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그곳으로 가다·77]에필로그

    [길 그곳으로 가다·77]에필로그 지면기사

       경인일보는 지난 2005년 7월부터 2년간 76회에 걸쳐 일방적인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변화와 파괴를 되풀이해오며 질곡의 역사를 품은 길(路)에 서린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창간 45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길, 그곳으로 가다'시리즈는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인간이 걸어온 현장이요 미래의 변화, 발전을 위한 통로인 길에 담긴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그 길과 함께해온 우리의 삶과 시대상을 보여줬다.   이보다 앞선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경기도의 역사를 되짚어본 '다시보는 경기산하' 시리즈에 이어 31개 시군의 행정구역을 넘나들며 바라본 길의 모습은 마치 생명처럼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고 길의 대서사시는 철저한 현장답사와 함께 충분한 사료 검증 작업을 거쳐 생동감 넘치는 기승전결로 풀어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통팔달로 뻗어 나가는 길의 궤적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방대했다. 따라서 역(逆)으로 경기도 경계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쳤다.'길, 그곳으로 가다'의 긴 여정은 ▲양평로 평해로 ▲광주로 여주로 봉화로 ▲용인로 음죽로 동해로 ▲수원로 해남로 ▲남양로 ▲강화로 ▲파주로 의주로 ▲연천로 삼방로 ▲포천로 경흥로까지 각 구간별로 육로·해로·수로 등을 모두 포함해 유기적인 동적 구성을 바탕으로 필진들의 해박한 지식을 가미해 독자들에게 현장감있고 쉽게 전달했다.   특히 이번 시리즈에서는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 한동민 수원시 문화관광과 전문위원,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정수자 시인·아주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과 조형기 경인일보 편집위원 등 고정필진을 비롯해 각 구간별·지역별 상세한 설명을 위해 해당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와 향토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해설을 함께 실어줌으로써 글에 재미를 더했다.   '길, 그곳으로 가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경기 지역의 길을 매개로 해 역사

  • [길 그곳으로 가다·76]양구로>4< - 경춘가도에서 돌아보다

    [길 그곳으로 가다·76]양구로>4< - 경춘가도에서 돌아보다 지면기사

       #그리움을 호명하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길이 있다. 경춘가도, 젊음과 사랑의 추억이 특히 많이 따라 나오는 길. 그 길에서 경기도의 길 순례를 마치니, 추억이 하나 더 늘겠다.    남양주를 지나자 뚝 끊긴 기찻길이 먼저 맞는다. 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아파트다. 하긴 사람 있고 길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편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유서 깊은 길도 치워버린 것을 수없이 봐왔다. 작년 12월에 철수했다는 철로의 잔해가 텅 빈 터널과 함께 그런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끊긴 기찻길을 걷자니 영화 '박하사탕'의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규 장면이 떠오른다. 그 길이 경춘선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지만 아무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 현재보다는 순수했던 아니 그렇다고 믿는 지난날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 기찻길 위에도 자글자글 모여 있다.    #경춘가도와 기찻길과 간이역   경춘가도는 기찻길과 국도가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운치가 참 좋다. 그런데 막히기로 유명하던 길이 이제는 썰렁하기 짝이 없다. 곧고 빠른 새 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옛길이 퇴물처럼 멀찍이 물러앉은 것이다. 간이역도 뒷목을 쓸쓸히 당긴다.   한 방향만 바라보다 늙어버린 문처럼   침목 긴 행간에 그늘이 깊어지면   그 몸을 관통해 가는 검은 기차가 있다   그리움은 헤어진 그 직후가 늘 격렬해   등을 만질 듯 마른 손을 뻗지만   제 길을 결코 안 벗는 그는 벌써 먼 기적   희미해진 이름 속을 꼭 한 번 섰다 갈 뿐   그때마다 피를 쏟듯 씨방이 터지는 걸   기차는 알지 못 한다, 폐허 위에 피는 꽃도    -정수자, 전문    길 위에서는 불쑥 삐져나와 발에 채는 것들이 많다.

  • [길 그곳으로 가다·75]양구로>3< - 북한강 뱃길따라 양구로 가는길

    [길 그곳으로 가다·75]양구로>3< - 북한강 뱃길따라 양구로 가는길 지면기사

       서울에서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강원도 양구가 나온다. 양구로는 북한강변을 따라 난 길이다. 조선시기에 여행객들은 강변을 따라, 혹은 산길을 질러 걸어갔지만 간혹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짐을 실은 배는 북한강 하구에서 250㎞ 남짓 소류, 즉 거슬러 올라가 양구에 이르렀다.    북한강 수운(水運)은 을축년, 즉 1925년의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화천댐과 청평댐의 건설로 쇠퇴하다가, 1974년에 준공된 팔당댐 건설로 막을 내렸다. 팔당댐이 강을 막기 전까지 여객선과 화물선이 부분 운항되었고, 북한강 상류와 홍천강으로 내려오다가 청평댐에 막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 강원도산 원목과 장작은 종착지인 오대골까지 연장한 경춘선 철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청평댐 아래, 예컨대 가평 외서면 삼회리같이 배후에 산을 두고 있는 마을에서는 철도의 도움 없이도 뗏목과 장작배를 서울까지 내려보낼 수 있는 곳이어서 팔당댐이 생기기 전까지 매년 산판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 중 5~6가구는 장작을 패서 배에 싣고 서울 뚝섬까지 가서 팔고 돌아오는 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장작은 지름이 약 4~5㎝되게 쪼개어 약 80㎝ 길이로 10개를 묶으면 1단이 된다. 배 한 척에 많으면 3천단까지 실었고, 쌍배 또는 쌍둥이라고 하여 배 두 척을 묶어 6천단을 싣기도 하였다.    대개 뚝섬까지는 하루 일정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2~3일이 소요되었다. 특히 북동풍 높새바람이 불면 내려올 때는 빠르지만 거슬러 올라오기가 힘들다. 도중에 여울을 만나면 한 명은 밧줄을 몸에 매어 당기고, 한 명은 삿대를 어깨에 대어 배를 밀어올려야 한다. 장작배는 주민들의 중요한 물자공급 수단이었다. 장작을 싣고 내려간 배가 돌아올 때는 소금이나 젓갈을 싣고 왔으며, 농사에 필요한 비료도 배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육로교통의 발달로 북한강을 운항하는 배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오대골을 출발하여 강원도 홍천군 마곡리 말골까지, 그리고 가평군 가

  • [길 그곳으로 가다·74]양구로>2< - 시대 풍미했던 선인의 흔적

    [길 그곳으로 가다·74]양구로>2< - 시대 풍미했던 선인의 흔적 지면기사

       평탄하면서 직선적인 길을 추구하던 옛길은 때때로 산길도 넘는다. 주변의 보다 험하고 큰 산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에서 화도읍 마석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한강과 북한강을 따라가면 낮게 이어지는 길이어서 좋겠지만 많이 돌아가게 되므로 만만치 않은 수리넘이 고개를 넘어서 가더라도 직선에 가까운 노정을 고른 것이다. 팔당 옆의 예봉산(685)도 험하거니와 팔당1, 2, 3, 4 등 굴길이 말해주듯 강변길도 까다로웠다. 게다가 수종사의 운길산(610)은 또 어떤가?   ■ 이순지 묘역과 능원대군 묘   큰 길 따라 큰 인물들의 유택도 마련되는지 발길 닿는 곳곳이 이름난 옛사람들의 영역이다.   덕소에서 수리넘이 고개를 넘으면 나븐바위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이순지 선생 묘가 길섶에 있다. 이순지(?~1465) 선생은 세종대왕의 시대를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킨 주인공이다. 천문, 음양, 풍수 등을 통달한 천문학자로서 정인지, 김담 등과 '칠정산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동래부 관노였던 장영실을 천거하여 앙부일구와 옥루 등을 제작하게 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순지 선생은 만년에 일어난 해괴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과부가 된 딸이 사방지란 여인과 가깝게 지냈는데, 사방지는 사실 남성으로 알려진 인물이어서 간통사건으로 비화된다. 더구나 사방지를 조사한 실록을 보면,   정현조에게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승지(承旨) 등을 포함해서 더불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머리의 장식과 복색은 여자였으나 형상과 음경·음낭은 다 남자인데, 다만 정도(精道)가 경도(莖頭)아래에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이었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이의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사방지는 남녀 양성을 가진 사람인데 남성 쪽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여성 쪽에 가까웠다면 레즈비언이었을 테고 남성 쪽이라면

  • [길 그곳으로 가다·73]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길 그곳으로 가다·73]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지면기사

       73. 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여섯 개의 대로 가운데 제3로인 평해로는 경기도내에서 평구역과 지평에서 갈라지는 분기로가 있었다. 양주에 소재한 평구역은 포천·영평·가평·양근·지평 일대의 역을 관할하는 평구도(平邱道)의 찰방역(察訪驛)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으며, 그 아래에 소속된 11개의 일반 역에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파견되었다. 경기도 내에서 평구도는 12개 역을 관할하였던 양재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역도였다.   평구도는 고려시대에도 30개의 역을 관할하면서 역역(驛域)이 강원 일대까지 뻗어 있던 유서 깊은 역도이다. 흔히 역은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교통시설로 알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모두 병부(兵部)에 속한 일종의 군사시설이었다. 평구역에서 분기하여 가평과 춘천을 지나 양구까지 이르는 분기로의 노선은 '대동지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평구역-구곡역(40)-청평천점(20)-감천역(15)-가평(20)-초연대(5)-안보역(15)-석파령(15)-덕두원(5)-신연강(10)-(10)-소양강(5)-부황현(20)-기락천(5)-가락동(15)-대동령(5)-시낙현(30)-(20)   이 길은 평구, 청평, 가평, 춘천, 양구 등의 주요 취락을 경유하며, 평구역에서 덕소를 지나 마석우리까지는 362번 지방도로와 이후부터는 이른바 '경춘국도'(京春國道)'라 불리는 46번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길로는 구곡역(남양주시 화도읍 구암리)까지는 석교(石橋·서울시 공릉동)로 중랑천을 건너고, 이후 퇴계원-사릉-평내동-마치-마석우리를 경유하는 노선이 따로 있기도 하다. 이 길은 1913년에 이미 2등도로로 정비된 바 있다.    평구를 경유하는 것보다 더 가깝고 도로 여건도 양호하기 때문에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는 이 길이 더 큰 길로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 직접 춘천으로 갈 때는 이 노선을 이용하는 사례가 더

  • [길 그곳으로 가다·72]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길 그곳으로 가다·72]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지면기사

       72. 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 의정부를 거쳐    경흥로는 의정부를 거쳐 함경도로 내닫는다. 양주, 포천도 경유하지만 기억의 공간은 강원도 땅인 철원에 더 많이 있다. 한탄강을 끼고 서 있는 고석정이며 승일교, 철원의 넓은 들판과 재두루미 그리고 금강산 가던 '끊긴 철길'의 각인 때문일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 경흥로를 먼저 건네주는 곳은 의정부다. 천상병이 말년을 보낸 까닭에 의정부에서는 요즘 '천상병 문학상'과 문학제를 열어 시인을 기린다. 그는 생전의 유고시집만 아니라 동료 시인들에게 당당하게 타 쓴 막걸리 값 등으로 한때는 일화가 시를 가리는 시인이었다. 그렇듯 물정 모르고 시만 쓰다 간 '천생 시인' 노릇도 한결같이 돌보는 부인이 있어 가능했지만 말이다.    나는 의정부시에 사는데   먼 산이 잘 바라보이고   뭔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고   나를 자꾸 부르는 것 같다    (중략)   먼 산은 아주 옛날처럼 보이고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들 같기도 하고   황성옛터 같다.      -천상병    이 시는 무료한 시간에 둘러보는 의정부 주위의 산을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시는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에 쓰고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지론 덕에 그의 시는 '제작'의 느낌이 적은 편이다. 독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은 '귀천'인데, 특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는 마지막 연은 천상병 시의 압권이다.    ■ 양주와 포천을 지나며   양주에서도 요즘 뜨기 시작하는 경기 북부 도시들의 부산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 중에도 문인이 많이 몰린 곳은 일산이

  • [길 그곳으로 가다·71]위풍당당 산성의 힘 반만년 역사 지키다

    [길 그곳으로 가다·71]위풍당당 산성의 힘 반만년 역사 지키다 지면기사

       71. 경흥로 >4< - 서수라로 가는 길    1.경흥로의 끝, 서수라(西水羅)   '서수라'라는 이름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서수라는 독도 등 섬을 제외하고 난 한반도의 동쪽 끝(동경 130도)이요, 우리나라 최북단 어항(漁港)이다.   아득하여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그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시대 홍길동·임꺽정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불렸던 장길산 때문이다.   장길산 세력에 위협을 느낀 숙종은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그는 함경도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서수라는 그렇게 아득한 미지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홍길동전의 율도국처럼.   그러나 서수라는 조선시대에 여진족을 경략하기 위한 서수라보(西水羅堡)가 설치된 국방의 요충지로 조정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심은 봉수대 설치를 통해 나타난다. 동북쪽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봉수로는 함북 경흥의 서수라 봉수대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봉수로는 서울로 오는 또 다른 대로(大路)였다.   그 길은 예부터 낙랑과 말갈 그리고 여진족이 남하하는 길이었다. 서수라는 그렇게 국경을 향하여 있다. 1895년 연해주로 왕래하는 선박은 반드시 서수라를 경유하여 납세 증명서를 받도록 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연해주에서 일진회원으로 오해되어 죽을 뻔하고 돌아온 곳도 서수라였다.   경흥로의 경기도 구역은 한성을 수도로 한 백제의 처지에서 보면 사활이 걸린 중요한 길목이었다. 원산만에서 철원평야를 거쳐 한성에 이르는 동북방의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원과 한성을 이어주는 포천지역은 백제 초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포천의 반월산성을 비롯한 많은 산성의 존재가 그것을 알려준다. 북쪽에서 오는 군대를 막는 길은

  • [길 그곳으로 가다·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길 그곳으로 가다·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지면기사

       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경흥로는 조선시기에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북지역 일대의 물산을 모아 서남쪽 서울로 넘겨주던 유통로다.    다른 이름으로 동북경흥대로(東北慶興大路), 통북대로(通北大路) 북관대로(北關大路) 라고 불렀듯이 대로의 면모를 갖춘 길이다.    경기 길 답사는 재작년에 평해로에서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이 경흥로에서 일단락 지을 것 같다.    그래서 길의 기능을 정리해 보는데, 이 경흥로만큼 적절한 대상은 없는 것 같다.    통시대의 대로는 관방(關防)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마패에 그려진 말 숫자대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대로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인이나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주막과 원(院)같은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유통과 교류의 중추 기능을 담당한다.    경흥로 역시 여러 군상들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금강산 구경 가는 이에게는 즐거운 유람 길이었지만, 죄를 지어 북쪽 변방으로 유배 가던 이에게는 고통의 귀양길이었다. 관리로 임명받아 부임하던 길이기도 하지만 벼슬살이를 접고 낙귀(樂歸)하던 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경흥로 이용은 사행(私行)도 있었고 관행(官行)도 있었으며 간혹 사행(使行)하던 일행도 이용한 길이었다. 게다가 지로나 협로, 우회로가 별로 없다 보니 이용객이 이 길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로변은 꽤 많은 여행객과 시설들로 북적대었다.   우리가 조선시대로 돌아가 포천 관내의 경흥로 한 길목을 지킬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길의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포천시는 과거 영평현까지 포섭하고 있어 경흥로가 갖는 다양한 콘텐츠를 거의 모두 담고 있다. 포천시를 흐르는 물의 근원은 둘인데, 하나는 남쪽 축석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동쪽 수원산에서 나온다.    조선 2

  • [길 그곳으로 가다·69]끊어진 철길 금강산 90㎞ 봄의 온기는 북으로 간다

    [길 그곳으로 가다·69]끊어진 철길 금강산 90㎞ 봄의 온기는 북으로 간다 지면기사

       69. 경흥로 > 2 < - 금강산에 새 봄을 배달하다   이 오는 길목'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쓰는 말이다. 그 중 공간으로 본다면 우리의 답사는 봄을 북쪽으로 가져다준 꼴이다. 봄은 당연히 남쪽부터 올진대 우리는 북으로 난 경흥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경흥로를 따라 올라갈수록 잔설이 많고 더 추웠던 것도 이 봄에 겨울을 경험한 추억이다.   ■ 장터와 고인돌과 미륵불이 지키는 길   축석고개 현충탑과 전적비를 두루 살펴보고 포천 소흘읍 송우리에 당도한다. '솔모루길'이라는 안내판이 정겹다. 솔모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왜 굳이 송우라고 했을까? 그나마 '솔모루' 입구에 새로운 솔밭공원을 조성하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형 할인매장이 새 솔밭 옆에 단장을 하지 않는가. 그 옛날 번성했던 솔모루 장은 이제 더 뒤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포천천 따라 올라가는 경흥로, 옛 파발막 옆 자작동에 고인돌이 있다. 크기도 만만치 않고 조형미도 좋아서 환영을 받는 고인돌이다. 더구나 경흥로를 계승한 43번국도 옆인지라 찾기도 쉽다. 고인돌 시대에도 경흥로까지는 아니어도 이 길을 어느 정도는 사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합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깝고 다니기 좋으면 길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의 포천시청은 포천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지만 옛 포천의 중심은 천변에서 벗어난 청성산(반월산) 아래가 터전이었다. 군내면 사무소가 그 자리일 터인데 오랜 세월 포천을 다스린 읍치소이다. 청성산의 반월산성이 그를 증명하는 셈이다. 반월산성은 작지만 조망만큼은 어느 산성에도 뒤지지 않아서 포천 일대를 충분히 지키고도 남는다.   이런 지리적 요충지에 설마 불교 유적이 없겠는가? 군내면 사무소 아래에 선 커다란 미륵이 옛길을 증언한다. 4.5가량 되는 큰 키에 후덕하면서도 위엄을 드러낸 모습에서 고려시대 불교의 한 단면이 보인다. 다만 지금 법당의 실내가 좁고

  • [길 그곳으로 가다·68]동북으로 뻗어나간 호국로 2천190리

    [길 그곳으로 가다·68]동북으로 뻗어나간 호국로 2천190리 지면기사

       경흥로 > 1 < - 서울에서 함경 서수라까지   경흥로는 서울에서 함경도 서수라(西水羅)까지 총 길이 2천190리 길이다. 경기도 내에서는 양주, 포천, 영평을 경유하고, 평구도 소속의 양주 녹양역, 포천 안기역, 영평 양문역 등에서 도로를 관리하였다.    의주로를 통일로로 부르는 것에 대하여 경흥로는 오늘날 호국로(護國路)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3번 국도 및 43번 국도가 옛 노선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였다.   경흥로는 지질·지형조건과 관련하여 옛 큰길 가운데 노선의 변경이 가장 적다. 삼방로가 연천에서 내려오는 지질구조선을 따라 놓인 것처럼 경흥로 역시 동북방향으로 뻗은 큰 지질구조선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선은 하천을 유도하고, 하천은 범람과 곡류를 반복하면서 연안에 좁고 긴 충적지를 형성시킨다.    또한 충적지는 기복과 경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로 이용된다. 결국 좁고 긴 하곡을 따라 놓인 경흥로는 새로운 노선이 모색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우선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1864)'에는 경흥로 노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도-수유현(15)-누원(17)-의정부(8)-서오랑점(10)-축석령(10)-송우장(20)-파발막(10)-안기역(10)-탄장거리(10)-만세교(10)-양문역(10)-유정(10)-굴운천(10)-서수라.   도성 안에서 혜화문을 나와 미아리고개를 넘거나, 동대문을 나와 신설동에서 종암동을 경유하여 수유현으로 이어지면서 경흥로가 시작된다. 수유현은 무너미고개로 불리는데, 지금의 신일중고등학교 앞의 작은 고개를 일컫는 것 같다.    누원(다락원)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경계 지점의 3번 국도 서쪽편 안쪽, 행정구역상으로는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한다. 조선후기에 누원은 송파와 더불어 서울 주변 큰 시장의 하나였다. 특히 동북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어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한때 서울의 시전상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