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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군포] 빈곤한 유적속 조상혜안 번뜩 지면기사
정확한 지명 유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군포는 신라 경덕왕때 율진군에 속했다가 고려 태조 23년 과주(果州)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과천현(果川縣) 남면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인구 27만명의 중소자족도시로 선조들의 혜안과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89년 1월1일 시흥군 군포읍에서 시로 승격한 군포시는 급속한 공업화와 더불어 신도시 개발로 많은 문화유적이 파괴돼 이렇다할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그러나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조선백자 도요지를 비롯 정난종선생의 묘와 신도비, 광정리 지석묘, 전주이씨 안양군 묘, 삼성사, 방자유기장 등 선조들의 혼과 넋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향토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군포시의 문화는 비록 수적으로는 얼마되지 않고 빈약하지만 현존하거나 혹은 발굴조사된 문화유적들을 볼 때 군포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아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최근에도 수리산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각종 유물이 선사시대 것으로 판명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도 함께 발견되고 있다.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성씨 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많은 사대부 가문에서 이곳에 묘역(墓域)을 만들어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삼아 오기도 했다.▲이기조묘와 신도비조선 인조대의 문신이었던 이기조(李基祚)의 묘와 신도비가 산본동 1152의11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120여평이며 봉분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동자석·망주석·문인석 한쌍이 설치돼 있다.묘소에는 묘비가 없는 대신 동자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신도비는 묘에서 동쪽으로 30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해 있다.이 비석은 1단의 기단석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옥개석을 얹었다.기단석의 크기는 가로 155㎝, 세로 101㎝, 높이 48㎝로 윗 부분의 모서리는 반듯하게 깎아 만들었으며 비신은 높이 230㎝, 폭 92㎝, 두께 30㎝다.신도비의 비문은 숙종때 좌의정을 지내고 예학에 밝은 박세채(朴世采)가 지었고 손자 이명필(李明弼)이 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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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화성] 발길닿는 곳마다 짙은 '孝의 향기' 지면기사
화성시는 고구려 때 매홀군으로 불리다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년)에 수성군이라 개칭했다. 고려시대인 934년(태조 17년) 수주로 승격했으며 995년(성종 14년)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이후 1005년(목종 8년)에 폐지했으며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지사를 두고, 1271년(원종 12년)에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수원이라 개칭했다. 1310년(충선왕)에 부로 격하됐다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군으로 강등된 후 3년뒤 부로 환원됐다.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년)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됐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다시 수원도호부가 되고 1456년(세조 2년) 진을 설치해 판관을 배치했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 화산에 있던 읍치를 팔달산 밑으로 옮겼으며, 1794년 화성(수원성)을 착공해 1796년 완공했다. 1896년(건양 1년) 수원군이 되고 경기도 관찰부소재지가 됐다가 1910년 서울로 옮겨졌다. 그후 1931년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군역이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0년 오산에 있던 화성군청사를 현재의 남양동으로 신축 이전했고 2001년 시로 승격됐다.#안곡서원은 조선 현종 7년(1616년) 남양현감으로 부임한 민노중이 기묘명현인 도원제 박세희의 유풍을 숭모하여 현위치에 안곡서원을 창건하고 그의 위패를 봉안·향사한 것이 그 유래다. 그 뒤 현종 9년 도원제의 백형으로 역시 기묘명현인 송촌 박세훈을, 숙종 23년(1697년)에는 남양 유생 한덕봉외 150여명의 진장으로 인재 홍섬을 추배·봉사하였다.경종 1년(1721년)에는 안곡서원으로 사액됐으나 영조 5년(1729년) 첩설서원 철폐때 철폐됐다 영조 16년(1740년) 남양 유생들이 비첩설서원임을 상소하여 복액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76년 유림들에 의해 사자(祠字)를 중건, 3인의 위패를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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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광명] 세월따라 제도따라 地名 수없는 변화 지면기사
광명시는 철산동과 가학동에서 지석묘가 발견돼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 초에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근처 한강유역에 있어 백제의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남진으로 장수왕때 고구려 영토가 됐다. 그때의 지역은 잉벌노현이었으며 신라가 통일한 후 경덕왕대에 곡양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이르러서는 금주로 불렸다.조선시대에는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적인 지명 개편으로 금천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이후 정조 19년(1795년) 시흥현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시흥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고종 32년(1895년) 군제의 실시로 시흥군이 됐으며 1904년 서면이 이후 남면이 생겼다.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남면과 서면은 1913년 12월29일 공포되고 다음해 3월1일부터 시행된 총독부 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면이 서면에 흡수 통합됐고 리 역시 대폭적인 변혁이 이뤄졌다.▲철산동 지석묘(향토유적 제1호)거석숭배(巨石崇拜)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묘제 또는 제천단(祭天壇)으로서 예배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석실 하부구조는 적석(積石)시설을 갖추고 있는 강화군 삼거리 제3호 지석묘와 비슷한 형식이다. 개석은 치석(治石)한 흔적이 많으며 장축인 동·서 길이는 292㎝, 남·북 길이는 72~88㎝의 규모다. 동·서 마구리돌은 빠져나가 없고 남·북 지석이 개석을 떠받치고 있다.남쪽 지석 길이는 165㎝ 두께 40㎝ 지표에 노출된 높이는 49㎝ 정도다.지석묘 발굴당시 석실내부의 흙속에는 기와편·백자편·청자편·잡석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은 아니고 후대에 교란됐던 것으로 추측된다.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철산동 462의33으로 민가가 들어선 지역이었으나 도시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지난 1985년 1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이전·복원작업을 의뢰, 인근 광명고등학교 교정입구로 이전했다.이후 학교 교실의 부족으로 교사증축이 이뤄짐에 따라 시정조정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1990년 8월 현재의 시민회관 영내로 이전 관리해오고 있다.▲정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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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과천] 都城관문 600년역사 고이 간직 지면기사
# 관악사지관악사지는 지난 199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과천시 일원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발견당시는 정면에 석축을 갖춘 4곳의 건물지와 무너진 석종형 부도 1기 및 샘이 확인됐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 존속시기등 역사적 성격은 규명되지 못한 채 등산객들의 무심한 눈길만 받았다. 창건시기 등의 확인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99년 7월6일 관악산 정상부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관악사지의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부터다.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가 주축인 발굴단은 가~마지구 등 5곳으로 나눠 작업을 진행, 가지구 지표 50㎝ 지점에서 면을 다듬은 장대석재가 노출됐고 나지구에서도 초석하부 및 건물 온돌시설로 보이는 석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등 5개월간에 걸친 발굴작업을 무사히 끝냈다.관악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총 10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지의 규모는 남북 30m 동서 15m로 경사지를 석축으로 쌓아 단을 형성하며 지어졌고, 이같은 건물지의 상황으로 미뤄 전성기에는 상당한 규모를 지닌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또 출토된 자기편을 통해 15세기에 창건돼 18세기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특히 연주암과 관악사의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 지적돼 주목을 받았다.일반적으로 연주암은 관악사의 3차 중창시 효령대군이 현재 위치로 옮겨 40간의 가람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그러나 연주암의 3층석탑과 연주대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관악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로 미뤄 연주암과 관악사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더라도 독립된 사찰이란게 조사팀의 견해다.관악사지에는 사적가치가 높은 유물이 대량 발견됐다. 이중 수막새와 암막새 모두 회청색 내지 회흑색을 띠는 소성도가 높은 경질인 점이 조선시대 막새의 전형을 보였다.막새의 문양이 봉황문과 용문이란 점에서 왕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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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양주] 고고한 600星霜… 가는곳마다 선열숨결 지면기사
600년 역사의 양주땅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군지정 향토유적만 13개소에 달한다. 특히 양주군 향토유적 1호로 지정돼 지난 80년부터 84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진 양주대모산성(楊州大母山城)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매초성'의 한 부분으로 추정되는 등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93년 도 기념물 143호로 지정됐다.●남을진 선생묘 및 신도비향토유적 2호인 남을진(南乙珍) 선생묘 및 신도비는 은현면 봉암리 24에 위치해 있다.고려말 충신인 남을진 선생은 공양왕때 참지문하부사를 지냈고 성품이 강직, 간결해 조선 개국이후 벼슬을 버리고 사천에 은거했다.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감악산 깊숙이 들어가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으며 사후 그가 거처한 곳을 남선굴이라 불렀다. 영조 때 사천서원에 제향됐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2기, 문인석 2개 등 석물이 있으며 봉분의 높이는 2m, 둘레는 19m, 직경은 7m다. 묘소 아래 위치한 신도비는 팔각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정민시 선생묘 및 신도비향토유적 3호는 양주읍 산북리 산 92에 위치한 정민시(鄭民始) 선생묘 및 신도비다. 정민시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왕의 보필에 힘써 문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묘는 정경부인 완산 이씨와의 합장묘로서 봉분의 크기는 직경 550㎝ 높이 155㎝며 묘역이 있는 구릉 하단부에는 사후 정조가 친히 '정와정공민시지장'이란 어필과 전교를 내려 건립한 비석이 있다.●정렴 선생묘 향토유적 4호인 정렴 선생묘는 양주읍 산북리 산 92에 자리해 있다. 정렴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선비이자 의학자로 천문·지리·의서·복서에 두루 능통했으며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아 1544년 왕을 입진하기도 했다. 묘는 후손 정민시의 묘 맞은편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일 상부에 부생제 온양 정순붕과 정경부인 완산 가씨의 합장묘가, 아래에는 후손인 정광겸과 정부인의 합장묘가 있다.●이해수 선생묘향토유적 5호인 이해수(李海壽) 선생묘는 남면 한산리 산1에 위치해 있다. 명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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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연천] 한반도 전략적 요충지 지면기사
연천군은 경기도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한반도 허리부분에 해당된다.이런 까닭에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북부와 남부의 점이지대를 형성하는 동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삼국시대부터 임진강을 통해 서해교역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차지, 남방진출을 노리던 북방세력과 이를 제지하려는 세력이 패권을 다투던 변방이기도 했다.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조선 초 연천인구는 360명으로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었으며, 성종실록에는 영평·철원·평강·연천은 인적이 드물고 억새풀이 들을 덮었다고 기록돼 있다.삼국중 가장 먼저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은 백제였고 이후 정치·행정적인 변화가 계속됐다. 백제의 공목달(功木達)로 시작된 이 지역이 오늘날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을 얻게된 것은 고려말 1309년이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시 9주 5소경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한주(漢州)에 속했고 궁예가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을 개국했을 때는 이 세력권에 포함되었다.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개성을 본거지로 고려를 건국하면서 연천은 수도배후지 역할을 담당했다. 또 고려말 사회적 혼란과 왜구침입이 극에 달해 개성 근처까지 미치자 1377년 우왕때 철원과 함께 연천이 천도후보지로 거론됐으나 궁궐터를 답사한 숭경부윤 진영세가 오역의 땅이라고 보고해 후보지서 삭제됐다.조선 태종때 현감이 파견된 이래 이곳은 마전·삭령·적성·철원·양주·파주·포천등 인근 군·현과 여러번에 걸친 통폐합 과정을 거쳐 현재 행정구역은 2읍 8개면이다.●연천향교(향토유적 제2호)연천읍 차탄리 345에 소재한 연천향교는 1407년 태종 7년에 창건돼 효종 9년 1차 이전하고 한국전쟁 이후 재건과 이전 등 3차에 걸쳐 개·보수 됐다.건립당시는 대성전·명륜당·신문·창고등 5개동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등 6개동 건물로 구성돼 있다.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위와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제향기능은 전래되고 있으나 과거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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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동두천] 3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시대별유적 寶庫 지면기사
고구려시대 내을매(內乙買) 또는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린 동두천시는 대동지지에는 백제 영토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신라 경덕왕 16년(757) 사천으로 변경, 견성군(현재 포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81)에 양주에 예속되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돼 진이 만들어졌다.양주 속현으로 견주·풍양·사천이 있었는데 목의 34개 방리중 하나인 이담이 오늘날 동두천시 근원이다.조선조말 가정자리(조선 영조때 도승지를 지낸 이중경이 벼슬에서 물러나 현 동두천동에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가정자라고 한데서 유래)라 불리던 동두내(東頭川)에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고유명칭이 동두천리로 바뀌었다.이는 동쪽에 근원을 두고 냇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이며 40여년전까지만 해도 동두내라는 명칭이 잔존해 있었다.현재 동두천(東豆川)으로 표기되는데 가운데 두(頭)자가 두(豆)자로 변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며 1950년대로 추정될 뿐이다.7개동에 걸쳐 11개 향토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10개유적은 지난 86년, 나머지 1개는 지난 98년에 향토문화재로 지정됐다. 시대사별로는 신라~고려말~조선시대로 이어진다. #사패지 경계석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초 무신 어유소(魚有沼·1434~1489)장군이 1488년 국왕 성종과 함께 어등산에서 사냥을 하다 화살로 솔개를 맞혀 떨어뜨린 지점이다. 어장군은 동두천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동점마을 암각문동점마을 입구 하천변 바위에 '일이삼사 육칠팔구 황중원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행설에서 유래된 이 암각문은 이 마을이 우리나라 중심지이며 여러마을 가운데 가장 길지로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글씨는 토정 이지함이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옛 생활풍습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학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목행선 선생 묘지행동 산11의1에 소재한 이 문화재는 조선 인조때 문신인 목선생이 인조 14년 경기도도사로 재직시 곤궁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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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파주] 수만년째 박동하는 선사의 숨결 지면기사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굽이쳐 흘러 수도 서울의 한강과 만나 서해로 유입되는 천혜의 지리적 환경을 갖춘 파주시 역사는 1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파주지역은 삼국 영토분쟁의 주요 요충지로, 고려와 조선시대는 수도인 개경과 한양사이 수도방비는 물론 정치·지리·환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파주는 선사·역사시대와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수많은 문화유산과 흔적을 지금도 고이 간직한 문화의 보고다.그러나 국보급을 비롯한 유·무형문화재등 지정된 문화유산들은 보호하고 있는 반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수백여점의 유물·유적들은 관리를 하지않고 있는 실정이다.보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파주관내 미지정문화재 소개와 함께 소중한 파주문화 유산을 재조명한다.#용연연못파평면 눌노리 2천여평의 연못에 위치한 파평 윤씨 용연은 시조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려 태사 윤신달이 바로 파평 윤씨 시조로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2등 개국공신이다. 관은 삼중대광 태사로 용연못은 그의 탄생지로 전해져오고 있다.전설에 의하면 신라말 진성여왕 7년(893년) 한가윗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큰 폭우가 쏟아지고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돌상자 하나가 이곳서 떠올랐다. 이를 본 백성이 관아에 신고후 고을태수가 도착하니 돌상자는 이미 연못 속으로 잠겨버린 뒤였다. 그때 연못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파 앞으로 돌상자가 떠올라 열어보니 오색의 우모에 싸인 아기가 있었다. 손바닥에 윤자 무늬가 선명해 윤씨라 불렀다는 이 아기가 바로 윤신달이다.파평 윤씨 시조의 발상지인 용연못에는 남개연꽃이라는 수상식물이 자생하고 있는데 남개연꽃은 여름철에 노란색 꽃이 피는 희귀식물이다.#능원묘(서곡리 벽화고분)고려시대 벽화로 밝혀진 서곡리 벽화고분은 진동면 서곡리 산112에 위치해 있으며 벽화는 능원묘에서 발견됐다.능원묘는 청주 한씨 종중무덤으로 1991년 도굴분으로 신고돼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다 묘내에서 벽화를 발견하게 됐다.2기의 묘로 구성된 능원묘 1호묘는 분구 뒷면이 2호묘 전방에 구축한 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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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안양] 선조의 손길닿아 활짝 핀 불교문화 지면기사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지명이 유래된 안양은 현재 인구 60만의 수도권 중핵도시로 선조들의 혜안과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73년 시로 승격한 안양시는 이렇다할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물 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를 비롯 도유형문화재인 석수동 마애종, 삼막사 3층 석탑, 안양사 귀부와 박서 신도비, 삼막사 삼귀자 등 선조들의 혼과 넋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향토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안양시의 문화는 지명 유래에서 보듯이 불교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문헌상에 최초로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고구려 때 율목군에서 시작되고 있다.그러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평촌신도시 개발과 함께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오래된 주거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백제 근초고왕때 백제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 남쪽 영토가 된 안양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정조대왕의 만안교 축조와 능행로가 만들어져 행정발전과 함께 선조들의 각종 문화를 꽃 피우고 있다.아직은 시향토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안양지역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개한다.#박서 신도비신도비는 종2품 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다. 박서(1602~165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황해도 관찰사 병조참판, 공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이 비는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는 만안구 박달2동 환경사업소 입구 은기목장내에 위치해 있으며 박서의 묘는 신도비로부터 북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해 있다. 총고는 3.82m이며 1665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안양사 부도(安養寺 浮屠)탑신과 기단 중석은 없으나 하대석(下臺石)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地臺石) 복연(複蓮)으로 장식됐으며 상대석(上臺石)은 앙연(仰蓮)이 조각됐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3단의 옥개 받침위에 있고 처마의 상·하선이 전각(轉角)부분에서 반전하며 높이는 1.36m 너비 1.35m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부도는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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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시흥] 연꽃 자태닮아 기품있는 연성문화 지면기사
저 멀리 고구려시대부터 '뻗어 가는 땅' '넓은 땅'이란 뜻의 '잉벌노(仍伐奴)'로 표기했던 시흥시는 현재 서해안시대 중추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고 급성장하고 있어 선조들이 지명을 붙인 혜안이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89년 시로 승격한 시흥시는 군시절 지역이 7개시로 분리될 정도로 지역이 넓고 세가 컸던 만큼 국가 지정 보물인 소래산 마애상(磨崖像)과 사적 제413호인 방산동 청자·백자요지 등 중요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연성금사시첩시흥의 대표적 문화로 꼽히는 연성문화는 조선후기 전성기를 맞으면서 양주·양평의 화서문화와 쌍벽을 이뤄 화서문화의 기둥이 이항노선생이라면 연성문화는 장유선생의 영향을 받았다.연성문화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장유가 역신으로 몰려 현재 장곡동 움막집에서 은거하면서 당시 선비들과 시류 논쟁을 벌인 '다락방 문화'가 바로 연성문화의 시효라고 '인조실록'에 기술돼 있다.이어 고종 14년 경기 서부지역 선비들이 시를 짓거나 시국을 논의하는 등 연성문화의 맥을 이어갔던 기록이 '연성금사시첩(蓮城昑社詩帖)'(죽률동 남양 홍씨 자손보관)에 있다.연성금사시첩에는 당시 선비들이 장유의 다락방문화를 본받아 제자와 스승간, 회원간의 관습적 도덕률이 엄격하면서도 선비의 도도한 인품과 풍류를 시로 읊으며 교류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경수·홍재식·박대병·김봉안·윤종선·박상오·유응렬·강영돈 등 40여명의 활동 회원 명단이 있다.◇태봉(胎封)일반적으로 태실·태묘 등으로 불리는 태봉은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관내에는 모두 3곳이 있었다.금이동 부근의 태장뿌리 산과 거모동 군자 초등학교 앞, 또 지난 90년 5월4일 시향토유적 6호로 지정된 무지내동 해발 50m 산 정상에 있는 것 등이다.앞의 두곳 태봉은 파괴되었고 현재 유적으로 보존되는 무지내동 태봉은 깊이 2m에 지름 0.85m 높이 0.47m, 두께 0.16m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함을 묻은 조선시대의 태실지다.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하여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인물의 태는 태봉으로 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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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여주] 성현의 향취 머금은 '역사의 고장' 지면기사
여주는 국보4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60여점에 달하는 문화재와 한글을 창조한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소재하고 있는 등 많은 문화유산과 옛 조상의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국가·도지정문화재를 제외하고 일반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주 향토유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매산서원(梅山書院·향토유적 제10호)고려말 학자이며 문신으로 전의주부(典儀主簿)·조사의대부를 지낸 삼우당 문익점(1329~1398년)을 제향하는 곳이다.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 장천익과 함께 고향인 강성현(江城縣·경남 산청)에 재배하여 뒷날 한국의 의류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조선 세조때 문익점만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되었으나 목은 이색(1328~1396년)과의 교우를 참작하여 후손과 유림에게 이색도 함께 모시도록 하고 서원(書院)으로 승격시켰다.이후 후손 문겸(文謙)이 병자호란때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사당각(祠堂閣)을 건립한 이래 춘추로 제향해 왔다.외삼문(外三門)인 솟을대문 앞에 신성한 구역의 입구를 뜻하는 홍살문이 서있고, 외삼문부터 전체 경내를 담장으로 에워쌌다.큰 당의 강당은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고 있으며, 정면은 9.78m(3칸)로 좌우에 작은 퇴간 1칸씩을 달았고 측면은 6.6m(3칸)다. 그 위 높직한 대지에는 내삼문이 있어 또 하나의 담장을 시설하고 안에 사당을 세워 '매산사(梅山祠)'란 사액(祠額)을 달았는데 이 안에 삼우당과 목은의 위패를 모셨다.맞배지붕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한식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은 4.4m(1칸)로 좌우에 퇴간 1칸씩을 붙였고 측면은 3.6m(1칸)로 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원호장군묘(元豪將軍墓·향토유적 제2호)원호장군의 묘는 북내면 장암리 원두표선생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부인 상주 김씨와 합장된 봉분 앞에는 비석·상석·향로석이 있고 망주석은 없이 문신석만 양쪽으로 서 있다.신도비문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었다. 조선 중기 무신인 원호(1533~1592년)는 첨지(僉知) 원송수(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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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가평]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을 지면기사
한반도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가평군은 옛 조상의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고장이다.높은 산과 깊은 계곡 그리고 맑은 물로 경기도내 대표적인 휴양지인 가평의 지명은 신라때 지어졌다. 경덕왕 16년(757년)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을이라 해 가평(嘉平)이라 명명했다. 이후 1018년(고려 현종 9년) 인구가 감소하면서 가평을 강원도 춘천부에 예속시켰으며 1397년(조선 태조 6년)에는 가평향교를 설치, 유생들을 배출했다.조선조 태종때 경기도로 이관된 이후 1507년에는 중종의 어태가 봉안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는 등 춘천부·양주목·포천군의 편입과 분리를 되풀이하다 고종 35년 포천군에서 가평군으로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특히 1599년 명필로 유명한 한호 석봉이 가평군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이때부터 이름있는 학자들이 가평을 찾아와 학문에 전념하는 풍토가 조성됐다고 한다.학자와 학문의 고장인 가평군에는 조상의 얼이 깃들어 있는 많은 향토유적이 있다.향토유적 제1호인 현등사(하면 하판리)내 화담당 경화탑은 화담 박경화(1786~1848)의 부도탑으로 서기 1848년에 세웠다.부도탑의 주인공인 화담당은 1803년에 화양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고 지탁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후 강원도 보개산 석대암에서 화엄경·열반경 등을 연구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67품의 계송을 펴다가 현등사에서 수도에 전념했다.이 탑에는 도광무신시월일입(道光戊申十月日立)이란 연대가 있어 조선시대 부도탑임을 알 수 있다.향토소유적 2호인 가평향교는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창설돼 대성전과 동무·서무·내삼문·명륜당을 건축하고 중앙에 문선왕인 공자를 비롯 안자·증자·자사·맹자등 다섯 성현의 위패를 봉안했다.동종향으로는 송준기·김집·김장생·이이·이황·조광조·김광필·안유·설총·정호등 10인의 현인을 모셨으며 서종향에는 주희·최치원·정몽주·정여창·이언유·김인후·성흔·조헌·송시열·박세변 등의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첫번째 정일이 드는 날)에 춘추석존제를 봉행하고 있다.일설에 의하면 가평향교는 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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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남양주] 실사구시·청렴함… 선비정신 그윽 지면기사
■향토유적남양주에는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선생묘(기념물 7호)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대동법을 비롯한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해 경제정책과 제도개혁을 주도한 김육(金堉)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2호)가 있다.또한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을 시작으로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능인 홍릉을 비롯해 조선왕조 마지막으로 조영된 왕릉 유릉은 제27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씨의 능 등 3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묘를 비롯, 조선 왕조의 능이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이처럼 남양주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문인 실학사상을 보급하고 일생을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며 애국충절과 깨끗한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는 충신들 및 왕과 왕비 등의 묘소가 여러 곳에 자리잡고 있다.이밖에 호국사찰로 알려진 봉선사 말사인 묘적사 대웅전앞에는 남양주 향토유적 1호인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이탑은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과 인근에 있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과 그 양식이 동일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은 팔각다층석탑으로서 조선초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 절에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묘적사는 국왕직속의 비밀기구가 있었던 곳으로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곳에 사찰을 지은 후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별내면 화접리 주을곡 282 조선 개국공신 남재사당과 묘는 향토유적 5호, 화도읍 녹촌리 192 능원대군인 이보선생신도비는 향토유적 3호, 평내동 151의 조선개국공신인 의안대군 이화의 사당은 향토유적 4호, 별내면 화접리 282 조선개국공신으로 구정유고의 저자인 남재선생 묘 및 신도비는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어 있다.근무지마다 청렴결백하고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며 선정을 베풀어 부임하는 곳마다 송덕비가 세워진 조선중기 문신 남선선생 묘 및 신도비는 별내면 청학리 산78에 있으며 향토유적 7호, 조선초기 문신이자 서예가로 영중추원사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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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포천] '금강산 가는 길목' 곳곳에 운치 지면기사
군의 관문인 축석령부터 금강산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106㎞밖에 되지 않아 '금강산 가는 길목'으로 널리 알려진 포천군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중북부지방의 교통·군사요충지로 궁예와 조선태조 이성계의 전설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포천군의 한복판을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포천천이 한탄강으로 이어져 한반도의 서북지역과 한강본류의 하류지역으로 연결돼 있고 동북쪽으로는 추가령 지구대를 따라 이동통로가 열려 있어 역사의 격변기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역할을 해왔다.또 충효의 고장답게 독립투사 최익현·이규채·이범영·최면식·조영원선생과 영조때의 청백리 정만석, 선조때 효자 신급, 숙종때 효자 오백주 등의 묘와 정문 그리고 이들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금수정(金水亭)포천군 창수면 오가리에 위치한 금수정은 향토유적 17호로 영평천(永平川)의 수면에서 8m정도되는 절벽위 평평한 대지위에 서있다.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옛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해 있던 금수정은 영평 8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정자이기도 했다.주위에는 창옥병(蒼玉屛)을 비롯해 준암·연화암·동천석문(洞天石門)등 기승지(奇勝地)가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를 즐겼던 곳이다. 당대의 시인이며 명필인 봉래 양사언선생을 비롯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등 지역과 연관깊은 명유들에 얽힌 많은 일화가 남겨져 있다.양사언이 금수정 10m위 바윗돌에 새긴 ‘취대(翠臺)’라는 글씨와 냇가 한복판 바위에 '부도(浮島)'라고 쓴 각자 등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정자의 건립연대는 앞의 명유들과의 인연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6세기 초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그러나 이 금수정은 6·25동란시 자취도 없이 소실돼 장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지난 89년 복원사업에 들어가 정면 2칸, 측면 2칸, 면적은 17㎡, 처마높이 4m, 최고 높이 7m로, 초석은 화강암 장초석(길게 세운 주춧돌)등으로 덧서까래 겹처마 팔작지붕형식(서까래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지은 형태)의 옛모습대로 복원 중수됐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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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안성] 위풍당당 하늘찌르는 '名將의 충절' 지면기사
'나라를 지켜내려는 의병장의 함성과 창·칼 부딪치는 금속음, 말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름모를 야생화와 바람만이 묘소를 감도네. 의병들의 애국충절, 후손들을 일깨우네'.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노랫말은 의병장 홍자수 장군을 기리기 위한 구전 가요다.우국충절의 정신이 깊게 배어있는 충의의 고장 안성지역은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향토유적안성인의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홍장군의 묘는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 산18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86년 5월 향토유적 제31호로 지정됐다.홍장군은 미양면 갈전리에서 태어나 선조 25년(1592)에 숨을 거둔 임진왜란의 의병장이며 아들 5형제와 함께 의병을 모집해 진천 엽둔고개에서 왜적을 대파하기도 했다.이처럼 안성지역에는 일생을 애국충절과 깨끗한 선비정신, 백성을 사랑했던 선조들의 묘소가 여러곳 자리를 잡고있다.부정과 타협을 혁파해 조선시대 청백리의 상징으로 꼽혔던 '최만리 선생(?~1445)의 묘(원곡면 지문리) 및 신도비'는 86년 5월 향토유적 32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와 함께 후손들에게 큰 교훈과 가르침을 줬던 문신·무신등 안성이 배출한 충신들의 묘 13개가 향토유적으로 지정돼 주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부여하고 있다.특히 안성시는 경기도 여타 지역중 신라·고려시대의 불교유적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는 양성면 방신리 '운수암' 비로전에 안치된 '비로자나불좌상'은 지난 86년 향토유적 제16호, 금광면 석남사 석탑(높이 225㎝)은 19호로 지정돼 있다.죽산면 매산리 소재 '미륵당 오층석탑'은 향토유적 제20호, 조선 현종때 세워진 죽산면 '칠장사 사적비'는 24호, 조선 현종 15년에 만들어진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 청동종'은 향토 유적 26호다.입적한 고승의 유골을 안치한 '청룡사 부도군'은 지난 86년 향토유적 27호, 조선후기에 건립된 금강면 상중리 '석남사 부도'는 28호로 지정되는 등 당시 안성지역은 법력이 뛰어난 스님들이 도를 닦던 곳이기도 하다.부도군은 모두 석종형으로 (石鐘型)으로 방형과 8각, 또는 원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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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안산편] 君主·위인 유난히 많은 명예로운 고을 지면기사
안산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 또는 고사야홀차현인데 신라 진덕왕이 장구현으로 고쳤으며 신문왕때 장구현으로 승격됐다.고려초기에 안산현으로 고쳤다가 현종 9년(1018)에 수주(수원)의 속현으로 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덕종, 정종, 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고을이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돼 이후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전면적인 지방통치 조직의 개편이 있었고 그 일환으로 실시된 8도제의 시행에 따라 경기도에 예속, 안산군으로 되어 이후 군수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고종 32년(1895)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가 1914년 시흥, 과천, 안산의 3개군이 시흥군이란 명칭으로 통합됐다.1976년 시흥군의 수암·군자면과 화성군의 반월면 일대가 반월 신공업도시로 조성되면서 해마다 인구가 증가되어 지난 86년 1월 시승격과 함께 안산의 뿌리를 찾아 안산시로 부르게 됐다.안산에는 20개 유적의 향토문화재(잿머리 성황당과 선부도 지석묘, 강징 선생 묘 및 신도비, 김류 선생 영정, 부계팔경도, 최용신 선생 묘, 홍정희 효자문, 대부도 자선비 등)가 있다.■ 잿머리 성황당 유래안산시 성곡동 산 76에 위치한 잿머리 성황당은 다른 여러지방의 성황당과는 달리 발생유래가 특이하다.일반적인 성황당이 한마을 단위만의 제액초복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발생한데 반해 잿머리 성황당은 발생설화가 독톡하다.고려 6대 성종(982~997)때 내부시랑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게되어 잿머리 해안(현재 당집이 있는 아래)에서 배를 타려고 했을때 갑자기 잠잠하던 바다가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그날 밤 서희가 장도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들었을때 꿈에 소복을 한 두 여인이 나타나 “우리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친정 어머니 안씨인데 경순왕과 결혼 후 나라가 망하고 비명에 죽은 것이 한이 되어 모녀 혼령이 안주치 못하고 이렇게 배회하고 있으니 저희 거처라도 마련해 주십사고 이렇게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서희는 이튿날 그곳에 작은 성을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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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이천] 왕건이 이름지은 땅 '天下가 이로운 기운' 지면기사
삼국시대 군사전략의 요충지요, 삼국통일의 영지였던 설봉산 서쪽기슭과 이어진 평야지대에 자리한 이천시는 461.23㎢의 면적에 13개 읍·면·동으로 구성된 도·농복합도시다.시내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마장면의 도드람산, 동쪽에는 부발읍 효양산, 남쪽은 설성면의 노성산과 장호원의 백족산등 영산이 주변을 감싸는 지리적 특성으로 지역 특유의 향토유적과 애증어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특히 이천(利川)의 유래를 살펴보지 않고 이천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할 정도로 이천은 명칭부터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려 이전에는 남천(南川)·남매(南買)·황무(黃武) 등으로 불리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지금의 명칭을 얻게 된다.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남천을 관통하는 복하천(福河川)에 이르렀을 때 홍수가 나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이 지역을 잘아는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길을 인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전쟁에서 승리한 왕건이 가상히 여겨 “학문과 덕을 쌓고 몸을 기르면 험난한 과정이랄 수 있는 대천(大川)을 건너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온천하가 이롭게 된다”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利'자와 '川'자를 따서 '利川'이라는 명칭을 하사한 이래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다.그래서인지 이천은 지금도 천혜의 기후와 토양, 물이 어우러져 최고 품질의 이천쌀이 생산되고 있으며 주류와 식품공장이 즐비하다.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인 영월암(映月庵)은 이천의 진산(鎭山)인 설봉산 주봉 기슭에 자리잡은 이천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경내에는 고려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향토유적 제3호인 석조광배(石造光背)및 연화좌대(蓮花座臺), 그리고 석조(石槽)3층석탑 등이 긴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영월암의 창건연대는 대략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보고 있다.조선 후기인 영조 50년에 이르러 영월 낭규대사가 큰 불사를 일으켜 중건했으며, 1911년 보은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주지인 유신암 스님이 극락전을 세웠다. 또한 1937년 조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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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김포편] 선비의 고고한 기품 '닮고픈 마음' 지면기사
김포지역은 반도로 동쪽으로 한강과 이어져 있다. 한강 건너면 파주·고양시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염하강을 건너 강화도가, 북쪽에는 조강을 건너 개풍군이, 남동쪽은 서울·인천·부천시와 접한다.남동에서 북서로 길게 돌출해 있는 김포반도는 오랜 침식작용을 받아 낮아진 준평원과 한강 중상류및 지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매립돼 발달한 충적지가 합해져 지형이 전체적으로 평탄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이처럼 천혜의 평야와 한국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있어 농경문화가 일찌감치 발달, 우리나라 최초의 쌀 생산지로 알려져 있고, 고구려 장수왕 63년(476년) 최초로 김포라는 지명이 쓰였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평야지대인 만큼 타 고장과 비교해 문화유적 및 사적지가 많지는 않으나 문수산성과 덕포진, 한재당, 대성원, 김포 및 통진향교, 우저서원 등은 지역문화재로 고장의 자랑거리다.이 가운데 향토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돼 오고 있는 대포서원, 대성원, 심응사당, 군하리 비군, 봉수대등에 대한 연혁 등을 살펴본다.향토유적 1호인 양촌면 대포리 대포서원은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양성지(1415~1482)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다.1791년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출생지에 월곡서원이 창건됐고 만년을 보낸 통진에 서원 건립을 주선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 남원양씨 문중에서 지난 1973년 대포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밑에 사우를 짓고 이곳 지명을 따서 대포서원이라 했다.건물은 좌측에 현대식 강당과 그 후면으로 3문과 사당이 있다.남원양씨 문중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서원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대곶면 약암리 승마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향토유적 3호인 대성원은 조선말기 이 고장 출신의 유생인 심성택선생이 사재로 이 건물을 축조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성원은 현재 입구에서 삼문까지는 장대석의 돌계단이 깔려져 있고 양 옆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어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느끼게 하고 있다.삼문 안쪽의 본원은 팔작지붕의 한식기와를 얹은 굴도리집으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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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하남] 義人의 향기 날리는 '풍요의 땅' 지면기사
하남지역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덕풍천·산곡천 등 샛강의 물이 흘러 들며 풍부한 양의 생명수를 제공, 그 옆으 형성된 평야를 기름지게 했다.경기도의 중심부에 자리한 하남은 동쪽으로 광주시 남종면과 남양주시 조안면, 서쪽으로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남쪽으로 광주시 중부면과 성남시,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인접하고 있다.또한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전원풍 도시로 이런 지형의 하남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좋았으며 일찍부터 신문화를 받아들여 보다 우수한 문화를 만들며 크고 작은 많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향토유적 제3호인 하남시 상산곡동 100의2 사충서원 묘정비는 조선조 경종때 영의정 김창집등 4명의 신하가 숙종의 셋째 왕자인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서다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신임사화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1786년(정조10)에 건립한 서원과 비다.당시 노량진에 세워진 이 서원은 고종·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사를 지내왔으며 중건한지 172년이 지난 1927년 이곳이 철도용지로 수용, 다시 용산으로 옮겨졌으나 6·25때 소실되면서 1968년 현재의 하남시로 다시 옮겨왔다.서원건물은 다시 지어 옛모습은 없으나 그 앞에 있는 묘정비는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올림픽대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교차하는 하일인터체인지에서 미사리 조정경기장 쪽으로 1.4㎞쯤 가면 삼거리에 향토유적 4호인 구산성지(망월동 387의12)가 자리해 있다.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해 불리는 구산마을은 103인의 성인중 71번째 성인 김우집(김성우 안토니오)을 비롯, 9명의 박해시대 순교자 묘역이 있는 유서깊은 사적지로 하남을 대표하고 있다.구산성지 사적지의 담장을 돌아 들어서면 고 김세중화백이 조각한 성모자상이 있고 이곳을 지나 또 다른문을 열면 그 안에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묘소와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1795년(정조19)에 태어난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중국인 유방제신부와 함께 구산으로 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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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정 문화재 - 평택] 애국충절의 기운 '진한 여운' 지면기사
'仙人橋(선인교) 나린 물이 紫霞洞(자하동)에 흘러 드러 半千年(반천 년) 王業(왕업)이 물소래뿐이로다. 아희야. 故國興亡(고국 흥망)을 무러 무삼하리요'.이 글은 조선개국 공신으로 조선 경국전을 집필, 편찬했으며 이태조의 총애를 받던 삼봉 정도전(鄭道傳, 1337~1398)선생이 지은 '회고가'다.고려 왕조에 등과해 녹을 먹었던 정도전은 이 회고가를 통해 고려 흥망의 무상함을,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글로 표현했다.강성대국을 표명했던 삼봉은 '이방원의 난'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해됐지만 요동정벌을 주장하던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아직도 들리는듯 하다.◇향토유적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 아늑한 곳에 위치한 정도전선생 사당내에는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 그리고 고종이 내린 사액 현판(유종공종·儒宗功宗)이 걸려있다.정도전선생 사당은 지난 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됐으며 삼봉의 철학과 사상이 수록된 '삼봉집 목판본' 14권 459혈 236포가 판각고에 보관돼 있다.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는 고종 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회복됐으며 당시 고종은 삼봉에게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위면 은산리에 사당을 지어 삼봉의 업적과 덕망을 기렸다.'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며 민본 정치를 주창했던 삼봉은 분명 백성을 사랑했던 위대한 정치가로서 평택시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서탄면 금암리에 위치한 '韓蘊將軍 忠臣旌問(향토유적 3호)'은 정도전 사당에 이어 또하나의 대표적 향토유적이다. 조선 숙종 22년(1696년)에 세워졌다.이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온 장군은 38세때 장흥부사에 부임, 왜구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사당안에는' 鐵腸石膳 一心殉國'이란 현판이 걸려있다.'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은 오직 나라에 바쳤도다'. 애국심과 순절의 교훈을 주고 있는 한온장군은 후세에게 조국의 참 뜻을 일깨우고 있다.이와함께 평택지역의 향토유적은 이충동 산 37의1에 있는 '충의각(향토유적 5호)', 도일동 산 84에 위치한 '원균사당(향토유적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