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그곳으로 가다·77]에필로그

    [길 그곳으로 가다·77]에필로그 지면기사

       경인일보는 지난 2005년 7월부터 2년간 76회에 걸쳐 일방적인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변화와 파괴를 되풀이해오며 질곡의 역사를 품은 길(路)에 서린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창간 45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길, 그곳으로 가다'시리즈는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인간이 걸어온 현장이요 미래의 변화, 발전을 위한 통로인 길에 담긴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그 길과 함께해온 우리의 삶과 시대상을 보여줬다.   이보다 앞선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경기도의 역사를 되짚어본 '다시보는 경기산하' 시리즈에 이어 31개 시군의 행정구역을 넘나들며 바라본 길의 모습은 마치 생명처럼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고 길의 대서사시는 철저한 현장답사와 함께 충분한 사료 검증 작업을 거쳐 생동감 넘치는 기승전결로 풀어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통팔달로 뻗어 나가는 길의 궤적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방대했다. 따라서 역(逆)으로 경기도 경계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쳤다.'길, 그곳으로 가다'의 긴 여정은 ▲양평로 평해로 ▲광주로 여주로 봉화로 ▲용인로 음죽로 동해로 ▲수원로 해남로 ▲남양로 ▲강화로 ▲파주로 의주로 ▲연천로 삼방로 ▲포천로 경흥로까지 각 구간별로 육로·해로·수로 등을 모두 포함해 유기적인 동적 구성을 바탕으로 필진들의 해박한 지식을 가미해 독자들에게 현장감있고 쉽게 전달했다.   특히 이번 시리즈에서는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 한동민 수원시 문화관광과 전문위원,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정수자 시인·아주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과 조형기 경인일보 편집위원 등 고정필진을 비롯해 각 구간별·지역별 상세한 설명을 위해 해당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와 향토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해설을 함께 실어줌으로써 글에 재미를 더했다.   '길, 그곳으로 가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경기 지역의 길을 매개로 해 역사

  • [길 그곳으로 가다·76]양구로>4< - 경춘가도에서 돌아보다

    [길 그곳으로 가다·76]양구로>4< - 경춘가도에서 돌아보다 지면기사

       #그리움을 호명하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길이 있다. 경춘가도, 젊음과 사랑의 추억이 특히 많이 따라 나오는 길. 그 길에서 경기도의 길 순례를 마치니, 추억이 하나 더 늘겠다.    남양주를 지나자 뚝 끊긴 기찻길이 먼저 맞는다. 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아파트다. 하긴 사람 있고 길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편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유서 깊은 길도 치워버린 것을 수없이 봐왔다. 작년 12월에 철수했다는 철로의 잔해가 텅 빈 터널과 함께 그런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끊긴 기찻길을 걷자니 영화 '박하사탕'의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규 장면이 떠오른다. 그 길이 경춘선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지만 아무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 현재보다는 순수했던 아니 그렇다고 믿는 지난날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 기찻길 위에도 자글자글 모여 있다.    #경춘가도와 기찻길과 간이역   경춘가도는 기찻길과 국도가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운치가 참 좋다. 그런데 막히기로 유명하던 길이 이제는 썰렁하기 짝이 없다. 곧고 빠른 새 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옛길이 퇴물처럼 멀찍이 물러앉은 것이다. 간이역도 뒷목을 쓸쓸히 당긴다.   한 방향만 바라보다 늙어버린 문처럼   침목 긴 행간에 그늘이 깊어지면   그 몸을 관통해 가는 검은 기차가 있다   그리움은 헤어진 그 직후가 늘 격렬해   등을 만질 듯 마른 손을 뻗지만   제 길을 결코 안 벗는 그는 벌써 먼 기적   희미해진 이름 속을 꼭 한 번 섰다 갈 뿐   그때마다 피를 쏟듯 씨방이 터지는 걸   기차는 알지 못 한다, 폐허 위에 피는 꽃도    -정수자, 전문    길 위에서는 불쑥 삐져나와 발에 채는 것들이 많다.

  • [길 그곳으로 가다·75]양구로>3< - 북한강 뱃길따라 양구로 가는길

    [길 그곳으로 가다·75]양구로>3< - 북한강 뱃길따라 양구로 가는길 지면기사

       서울에서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강원도 양구가 나온다. 양구로는 북한강변을 따라 난 길이다. 조선시기에 여행객들은 강변을 따라, 혹은 산길을 질러 걸어갔지만 간혹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짐을 실은 배는 북한강 하구에서 250㎞ 남짓 소류, 즉 거슬러 올라가 양구에 이르렀다.    북한강 수운(水運)은 을축년, 즉 1925년의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화천댐과 청평댐의 건설로 쇠퇴하다가, 1974년에 준공된 팔당댐 건설로 막을 내렸다. 팔당댐이 강을 막기 전까지 여객선과 화물선이 부분 운항되었고, 북한강 상류와 홍천강으로 내려오다가 청평댐에 막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 강원도산 원목과 장작은 종착지인 오대골까지 연장한 경춘선 철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청평댐 아래, 예컨대 가평 외서면 삼회리같이 배후에 산을 두고 있는 마을에서는 철도의 도움 없이도 뗏목과 장작배를 서울까지 내려보낼 수 있는 곳이어서 팔당댐이 생기기 전까지 매년 산판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 중 5~6가구는 장작을 패서 배에 싣고 서울 뚝섬까지 가서 팔고 돌아오는 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장작은 지름이 약 4~5㎝되게 쪼개어 약 80㎝ 길이로 10개를 묶으면 1단이 된다. 배 한 척에 많으면 3천단까지 실었고, 쌍배 또는 쌍둥이라고 하여 배 두 척을 묶어 6천단을 싣기도 하였다.    대개 뚝섬까지는 하루 일정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2~3일이 소요되었다. 특히 북동풍 높새바람이 불면 내려올 때는 빠르지만 거슬러 올라오기가 힘들다. 도중에 여울을 만나면 한 명은 밧줄을 몸에 매어 당기고, 한 명은 삿대를 어깨에 대어 배를 밀어올려야 한다. 장작배는 주민들의 중요한 물자공급 수단이었다. 장작을 싣고 내려간 배가 돌아올 때는 소금이나 젓갈을 싣고 왔으며, 농사에 필요한 비료도 배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육로교통의 발달로 북한강을 운항하는 배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오대골을 출발하여 강원도 홍천군 마곡리 말골까지, 그리고 가평군 가

  • [길 그곳으로 가다·74]양구로>2< - 시대 풍미했던 선인의 흔적

    [길 그곳으로 가다·74]양구로>2< - 시대 풍미했던 선인의 흔적 지면기사

       평탄하면서 직선적인 길을 추구하던 옛길은 때때로 산길도 넘는다. 주변의 보다 험하고 큰 산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에서 화도읍 마석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한강과 북한강을 따라가면 낮게 이어지는 길이어서 좋겠지만 많이 돌아가게 되므로 만만치 않은 수리넘이 고개를 넘어서 가더라도 직선에 가까운 노정을 고른 것이다. 팔당 옆의 예봉산(685)도 험하거니와 팔당1, 2, 3, 4 등 굴길이 말해주듯 강변길도 까다로웠다. 게다가 수종사의 운길산(610)은 또 어떤가?   ■ 이순지 묘역과 능원대군 묘   큰 길 따라 큰 인물들의 유택도 마련되는지 발길 닿는 곳곳이 이름난 옛사람들의 영역이다.   덕소에서 수리넘이 고개를 넘으면 나븐바위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이순지 선생 묘가 길섶에 있다. 이순지(?~1465) 선생은 세종대왕의 시대를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킨 주인공이다. 천문, 음양, 풍수 등을 통달한 천문학자로서 정인지, 김담 등과 '칠정산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동래부 관노였던 장영실을 천거하여 앙부일구와 옥루 등을 제작하게 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순지 선생은 만년에 일어난 해괴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과부가 된 딸이 사방지란 여인과 가깝게 지냈는데, 사방지는 사실 남성으로 알려진 인물이어서 간통사건으로 비화된다. 더구나 사방지를 조사한 실록을 보면,   정현조에게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승지(承旨) 등을 포함해서 더불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머리의 장식과 복색은 여자였으나 형상과 음경·음낭은 다 남자인데, 다만 정도(精道)가 경도(莖頭)아래에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이었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이의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사방지는 남녀 양성을 가진 사람인데 남성 쪽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여성 쪽에 가까웠다면 레즈비언이었을 테고 남성 쪽이라면

  • [길 그곳으로 가다·73]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길 그곳으로 가다·73]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지면기사

       73. 양구로 >1< - 북한강 유역 가평 가는길   여섯 개의 대로 가운데 제3로인 평해로는 경기도내에서 평구역과 지평에서 갈라지는 분기로가 있었다. 양주에 소재한 평구역은 포천·영평·가평·양근·지평 일대의 역을 관할하는 평구도(平邱道)의 찰방역(察訪驛)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으며, 그 아래에 소속된 11개의 일반 역에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파견되었다. 경기도 내에서 평구도는 12개 역을 관할하였던 양재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역도였다.   평구도는 고려시대에도 30개의 역을 관할하면서 역역(驛域)이 강원 일대까지 뻗어 있던 유서 깊은 역도이다. 흔히 역은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교통시설로 알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모두 병부(兵部)에 속한 일종의 군사시설이었다. 평구역에서 분기하여 가평과 춘천을 지나 양구까지 이르는 분기로의 노선은 '대동지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평구역-구곡역(40)-청평천점(20)-감천역(15)-가평(20)-초연대(5)-안보역(15)-석파령(15)-덕두원(5)-신연강(10)-(10)-소양강(5)-부황현(20)-기락천(5)-가락동(15)-대동령(5)-시낙현(30)-(20)   이 길은 평구, 청평, 가평, 춘천, 양구 등의 주요 취락을 경유하며, 평구역에서 덕소를 지나 마석우리까지는 362번 지방도로와 이후부터는 이른바 '경춘국도'(京春國道)'라 불리는 46번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길로는 구곡역(남양주시 화도읍 구암리)까지는 석교(石橋·서울시 공릉동)로 중랑천을 건너고, 이후 퇴계원-사릉-평내동-마치-마석우리를 경유하는 노선이 따로 있기도 하다. 이 길은 1913년에 이미 2등도로로 정비된 바 있다.    평구를 경유하는 것보다 더 가깝고 도로 여건도 양호하기 때문에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는 이 길이 더 큰 길로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 직접 춘천으로 갈 때는 이 노선을 이용하는 사례가 더

  • [길 그곳으로 가다·72]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길 그곳으로 가다·72]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지면기사

       72. 경흥로 > 5 < - 끊긴 철길에 서서   ■ 의정부를 거쳐    경흥로는 의정부를 거쳐 함경도로 내닫는다. 양주, 포천도 경유하지만 기억의 공간은 강원도 땅인 철원에 더 많이 있다. 한탄강을 끼고 서 있는 고석정이며 승일교, 철원의 넓은 들판과 재두루미 그리고 금강산 가던 '끊긴 철길'의 각인 때문일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 경흥로를 먼저 건네주는 곳은 의정부다. 천상병이 말년을 보낸 까닭에 의정부에서는 요즘 '천상병 문학상'과 문학제를 열어 시인을 기린다. 그는 생전의 유고시집만 아니라 동료 시인들에게 당당하게 타 쓴 막걸리 값 등으로 한때는 일화가 시를 가리는 시인이었다. 그렇듯 물정 모르고 시만 쓰다 간 '천생 시인' 노릇도 한결같이 돌보는 부인이 있어 가능했지만 말이다.    나는 의정부시에 사는데   먼 산이 잘 바라보이고   뭔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고   나를 자꾸 부르는 것 같다    (중략)   먼 산은 아주 옛날처럼 보이고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들 같기도 하고   황성옛터 같다.      -천상병    이 시는 무료한 시간에 둘러보는 의정부 주위의 산을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시는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에 쓰고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지론 덕에 그의 시는 '제작'의 느낌이 적은 편이다. 독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은 '귀천'인데, 특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는 마지막 연은 천상병 시의 압권이다.    ■ 양주와 포천을 지나며   양주에서도 요즘 뜨기 시작하는 경기 북부 도시들의 부산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 중에도 문인이 많이 몰린 곳은 일산이

  • [길 그곳으로 가다·71]위풍당당 산성의 힘 반만년 역사 지키다

    [길 그곳으로 가다·71]위풍당당 산성의 힘 반만년 역사 지키다 지면기사

       71. 경흥로 >4< - 서수라로 가는 길    1.경흥로의 끝, 서수라(西水羅)   '서수라'라는 이름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서수라는 독도 등 섬을 제외하고 난 한반도의 동쪽 끝(동경 130도)이요, 우리나라 최북단 어항(漁港)이다.   아득하여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그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시대 홍길동·임꺽정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불렸던 장길산 때문이다.   장길산 세력에 위협을 느낀 숙종은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그는 함경도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서수라는 그렇게 아득한 미지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홍길동전의 율도국처럼.   그러나 서수라는 조선시대에 여진족을 경략하기 위한 서수라보(西水羅堡)가 설치된 국방의 요충지로 조정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심은 봉수대 설치를 통해 나타난다. 동북쪽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봉수로는 함북 경흥의 서수라 봉수대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봉수로는 서울로 오는 또 다른 대로(大路)였다.   그 길은 예부터 낙랑과 말갈 그리고 여진족이 남하하는 길이었다. 서수라는 그렇게 국경을 향하여 있다. 1895년 연해주로 왕래하는 선박은 반드시 서수라를 경유하여 납세 증명서를 받도록 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연해주에서 일진회원으로 오해되어 죽을 뻔하고 돌아온 곳도 서수라였다.   경흥로의 경기도 구역은 한성을 수도로 한 백제의 처지에서 보면 사활이 걸린 중요한 길목이었다. 원산만에서 철원평야를 거쳐 한성에 이르는 동북방의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원과 한성을 이어주는 포천지역은 백제 초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포천의 반월산성을 비롯한 많은 산성의 존재가 그것을 알려준다. 북쪽에서 오는 군대를 막는 길은

  • [길 그곳으로 가다·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길 그곳으로 가다·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지면기사

       70. 경흥로 >3< - 여러 군상의 이동통로   경흥로는 조선시기에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북지역 일대의 물산을 모아 서남쪽 서울로 넘겨주던 유통로다.    다른 이름으로 동북경흥대로(東北慶興大路), 통북대로(通北大路) 북관대로(北關大路) 라고 불렀듯이 대로의 면모를 갖춘 길이다.    경기 길 답사는 재작년에 평해로에서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이 경흥로에서 일단락 지을 것 같다.    그래서 길의 기능을 정리해 보는데, 이 경흥로만큼 적절한 대상은 없는 것 같다.    통시대의 대로는 관방(關防)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마패에 그려진 말 숫자대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대로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인이나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주막과 원(院)같은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유통과 교류의 중추 기능을 담당한다.    경흥로 역시 여러 군상들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금강산 구경 가는 이에게는 즐거운 유람 길이었지만, 죄를 지어 북쪽 변방으로 유배 가던 이에게는 고통의 귀양길이었다. 관리로 임명받아 부임하던 길이기도 하지만 벼슬살이를 접고 낙귀(樂歸)하던 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경흥로 이용은 사행(私行)도 있었고 관행(官行)도 있었으며 간혹 사행(使行)하던 일행도 이용한 길이었다. 게다가 지로나 협로, 우회로가 별로 없다 보니 이용객이 이 길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로변은 꽤 많은 여행객과 시설들로 북적대었다.   우리가 조선시대로 돌아가 포천 관내의 경흥로 한 길목을 지킬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길의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포천시는 과거 영평현까지 포섭하고 있어 경흥로가 갖는 다양한 콘텐츠를 거의 모두 담고 있다. 포천시를 흐르는 물의 근원은 둘인데, 하나는 남쪽 축석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동쪽 수원산에서 나온다.    조선 2

  • [길 그곳으로 가다·69]끊어진 철길 금강산 90㎞ 봄의 온기는 북으로 간다

    [길 그곳으로 가다·69]끊어진 철길 금강산 90㎞ 봄의 온기는 북으로 간다 지면기사

       69. 경흥로 > 2 < - 금강산에 새 봄을 배달하다   이 오는 길목'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쓰는 말이다. 그 중 공간으로 본다면 우리의 답사는 봄을 북쪽으로 가져다준 꼴이다. 봄은 당연히 남쪽부터 올진대 우리는 북으로 난 경흥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경흥로를 따라 올라갈수록 잔설이 많고 더 추웠던 것도 이 봄에 겨울을 경험한 추억이다.   ■ 장터와 고인돌과 미륵불이 지키는 길   축석고개 현충탑과 전적비를 두루 살펴보고 포천 소흘읍 송우리에 당도한다. '솔모루길'이라는 안내판이 정겹다. 솔모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왜 굳이 송우라고 했을까? 그나마 '솔모루' 입구에 새로운 솔밭공원을 조성하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형 할인매장이 새 솔밭 옆에 단장을 하지 않는가. 그 옛날 번성했던 솔모루 장은 이제 더 뒤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포천천 따라 올라가는 경흥로, 옛 파발막 옆 자작동에 고인돌이 있다. 크기도 만만치 않고 조형미도 좋아서 환영을 받는 고인돌이다. 더구나 경흥로를 계승한 43번국도 옆인지라 찾기도 쉽다. 고인돌 시대에도 경흥로까지는 아니어도 이 길을 어느 정도는 사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합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깝고 다니기 좋으면 길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의 포천시청은 포천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지만 옛 포천의 중심은 천변에서 벗어난 청성산(반월산) 아래가 터전이었다. 군내면 사무소가 그 자리일 터인데 오랜 세월 포천을 다스린 읍치소이다. 청성산의 반월산성이 그를 증명하는 셈이다. 반월산성은 작지만 조망만큼은 어느 산성에도 뒤지지 않아서 포천 일대를 충분히 지키고도 남는다.   이런 지리적 요충지에 설마 불교 유적이 없겠는가? 군내면 사무소 아래에 선 커다란 미륵이 옛길을 증언한다. 4.5가량 되는 큰 키에 후덕하면서도 위엄을 드러낸 모습에서 고려시대 불교의 한 단면이 보인다. 다만 지금 법당의 실내가 좁고

  • [길 그곳으로 가다·68]동북으로 뻗어나간 호국로 2천190리

    [길 그곳으로 가다·68]동북으로 뻗어나간 호국로 2천190리 지면기사

       경흥로 > 1 < - 서울에서 함경 서수라까지   경흥로는 서울에서 함경도 서수라(西水羅)까지 총 길이 2천190리 길이다. 경기도 내에서는 양주, 포천, 영평을 경유하고, 평구도 소속의 양주 녹양역, 포천 안기역, 영평 양문역 등에서 도로를 관리하였다.    의주로를 통일로로 부르는 것에 대하여 경흥로는 오늘날 호국로(護國路)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3번 국도 및 43번 국도가 옛 노선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였다.   경흥로는 지질·지형조건과 관련하여 옛 큰길 가운데 노선의 변경이 가장 적다. 삼방로가 연천에서 내려오는 지질구조선을 따라 놓인 것처럼 경흥로 역시 동북방향으로 뻗은 큰 지질구조선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선은 하천을 유도하고, 하천은 범람과 곡류를 반복하면서 연안에 좁고 긴 충적지를 형성시킨다.    또한 충적지는 기복과 경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로 이용된다. 결국 좁고 긴 하곡을 따라 놓인 경흥로는 새로운 노선이 모색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우선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1864)'에는 경흥로 노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도-수유현(15)-누원(17)-의정부(8)-서오랑점(10)-축석령(10)-송우장(20)-파발막(10)-안기역(10)-탄장거리(10)-만세교(10)-양문역(10)-유정(10)-굴운천(10)-서수라.   도성 안에서 혜화문을 나와 미아리고개를 넘거나, 동대문을 나와 신설동에서 종암동을 경유하여 수유현으로 이어지면서 경흥로가 시작된다. 수유현은 무너미고개로 불리는데, 지금의 신일중고등학교 앞의 작은 고개를 일컫는 것 같다.    누원(다락원)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경계 지점의 3번 국도 서쪽편 안쪽, 행정구역상으로는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한다. 조선후기에 누원은 송파와 더불어 서울 주변 큰 시장의 하나였다. 특히 동북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어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한때 서울의 시전상업을

  • [길 그곳으로 가다·67]상인들이 즈려밟은 오솔길, 큰길되다

    [길 그곳으로 가다·67]상인들이 즈려밟은 오솔길, 큰길되다 지면기사

       67. 삼방로 > 6 < - 18C중엽 상품유통로   애초에 관방시설을 갖추고 군사로로 이용하려는 목적때문에 조선의 중앙정부는 일반인들의 삼방로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추가령을 넘어 평강~연천~대탄~양주로 연결되는 삼방로는 좌우로 험한 절벽이 이어지기는 하나 철령을 넘어 회양~금성~김화~철원~포천~양주로 이어지는 경흥로보다 60리 정도 짧고, 추가령 자체가 철령보다 낮기 때문에 특히 상인들은 이 삼방로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오솔길에 불과했던 삼방로는 점차 평탄화 과정을 거쳐 대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노변에 새로운 상업취락이 형성되자 중앙정부에서도 더이상 삼방로를 폐쇄하자는 주장을 피력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중앙정부는 삼방로의 통행을 인정하고 대신 삼방로 남쪽의 분수령 일대를 방어기지로 강화하는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18세기 중엽에 삼방로는 이미 상품유통로로 자리를 잡았고 새로 관방대책까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조대에 삼방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에도 폐쇄가 불가하다는 쪽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때 양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관원들이 내세운 근거는 '이 길이 서울, 개성, 황해도로 가는 상인들의 주된 교통로이며 이미 길을 따라 점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폐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삼방로가 조선의 동북 교통로의 일축을 형성하자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고지도에는 경흥로(철령로)와 함께 삼방로가 표시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반에 김정호 역시 이를 간과하지 않고, 그가 제작한 '동여도'에서 삼방로의 자태를 뚜렷하게 표시하였으며, 노변에 형성된 상방(上防), 중방(中防), 하방(下防) 등의 노변시설 및 상업 취락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방로가 특히 중시된데에는 원산과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북어상(北魚商)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원산에서 북어를 수레나 등짐을 이용하여 삼방로를 따라 내려온후 현재의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했던 서울

  • [길 그곳으로 가다·66]恨 서린 한탄강 북으로 더 못가고 그렁거리던 열차·양공주·부대찌개… 옹이 쓰다듬다

    [길 그곳으로 가다·66]恨 서린 한탄강 북으로 더 못가고 그렁거리던 열차·양공주·부대찌개… 옹이 쓰다듬다 지면기사

       66. 삼방로 > 5 < - 빛도 그늘도 역사려니…   ■ 동두천의 그늘과 기억들    삼방로는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를 빠져 의정부와 동두천을 지난다. 이 길 주변의 도봉산이나 수락산도 시심을 꽤 자극했지만, '의정부'와 '동두천'은 현대사의 그늘을 환기하며 또 다른 시심을 불러냈다.    그래서 시편은 대부분 어둡고 아픈 기억들이 주조를 이룬다. '양공주'부터 '부대찌개'까지 만들어낸 이곳의 사연이 시인이나 독자의 마음에 우리 자신의 현주소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듯 빛도 그늘도 모두 이 땅의 역사려니, 삼방로 역시 많은 일을 제 안에 쟁인 채 오늘을 살아간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게 또한 문학의 소임일 터, 도처에 널려 있는 상처나 옹이를 비추고 쓰다듬는 시편들이 있다.    배밭길 질러 철뚝을 건너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고…   아직 우리들을 굳게 만드는 이 막막한 어둠말고 무엇을    우리들이 욕할 수 있을까   어둠조차 우리들이 벌 줄 수 있었던가   눈물일까 눈물일까 정이월 찬비 속으로   쓰러지지 못해 또다시 떠나는 우리들의 비겁함 외에는   무엇이 더 오래 남아 젖을지 정작 또 모르면서    첫 시집 제목을 '동두천'으로 할 만큼, 김명인 시인은 한때 '동두천'의 현실에서 시를 길어내곤 했다.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던 경험으로 '미운 오리새끼' 같은 혼혈 아이들이나 부모들의 아픔을 깊숙이 들여다본 것이다. 이에 따라 '동두천'은 특별한 지명으로 시사에 기록되는 한편, 시인에게도 초기의 주요 작품으로 남게 된다.    ■ 녹슨 철마가 달리는 환청, 신탄리역   신탄리역은 감회가 각별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 역을 찾은 사람들은 다 민족이며 나라에 대한 생각을 새삼 새겨보곤 했을 것이다

  • ■ 깨달음의 길

    ■ 깨달음의 길 지면기사

       금강산 가는 길은 깨달음을 찾는 길이다.    금강산은 북산이다. 남악(南岳)·북산(北山)은 우리나라 불교 성지의 쌍벽을 이룬다. 바로 지리산과 금강산이다. 특히 금강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상징이었고,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승려가 된다는 말이었다.    하여 금강산 가는 길에서 숱한 승려들과 그들이 거쳐 간 사찰을 만날 수 있다. 소요산 자재암, 의정부 망월사, 철원 심원사, 철원 도피안사,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길은 500년 전 매월당 김시습이 간 길이기도 하다.    서울 도성을 떠나 금강산으로 깨달음을 찾아 가는 길에는 의정부 어간 도봉의 아름다움에 취해 망월사로 올랐다. 그렇게 북동쪽으로 가는 길에 소요산 자재암에 들러 자재한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을 터.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위치했던 보개산 심원사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난 뒤 철원 도피안사 철불을 배관하고 철원평야를 에돌아 금강산으로 찾아가는 길은 승려들의 삼방로의 활용방법이었다.    보개산 심원사는 우리나라 지장신앙의 메카인 석대암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심원사를 둘러보고 쓴 김시습의 시를 통해 옛 영화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1907년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를 때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된다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침략적인 이유로 심원사를 불태웠다. 그리고 복구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소진된 심원사는 한국근대사의 아픔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바로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철원 보개산 심원사로 통칭되었으나 지금은 연천 보개산 심원사가 되어 있다. 지금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우리는 지금 금강산을 가고 있다.   처음 동해 뱃길로 갔다가 지금은 고성 해금강의 육로로 가고 있다. 그럼에도 외금강의 언저리와 해금강의 일부를 보고 올 따름이다. 금강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니 설악과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더욱

  • [길 그곳으로 가다·65]옛 이야기 가득 지닌 '천하절경' 일만이천봉 아! 그리운 금강산

    [길 그곳으로 가다·65]옛 이야기 가득 지닌 '천하절경' 일만이천봉 아! 그리운 금강산 지면기사

       65. 삼방로 > 4 < - 금강산 가는 길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우리의 산천은 단연 금강산이었다. 이는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떤 중국인도 그러하였고, 제주도에서 여인으로 태어났던 만덕이 정조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소원 역시 한양의 궁궐 구경과 금강산 구경이었다.    예조판서였던 월사 이정구(1564~1635)조차 함흥의 화릉(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의 묘) 봉심을 핑계로 40년 숙원이었던 금강산을 찾았을 정도였다.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죽는 천추의 한을 들이대며 함흥을 가겠다고 하는데 그 누가 막을손가?   금강산. 그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부심이었다.    금강산을 가기 위해 1485년 4월15일 서울을 출발한 추강 남효온(1453~1492) 일행은 보제원(普濟院)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90리 길을 가서 입암에서 잤다. 4월17일 소요산을 지나 대탄(大灘)을 건너 60리 길을 가서 연천에서 쉬었다. 이튿날 보개산을 지나 철원 옛 동주평야를 지나 남으로 100여 리를 가서 김화에서 잤다. 그렇게 2달 간의 남효온의 금강산 여행은 시작되었다. 김화를 지나 단발령을 넘는 것이 금강산을 가는 일반적인 코스였다.   이렇게 삼방로는 금강산 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기찻길이 놓였다. 경원선이다.   1903년 10월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에서 원산을 거쳐 경흥(慶興)에 이르는 철도를 놓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끝내 경원선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1910년 10월 경원선이 기공되어 이듬해 9월 용산에서 의정부까지 개통되었다.    그리고 의정부~연천 구간은 1912년 7월 운수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천~철원 구간은 10월7일부터 운수업무가 시작되었으나 철원~월정리~평강~복계 사이는 이듬해인 1913년 6월에야 개시되었다. 삼방로를 따라 개설된 경원선은 191

  • [길 그곳으로 가다·64]역사는, 흐르고 또 흐른다

    [길 그곳으로 가다·64]역사는, 흐르고 또 흐른다 지면기사

       64. 삼방로 > 3 < - 강 낮고 돌 험한 수잔석험(水淺石險)   서울에서 동북 방향으로 경흥까지 가는 길을 조선시기에는 북관대로(北關大路)라고 하였다. 지금은 경기도 제2청사가 위치한 의정부시 금오동을 지나 축석령을 넘어 포천시를 거쳐 강원도 김화로 연결되는 43번 국도다. 3번 국도 역시 그러한데 양주시청이 있는 주내면을 지나 동두천과 연천, 그리고 철원과 평강을 거쳐 간다. 지금은 3번 국도가 대로(大路)지만 과거에는 사행로(私行路)였으므로 간로(間路)로서 삼방로(三防路)로 불렀다. 이에 반해 43번 도로는 사행(使行)과 관행(官行) 때 이용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대로의 명칭이 붙었다.   북관대로는 조선후기인 18세기 중반에 이미 대로로서의 모습을 잃었다. 원산이나 함흥까지 가려면 철령(鐵嶺)을 넘어야 하는데, 고개 전후로 70리 가까운 거리에 방수(防守)하는 군졸이나 촌락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썰렁하였다고 한다. 골짜기로 거듭 연결된 삼방곡(三防谷)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이용한 결과였다.   철령을 서쪽으로 비껴가는 삼방곡은 평강현에서 북으로 100리 떨어진 안변부(安邊府)와 맞닿은 곳에 있다.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弓裔, ?~918)가 삼방로 부근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평강현 옛 지도를 보면 현 위쪽의 분수령(分水嶺)을 넘어 상방(上防), 중방(中防), 그리고 하방(下防)의 삼방이 차례로 있고, 중방 부근에 궁왕묘(弓王墓)가 표기되어 있다.   상방의 옛 성터에는 과객들의 신앙처인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목방곡(木防谷)에도 성을 쌓은 곳이 있는데 중방 또는 이방(二防)이라 한다. 목방곡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또 성터가 있는데 이것이 하방 또는 삼방(三防)이다. 철령을 넘는 관로(官路)가 비어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은 100여 호가 점촌(店村)을 형성하였는데 주민들은 북상(北商), 즉 원산에서 북어를 싣고 서울로 향하는 상인들을 상대

  • [길 그곳으로 가다·63 삼방로]시간의 길·공간의 길·이념의 길

    [길 그곳으로 가다·63 삼방로]시간의 길·공간의 길·이념의 길 지면기사

       63. 삼방로 > 2 < - 북으로 북으로 곧게 뻗다   옛길을 답사할 때마다 와닿는 느낌이지만 모든 길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거치고 확정된 길이었으니 당연히 편리한 노선으로 확정된다. 어느 권력자가 임의대로 바꾼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통행하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없는 길 아닌가?   삼방로도 마찬가지다. 도성을 벗어나 북진하면서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길을 냈는데 이는 중랑천의 상류이므로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다.   말도 많고 탈도 무성했던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의 큰 골칫거리가 바로 이 두 산 때문이었다. 사패산 터널과 수락터널 불암터널 등 멀리서 보기에도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암봉을 뚫어야 하고, 인근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까지 극복해야 했으니 난공사도 이런 난공사가 없으리라. 여기에 비하면 삼방로의 이 구간은 얄미울 정도로 미끄러지듯 잘 빠져 나갔다.   ■ 도봉과 수락의 자태는 인물을 만들고   도봉산의 위용을 어찌 이 짧은 글로 표현하겠는가? 또 수락산의 아름답고도 수려하면서 고고한 자태를 어찌 그려내겠는가? 삼방로를 걸어가던 옛사람들의 감동은 지금보다 더했을 것 아닌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1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수락산의 바위가 붕괴되어 사람들이 압사당한 것을 기록하였다. 특히 세종 1년에는 높이 23척, 너비 28척 크기의 바위가 떨어졌다고 하니, 고대로 돌아갈수록 도봉산과 수락산의 풍치는 더욱 좋았으리라.    도봉산 자락 망월사역 가까운 곳에 산악인 엄홍길 전시관이 들어섰다. 의정부시 호원동사무소였던 건물이다. 엄홍길의 업적과 산악 장비들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였다. 도봉산 중턱에서 삶을 이끌었던 부모님을 따라 유아기, 소년기를 보냈으니 크고 작은 바위들과 계곡이 놀이터요 산악 학습장이었으리라. 엄홍길이 히말라야의 높은 산

  • [길 그곳으로 가다 · 62]경흥로의 가장 중요한 지선

    [길 그곳으로 가다 · 62]경흥로의 가장 중요한 지선 지면기사

       62. 삼방로 >1< - 경흥로의 가장 중요한 지선   삼방로(三防路)는 신경준이 분류한 6대로 가운데 제2로로 명명된 경흥로의 가장 중요하고 큰 지선이다.   삼방이라는 이름은 조선 전기에 관북지방에서 자주 출몰했던 이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함경도 원산과 강원도 평강 사이의 협곡부에 세 개의 관방을 설치한 데에서 유래한다. 이 협곡은 한때 지구대(地溝帶)로 알려진 적도 있으나 지질구조선에 의해 유도된 좁고 긴 침식곡으로 판명되면서 지금은 통상 추가령구조곡 또는 추가령침식곡으로 불린다. 이 구조선은 평강~철원~연천~의정부까지 이어진다.   지질구조선은 좁고 긴 하곡을 유도하고, 두 개 이상의 구조선이 만나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분지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규모가 큰 취락이 입지하였다. 한성에서 의정부, 동두천, 전곡, 연천, 신탄리까지 이어지는 삼방로와 의정부에서 포천, 양문, 운천리, 갈말, 김화로 이어지는 경흥로는 지질구조선을 따라 놓인 대표적인 도로이다.    초기에 삼방로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로로서의 기능이 강조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상업로로서의 기능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삼방로를 상업로로 변모시킨 주체는 원산 지방의 북어상(北魚商)들이었다. 삼방로가 경흥로보다 더 빠르게 서울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통행량이 점차 많아졌고 이에 따라 도로 주변으로는 새로 형성되는 취락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일제시기에 신작로로 정비된 삼방로는 오늘날 3번국도로 계승되었으며 국도에는 잘 붙지 않은 평화로(平和路)라는 별칭을 갖게되었다.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1864)'에는 삼방로의 경로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삼방로】   의정부~비립거리(10, 분기)~어등산(20)~가정자(20)~대탄진(20)~가사평(10)~통현(10)~(10, 분기, 경140리)~거림(20)~용담역(30)~철원(10)~월내정참(20)~(30)&nbs

  • [길 그곳으로 가다·61]박제할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유물

    [길 그곳으로 가다·61]박제할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유물 지면기사

       61. 의주로 > 6 < - 수많은 발길 유구한 역사   의주로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시되던 도로였다. 18세기 중·후반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였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은 조선의 대로를 처음 6대로로 명명할 때 의주로에 제1로의 자격을 주었다. 여암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의주로가 중국에 연결되는 노선이라는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서북로로도 불렸던 의주로가 뻗어나간 방향이 자(子) 방향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이를 제1로로 삼았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제1로 이후 제2로부터 제6로에 이르기까지의 번호는 시계방향을 따라 순차적으로 매겨졌고, 이는 12간지(干支)로 방위를 설정할 때의 진행방향과 일치한다. 즉 자방향의 노선을 기준으로 삼아 이를 제1로로 부여하고 오른 방향으로 나머지 대로들에게 연번을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어쨌든 의주로는 조선의 제1 도로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노선의 변경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한의 총 49개 일반국도 노선 가운데 가장 번호가 빠른 1호 국도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국도 1호선은 전국의 국도 가운데 국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내막은 다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조선의 명맥을 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의주로는 서울∼개성∼평양∼의주를 잇는다. 서울은 굳이 설명할 필요없지만, 조선 건국 이래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을 한국 제일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개성은 그 이전 약 500년 동안 고려의 수도로 당대 최고의 중심지였다. 평양 역시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펴면서 새로 옮겨온 수도였으며, 의주는 조선시대에 국토로 편입된 이후 대중국 외교·군사·무역의 첨병도시로 중시된 최고차 국경도시였다.    총 길이 1천65리에 달하는 의주로는 곳곳에서 분기로가 뻗어나갔다. 경기도 고양군 신원리에서 분기하여 휴암점과

  • [길 그곳으로 가다·60]동강난 경의선, 북으로 내달리는 꿈구다

    [길 그곳으로 가다·60]동강난 경의선, 북으로 내달리는 꿈구다 지면기사

                                                                                                    60. 의주로 >5< - 임진강 너머 마음만 길게 내닫고   ■ 신의주, 마음이 먼저 내닫는 길   의주로에 서면 신의주가 떠오르고 내쳐 달리고 싶은 마음이 펄럭인다. 기차를 타고 개성, 신의주를 지나면 압록강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면 드넓은 평원이 펼쳐질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게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음을 뿌듯이 품고 오갔으리라.    그런데 이제는 갈 수 없는 땅이니 북방 정서를 헌걸차게 다룬 현대시를 많이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의 단절을 낳은 분단의 흔적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새삼 암담하다.   겨우 파주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서는   동강난 경의선 찻간에서 나도 꿈을 꾼다   차폐물로 골짜기에 숨겨진 탱크와 대포가   펄펄 끓는 도가니 속에 들어가 &nb

  • [길 그곳으로 가다·59]세계로 가는 통로 선진문물에 대한 사대부들의 호기심

    [길 그곳으로 가다·59]세계로 가는 통로 선진문물에 대한 사대부들의 호기심 지면기사

        59. 의주로 >4< - 사행(使行)-조천(朝天)과 연행(燕行)의 차이   고려가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한 이래 북방 요충지 서경(西京·평양)과 신라의 도읍 동경(東京·경주)의 3경(京)체제가 마련되었다. 이후 남경(南京·한양)을 3경으로 대우하면서 개경과 남경을 잇는 길의 중요성이 커져 갔다.   고대의 주요 교통수단은 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의 유력한 문벌귀족들이 바닷가 고을을 터전 삼았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문벌귀족들은 10대에 걸쳐 6명의 수상과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해주 최씨(최충), 문종에서 인종까지 5대의 왕에게 10명의 딸들을 시집보내 고려 최고의 외척이 된 인주 이씨(이자연-이호-이자겸), 파평 윤씨(윤관), 안산 김씨(김은부), 수주 최씨(최사위), 영광 김씨(김심언), 나주 문씨(문공원), 광양 김씨(김양감) 등이다.   조선이 남경이었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명나라가 해상교역을 봉쇄하는 해금정책 탓에 서울에서 개경을 지나 의주로 가는 길이 붐비게 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행렬이었는데, 이는 세계로 가는 소통의 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가 있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이 길은 매혹적이지 않았다. 300년 뒤인 고종 때 일본으로 가는 신사유람단으로 바뀌기까지 북행길이야말로 선진된 문물을 배우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만 한족의 명나라를 찾아가는 것이 `조천(朝天)'이었다면 만주족의 청나라로 가는 것은 `연행(燕行)'이라 불렀을 뿐 실제 내용상 차이는 없었다. 똑같은 북경을 가는 것임에도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과 `연경으로 가는 것'이라는 명과 청에 대한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의 자기위안이 있었을 뿐이다.   사행길은 단순한 사대적 외교 관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상거래가 동반한 무역이었다. 실제 조선의 상권은 사행로를 따라 번성하였다. 한양의 경상(京商)과 개성의 송상(松商)에 더하여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