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에필로그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에필로그 지면기사

    [경인일보=박상일기자]1960년 '인천신문'으로 창간,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하며 경기·인천 독자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 온 경인일보는 이제 지난 반세기 역사의 책장을 넘기고 새로운 반세기를 기록할 대장정을 준비한다. 경인일보가 기록할 새로운 반세기는 반란과 폭력과 부정부패로 얼룩졌던 지난 반세기와 확연히 다른 희망과 발전의 역사가 될 것이다. 성숙한 지방자치, 안정되고 활기찬 경제, 아름답고 세련된 문화,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자랑스러운 경기·인천이 우리가 그려갈 미래다. # 격동의 지난 반세기경인일보가 창간한 1960년은 한국사에 암울한 시기였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0년 독재가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리면서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이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쳤다. 언론계에도 부패한 사이비언론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가뜩이나 혼탁한 세상을 얼룩지게 했다. 경인일보는 그런 시대에 인천시 중구 사동의 한 인쇄소 창고에서 '순수한 향토지(鄕土紙)'를 표방하며 출범했다. 창간 2년 만에 인천지역 언론 중 처음으로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정통언론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언론에 서슬 퍼런 검열과 탄압의 칼을 휘둘렀다.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히 정론직필의 깃발을 지키며 경인지역 언론의 역사를 이어갔다. 무자비했던 군사정권의 억압과 언론통폐합이 난무하는 격변하는 언론환경에서도 경인일보가 꿋꿋하게 반세기를 버텨올 수 있었던 저변에는 식지 않는 독자들의 사랑이 있었고, 경인지역의 미래가 있었고, '정론직필·지역발전·문화창달'이라는 굳건한 창간 정신이 있었다.반세기 역사를 지켜온 경인일보가 현장에서 기록한 지난 5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부 쿠데타에서 유신정권, 10·26 대통령 암살, 12·12 군사반란, 1980년 민주화 항쟁 등이 이어지며 국제적으로 유례없는 격동의 역사를 썼다. 사회적으로도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급격한 도시화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급격한 도시화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경기도의 현재와 과거는 무척이나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물론 외관상의 변화다. 몇몇 지자체는 10여년전과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농업지역에서 첨단 도시로 변모했다.경기도가 팽창하고 발전해 나갈수록 각 시·군의 역할과 위상도 강화됐다. 30여년전 인천직할시로 경기도에서 별도 분리된 인천광역시는 이제 동북아 중심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도내 소도시들도 인구 증가 등을 이유로 줄줄이 시(市)로 승격했다. 현재 도내 31개 시·군중 군(郡)은 불과 4곳에 불과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점점 커져가는 경기도의 규모 문제로 인해 '분도론'이 터져 나오기도 했으며, 최근까지만 해도 각 시·군의 통폐합 문제는 지역내 최대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경인일보는 지역 여론의 대변자로서 이같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보도해 왔다.# 급격한 도시화, 잇따른 시 승격1970년대 이후 경기지역에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자 인구 팽창에 다른 잇따라 시 승격이 시작된다.이에 대한 첫 보도는 경인일보 1973년 3월1일자 '전국 행정구역 대폭 개편'이라는 기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기사에는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방침에 따라 성남과 안양, 부천이 시로 승격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같은 시 승격 배경에는 정부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안이 밑바탕이 됐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 위성도시인 성남, 안산, 부천을 읍에서 시로 재조정했으며, 양주 구리면 등을 읍으로 승격시켰다.또한 1980년 4월1일자 7면에는 '오늘 남양주군 탄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의 신설 소식을 다뤘다. 기사에서는 남양주가 국내 최초로 남양주군청과 남양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들이 한 곳에 배치됐다는 내용을 전했다.특히 당시 보도에서는 '남양주군 탄생…1년의 산고'라는 관련 기사를 통해 남양주군 탄생과 관련한 비화를 전했다. '개발제한에 묶여 위치 선정', '옹고집 한뼘땅 주인 군수가 설득' 등의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난을 겪었던 남양주 탄생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후 1986년 1월 6일자 보도에서도 또다른 시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수도권 규제에 묶이다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30]수도권 규제에 묶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경기·인천은 발전 및 규제의 역사가 함께 진행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권 규제는 인구 및 국가 주요 시설은 물론 경제의 중심도 수도권에 집중된 현상을 해소키 위해 시작됐지만 최근에는 '중첩규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도권 발전의 목을 조이는 덫이 됐다. 실제 경기도만 해도 경기도 전역에 걸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4년제 대학 신설에 대한 규제를 받고 있으며, 2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은 도 전체 면적의 20%(2천213㎢)에 달할 정도다. 또한 도 전체 면적의 21%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 7개 시·군내 토지 2천97㎢는 팔당상수원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으로 묶여 규제를 받고 있는 등 규제 내역을 일일이 밝히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2000년 이후에는 수도 이전 문제가 대두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올해로 50년을 맞은 경인일보는 이 같은 수도권 규제와 수도 이전 논란 등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경인일보를 통해 본 수도권 규제와 수도 이전 논란에는 지역 발전을 위한 투쟁의 기록이 낱낱이 적혀 있다.# 수도권 규제를 알리다수도권 규제와 관련한 경인일보의 보도는 당시 제호였던 연합신문 1972년 8월 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보도에서는 '수원·안산 등 개발을 제한'이라는 기사를 통해 도내 1개 시 3개 군 597㎢에 대한 개발제한구역 고시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이 기사에서는 1971년 12월 29일 건설부가 확정했던 개발제한구역 내용을 다뤘다. 기사는 개발제한 지역과 면적 등을 상세히 다뤘으나, 이 같은 정책에 대한 비판 내용은 써 있지 않다. 이는 당시 군사정권·정부의 검열로 인한 암울했던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경인일보는 당시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는 등 기사 배치를 통해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977년 3월 26일자 신문에도 경기·인천 지역에 대한 규제 소식을 경인일보는 대대적으로 알린다. 경인일보는 이번에도 1면 톱 기사로 기사를 전진 배치시키면서 규제의 부당함을 간접적으로 중요시했다.'인천·수원 등 공장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9]경기도청의 이전 비화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9]경기도청의 이전 비화 지면기사

    [경인일보=김태성기자 ]경기도청은 경기도의 중심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의 핵심적인 정책이 이곳에서 수립·실현되고 다양한 행정 처리도 이곳에서 심장 역할을 맡는다. 경기도청이 현재의자리에 자리잡은지는 불과 50년도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도민들에게조차 낯선 정보다. 기원전 7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기도의 긴 역사, 그리고 첫 도지사가 1946년 임명된 새로운 행정체계로의 경기도를 뒤볼아볼 때도 이같은 사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창간 50주년을 맞는 경인일보 지면으로 풀 수 있다. 지난 1967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한 경기도청의 새로운 역사는 1960년 창간한 경인일보의 역사보다도 짧다. 경기도청이 지금의 터를 잡는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도내에서 유일한 신문매체로 남아있는 경인일보는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을 이전 당시부터 상세하게 도민들에게 전했다. 또한 최근의 경기도청 광교신도시 이전 문제도 신속·정확하게 보도해 경기도청의 역사는 경인일보와 함께함을 또다시 증명하고 있다.# 경기지사 임명으로 시작된 경기도청 관련 보도경인일보의 경기도청 관련 보도는 창간 이듬해인 1961년 신임 경기도지사 임명과 관련해서다.경인일보 1961년 5월25일자에는 '명 도지사와 시장을 임명'이라는 제목의 1면 기사를 통해 정부의 관선 지자체장 인사를 보도했다. 이 당시 도지사로 임명된 인물은 수원 유신·창현고의 설립자인 고(故) 박창원 준장이다.도지사의 경우 1대 구자옥 지사부터 7대 윤원선 지사때까지는 임명직으로 선출 후 제8대 신광균 지사의 경우 1960년 12월 선출을 통해 도지사 자리에 올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임기를 6개월도 채우지 못했다. 박 전 도지사의 임명은 후일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다.도지사 임명과 관련한 기사는 1963년 12월17일자 경인일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경인일보는 군 출신 박창원 전 지사의 군 복귀를 위한 도지사직 이임을 보도했고, 이와 관련한 박 전 지사의 입장도 실었다. 또한 5일후인 1963년 12월22일자 1면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8]경인일보로 보는 경제지표 및 물가지수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8]경인일보로 보는 경제지표 및 물가지수 지면기사

    [경인일보=최규원기자]경인일보가 창간한 지 5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에 빗대면 5번을 변한 세월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는 그 보다 빠른 변화를 겪어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도하고 있는 경기도 역시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사실상 1년에 한번 아니 몇달에 한번씩 사이클이 변할 정도로 급변의 시대를 지내고 있다. 창간 초기 경인일보는 2면 체제로 지면의 대부분이 사회를 반영하는 사건기사가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가'에 대한 정보는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60~70년대 가장 중요한 경제기사 아니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오로지 서민들의 주식인 '쌀'과 관련된 기사가 주를 이뤘다. 경인일보가 물가의 지표로 삼은 최초의 품목은 쌀, 보리쌀, 콩, 밀가루, 쇠고기, 돼지고기, 계란, 멸치, 배추, 무, 참기름, 간장, 설탕, 황목, 목탄, 금, 은 등 17개였다. 현재의 단위와는 다르지만, 이들 품목이 당시의 가장 큰 서민들의 먹거리요 관심품목이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또 시간 흐름에 따라 옥양목, 포플린, 연탄, 시멘트, 함석, 세탁비누, 밀가루, 베니어합판, 마른 명태 등도 물가의 지표로 등장했다.# 60~70년대 주요 경제 이슈는 '벼농사', '김장' 등 서민생활과 밀접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 창간 후 가장 먼저 내보낸 경제기사는 1960년 9월 5일자 버스비 인상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시 버스요금 20환을 30환으로 인상 결정을 내리자 학생들이 반발, 버스 운영업체와 협의를 벌였다는 내용이다.최초의 통계기사로 분류될 수 있는 기사는 총세대수 관련 내용이다. 1960년 경기도의 총인구는 36만5천883명, 6만8천329세대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세입자는 2만3천9세대, 가구 소유자는 4만4천289명으로 2010년 현재 인구 천만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경기도와는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지금도 실업이 가장 큰 사회문제 중 하나지만, 60년대 당시에도 취업은 시대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단적인 예로 '미군 노者(근로자)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경기·인천 변천사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경기·인천 변천사 지면기사

    [경인일보=전상천기자]1960년도에 창간된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경기·인천지역의 기업과 시민, 그리고 정부의 경제정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다각도로 조명, 전달해 왔다.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수원연초제조창 기공 등 기업 역사는 물론 경부고속도로 등 한반도 전역을 물샐틈 없이 연결해 온 물류의 동맥인 도로의 개설 역사까지 한 점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특히 경인일보는 4·19 민주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1960년 민주주의 실현의 기치를 걸고 인천항 인근 물류창고에서 창간된 점을 감안할 때 경제뉴스 전달에 그 어느 매체보다 주력함은 필연적 인연이 있는 듯하다.경인일보 창간 초기인 196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변천은 크게 경제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계획발전기와 1987년 민주화시기 이후 경제, 1998년 IMF 위기 및 재도약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경제계획발전기엔 화폐개혁과 경부고속도로 개통 등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 토대를 놓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어 199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삼성과 LG, 현대 등 우리나라 굴지의 그룹사들과 중소기업들의 큰 약진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는 힘이다. 이어 한국경제에 쇼크를 안겨준 1988년 IMF 경제위기다. 많은 기업이 부도 등 퇴출당했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쫓기던 때이다. 이어 2000년도부터 한국경제는 다시 재도약의 시기를 맞게 된 원인과 과정, 그 대안을 제시, 지역경제의 주춧돌이 돼 왔다.# 발전계획경제와 화폐개혁경인일보는 창간 보름 만인 9월 1일자에 POL(미군유류항) 노조원의 연좌시위를 담은 '살길 찾는 勞者의 絶叫'를 실었다. 당시 인천 POL 작업권을 갖고 있는 평화공사측이 노조의 임금인상을 거부하면서 촉발된 70일간의 시위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했다.이를 시작으로 경인일보는 5·16 쿠데타가 성공한 뒤인 1962년 11월 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대장 승진과 함께 시작된 국가발전 위주의 계획경제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 삼성전자·SK…기업변천사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7] 삼성전자·SK…기업변천사 지면기사

    [경인일보=이성철기자] 한국 경제는 초기 반세기동안 일제 치하의 수탈 위주 경제, 6·25전쟁 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제자리걸음을 했으나 19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잘살아보자'는 기치 아래 경제개발에 매진해 온 결과, 최빈국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 재벌이 주도하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 등을 통해 우리나라는 지난 53년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96년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선진국의 사교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 대기업들의 비약적인 발전은 대한민국 경제 번영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대한민국의 중심인 경기도와 인천. 이곳에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온 기업들의 역사가 서려있다.1960년대 선경(현재 SK케미칼)이 수원에 아세테이트섬유 공장을 세우면서 경기도내 산업 부흥의 시작을 알렸다. 1971년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들어섰고, 1980년대 들어 삼성전자반도체 공장과 정보통신 연구소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또 많은 협력업체들이 도내 곳곳에 터전을 마련했고 부의 효과는 선순환을 이뤘다. 인천도 마찬가지. 1953년 전후 대한중공업사로 시작해 인천제철로 회사명이 바뀌고 현대에 인수된 후 지금까지 제철공업을 이끌고 있다. 지난 2000년 부도가 나기 전까지 국산 자동차 생산의 전초기지임을 자처했던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 등 고난과 번영의 시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산업 역사의 한 면을 장식했다.# 수원의 대표 기업 선경선경의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수원시 평동 벌판에서 직기 20대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매출 80조원의 재계 3위 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초석을 다졌다. 최 회장은 수원 토박이로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일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1953년 3월에 인수했다.최 회장은 1953년 10월 1일 회사를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6]경인일보가 키운 꿈나무들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6]경인일보가 키운 꿈나무들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1950년대 고교 야구붐 이후 산업화에 밀려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졌다.지방언론뿐 아니라 중앙언론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보도보다는 정치와 경제 문제 등에 대한 보도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경인일보는 지역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을 위해 다양한 대회를 유치 및 개최해 선수 발굴에 앞장섰다. 또 1980년대 이후 프로 스포츠의 인기에 가려 아마추어 스포츠가 위기에 봉착하자 지역 유망주와 지도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경인일보사가 시상하는 '체육 꿈나무 대상'과 '전국체전 MVP' 시상을 제정했다.# 경인일보와 지역 아마추어 스포츠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1960~70년대 한국 스포츠는 도약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1982년 6개 팀이 참여한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축구와 농구, 배구 등의 종목에서도 잇따라 프로리그가 발족하며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높아졌다.특히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싹을 틔우고 있던 1986년과 1988년에는 각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개최됐고, 2002년에는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려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여기에 더해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야구 국가대표팀이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우승, 2009년 제2회 WBC 준우승을 일궈냈다.또 올해 상반기 열린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남자 성인국가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성공한 데 이어 U-20 여자국가대표팀이 4강 진출, U-17 여자국가대표팀이 120여년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축구연맹이 주관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 명실상부 스포츠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이런 각종 세계대회에서 프로리그가 있는 종목들이 선전함에 따라 프로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어 갔지만 반대로 아마추어 스포츠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특히 홍수환이 투지 하나로 세계챔피언에 오르며 국민적인 감동을 줬던 복싱,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오른 임춘애로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5]1960~1970년대 학교스포츠 만화경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5]1960~1970년대 학교스포츠 만화경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한국에서 프로스포츠가 탄생한 것은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탄생한 1982년부터였다. 프로야구 탄생 이후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이 잇따라 리그를 결성하면서 지금까지 국민들의 인기몰이에 힘써왔다. 그러나 아마추어 스포츠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특정 대회에만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뿐 국내 대회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프로스포츠가 탄생되기 전인 1980년 이전 아마추어 스포츠는 어땠을까. 경인일보를 통해 프로스포츠가 탄생하기 전인 1960년대와 1970년대 스포츠를 뒤돌아본다.# 60년대 스포츠를 이끈 고교 야구경인지역에서 고교 야구의 인기는 당시 어느 종목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우선 인기 몰이는 인천고가 먼저 시작했다. 1952년부터 3년간 인천고는 전국 무대를 휩쓸면서 구도(球道)라는 명성에 맞는 성적을 냈고 이어 동산고가 각종 전국 대회를 휩쓸면서 그야말로 경인지역 야구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이랬던 분위기는 6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1961년 8월 동산고가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같은 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2회 전국체전에서도 고등부 야구 우승을 차지해 경인지역 국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더불어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에 인천고와 동산고가 인천 대표로 출전하며 일반 시민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했다.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는 서울과 인천, 대구, 부산 등 4대 도시의 대표팀이 출전해 지역의 명예를 걸고 결전을 벌였던 것으로 지금의 왕중왕전과 같은 성격이었다. 사실 이 대회는 인천고가 1954년 휴전 이후 부활된 제9회 청룡기 대회와 제8회 황금사자기, 제35회 전국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50년대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것이 60년대 들어 비정기적으로 열렸고 70년대에는 '인천시장배 4대 도시 대회'로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제8회 대회는 경인일보의 전신인 인천신문사와 경기도야구협회가 공동으로 대회를 개최해 야구 열기가 계

  •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4]프로스포츠 이야기

    [시대의 창에 비친 격동 반세기·24]프로스포츠 이야기 지면기사

    [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한국 프로스포츠는 지난 1982년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됐다.이후 1985년 프로축구, 1996년 프로농구에 이어 2004년 프로배구가 순차적으로 설립됐다. 빠른 정착을 위해 지역 연고지 제도를 도입한 각 프로리그들은 2천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을 최대의 마케팅 시장으로 판단, 소속팀의 연고지로 적극 활용했다.시장성이 큰 만큼 많은 팀들이 수도권에 터를 잡고 팬 몰이에 나섰지만 결국 일부 팀들은 이 지역을 떠나기도 했다. 경인일보를 통해 비쳐진 4대 프로 스포츠에 대한 역사를 살펴본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경인지역 팀들한국 프로축구에서 경인지역 연고팀들은 리그를 선도했다.경인지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팀은 현재 제주유나이티드FC의 전신인 유공 코끼리다.유공코끼리는 1982년 12월 17일 창단, 이듬해인 1983년 한국 프로축구 원년 슈퍼리그에 서울·인천·경기 지방을 연고로 참가했다.광역연고제가 정착된 1987년부터는 경인지역을 연고지로 사용했다.1991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지만 프로축구연맹이 '지방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1996년 일화 천마(현 성남 일화)와 LG치타스(현 FC서울) 등과 함께 경기도로 강제 이전을 권고해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팀 명칭도 부천 SK로 바꿨다.1988년 서울에서 창단한 성남 일화는 1996년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뒤 2000년 지금의 성남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성남은 2001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정상을 지키며 명실상부 한국 프로축구 최고의 팀으로 자리잡았다.1995년 창단한 수원 삼성은 21번의 공식대회 우승컵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의 서포터스를 보유하고 있다. 2004년 3월 K-리그 13번째 구단으로 공식 출범한 인천 유나이티드는 특정기업이 아닌 시민주 공모를 실시해 195억원의 창단 자금을 마련해 창단했다.인천 유나이티드는 2005년 창단 2년 만에 정규리그 통합 성적 1위와 통합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시민 구단의 성공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