들이 이곳에 속속 정착하면서부터이다.서하리 전체의 농사는 시설농업(비닐하우스 재배)으로 대변된다. 서하리 경로당 총무 이규원(74)씨에 의하면, 사마루의 너른 들판에 토마토를 비롯해 아욱, 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