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군지정 문화재 - 군포] 빈곤한 유적속 조상혜안 번뜩 지면기사

    정확한 지명 유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군포는 신라 경덕왕때 율진군에 속했다가 고려 태조 23년 과주(果州)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과천현(果川縣) 남면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인구 27만명의 중소자족도시로 선조들의 혜안과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89년 1월1일 시흥군 군포읍에서 시로 승격한 군포시는 급속한 공업화와 더불어 신도시 개발로 많은 문화유적이 파괴돼 이렇다할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그러나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조선백자 도요지를 비롯 정난종선생의 묘와 신도비, 광정리 지석묘, 전주이씨 안양군 묘, 삼성사, 방자유기장 등 선조들의 혼과 넋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향토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군포시의 문화는 비록 수적으로는 얼마되지 않고 빈약하지만 현존하거나 혹은 발굴조사된 문화유적들을 볼 때 군포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아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최근에도 수리산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각종 유물이 선사시대 것으로 판명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도 함께 발견되고 있다.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성씨 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많은 사대부 가문에서 이곳에 묘역(墓域)을 만들어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삼아 오기도 했다.▲이기조묘와 신도비조선 인조대의 문신이었던 이기조(李基祚)의 묘와 신도비가 산본동 1152의11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120여평이며 봉분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동자석·망주석·문인석 한쌍이 설치돼 있다.묘소에는 묘비가 없는 대신 동자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신도비는 묘에서 동쪽으로 30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해 있다.이 비석은 1단의 기단석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옥개석을 얹었다.기단석의 크기는 가로 155㎝, 세로 101㎝, 높이 48㎝로 윗 부분의 모서리는 반듯하게 깎아 만들었으며 비신은 높이 230㎝, 폭 92㎝, 두께 30㎝다.신도비의 비문은 숙종때 좌의정을 지내고 예학에 밝은 박세채(朴世采)가 지었고 손자 이명필(李明弼)이 썼으며

  • [시·군지정 문화재 - 화성] 발길닿는 곳마다 짙은 '孝의 향기' 지면기사

    화성시는 고구려 때 매홀군으로 불리다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년)에 수성군이라 개칭했다. 고려시대인 934년(태조 17년) 수주로 승격했으며 995년(성종 14년)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이후 1005년(목종 8년)에 폐지했으며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지사를 두고, 1271년(원종 12년)에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수원이라 개칭했다. 1310년(충선왕)에 부로 격하됐다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군으로 강등된 후 3년뒤 부로 환원됐다.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년)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됐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다시 수원도호부가 되고 1456년(세조 2년) 진을 설치해 판관을 배치했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 화산에 있던 읍치를 팔달산 밑으로 옮겼으며, 1794년 화성(수원성)을 착공해 1796년 완공했다. 1896년(건양 1년) 수원군이 되고 경기도 관찰부소재지가 됐다가 1910년 서울로 옮겨졌다. 그후 1931년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군역이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0년 오산에 있던 화성군청사를 현재의 남양동으로 신축 이전했고 2001년 시로 승격됐다.#안곡서원은 조선 현종 7년(1616년) 남양현감으로 부임한 민노중이 기묘명현인 도원제 박세희의 유풍을 숭모하여 현위치에 안곡서원을 창건하고 그의 위패를 봉안·향사한 것이 그 유래다. 그 뒤 현종 9년 도원제의 백형으로 역시 기묘명현인 송촌 박세훈을, 숙종 23년(1697년)에는 남양 유생 한덕봉외 150여명의 진장으로 인재 홍섬을 추배·봉사하였다.경종 1년(1721년)에는 안곡서원으로 사액됐으나 영조 5년(1729년) 첩설서원 철폐때 철폐됐다 영조 16년(1740년) 남양 유생들이 비첩설서원임을 상소하여 복액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76년 유림들에 의해 사자(祠字)를 중건, 3인의 위패를 봉안

  • [시·군지정 문화재 - 광명] 세월따라 제도따라 地名 수없는 변화 지면기사

    광명시는 철산동과 가학동에서 지석묘가 발견돼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 초에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근처 한강유역에 있어 백제의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남진으로 장수왕때 고구려 영토가 됐다. 그때의 지역은 잉벌노현이었으며 신라가 통일한 후 경덕왕대에 곡양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이르러서는 금주로 불렸다.조선시대에는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적인 지명 개편으로 금천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이후 정조 19년(1795년) 시흥현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시흥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고종 32년(1895년) 군제의 실시로 시흥군이 됐으며 1904년 서면이 이후 남면이 생겼다.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남면과 서면은 1913년 12월29일 공포되고 다음해 3월1일부터 시행된 총독부 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면이 서면에 흡수 통합됐고 리 역시 대폭적인 변혁이 이뤄졌다.▲철산동 지석묘(향토유적 제1호)거석숭배(巨石崇拜)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묘제 또는 제천단(祭天壇)으로서 예배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석실 하부구조는 적석(積石)시설을 갖추고 있는 강화군 삼거리 제3호 지석묘와 비슷한 형식이다. 개석은 치석(治石)한 흔적이 많으며 장축인 동·서 길이는 292㎝, 남·북 길이는 72~88㎝의 규모다. 동·서 마구리돌은 빠져나가 없고 남·북 지석이 개석을 떠받치고 있다.남쪽 지석 길이는 165㎝ 두께 40㎝ 지표에 노출된 높이는 49㎝ 정도다.지석묘 발굴당시 석실내부의 흙속에는 기와편·백자편·청자편·잡석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은 아니고 후대에 교란됐던 것으로 추측된다.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철산동 462의33으로 민가가 들어선 지역이었으나 도시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지난 1985년 1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이전·복원작업을 의뢰, 인근 광명고등학교 교정입구로 이전했다.이후 학교 교실의 부족으로 교사증축이 이뤄짐에 따라 시정조정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1990년 8월 현재의 시민회관 영내로 이전 관리해오고 있다.▲정원용

  • [시·군지정 문화재 - 과천] 都城관문 600년역사 고이 간직 지면기사

    # 관악사지관악사지는 지난 199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과천시 일원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발견당시는 정면에 석축을 갖춘 4곳의 건물지와 무너진 석종형 부도 1기 및 샘이 확인됐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 존속시기등 역사적 성격은 규명되지 못한 채 등산객들의 무심한 눈길만 받았다. 창건시기 등의 확인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99년 7월6일 관악산 정상부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관악사지의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부터다.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가 주축인 발굴단은 가~마지구 등 5곳으로 나눠 작업을 진행, 가지구 지표 50㎝ 지점에서 면을 다듬은 장대석재가 노출됐고 나지구에서도 초석하부 및 건물 온돌시설로 보이는 석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등 5개월간에 걸친 발굴작업을 무사히 끝냈다.관악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총 10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지의 규모는 남북 30m 동서 15m로 경사지를 석축으로 쌓아 단을 형성하며 지어졌고, 이같은 건물지의 상황으로 미뤄 전성기에는 상당한 규모를 지닌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또 출토된 자기편을 통해 15세기에 창건돼 18세기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특히 연주암과 관악사의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 지적돼 주목을 받았다.일반적으로 연주암은 관악사의 3차 중창시 효령대군이 현재 위치로 옮겨 40간의 가람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그러나 연주암의 3층석탑과 연주대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관악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로 미뤄 연주암과 관악사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더라도 독립된 사찰이란게 조사팀의 견해다.관악사지에는 사적가치가 높은 유물이 대량 발견됐다. 이중 수막새와 암막새 모두 회청색 내지 회흑색을 띠는 소성도가 높은 경질인 점이 조선시대 막새의 전형을 보였다.막새의 문양이 봉황문과 용문이란 점에서 왕실과

  • [시·군지정 문화재 - 양주] 고고한 600星霜… 가는곳마다 선열숨결 지면기사

    600년 역사의 양주땅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군지정 향토유적만 13개소에 달한다. 특히 양주군 향토유적 1호로 지정돼 지난 80년부터 84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진 양주대모산성(楊州大母山城)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매초성'의 한 부분으로 추정되는 등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93년 도 기념물 143호로 지정됐다.●남을진 선생묘 및 신도비향토유적 2호인 남을진(南乙珍) 선생묘 및 신도비는 은현면 봉암리 24에 위치해 있다.고려말 충신인 남을진 선생은 공양왕때 참지문하부사를 지냈고 성품이 강직, 간결해 조선 개국이후 벼슬을 버리고 사천에 은거했다.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감악산 깊숙이 들어가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으며 사후 그가 거처한 곳을 남선굴이라 불렀다. 영조 때 사천서원에 제향됐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2기, 문인석 2개 등 석물이 있으며 봉분의 높이는 2m, 둘레는 19m, 직경은 7m다. 묘소 아래 위치한 신도비는 팔각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고 있다.●정민시 선생묘 및 신도비향토유적 3호는 양주읍 산북리 산 92에 위치한 정민시(鄭民始) 선생묘 및 신도비다. 정민시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왕의 보필에 힘써 문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묘는 정경부인 완산 이씨와의 합장묘로서 봉분의 크기는 직경 550㎝ 높이 155㎝며 묘역이 있는 구릉 하단부에는 사후 정조가 친히 '정와정공민시지장'이란 어필과 전교를 내려 건립한 비석이 있다.●정렴 선생묘 향토유적 4호인 정렴 선생묘는 양주읍 산북리 산 92에 자리해 있다. 정렴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선비이자 의학자로 천문·지리·의서·복서에 두루 능통했으며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아 1544년 왕을 입진하기도 했다. 묘는 후손 정민시의 묘 맞은편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일 상부에 부생제 온양 정순붕과 정경부인 완산 가씨의 합장묘가, 아래에는 후손인 정광겸과 정부인의 합장묘가 있다.●이해수 선생묘향토유적 5호인 이해수(李海壽) 선생묘는 남면 한산리 산1에 위치해 있다. 명종 18

  • [시·군지정 문화재 - 연천] 한반도 전략적 요충지 지면기사

    연천군은 경기도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한반도 허리부분에 해당된다.이런 까닭에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북부와 남부의 점이지대를 형성하는 동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삼국시대부터 임진강을 통해 서해교역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차지, 남방진출을 노리던 북방세력과 이를 제지하려는 세력이 패권을 다투던 변방이기도 했다.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조선 초 연천인구는 360명으로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었으며, 성종실록에는 영평·철원·평강·연천은 인적이 드물고 억새풀이 들을 덮었다고 기록돼 있다.삼국중 가장 먼저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은 백제였고 이후 정치·행정적인 변화가 계속됐다. 백제의 공목달(功木達)로 시작된 이 지역이 오늘날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을 얻게된 것은 고려말 1309년이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시 9주 5소경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한주(漢州)에 속했고 궁예가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을 개국했을 때는 이 세력권에 포함되었다.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개성을 본거지로 고려를 건국하면서 연천은 수도배후지 역할을 담당했다. 또 고려말 사회적 혼란과 왜구침입이 극에 달해 개성 근처까지 미치자 1377년 우왕때 철원과 함께 연천이 천도후보지로 거론됐으나 궁궐터를 답사한 숭경부윤 진영세가 오역의 땅이라고 보고해 후보지서 삭제됐다.조선 태종때 현감이 파견된 이래 이곳은 마전·삭령·적성·철원·양주·파주·포천등 인근 군·현과 여러번에 걸친 통폐합 과정을 거쳐 현재 행정구역은 2읍 8개면이다.●연천향교(향토유적 제2호)연천읍 차탄리 345에 소재한 연천향교는 1407년 태종 7년에 창건돼 효종 9년 1차 이전하고 한국전쟁 이후 재건과 이전 등 3차에 걸쳐 개·보수 됐다.건립당시는 대성전·명륜당·신문·창고등 5개동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등 6개동 건물로 구성돼 있다.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위와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제향기능은 전래되고 있으나 과거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은

  • [시·군지정 문화재 - 동두천] 3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시대별유적 寶庫 지면기사

    고구려시대 내을매(內乙買) 또는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린 동두천시는 대동지지에는 백제 영토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신라 경덕왕 16년(757) 사천으로 변경, 견성군(현재 포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81)에 양주에 예속되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돼 진이 만들어졌다.양주 속현으로 견주·풍양·사천이 있었는데 목의 34개 방리중 하나인 이담이 오늘날 동두천시 근원이다.조선조말 가정자리(조선 영조때 도승지를 지낸 이중경이 벼슬에서 물러나 현 동두천동에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가정자라고 한데서 유래)라 불리던 동두내(東頭川)에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고유명칭이 동두천리로 바뀌었다.이는 동쪽에 근원을 두고 냇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이며 40여년전까지만 해도 동두내라는 명칭이 잔존해 있었다.현재 동두천(東豆川)으로 표기되는데 가운데 두(頭)자가 두(豆)자로 변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며 1950년대로 추정될 뿐이다.7개동에 걸쳐 11개 향토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10개유적은 지난 86년, 나머지 1개는 지난 98년에 향토문화재로 지정됐다. 시대사별로는 신라~고려말~조선시대로 이어진다. #사패지 경계석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초 무신 어유소(魚有沼·1434~1489)장군이 1488년 국왕 성종과 함께 어등산에서 사냥을 하다 화살로 솔개를 맞혀 떨어뜨린 지점이다. 어장군은 동두천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동점마을 암각문동점마을 입구 하천변 바위에 '일이삼사 육칠팔구 황중원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행설에서 유래된 이 암각문은 이 마을이 우리나라 중심지이며 여러마을 가운데 가장 길지로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글씨는 토정 이지함이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옛 생활풍습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학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목행선 선생 묘지행동 산11의1에 소재한 이 문화재는 조선 인조때 문신인 목선생이 인조 14년 경기도도사로 재직시 곤궁에 빠

  • [시·군지정 문화재 - 파주] 수만년째 박동하는 선사의 숨결 지면기사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굽이쳐 흘러 수도 서울의 한강과 만나 서해로 유입되는 천혜의 지리적 환경을 갖춘 파주시 역사는 1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파주지역은 삼국 영토분쟁의 주요 요충지로, 고려와 조선시대는 수도인 개경과 한양사이 수도방비는 물론 정치·지리·환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파주는 선사·역사시대와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수많은 문화유산과 흔적을 지금도 고이 간직한 문화의 보고다.그러나 국보급을 비롯한 유·무형문화재등 지정된 문화유산들은 보호하고 있는 반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수백여점의 유물·유적들은 관리를 하지않고 있는 실정이다.보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파주관내 미지정문화재 소개와 함께 소중한 파주문화 유산을 재조명한다.#용연연못파평면 눌노리 2천여평의 연못에 위치한 파평 윤씨 용연은 시조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려 태사 윤신달이 바로 파평 윤씨 시조로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2등 개국공신이다. 관은 삼중대광 태사로 용연못은 그의 탄생지로 전해져오고 있다.전설에 의하면 신라말 진성여왕 7년(893년) 한가윗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큰 폭우가 쏟아지고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돌상자 하나가 이곳서 떠올랐다. 이를 본 백성이 관아에 신고후 고을태수가 도착하니 돌상자는 이미 연못 속으로 잠겨버린 뒤였다. 그때 연못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파 앞으로 돌상자가 떠올라 열어보니 오색의 우모에 싸인 아기가 있었다. 손바닥에 윤자 무늬가 선명해 윤씨라 불렀다는 이 아기가 바로 윤신달이다.파평 윤씨 시조의 발상지인 용연못에는 남개연꽃이라는 수상식물이 자생하고 있는데 남개연꽃은 여름철에 노란색 꽃이 피는 희귀식물이다.#능원묘(서곡리 벽화고분)고려시대 벽화로 밝혀진 서곡리 벽화고분은 진동면 서곡리 산112에 위치해 있으며 벽화는 능원묘에서 발견됐다.능원묘는 청주 한씨 종중무덤으로 1991년 도굴분으로 신고돼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다 묘내에서 벽화를 발견하게 됐다.2기의 묘로 구성된 능원묘 1호묘는 분구 뒷면이 2호묘 전방에 구축한 축대

  • [시·군지정 문화재 - 안양] 선조의 손길닿아 활짝 핀 불교문화 지면기사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지명이 유래된 안양은 현재 인구 60만의 수도권 중핵도시로 선조들의 혜안과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73년 시로 승격한 안양시는 이렇다할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물 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를 비롯 도유형문화재인 석수동 마애종, 삼막사 3층 석탑, 안양사 귀부와 박서 신도비, 삼막사 삼귀자 등 선조들의 혼과 넋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향토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안양시의 문화는 지명 유래에서 보듯이 불교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문헌상에 최초로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고구려 때 율목군에서 시작되고 있다.그러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평촌신도시 개발과 함께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오래된 주거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백제 근초고왕때 백제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 남쪽 영토가 된 안양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정조대왕의 만안교 축조와 능행로가 만들어져 행정발전과 함께 선조들의 각종 문화를 꽃 피우고 있다.아직은 시향토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안양지역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개한다.#박서 신도비신도비는 종2품 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다. 박서(1602~165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황해도 관찰사 병조참판, 공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이 비는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는 만안구 박달2동 환경사업소 입구 은기목장내에 위치해 있으며 박서의 묘는 신도비로부터 북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해 있다. 총고는 3.82m이며 1665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안양사 부도(安養寺 浮屠)탑신과 기단 중석은 없으나 하대석(下臺石)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地臺石) 복연(複蓮)으로 장식됐으며 상대석(上臺石)은 앙연(仰蓮)이 조각됐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3단의 옥개 받침위에 있고 처마의 상·하선이 전각(轉角)부분에서 반전하며 높이는 1.36m 너비 1.35m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부도는 고대

  • [시·군지정 문화재 - 시흥] 연꽃 자태닮아 기품있는 연성문화 지면기사

    저 멀리 고구려시대부터 '뻗어 가는 땅' '넓은 땅'이란 뜻의 '잉벌노(仍伐奴)'로 표기했던 시흥시는 현재 서해안시대 중추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고 급성장하고 있어 선조들이 지명을 붙인 혜안이 돋보이는 곳이다.지난 89년 시로 승격한 시흥시는 군시절 지역이 7개시로 분리될 정도로 지역이 넓고 세가 컸던 만큼 국가 지정 보물인 소래산 마애상(磨崖像)과 사적 제413호인 방산동 청자·백자요지 등 중요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연성금사시첩시흥의 대표적 문화로 꼽히는 연성문화는 조선후기 전성기를 맞으면서 양주·양평의 화서문화와 쌍벽을 이뤄 화서문화의 기둥이 이항노선생이라면 연성문화는 장유선생의 영향을 받았다.연성문화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장유가 역신으로 몰려 현재 장곡동 움막집에서 은거하면서 당시 선비들과 시류 논쟁을 벌인 '다락방 문화'가 바로 연성문화의 시효라고 '인조실록'에 기술돼 있다.이어 고종 14년 경기 서부지역 선비들이 시를 짓거나 시국을 논의하는 등 연성문화의 맥을 이어갔던 기록이 '연성금사시첩(蓮城昑社詩帖)'(죽률동 남양 홍씨 자손보관)에 있다.연성금사시첩에는 당시 선비들이 장유의 다락방문화를 본받아 제자와 스승간, 회원간의 관습적 도덕률이 엄격하면서도 선비의 도도한 인품과 풍류를 시로 읊으며 교류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경수·홍재식·박대병·김봉안·윤종선·박상오·유응렬·강영돈 등 40여명의 활동 회원 명단이 있다.◇태봉(胎封)일반적으로 태실·태묘 등으로 불리는 태봉은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관내에는 모두 3곳이 있었다.금이동 부근의 태장뿌리 산과 거모동 군자 초등학교 앞, 또 지난 90년 5월4일 시향토유적 6호로 지정된 무지내동 해발 50m 산 정상에 있는 것 등이다.앞의 두곳 태봉은 파괴되었고 현재 유적으로 보존되는 무지내동 태봉은 깊이 2m에 지름 0.85m 높이 0.47m, 두께 0.16m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함을 묻은 조선시대의 태실지다.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하여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인물의 태는 태봉으로 가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