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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에필로그 지면기사
[경인일보=박상일기자]1960년 '인천신문'으로 창간,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하며 경기·인천 독자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 온 경인일보는 이제 지난 반세기 역사의 책장을 넘기고 새로운 반세기를 기록할 대장정을 준비한다. 경인일보가 기록할 새로운 반세기는 반란과 폭력과 부정부패로 얼룩졌던 지난 반세기와 확연히 다른 희망과 발전의 역사가 될 것이다. 성숙한 지방자치, 안정되고 활기찬 경제, 아름답고 세련된 문화,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자랑스러운 경기·인천이 우리가 그려갈 미래다. # 격동의 지난 반세기경인일보가 창간한 1960년은 한국사에 암울한 시기였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0년 독재가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리면서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이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쳤다. 언론계에도 부패한 사이비언론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가뜩이나 혼탁한 세상을 얼룩지게 했다. 경인일보는 그런 시대에 인천시 중구 사동의 한 인쇄소 창고에서 '순수한 향토지(鄕土紙)'를 표방하며 출범했다. 창간 2년 만에 인천지역 언론 중 처음으로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정통언론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언론에 서슬 퍼런 검열과 탄압의 칼을 휘둘렀다.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히 정론직필의 깃발을 지키며 경인지역 언론의 역사를 이어갔다. 무자비했던 군사정권의 억압과 언론통폐합이 난무하는 격변하는 언론환경에서도 경인일보가 꿋꿋하게 반세기를 버텨올 수 있었던 저변에는 식지 않는 독자들의 사랑이 있었고, 경인지역의 미래가 있었고, '정론직필·지역발전·문화창달'이라는 굳건한 창간 정신이 있었다.반세기 역사를 지켜온 경인일보가 현장에서 기록한 지난 5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부 쿠데타에서 유신정권, 10·26 대통령 암살, 12·12 군사반란, 1980년 민주화 항쟁 등이 이어지며 국제적으로 유례없는 격동의 역사를 썼다. 사회적으로도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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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급격한 도시화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경기도의 현재와 과거는 무척이나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물론 외관상의 변화다. 몇몇 지자체는 10여년전과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농업지역에서 첨단 도시로 변모했다.경기도가 팽창하고 발전해 나갈수록 각 시·군의 역할과 위상도 강화됐다. 30여년전 인천직할시로 경기도에서 별도 분리된 인천광역시는 이제 동북아 중심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도내 소도시들도 인구 증가 등을 이유로 줄줄이 시(市)로 승격했다. 현재 도내 31개 시·군중 군(郡)은 불과 4곳에 불과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점점 커져가는 경기도의 규모 문제로 인해 '분도론'이 터져 나오기도 했으며, 최근까지만 해도 각 시·군의 통폐합 문제는 지역내 최대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경인일보는 지역 여론의 대변자로서 이같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보도해 왔다.# 급격한 도시화, 잇따른 시 승격1970년대 이후 경기지역에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자 인구 팽창에 다른 잇따라 시 승격이 시작된다.이에 대한 첫 보도는 경인일보 1973년 3월1일자 '전국 행정구역 대폭 개편'이라는 기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기사에는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방침에 따라 성남과 안양, 부천이 시로 승격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같은 시 승격 배경에는 정부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안이 밑바탕이 됐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 위성도시인 성남, 안산, 부천을 읍에서 시로 재조정했으며, 양주 구리면 등을 읍으로 승격시켰다.또한 1980년 4월1일자 7면에는 '오늘 남양주군 탄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의 신설 소식을 다뤘다. 기사에서는 남양주가 국내 최초로 남양주군청과 남양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들이 한 곳에 배치됐다는 내용을 전했다.특히 당시 보도에서는 '남양주군 탄생…1년의 산고'라는 관련 기사를 통해 남양주군 탄생과 관련한 비화를 전했다. '개발제한에 묶여 위치 선정', '옹고집 한뼘땅 주인 군수가 설득' 등의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난을 겪었던 남양주 탄생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후 1986년 1월 6일자 보도에서도 또다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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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수도권 규제에 묶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경기·인천은 발전 및 규제의 역사가 함께 진행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권 규제는 인구 및 국가 주요 시설은 물론 경제의 중심도 수도권에 집중된 현상을 해소키 위해 시작됐지만 최근에는 '중첩규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도권 발전의 목을 조이는 덫이 됐다. 실제 경기도만 해도 경기도 전역에 걸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4년제 대학 신설에 대한 규제를 받고 있으며, 2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은 도 전체 면적의 20%(2천213㎢)에 달할 정도다. 또한 도 전체 면적의 21%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 7개 시·군내 토지 2천97㎢는 팔당상수원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으로 묶여 규제를 받고 있는 등 규제 내역을 일일이 밝히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2000년 이후에는 수도 이전 문제가 대두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올해로 50년을 맞은 경인일보는 이 같은 수도권 규제와 수도 이전 논란 등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경인일보를 통해 본 수도권 규제와 수도 이전 논란에는 지역 발전을 위한 투쟁의 기록이 낱낱이 적혀 있다.# 수도권 규제를 알리다수도권 규제와 관련한 경인일보의 보도는 당시 제호였던 연합신문 1972년 8월 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보도에서는 '수원·안산 등 개발을 제한'이라는 기사를 통해 도내 1개 시 3개 군 597㎢에 대한 개발제한구역 고시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이 기사에서는 1971년 12월 29일 건설부가 확정했던 개발제한구역 내용을 다뤘다. 기사는 개발제한 지역과 면적 등을 상세히 다뤘으나, 이 같은 정책에 대한 비판 내용은 써 있지 않다. 이는 당시 군사정권·정부의 검열로 인한 암울했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경인일보는 당시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는 등 기사 배치를 통해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977년 3월 26일자 신문에도 경기·인천 지역에 대한 규제 소식을 경인일보는 대대적으로 알린다. 경인일보는 이번에도 1면 톱 기사로 기사를 전진 배치시키면서 규제의 부당함을 간접적으로 중요시했다.'인천·수원 등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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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9]경기도청의 이전 비화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 ]경기도청은 경기도의 중심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의 핵심적인 정책이 이곳에서 수립·실현되고 다양한 행정 처리도 이곳에서 심장 역할을 맡는다. 경기도청이 현재의자리에 자리잡은지는 불과 50년도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도민들에게조차 낯선 정보다. 기원전 7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기도의 긴 역사, 그리고 첫 도지사가 1946년 임명된 새로운 행정체계로의 경기도를 뒤볼아볼 때도 이같은 사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창간 50주년을 맞는 경인일보 지면으로 풀 수 있다. 지난 1967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한 경기도청의 새로운 역사는 1960년 창간한 경인일보의 역사보다도 짧다. 경기도청이 지금의 터를 잡는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도내에서 유일한 신문매체로 남아있는 경인일보는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을 이전 당시부터 상세하게 도민들에게 전했다. 또한 최근의 경기도청 광교신도시 이전 문제도 신속·정확하게 보도해 경기도청의 역사는 경인일보와 함께함을 또다시 증명하고 있다.# 경기지사 임명으로 시작된 경기도청 관련 보도경인일보의 경기도청 관련 보도는 창간 이듬해인 1961년 신임 경기도지사 임명과 관련해서다.경인일보 1961년 5월25일자에는 '명 도지사와 시장을 임명'이라는 제목의 1면 기사를 통해 정부의 관선 지자체장 인사를 보도했다. 이 당시 도지사로 임명된 인물은 수원 유신·창현고의 설립자인 고(故) 박창원 준장이다.도지사의 경우 1대 구자옥 지사부터 7대 윤원선 지사때까지는 임명직으로 선출 후 제8대 신광균 지사의 경우 1960년 12월 선출을 통해 도지사 자리에 올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임기를 6개월도 채우지 못했다. 박 전 도지사의 임명은 후일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다.도지사 임명과 관련한 기사는 1963년 12월17일자 경인일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경인일보는 군 출신 박창원 전 지사의 군 복귀를 위한 도지사직 이임을 보도했고, 이와 관련한 박 전 지사의 입장도 실었다. 또한 5일후인 1963년 12월22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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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8]경인일보로 보는 경제지표 및 물가지수 지면기사
[경인일보=최규원기자]경인일보가 창간한 지 5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에 빗대면 5번을 변한 세월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는 그 보다 빠른 변화를 겪어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도하고 있는 경기도 역시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사실상 1년에 한번 아니 몇달에 한번씩 사이클이 변할 정도로 급변의 시대를 지내고 있다. 창간 초기 경인일보는 2면 체제로 지면의 대부분이 사회를 반영하는 사건기사가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가'에 대한 정보는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60~70년대 가장 중요한 경제기사 아니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오로지 서민들의 주식인 '쌀'과 관련된 기사가 주를 이뤘다. 경인일보가 물가의 지표로 삼은 최초의 품목은 쌀, 보리쌀, 콩, 밀가루, 쇠고기, 돼지고기, 계란, 멸치, 배추, 무, 참기름, 간장, 설탕, 황목, 목탄, 금, 은 등 17개였다. 현재의 단위와는 다르지만, 이들 품목이 당시의 가장 큰 서민들의 먹거리요 관심품목이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또 시간 흐름에 따라 옥양목, 포플린, 연탄, 시멘트, 함석, 세탁비누, 밀가루, 베니어합판, 마른 명태 등도 물가의 지표로 등장했다.# 60~70년대 주요 경제 이슈는 '벼농사', '김장' 등 서민생활과 밀접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 창간 후 가장 먼저 내보낸 경제기사는 1960년 9월 5일자 버스비 인상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시 버스요금 20환을 30환으로 인상 결정을 내리자 학생들이 반발, 버스 운영업체와 협의를 벌였다는 내용이다.최초의 통계기사로 분류될 수 있는 기사는 총세대수 관련 내용이다. 1960년 경기도의 총인구는 36만5천883명, 6만8천329세대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세입자는 2만3천9세대, 가구 소유자는 4만4천289명으로 2010년 현재 인구 천만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경기도와는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지금도 실업이 가장 큰 사회문제 중 하나지만, 60년대 당시에도 취업은 시대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단적인 예로 '미군 노者(근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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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경기·인천 변천사 지면기사
[경인일보=전상천기자]1960년도에 창간된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경기·인천지역의 기업과 시민, 그리고 정부의 경제정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다각도로 조명, 전달해 왔다.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수원연초제조창 기공 등 기업 역사는 물론 경부고속도로 등 한반도 전역을 물샐틈 없이 연결해 온 물류의 동맥인 도로의 개설 역사까지 한 점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특히 경인일보는 4·19 민주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1960년 민주주의 실현의 기치를 걸고 인천항 인근 물류창고에서 창간된 점을 감안할 때 경제뉴스 전달에 그 어느 매체보다 주력함은 필연적 인연이 있는 듯하다.경인일보 창간 초기인 196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변천은 크게 경제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계획발전기와 1987년 민주화시기 이후 경제, 1998년 IMF 위기 및 재도약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경제계획발전기엔 화폐개혁과 경부고속도로 개통 등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 토대를 놓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어 199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삼성과 LG, 현대 등 우리나라 굴지의 그룹사들과 중소기업들의 큰 약진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는 힘이다. 이어 한국경제에 쇼크를 안겨준 1988년 IMF 경제위기다. 많은 기업이 부도 등 퇴출당했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쫓기던 때이다. 이어 2000년도부터 한국경제는 다시 재도약의 시기를 맞게 된 원인과 과정, 그 대안을 제시, 지역경제의 주춧돌이 돼 왔다.# 발전계획경제와 화폐개혁경인일보는 창간 보름 만인 9월 1일자에 POL(미군유류항) 노조원의 연좌시위를 담은 '살길 찾는 勞者의 絶叫'를 실었다. 당시 인천 POL 작업권을 갖고 있는 평화공사측이 노조의 임금인상을 거부하면서 촉발된 70일간의 시위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했다.이를 시작으로 경인일보는 5·16 쿠데타가 성공한 뒤인 1962년 11월 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대장 승진과 함께 시작된 국가발전 위주의 계획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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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 삼성전자·SK…기업변천사 지면기사
[경인일보=이성철기자] 한국 경제는 초기 반세기동안 일제 치하의 수탈 위주 경제, 6·25전쟁 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제자리걸음을 했으나 19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잘살아보자'는 기치 아래 경제개발에 매진해 온 결과, 최빈국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 재벌이 주도하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 등을 통해 우리나라는 지난 53년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96년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선진국의 사교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 대기업들의 비약적인 발전은 대한민국 경제 번영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대한민국의 중심인 경기도와 인천. 이곳에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온 기업들의 역사가 서려있다.1960년대 선경(현재 SK케미칼)이 수원에 아세테이트섬유 공장을 세우면서 경기도내 산업 부흥의 시작을 알렸다. 1971년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들어섰고, 1980년대 들어 삼성전자반도체 공장과 정보통신 연구소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또 많은 협력업체들이 도내 곳곳에 터전을 마련했고 부의 효과는 선순환을 이뤘다. 인천도 마찬가지. 1953년 전후 대한중공업사로 시작해 인천제철로 회사명이 바뀌고 현대에 인수된 후 지금까지 제철공업을 이끌고 있다. 지난 2000년 부도가 나기 전까지 국산 자동차 생산의 전초기지임을 자처했던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 등 고난과 번영의 시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산업 역사의 한 면을 장식했다.# 수원의 대표 기업 선경선경의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수원시 평동 벌판에서 직기 20대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매출 80조원의 재계 3위 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초석을 다졌다. 최 회장은 수원 토박이로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일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1953년 3월에 인수했다.최 회장은 1953년 10월 1일 회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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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6]경인일보가 키운 꿈나무들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1950년대 고교 야구붐 이후 산업화에 밀려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졌다.지방언론뿐 아니라 중앙언론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보도보다는 정치와 경제 문제 등에 대한 보도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경인일보는 지역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을 위해 다양한 대회를 유치 및 개최해 선수 발굴에 앞장섰다. 또 1980년대 이후 프로 스포츠의 인기에 가려 아마추어 스포츠가 위기에 봉착하자 지역 유망주와 지도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경인일보사가 시상하는 '체육 꿈나무 대상'과 '전국체전 MVP' 시상을 제정했다.# 경인일보와 지역 아마추어 스포츠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1960~70년대 한국 스포츠는 도약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1982년 6개 팀이 참여한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축구와 농구, 배구 등의 종목에서도 잇따라 프로리그가 발족하며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높아졌다.특히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싹을 틔우고 있던 1986년과 1988년에는 각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개최됐고, 2002년에는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려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여기에 더해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야구 국가대표팀이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우승, 2009년 제2회 WBC 준우승을 일궈냈다.또 올해 상반기 열린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남자 성인국가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성공한 데 이어 U-20 여자국가대표팀이 4강 진출, U-17 여자국가대표팀이 120여년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축구연맹이 주관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 명실상부 스포츠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이런 각종 세계대회에서 프로리그가 있는 종목들이 선전함에 따라 프로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어 갔지만 반대로 아마추어 스포츠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특히 홍수환이 투지 하나로 세계챔피언에 오르며 국민적인 감동을 줬던 복싱,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오른 임춘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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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5]1960~1970년대 학교스포츠 만화경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한국에서 프로스포츠가 탄생한 것은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탄생한 1982년부터였다. 프로야구 탄생 이후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이 잇따라 리그를 결성하면서 지금까지 국민들의 인기몰이에 힘써왔다. 그러나 아마추어 스포츠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특정 대회에만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뿐 국내 대회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프로스포츠가 탄생되기 전인 1980년 이전 아마추어 스포츠는 어땠을까. 경인일보를 통해 프로스포츠가 탄생하기 전인 1960년대와 1970년대 스포츠를 뒤돌아본다.# 60년대 스포츠를 이끈 고교 야구경인지역에서 고교 야구의 인기는 당시 어느 종목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우선 인기 몰이는 인천고가 먼저 시작했다. 1952년부터 3년간 인천고는 전국 무대를 휩쓸면서 구도(球道)라는 명성에 맞는 성적을 냈고 이어 동산고가 각종 전국 대회를 휩쓸면서 그야말로 경인지역 야구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이랬던 분위기는 6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1961년 8월 동산고가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같은 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2회 전국체전에서도 고등부 야구 우승을 차지해 경인지역 국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더불어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에 인천고와 동산고가 인천 대표로 출전하며 일반 시민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했다.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는 서울과 인천, 대구, 부산 등 4대 도시의 대표팀이 출전해 지역의 명예를 걸고 결전을 벌였던 것으로 지금의 왕중왕전과 같은 성격이었다. 사실 이 대회는 인천고가 1954년 휴전 이후 부활된 제9회 청룡기 대회와 제8회 황금사자기, 제35회 전국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50년대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것이 60년대 들어 비정기적으로 열렸고 70년대에는 '인천시장배 4대 도시 대회'로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제8회 대회는 경인일보의 전신인 인천신문사와 경기도야구협회가 공동으로 대회를 개최해 야구 열기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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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4]프로스포츠 이야기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한국 프로스포츠는 지난 1982년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됐다.이후 1985년 프로축구, 1996년 프로농구에 이어 2004년 프로배구가 순차적으로 설립됐다. 빠른 정착을 위해 지역 연고지 제도를 도입한 각 프로리그들은 2천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을 최대의 마케팅 시장으로 판단, 소속팀의 연고지로 적극 활용했다.시장성이 큰 만큼 많은 팀들이 수도권에 터를 잡고 팬 몰이에 나섰지만 결국 일부 팀들은 이 지역을 떠나기도 했다. 경인일보를 통해 비쳐진 4대 프로 스포츠에 대한 역사를 살펴본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경인지역 팀들한국 프로축구에서 경인지역 연고팀들은 리그를 선도했다.경인지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팀은 현재 제주유나이티드FC의 전신인 유공 코끼리다.유공코끼리는 1982년 12월 17일 창단, 이듬해인 1983년 한국 프로축구 원년 슈퍼리그에 서울·인천·경기 지방을 연고로 참가했다.광역연고제가 정착된 1987년부터는 경인지역을 연고지로 사용했다.1991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지만 프로축구연맹이 '지방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1996년 일화 천마(현 성남 일화)와 LG치타스(현 FC서울) 등과 함께 경기도로 강제 이전을 권고해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팀 명칭도 부천 SK로 바꿨다.1988년 서울에서 창단한 성남 일화는 1996년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뒤 2000년 지금의 성남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성남은 2001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정상을 지키며 명실상부 한국 프로축구 최고의 팀으로 자리잡았다.1995년 창단한 수원 삼성은 21번의 공식대회 우승컵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의 서포터스를 보유하고 있다. 2004년 3월 K-리그 13번째 구단으로 공식 출범한 인천 유나이티드는 특정기업이 아닌 시민주 공모를 실시해 195억원의 창단 자금을 마련해 창단했다.인천 유나이티드는 2005년 창단 2년 만에 정규리그 통합 성적 1위와 통합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시민 구단의 성공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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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3]보릿고개 시절의 영웅들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신문은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1960~1970년대 서민들에게 정보의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 삶이 고단하게만 느껴지던 1960~1970년대 지역 신문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경인일보는 지역의 소식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로서 지역 정가를 비롯해 경제 현실을 정확하게 전했다. 특히 스포츠는 개발이 한창 일어나던 이 시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서민들에게 희망을 전해줬다. 국내외 아마추어 선수들의 활약상과 지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스포츠 경기를 현장에서 보는 것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지면에 담았다.# 한국 스포츠 위상을 알리다-'장창선'한국 스포츠가 세계 다양한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개최하며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권에서 스포츠를 이끄는 3대 국가로 도약했지만 60년대는 그렇지 못했다.고교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현재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 스포츠를 탄생시킨 야구와 축구, 농구, 배구 등은 일부 종목에서 실업리그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 종목조차도 세계 무대의 높은 벽에 부딪혀 스포츠 한국으로서의 위상을 알리지 못했다.1960년대 잠들어 있던 한국 스포츠를 깨운 사람이 바로 태릉선수촌장을 지냈던 장창선(67)씨다. 장창선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1966년 미국 톨레도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스포츠 세계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장창선이 처음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생이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지만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경인일보는 1966년 6월 21일자 지면에 '체육 한국을 과시', '시내는 또 하나의 경축의 '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경인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경인지역 스포츠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 '조재형'과 '홍수환'보릿고개는 전년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 지은 보리가 여물기 전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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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2]경기·인천의 역사 재조명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와 인천에는 유서깊은 문화재와 역사적인 인물,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들이 많다. 경인일보는 1960년대부터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문화재와 인물, 마을들을 집중 조명해 도민과 시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데 일조해왔다. 또 우리가 방치하고 훼손한 문화재나 시간이 흘러 잊혀진 인물들과 사건들을 기획시리즈로 재조명함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왔다.# 발굴과 발견, 인천을 다시 생각하다1966년 3월1일 강화의 전등사에서 중국 철종(鐵鐘)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철종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송나라 시대의 것이며 856년전 제품으로 불교학상 또는 고고학상으로 보아 귀중한 연구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1966년 3월 1일자 3면) 요즘에야 조선시대 유물들은 자주 발굴되고, 심지어 신석기 문화재가 대규모로 출토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래서 이런 문화재 발굴 기사에 사람들이 많이 둔감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희귀 문화재가 나오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도자기하면 경기도를 먼저 떠올리기가 쉽다.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등은 도자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2년마다 도자비엔날레를 개최하고 많은 생활도자기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예전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한 대목 있다. "5백여 년 전에 도자기를 구워내던 길이 8m, 폭1.2m, 높이 1.5m의 반월형 솥틀(가마)이 국내에서 최초로 인천시 경서동 146 속칭 자기마을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솥틀은 대접같은 것을 한번에 2천내지 3천개를 구워 냈으며 항아리 같은 종류의 도자기는 한번에 수백개씩 구워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66년 4월 26일자 3면)이 기사를 보면 예전엔 도자기를 경기도에서 뿐 아니라 인천에서도 대규모로 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인천과 도자기를 연관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기사에는 고개를 끄덕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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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1]한국문학을 이끌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문학'.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文學)이라는 말은 대체적으로 학문(學問)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의미가 한정돼 오늘날에는 문학이 시나 소설, 희곡·평론·수필·일기 등 순수문학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이런 순수문학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서점에서 불티나듯 팔렸고, 거기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기까지하면 영화화돼 히트를 하기도 했다.이런 까닭에 신문사들은 앞다퉈 유명 작가들의 연재소설을 게재하고, '신춘문예'를 개최해 우수한 문인들을 발굴, 육성하려고 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그 작가는 꼭 경력사항에 'OO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력을 넣었고, 이는 신문사의 사세(社勢)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경기·인천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경인일보는 1960년 신춘문예를 개최하며 현재까지 많은 문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1966년에는 경인지역 언론사 최초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신문 연재소설의 인기경인일보에 실렸던 최초의 연재소설은 김광주씨의 '奇遊記(기유기)'였다. 1966년 2월 18일부터 연재됐던 이 소설은 중원(中原)과 서장(西藏)을 무대로 전개되는 무협담이었다. 여기서 작가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소위 중국 고전중에서 흔히 유명하다는 어떤 명작을 옮겨 놓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허구와 공상과 가상의 극(極)을 다하는 통쾌무비(痛快無比)한 무협담 속에서 비록 시대는 다르고 하지만 인간에게 영원히 공통되지 않을 수 없는 은혜, 원한, 보복, 애정의 파란을 더듬으면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호흡이 과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인물들과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 존재들이냐하는 점은 오로지 독자제현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볼 생각입니다."(1966년 2월 17일자 1면)기유기의 연재 이후 잠깐 주춤했다가 1969년부터는 매해 새로운 연재소설이 지면을 장식한다. 춘무(1969), 탈주(1970),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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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0]경기·인천 문화예술 부흥을 꿈꾸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경기·인천 지역은 서울에 비해 문화혜택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었다. 늘 서울이라는 심장부에 가려 있었고, 주요행사 자체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서울에서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몇 문화인사들을 중심으로 지역에도 제대로 된 문예회관, 미술관, 박물관들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서서히 문화에 대한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다. 또 살림살이가 점점 나아지자 시민들은 버려졌던 문화재들에 대해 다시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잘 복원해 급기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이르게까지 한다.# 미술대회 콩쿠르 등 각종 대회 개최1960년대 문화계는 그야말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나라 전체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데다 경제난을 극심하게 겪고 있었고, 4·19나 5·16 등 그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국민들은 먹고사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경인일보는 경기·인천지역의 문화인들과 함께 뜻을 모아 미술대회, 문예대회, 콩쿠르 등 문화행사들을 개최하며 조금씩 문화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제1회 도내초중고등학교학생무용콩쿨대회' '제1회 초대작가전' '제1회 경기예술제' 등 경인일보가 주최·후원하는 행사는 대부분 최초로 시도하는 것들로 '제1회'라는 말이 어김없이 들어갔다. 이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 문화계는 '난파음악제' '화홍문화제' 등 굵직한 문화행사를 자생적으로 탄생시키기에 이른다.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미술인들끼리 협회를 결성하고 소규모 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전시회 관련기사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경기·인천 지역에 변변한 갤러리들이 없어 백화점이나 다방에 조그맣게 갤러리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수원크로바 백화점에 있었던 크로바화랑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인데 기사를 쓴 이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지난 15년간 수원지역의 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해온 크로바화랑이 완전히 폐쇄된다. 크로바화랑은 지난해 11월부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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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9]유행의 빛과 그림자 지면기사
[경인일보=문성호기자]'유행은 돌고 돈다.'지난 50년간 유행은 그 시대에 특징적인 문화와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60년대 흑백TV에 이어 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면서 유행의 주기가 급속히 빨라지는 경향을 띠게 됐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재건국민운동본부의 국민생활계몽운동에 따라 생활의 간소화, 합리화를 추구하면서 남성의 '재건복'이 등장했다. 또 의류 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국산화의 길이 다져지게 되었고 '재봉틀 부속품의 국내 생산 성공'(1963년 2월15일자) 이후 한복 개량을 위해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매스미디어'의 강한 물결을 타고 주택가의 하늘은 TV안테나의 정글을 이루고 있어 안방극장인 '텔레비전수상기'가 가정에서 계속 인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의 경제 사정 호조와 문화생활에 급격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는데 29일 현재 수원시내에서 TV수상기를 보유하고 있는 가구수가 5천600여가구로써 총가구수 3만3천575가구에 비하면 6가구당 1대꼴이 되는 셈이다."(1971년 12월30일자 사회면)우리나라 최초의 TV는 1966년 현재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만든 VD-191로 당시 흑백TV 한 대의 가격은 웬만한 집 한 채 가격과 비슷한 15만원이나 됐다.올해 남아공월드컵에서 3D TV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처럼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흑백TV 수상기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신문에서도 TV프로그램을 게재(1972년5월6일자)하기 시작했고 1980년 8월부터 컬러TV가 국내 시판이 이뤄지면서 생활 팬턴의 변화까지 가져왔다. 또한 극장가도 컬러TV 등장으로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전업을 채비한다는 예상(1981년1월13일자 사회면)이 나오기도 했지만 2000년대 시대의 흐름에 맞춘 멀티플렉스관처럼 대형화로 극장(영화)산업은 꾸준히 성황을 이루고 있다.70년대의 유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미니스커트와 장발."새 경범(輕犯)처벌법 내일 발효/꼴불견·새유행·비시민단속… 적발된 사범은 경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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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8]여가활동 변천사 지면기사
[경인일보=문성호기자]직업상 일이나 필수적인 가사활동 외에 소비하는 시간을 일컫는 여가(餘暇). 한국도 누구나 여가활동을 즐기는 단계에 이르렀다.60~70년대 일부 계층만이 누린다고 생각해 왔던 테니스나 볼링, 실내 수영은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영화관람은 예삿일이 됐다. 또한 90년대 들어 레저의 종류도 다양해져 래프팅, 패러글라이딩, 수상스키 등 체험형 레저의 인기가 높아졌고 또한 최근에는 골프·승마 등 사치성을 띤 스포츠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1960년대에는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독립적 여가생활을 위한 여건이 조성되는 시기였다.도시화·산업화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야외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여가 행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정부도 국립공원의 지정, 여가행정조직 및 여가관련법규를 정비해 국민들에게 여가공간을 제공했다."결실의 9월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벅찬 시기를 당해 심신양면의 노고가 클 줄로 믿습니다. 이번 인천신문에서는 여러 낚시 동호인들에게 위안을 드리고 낚시도락본래의 의의를 높이기 위해 제2회 경기도낚시선수권대회를 다음 요강에 따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1961년 9월11일자 사회면)50여년 전 한국에서 낚시는 일부층의 대표적인 여가활동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80~90년대 여가활동이 다양화되면서 중·고령자 등에 의해 취미적 성향이 짙어지며 해마다 낚시인구가 증가하고 그 양상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딸기인파 절정, 서울행 버스 붐비고 접객업소 호경기-6·7일 양일간 겹친 휴일로 수원의 푸른지대에는 10여년만에 인파가 붐벼, 올들어 최고의 성시를 이루었다. 만발한 딸기의 푸른지대는 서울의 가족놀이터로 자가용과 서울택시들이 밀어닥치고 넓은 정원에는 발을 들여 놓을 자리조차 없어 초여름의 놀이터로 최고조의 성황을 마크했다.…"(1970년 6월8일자 사회면)"한국 전래의 전통문화 및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교육장화하며 해외 관광객에게 한국을 집중 소개하기 위한 민속촌이 3일 오후 용인군 기흥면 보라리에서 개관되었다. 이날 개관한 민속촌은 기흥관광주식회사가 정부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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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7]척박한 교육에서 미래를 그리다 지면기사
[경인일보=문성호기자]지난해 5월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만화책을 보다 적발된 고교생이 훈계를 하는 교사를 둔기로 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둔기로 맞은 교사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봉합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학교측은 '제자'라는 이유로 가해학생을 형사고발은 하지 않고, 교직원회의를 통해 퇴학 처리했다.또 지난 2007년에는 한 학부모가 두발불량으로 자녀를 나무라는 교사를 5분여간 일방적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교사는 학부모를 고소해 어머니는 기소유예, 아버지는 3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는 뜻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스승은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것으로 스승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가 자아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하나의 성숙한 인간을 만들고, 나라에 필요한 일꾼을 만든다는 뜻의 이 말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옛말이 됐다.오히려 교사의 존재는 단지 월급을 받고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진실된 마음과 사랑으로 참된 인간을 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려오고 있다.오천석 박사의 '스승'이라는 책에서는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이 부족한 오늘의 교육인에게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게끔 하는 질책과 충언을 던져주고 있다.'저로 하여금 교사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옵니다.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일 가운데서, 교사의 임무를 택하는 지혜를 주심에 감사하옵니다. 언제나 햇빛 없는 그늘에서 묵묵히 어린이의 존귀한 영(靈)을 기르는 역사(役事)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옵니다. …(중략)…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도우시어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저를 도우시어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스승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교사의 기도'라는 서사(序詞)에서 참된 스승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가 있다.지난 50년 동안 척박한 환경 속에도 사도(師道)의 길을 걸었던 교사들. 하지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만큼 높고, 권위 있던 교권의 지위가 너무나도 약해지고, 땅에 떨어진 이 현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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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6]수도권 개발의 빛과 그늘 지면기사
[경인일보=문성호기자]인구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사는 수도권은 돈을 쏟아부어 덩치는 커졌지만 오히려 살기는 더 불편해졌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공룡으로 비유되는 수도권의 집중은 우리나라 경쟁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서울 중심의 양적 팽창은 경기도와 인천을 서울의 위성도시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용인, 고양, 파주시 등 경기도지역에서 성행한 '묻지마 아파트 개발'은 마구잡이 개발로 도시기능이 뒤틀렸고 지역 간 빈익빈 부익부도 그만큼 심화됐다. 이로 인한 교통, 환경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경제 논리가 다음 세대에는 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수도권의 개발은 신도시개발사업과 불가분의 관계로 일컬어진다."정부에서 서두르고 있는 대도시인구집중 방지를 위한 방안이 최근 구체화되어 대통령에게 곧 보고한 다음 국무회의에서 확정될 것 같다. 30일 관계당국에서 밝혀진 최종안에 의하면 도시의 인구 팽창을 막고 건전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육성하기 위해 관공서, 금융기관, 대학교 등 공공시설 일부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등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1970년 3월 31일자 1면)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신도시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공업화 및 경제개발정책의 본격 가동과 더불어 '대도시 인구 집중 방지책'(1964년) 및 '수도권 과밀 억제에 관한 기본지침'(1970년대)에 따라 대체로 국토 및 지역개발, 대도시 문제해결이라는 두 가지 정책목표에 따라 현대적 의미의 최초 신도시인 광주대단지(성남)가 건설됐다."분양지 무상불하를 요구하는 성남단지 주민들의 궐기대회는 도가 지나쳐 폭동으로 변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이들 단지의 주민들은 『1백원 땅을 1만원에 파는 것을 결사반대한다.』등 푸랑카드와 피켓을 들고 궐기대회를 개최 이 자리에 참석키로 했던 양택록 시장이 11시10분이 넘도록 오지 않고 시청직원이 양해를 구하는데서 비롯됐다.…"(1971년 8월 11일자 사회면)서울특별시는 1968년 당시 서울의 인구 및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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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5]부끄러운 사고들(下) 지면기사
[경인일보=박상일기자]안전불감증과 부실한 공사가 불러온 각종 화재와 폭발, 붕괴 사고는 지난 반세기동안 수많은 사고들을 불렀다. 불타고 무너진 사고의 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고, 많은 국민들을 탄식과 안타까움에 빠지게 했다.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형 사고들은 다른 곳에서도 터져 나왔다. 부실한 안전점검과 조급함 등이 불러온 대형 교통관련 사고들이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터져나온 안타까운 사고들은 여행길이나 귀향길, 귀갓길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을 낯선 곳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게 했고, 때로는 무고한 인명까지 희생시켰다. ■ 떨어지면 대형 참사, 비행기 사고"제트기가 이륙 직후 민가 부근에 추락, 때마침 아침식사 중이던 일가족이 몰살 또는 중상을 입은 참사가 수원에서 일어났다. 10일 아침 10시 25분경 수원시 고색동 15 강○○(39)씨 집앞 약 30야드 지점 밭에 이륙 직후 기관 고장을 일으킨 공군 ○○전투비행단 소속 제트 전폭기가 추락, 조종사와 아침식사중이던 일가족 5명 등 6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하다…."(1967년 7월 11일자 사회면)민간 여객기가 흔치 않았던 1960년대에는 전투기 사고가 종종 지면에 등장했다. 특히 기관 고장을 일으킨 전투기가 민가에 추락해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잦았다. 일가족 5명이 참변을 당한 1967년의 전투기 추락 사고는 꼭 2년후인 1969년 7월에도 일어났다. F-86 전천후 요격기가 이륙하다가 기관 고장으로 수원시 고색동 민가에 추락한 사고로 민간인 가옥 2채가 전소됐고, 어린이 8명과 어른 1명, 조종사 등 10명의 귀중한 생명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9명의 가족과 이웃을 잃은 고색동 마을은 슬픔에 잠겼다."이날 불의의 참변을 당한 고색동 마을은 온통 어두워질 때까지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바람에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시내에 나왔다가 뒤늦게 달려온 방씨(희생자) 부인 박 여인은 남편과 두 딸을 잃고 어떻게 살겠느냐고 대성통곡을 했다…."(1969년 7월 23일자 사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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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14]부끄러운 사고들(上) 지면기사
[경인일보=박상일기자]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6·25전쟁이 남긴 폐허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며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저력은 세계적으로도 감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이뤄진 경제 성장은 '대충대충'과 '빨리빨리'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고,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내내 이땅에는 고개를 떨구게 하는 부끄러운 사고가 이어졌다.수명·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사고들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안전불감증'은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며 역사의 페이지마다 상처를 남기고 있다.# 끔찍한 참사, 화재·폭발사고"1일 밤 9시 25분경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하천1리 사○○여인 집에서 석유 등잔에 휘발유를 잘못 넣다가 불이나 함께 모여놀던 10세 전후의 같은 동네 어린이 20명 중 17명이 불타 죽고 1명이 중경화상을 입었다. 방안에 있던 어린이들은 출입문이 한개밖에 없어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모두 타죽거나 화상을 입었다…."(1972년 7월 3일자 사회면)1970년대 초에는 유난히 대형 화재사고가 많았다. 온동네를 슬픔에 빠뜨린 가평 어린이 집단 참사는 1970년대초 연이은 화재사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앞서 1971년 12월에는 대한민국 화재사고 중 '최악의 사고'로 손꼽히는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사고가 일어나 무려 168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화재는 방송을 통해 국내외에 생생하게 전해졌고, 국민들은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불과 1년만인 1972년 12월에는 모 방송사의 '10대가수 청백전'이 진행되던 서울시민회관에 대형 화재가 발생한다. 수천명의 관객이 몰려있던 현장은 치솟는 불길로 아수라장이 됐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53명이 또다시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1974년 11월에는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불이 나 나이트클럽 손님과 호텔 투숙객 등 8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불과 3년 사이에 연이어 일어난 이 3건의 화재사고는 1970년대 최악의 화재사고로 기록됐다.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