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릉의 보전과 관광 자원화 특별 좌담회]

    [조선왕릉의 보전과 관광 자원화 특별 좌담회] 지면기사

    [경인일보=정리=김선회기자]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문화재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대한민국의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소식을 우리는 접했다. 그로부터 2개월 남짓 지난 9월 2일 경인일보는 창간 49주년을 기념해 특별기획 '왕을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두 달간의 짧은 준비기간이었지만 국내 최고의 왕릉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왕릉이 지니고 있는 장례, 풍수, 조경, 역사, 문화재적 가치를 제대로 찾기위해 1년간 필진들은 동분서주했다. 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서부터 조선의 마지막 황제 27대 순종의 유릉까지 마치고 보니 해가 바뀌고 경인일보는 창간 50주년을 맞게됐다.조선왕릉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시리즈에 참여했던 필진들은 '왕을 만나다' 시리즈의 종결을 기념하며 지난 8일 오후 경인일보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조선왕릉의 보전과 관광 자원화에 대하여'라는 특별좌담회를 가졌다. 이날의 좌담회는 경인일보가 진행했던 시리즈를 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 국민들이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와 방법에 대해서도 크게 반성해보는 계기가 됐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조영 당시의 기록도 상세히 알려야… 왕릉의 제례 지방문화재 지정 필요"1년 전, 우리의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마치 묻혀있던 보석이라도 찾은 양 국내의 모든 언론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야단법석을 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과연 '왕릉'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무엇을 주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을 미리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인일보에서 능동적이고 발 빠르게 1년 연재라는, 그것도 파격적으로 지면 한 면 전체를 할애해 실었다는 점에 대해 필자의 한사람으로서 고맙고도 높이 평가한다.이번 연재는 그야말로 단순히 옛 왕들의 무덤이 아닌,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왕릉으로 부각시키는데 큰 일조를 했다고 자부한다. 매주 '왕을

  • [王을 만나다·41]정릉 (靖陵·11대 중종)

    [王을 만나다·41]정릉 (靖陵·11대 중종)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지하철 선릉역 8번 출구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선릉과 정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오늘 만나볼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1488~1544)의 능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정릉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인석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인석 얼굴은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임금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3월 5일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에 대항해 박원종·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이 중종반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반정 맨 앞에 선 성희안.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그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자문을 많이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임금의 방탕과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성희안은 분을 못이겨 그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 종9품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밀려났다. 그후 성희안은 박원종을 만나 반정을 모의한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 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 [王을 만나다·40]선릉 (9대 성종·계비 정현왕후)

    [王을 만나다·40]선릉 (9대 성종·계비 정현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두규 우석대교수]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成宗·1457~1494)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1462~1530) 윤씨의 능으로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걸어서 3~4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가볍게 조깅할 수 있는 아담한 공원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돼있으며 왼쪽 언덕에는 정현왕후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돼 있다.#살아선 다복했던 임금, 죽어선 치욕의 삶서울 중심가에 있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왕릉이지만 다른 왕릉에 비해 능역은 매우 좁고, 주변의 고층 빌딩에 포위된 상황이다. 그런데 선릉이 원래부터 이렇게 옹색하게 자리하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 역대 정권, 특히 박정희 정권때 능역의 많은 부분들이 민간에 팔렸기 때문이다. 다른 왕릉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은 그 정도가 심했다. 단독 주택에 비유하자면 담장과 행랑 그리고 마당까지 남의 땅이 되어버리고 안채 일부만 남아있는 꼴이랄까. 이러한 이유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당시 이곳을 제외시킬 생각을 했었다고 등재신청 작업에 참여했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회고한다. 그런데 '도심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나마 보존되어 남아 있는 것이 더 기적'이라고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외국의 세계문화유산 실사단원들은 칭찬을 했다고 한다.살아 생전의 삶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도 있다. 생전의 성종은 기록상으로만 보면 비록 나이 40을 못 넘기고 죽긴 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등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 완수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정적으로도 12명의 부인에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어 다복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후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맏아들 연산군의 일이다. 물론 성종 생전에 연산군이 훗날 그렇게 포악해질 것이라고 아버지 성종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 일도 그렇지만 사후 성종을 욕보이게 한 가장 큰 사건은 그로부터 100년 후에 발생한다. 1592년

  • [王을 만나다·39]의릉 (20대 경종·계비 선의왕후)

    [王을 만나다·39]의릉 (20대 경종·계비 선의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은 조선 왕조 제20대 임금인 경종(景宗·1688~1724)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1705~1730) 어씨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형태의 능이다. 상부의 곡장을 두른 것이 경종의 능침이며 아래 곡장이 없는 것이 선의왕후의 능침이다. 실록에는 의릉이 석관동 천장산(天藏山) 신좌인향(申坐寅向)에 있으며 흥인문(동대문)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다고 전한다. 이곳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境域·경계가 되는 구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기도 했다. 이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해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의릉은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임금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사된다. 이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이 대신해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 [王을 만나다·38]장릉 (長陵·16대 인조·인열왕후)

    [王을 만나다·38]장릉 (長陵·16대 인조·인열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 /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온 나라가 온통 월드컵 16강 진출로 인해 열광의 도가니이다. 국민 너나 할 것 없이 좋아라하고 맘껏 기뻐하고 있다. 이렇게 자랑스런 업적을 이룬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의 전문 훈련 장소가 '파주'에 있다는 것은 웬만한 축구팬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훈련 장소와 매우 가까운 곳에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203호인 '장릉(長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개 잘 모른다. 오늘은 월드컵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날씨를 무릅쓰고 찾아가 본 장릉에 대해 알아본다.#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王)의 비공개 능아직 일반인에게 비공개로 돼있는 장릉은 방문하기전 관계 기관에 연락하면 오히려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답사할 수 있다. 그전에 꼭 한가지 염두에 둘 것은 조선시대 왕릉중 '장릉'이라는 명칭을 가진 능이 3기나 있어 제대로 확인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 그리고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인조의 친부, 원종의 장릉(章陵)이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파주의 장릉을 합해 총 3기인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仁祖·1595∼1649)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의 합장릉이다. 인조는 선조(宣祖)의 손자이자 추존왕 원종(元宗)의 아들이다. 그는 두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첫번째가 인열왕후이고 두 번째는 장렬왕후(莊烈王后·1624~1688)다. 인조는 조선의 어느 왕보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왕이었다. 반정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 즉위한 것도 매우 드라마틱하고 재위 기간에 두 번의 큰 전란을 맞이했기 때문이다.1607년(선조 40) 13세때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곧 이어 군(君)에 진봉(進封)됐는데 1623년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일으킨 반정(反正)으로 왕에 추대됐다. 그런데 이듬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公州)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 [王을 만나다·37]온릉 (11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王을 만나다·37]온릉 (11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온릉(溫陵)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中宗·1488~1544)의 아홉 부인 가운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1487~1557)의 무덤이다. 온릉은 비공개 능이다. 허가를 받고 들어간 온릉의 분위기는 이름대로 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로 옆에는 군부대가 자리를 잡았고 근처의 장흥유원지와 일영유원지, 신흥유원지와 송추유원지는 사람과 차들로 북적이는데 온릉은 고요속에 파묻힌 듯 조용하기만 하다. 비각에 든 비석에는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순조 7년(1807) 4월에 세웠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의 흔적인지 아니면 정자각 근처에까지 자리를 잡았던 군부대 탓인지 총탄 자국이 많이 보인다. # 일주일만에 끝나버린 왕비생활단경왕후는 12세때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진성대군은 반정으로 형인 연산군이 폐위되자 19세 나이에 왕으로 옹립됐는데 이때 단경왕후도 왕비가 된다. 그러나 좌의정이었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중종반정에 협조하지 않았고, 박원종 등의 반정세력에 의해 형제들과 함께 희생당한다. 그리고 신수근의 누이이자 단경왕후의 고모가 연산군의 왕비였는데 결국 신수근은 누이와 딸 중 누이를 고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중종이 왕비의 폐위를 반대했더라도 반정세력의 입장을 꺾지 못할 일이다. 단경왕후를 왕비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들을 죽일 것 아니겠는가? 결국 반정세력들에 의해 중종이 왕위에 즉위한 후 7일만에 단경왕후는 왕비에서 폐위된다.단경왕후의 20세는 그렇게 상실의 아픔으로 점철됐고 71세로 죽을 때까지 자식 하나 없이 중종의 사랑이 되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야사에는 중종이 즐겨 타던 말(御馬)을 보냈더니 단경왕후가 왕을 보듯이 쌀죽을 쑤어 먹였다는 등 또 중종이 단경왕후의 집 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는 말이 흘러나가 왕후가 궁중에서 즐겨 입었던 분홍 치마를 바위에 펼쳐서 그리움을 달래게 했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생기기도 했다.

  • [王을 만나다·36]정릉 (貞陵·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王을 만나다·36]정릉 (貞陵·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서울 성북구 정릉 삼거리에서 아리랑고개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아드는 비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골목 끝에 매표소가 나오고 매표소를 지나 좀더 올라가면 조선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를 안장한 정릉(貞陵)이 나온다. 그런데 원래 정릉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문화체육관 인근 또는 영국 대사관과 성공회 자리 부근으로 추정돼왔다. 그러나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는 미 대사관저 뒤편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취현방(聚賢坊)'이라 불렀다.#조선 최초의 왕릉이 된 정릉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가장 억울하고도 원통했던 왕비를 들라 하면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와 문종비 '현덕 왕후'를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도 부족해서 자식들마저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들이었다.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1396) 강씨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됐고, 그의 무덤인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 됐다.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는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 태조(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 [王을 만나다·35]사릉 (6대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王을 만나다·35]사릉 (6대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위치한 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 송씨가 홀로 잠들어있는 곳이다. 이곳의 규모는 비록 아담하지만 능원을 둘러싼 솔밭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사릉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들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문화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특히 이곳의 어린 소나무 묘목들은 강원도 삼척의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落落長松) 후손들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소나무는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여기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의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는데 이때 쓰인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4년간의 짧았던 결혼생활, 남편과의 생이별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했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440년(세종 22년) 태어났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해서 간택,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해 왕비에 책봉됐다. 사실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세조)과 양녕대군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에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미 실권은 수양대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종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왕대비가 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

  • [王을 만나다·34]유릉 (27대 순종황제·순명효·순정효황후)

    [王을 만나다·34]유릉 (27대 순종황제·순명효·순정효황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두규 우석대 교수]지난 호에 소개된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과 인접해 있는 유릉(裕陵)은 고종황제의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돼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흉지에 매장된 마지막 황제 '순종'순종황제(1874~1926)는 본명이 이척(李拓)이며,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나 1897년에 황태자가 됐다. 1907년에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탄과 더불어 퇴위 당한다. 이후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53세를 일기로 사망해 현재의 자리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안장된다.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은 비록 망국의 황제 능이기는 하지만, 황릉다운 면모를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유릉을 답사하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은 풍수지리와 관련해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순종황제능에 대한 풍수지리 평은 순종황제가 죽은 지 얼마 후인 1931년에 나온다. 당시 조선총독부 촉탁(囑託) 학자인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이 쓴 '조선의 풍수'는 이 자리 소점에 관여한 지관 전기응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종황제의 능보다도 좋은 자리'라고 적고 있다. "이 십자통기형(十字通氣形)은 내팔거팔형(來八去八形)이라고도 하며 지맥이 팔자(八字)형을 이루면서 위에서 임하는 것과 그것에 대응해 아래에서 거꾸로 팔자(八字)형을 이루어 서로 만나서, 그 거팔내팔(去八來八)이 서로 교차하는 양측에 각각 하나씩의 낮게 솟은 둥근 언덕이 있다. 이것은 좌우 좌우종사(左右종砂)라고 하며, 거팔내팔의 좌우종사 네 개가 상응해 십자형을 이루는 중심에 분묘를 정한 것으로 그것은 생기를 모으는

  • [王을 만나다·33]홍릉 (26대 고종·명성황후)

    [王을 만나다·33]홍릉 (26대 고종·명성황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오락가락하던 날씨가 지나가고 쾌청한 하늘이 눈부시던 이른 아침에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릉을 찾아 나섰다. 이곳은 조선의 왕이었다가 대한제국의 황제까지 오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다.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그 해 3월 4일 이장해 고종과 함께 묻힌 것이다. #조선의 '황제'를 기억하라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는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비록 추존된 황제이지만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황제(皇帝)'가 있었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에 등극하고 그 뒤를 이은 순종 역시 황제에 올라 조선 태조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 추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생전에 왕위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영조의 첫번째 왕자), 장조(영조의 두 번째 왕자), 문조(순조의 왕자)를 각각 진종소황제, 장조의황제, 문조익황제로 추존했으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각각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로 추존했던 것이다. 태조는 조선의 개창조(開創祖)였기에 황제로 추존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종과 순종의 세계(世系)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추존됐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총 8명의 황제가 있으니, 이들이 묻힌 능을 왕릉으로 호칭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황릉(皇陵)'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요즘들어 흔히 쓰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시대 왕릉'이란 표현도 '조선시대 황릉과 왕릉'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또한 고종과 순종은 보다 엄밀히 얘기하면 조선의 법통을 계승해 선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들이지 조선의 황제는 아닌 것이다. 고종(1852∼1919)은 조선의 제26대왕이다. 1852년 서울 정선방(貞善坊)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 [王을 만나다·32]인릉 (23대 순조·순원왕후)

    [王을 만나다·32]인릉 (23대 순조·순원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경기 남부지역인 수원, 용인, 오산, 화성 등에서는 새로 만든 용인~양재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쉽게 '인릉(仁陵)'에 도달할 수 있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에 위치한 인릉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1790~1834)와 그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 김씨를 합장한 능이다.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獻陵)과 같은 산에 있어서 흔히 '헌인릉'으로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강남땅이긴 하지만 고층빌딩도 보이지 않고 번잡하지도 않아서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감돈다.#온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순조정조(正祖·1752~1800)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순조는 친할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이후에 태어났기에 아버지 정조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은 원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곳인데 이를 옛수원부 뒷산인 화산(지금의 융릉)으로 옮기고 난 이듬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무덤과 옛수원을 새수원(수원시 팔달산 근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돈도 많이 들었거니와 신하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세자(순조)가 태어남으로써 논쟁이 일단락된 것이다. 순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대를 이을 세자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조정에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때 당시 정조의 나이는 38세였고, 문효세자(1782~1786)는 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상태였다. 아마도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던 융릉의 기운이 왕실의 후손 순조를 점지한 것 아닐까?아버지인 정조를 닮아서 그랬는지 순조는 어릴 때부터 근검절약을 생활화했고, 바른 자세로 앉거나 누웠으며,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일삼았다.그러나 단 하나 닮지말아야 할 것도 닮았으니 11세에 부친을 잃은 것이다. 사도세자의 엽기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에 비하면 덜하다고 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왕위에 올라야 하는 부담감은 순조가 행동을 더욱 조심하게 한 원인이 됐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후에 더욱 조심스

  • [王을 만나다·31]헌릉 (3대 태종·원경왕후)

    [王을 만나다·31]헌릉 (3대 태종·원경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창업(創業)보다 더 어려운 것이 수성(守成)이다. 어느 왕조든 2대가 잘하지 못하면 그 왕조는 단명한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2대가 수성을 잘한 왕조는 오래갔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단명으로 끝났다. 만일 태종이 없었더라면 과연 조선 왕조가 오백여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바로 태종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필자는 태종을 이야기할 때 결코 '성군(聖君)'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영민하고 과단성있고 투철한 통치철학을 가진 군주'라고 평한다. 태종은 성격이 매우 독하고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결단력과 무자비함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 자락. 이곳에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헌릉이 자리잡고 있다. 능 입구에는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장한 인릉(仁陵)이 있다. 인릉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조선 왕조를 세우고 기틀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태종(太宗·1367~1422)과 그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 민씨가 나란히 잠든 헌릉을 만날 수 있다.1·2차 왕자의 난 골육상쟁으로 쟁취한 비정한 권력# 방석(芳碩)의 세자 책봉과 '제1차 왕자 난'의 씨앗1367년(고려 공민왕 16년) 5월 16일, 태종은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우왕때 태종 이방원은 열여섯 살 나이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태종 등극의 1등 공신으로 관상을 잘 봤던 하륜은 태종을 보고 다른 이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고 했다. 계모인 신덕왕후 강비도 태종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내 몸에서 나지 않았는가"하며 아쉬움으로 탄식했다고 한다.이방원은 태조를 도와 조선 왕조 개국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조영규로 하여금 격살토록 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하게 한 뒤 아버지 이성계를 등극하게 하는 등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

  • [王을 만나다·30]장릉 (章陵-추존 원종·인헌왕후)

    [王을 만나다·30]장릉 (章陵-추존 원종·인헌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두규 우석대교수]김포시청 뒷산 너머에 자리한 장릉(章陵)은 원종(元宗·1580~1619)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1578~1626) 구씨의 무덤이다. 원종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임금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원종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1595~1649)의 아버지이자 선조임금의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으로, 그가 죽었을 당시에는 '군(君)'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을 축출시킨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임금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인 1632년(인조 10년)에 원종으로 추존된다. 그 뿐만 아니라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있던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된 것이다. 그는 살아있을때보다 오히려 죽은 뒤에 대접을 받은 셈이다. 필자의 전공이 풍수지리이기 때문에 오늘은 풍수와 관련해 두 가지 관점에서 장릉을 이야기하고자 한다.#광해군의 풍수 핍박을 받은 원종풍수술사들 사이에 '명당 쓰고 인물 나는가 하면, 인물 나고 명당 쓰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언뜻 보면 아들이 임금이 되자 지금처럼 양지바르고 넓은 곳으로 옮겨졌으니 인물 나고 명당 쓴 셈이다. 그런데 원종은 그렇게 간단히 해석할 수 없는 풍수지리와의 모진 인연이 있다.정원군(원종)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宣祖)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서 광해군에게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와중에 1615년(광해군 7년) 이른바 '신경희 옥사'라는 사건이 터진다. 소명국이란 사람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무고를 하자 광해군은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

  • [王을 만나다·29]장릉 (莊陵·6대 단종)

    [王을 만나다·29]장릉 (莊陵·6대 단종)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자리잡은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 단종(端宗·1441~1457)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5대 임금)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열 살때 인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세손으로 추봉된다. 그러나 아버지 문종이 임금이 된지 2년 3개월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그는 12세에 왕위에 올라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게 된다. 더구나 어머니 현덕왕후는 이미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3일만에 죽고 없었기 때문에 단종은 그 누구보다 외로웠을 것이다.# 서인까지 강등됐다 임금으로 복위된 단종단종은 어릴 때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상을 일찍 뜨자 할머니인 소헌왕후가 더욱 애틋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해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가 즉위해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했다. 하지만 김종서, 황보인 등의 황표정사(黃標政事·대신들이 미리 낙점할 사안 옆에 노란 표식을 붙여 올리면 단종이 이를 보고 결재하는 것 )는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다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결국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한명회·권람 등이 강요해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됐다.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이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돼 모두 처형됐으며, 단종은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돼 사사(賜死)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문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됐다.

  • [王을 만나다·28]건릉 (22대 정조·효의왕후)

    [王을 만나다·28]건릉 (22대 정조·효의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화성시 안녕동의 건릉은 정조(正祖·1752~1800)와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으로 세종대왕에 비견될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참변을 11세 소년기에 목격하고, 5세 였던 세자를 잃었으며 자신도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버리는 등 불운한 임금이었다.# 애민정신이 기록으로 드러난 임금정조는 효성을 바탕에 깔고 백성의 편에 서서 합리적인 국정을 도모했다.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 융릉)을 13차례나 찾아오는 등 원행과 능행을 반복하며 궁 밖에 나서 민심을 읽어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길에서 상언(上言)을 받아 민원을 수천 건 처리하기도 했는데, 이는 역대 임금 가운데 최고였다. 또한 상소도 많이 받아들였음은 물론이고,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해 국왕의 선정의지가 백성에게 전달되는지를 확인했다.정조는 백성에 대해, 마치 부모가 자식 걱정하듯이 '늘 다칠까 걱정하듯 살폈다(視之如傷)'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한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했는데, 그 술잔 복판에는 '아유가빈(我有嘉賓·나의 진실로 아름다운 손님)'이 전서체로 새겨졌다. 유생들은 아름다운 시를 써서 왕의 은혜를 노래했고, 왕은 그들의 명시를 모아 책을 엮어 '태학은배시집(太學銀杯詩集)'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임금과 신하가 아름답게 만나는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그 '팀 워크'의 결정체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건설로 드러난다. 실제 공역기간 28개월이라는 놀라운 집중력을 결집시켜 5.5㎞의 성곽과 행궁의 증축을 이끈 것이다. 게다가 축성 과정의 전말을 모두 정리해 '화성성역의궤'로 편찬했고,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베풀고 역시 그 과정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담았다. 이로써 수원화성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모든 기록을 지니게 된 것이다.정조는 화성을 완공한 이

  • [王을 만나다·27]융릉 (추존 장조·헌경왕후)

    [王을 만나다·27]융릉 (추존 장조·헌경왕후) 지면기사

    이 시는 지난 2008년 6월 24일 용주사에서 열렸던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식'때 추도시로 낭송되던 정수자 시인의 '저무는 목숨으로 청컨대'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영조의 강요에 의해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도세자의 심정과 그를 살리려는 정조의 애절함이 너무도 잘 묘사되어 있어, 마치 그때 궁중에서 일어났던 희대의 참극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고 정조의 피맺힌 절규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비운의 대명사 '사도세자'가 안치된 융릉[경인일보=글/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도세자(1735∼1762)는 영조가 40세가 넘어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번째 왕자로 2세때 왕세자에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효경(孝經)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익혔고 글씨 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때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1749년(영조 25) 15세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하게 되자,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등이 무고하기 시작한다. 이에 현혹된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되면서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고 술회했다.그러다가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했고 이를 보고 격분한 영조가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한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자결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 했다. 그런후 사도(思悼·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졌다.#허물을 덮으려는 할아버지와 드러내려는 손자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게된 원인에 대해 당시는 물론 지금

  • [王을 만나다·26]영릉 (4대 세종·소헌왕후)

    [王을 만나다·26]영릉 (4대 세종·소헌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가 '세종대왕'이라 한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가 안치된 여주의 영릉 자리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양의 땅이다. 묘혈을 둘러싼 산들은 마치 신하가 무릎을 꿇고 군왕에게 조례를 드리며 임금과 신하가 다정히 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풍수지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아도 영릉에 들어서면 누구나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 칭송했고, 대다수의 풍수가들도 '영릉의 덕으로 조선왕조가 백년이 더 연장됐다'고 할 정도다.#젊은 날 등극해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세종은 태조 6년(1397) 4월 10일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열다섯 때 충녕대군으로 봉해졌고, 세자 양녕이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된다. 보통 왕들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날 즉위하는데, 세종은 다른 왕과 다르게 선왕이 살아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1418년(태종 18년) 8월 8일 정오, 태종은 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세종에게 옥새를 주며 임금의 자리에 앉힌다. 세종이 울면서 사양하자, 태종은 "어찌 나에게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나는 장차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다시 복위않기로 북두칠성에 맹세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했다. 사흘 뒤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조 4대 임금에 즉위한다. 이때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그렇다면 태종은 왜 서둘러 왕권을 넘기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을 옹호하는 세력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태종은 "18년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것으로 족하다"며 재차 양위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양녕이 비록 마음이 선하여 정변을 일으킬 의심

  • [王을 만나다·25]영릉 (寧陵·17대 효종·인선왕후)

    [王을 만나다·25]영릉 (寧陵·17대 효종·인선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두규 우석대 교수]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영릉(寧陵)은 17대 효종(孝宗·161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1618~1674) 장씨의 무덤이다. 발음이 같은 세종대왕의 무덤 영릉(英陵)과는 불과 몇 백 m 떨어진 곳에 있다. 이번 회에서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영릉을 살펴보기로 하겠는데 모두 풍수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왜 풍수였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죽어서도 불안했던 효종우선 효종의 인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몹시 불안했다. 그는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정묘호란을 당했고, 열여덟 살 때에는 병자호란을 당해 강화로 피란했지만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볼모로 선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山海關)과 금주위(錦州衛)까지 가서 이제 몰락의 길을 걷는 명나라 군대가 청나라에 의해 격파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또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동북쪽으로는 여해부(如奚部)까지 따라다니며 청나라 군대의 활약상을 지켜봐야만 했다. '청나라가 이렇게 강한데 감히 조선이 대들 수 있겠느냐?' 하는 일종의 교육 및 협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지 8년 만인 스물여섯살에 귀국한다. 그러나 곧바로 청나라에 다시 소환돼 이번에는 명나라의 수도(베이징)가 불에 타면서 명나라가 망하는 장면을 '참관(參觀)'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스물일곱 살에 귀국한 후 아버지 인조가 죽자 1649년 드디어 왕이 된다.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가 기대한 '동방의 착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 반대로 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그러나 대신들의 비협조와 재정 빈약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즉위한 지 10년만인 1659년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이렇게 불안한 삶으로 점철된 그의 사후는 어떠했을까? 죽어서나마 그의 혼령은 편안했을까?효종이 죽자 그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 능선(

  • [王을 만나다·24]태릉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王을 만나다·24]태릉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교수]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잡은 태릉(泰陵)은 조선의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능이며 사적 201호로 지정돼 있다. 역사가들은 문정왕후를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녀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해 다른 이들을 무척 시기했으며 그 성격 또한 표독하고, 독살스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웅장하고 거대한 능은 그녀의 생전의 모습을 연상케 해태릉은 일반 왕후의 능보다 훨씬 화려하고 웅장하며 특이하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했다. 그로 부터 3개월 후 1565년 7월 15일 양주 노원면 대방리(현 노원구 공릉동)에 종산을 수락산으로 하고 주산을 검암산으로 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형국에 자리잡았다. 앞에 흐르는 공릉천은 명당수이다. 능침의 좌향은 북서에서 남동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예장돼 있다. 능역의 좌측에는 태릉선수촌과 그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이 있다. 그리고 옆으로 삼육대학교가 있다. 전면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하고, 우측에는 사격장과 놀이동산, 그리고 서울여자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태릉의 좌청룡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경관이다.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라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 지금의 터에 어머니 문정왕후를 모셨다 한다. 당시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에 따라 명종은 어머니를 이곳에 모시고 자신도 태릉옆인 강릉에 안장됐다. 문정왕후는 미래에 자신이 죽으면 남편인 중종과 함께 하고 싶어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오른편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터로 옮겨 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명종이 정릉 주위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핑계를 대고, 남사고 등

  • [王을 만나다·23]강릉 (13대 명종·인순왕후)

    [王을 만나다·23]강릉 (13대 명종·인순왕후)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유난히 눈이 많았던 올 겨울도 다 지나고, 어느새 3월이 찾아들자 사방에서 봄 기운이 생동한다. 겨우내 스산하게만 보이던 산에는 어느새 나무에 물이 차 올라 꽃망울이 터질 듯하고 얼었던 개천가도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이러한 봄날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끽하고픈 마음에 오늘은 멀리 떠나지 않고 왕릉순례도 할겸 가까운 서울시내의 강릉(康陵)을 찾아나섰다. 일천만 인구가 북적거리는 서울시내에 조선시대 왕릉과 그를 둘러싼 숲이, 도심 생활에 찌든 시민들에게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공원 역할을 해주어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그런데 서울에 조선시대 왕릉이 몇기나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아마도 지하철 역이름으로 알려진 몇몇만 기억하고 있으리라.서울에는 정릉(貞陵·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을 비롯해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陵·중종), 태릉(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강릉(명종과 인순왕후), 의릉(경종과 선의왕후), 인릉(순조와 순원왕후)을 포함, 총 8기의 왕릉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 중 일반인에게 생소한 왕릉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만나볼 명종의 '강릉'이다.# 일반인들에게 낯선 비공개 능강릉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태릉과 함께 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하고 있다. 태릉! 태릉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먼저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의 요람이 어디인가. 바로 '태릉선수촌'과 '태릉스케이트장'이다. 그리고 지하철역 이름에도 '태릉입구역'이 있다. 또한 각종 업체도 다양하게 쓰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명칭이 바로 '태릉갈비'이다. 태릉이 이렇게 명성을 드날리는 반면에 강릉은 일반인에게 매우 낯설다. 태릉은 공개된 반면 강릉은 비공개 왕릉이라서 더욱 그렇다. 살아 생전에 어머니 위세에 눌려 지낸, 명종이 죽어서도 그런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씁쓸하다.강릉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릉관리소에 미리 연락을 해야 한다. 관리소 측에서는 몇가지 이유를 들어 태릉의 우측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