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3] 에필로그,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3] 에필로그,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 영원불멸을 꿈꾸며 만리장성과 병마용, 그리고 거대한 지하궁전을 만들었던 진시황제도 사라졌고, 야광주를 입에 물고 극락으로 가기를 염원했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결국 수천 수백 만명의 백성들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든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황금 옥좌뿐이었다.   경인일보는 지난 9월 6일부터 12월 2일까지 3개월 남짓한 기간동안 창간50주년 특별기획 왕릉순례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를 연재했다.    중국 시안(西安), 난징(南京), 선양(瀋陽), 베이징(北京), 탕산(唐山)을 거쳐 베트남 후에(Hue)와 일본 오키나와 (沖繩)를 넘나들며 경인일보 취재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릉과 왕릉군의 생생한 기록을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중국편에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거지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명나라 홍무제, 한시대를 풍미했던 명의 영락제와 만력제, 대청 제국의 기틀을 만든 청태조와 청태종, 청나라를 최강의 제국으로 만든 강희제와 건륭제, 그리고 청의 멸망을 재촉한 서태후를 새롭게 조명했고,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화재 발굴 뒷이야기와 왕릉 도굴사건 등도 흥미롭게 소개했다.    베트남편에서는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속에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뜨득 황제와 카이딘 황제를, 일본편에서는 일본과는 전혀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독립적인 류큐 왕국을 건설했던 쇼씨왕조에 대해 다뤘다,   중국 황릉을 처음 답사했을때 취재진은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적잖게 놀랐다. 그리고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정착된 황릉 양식이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과 베트남, 일본에까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확인했다. 하지만 중화제국의 문물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조선 나름대로, 일본과 베트남 역시 중국의 문묘문화를 수용하되 그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결합해 왕릉을 조성했다. 이들 왕릉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2]일본 오키나와 슈리성과 다마우돈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2]일본 오키나와 슈리성과 다마우돈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현(沖繩懸)은 40여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이들 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오키나와 본도(本島)이며, 그 안에는 현청 소재지인 나하(那覇)시가 자리잡고 있다. 나하시의 반경 1천500㎞내에 오사카, 서울, 마닐라, 홍콩 등이 위치해 있어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일본과의 중간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에메랄드 빛 바다와 기암절벽이 만드는 수려한 경관과 함께 연평균 기온이 약 22℃로 늘 따뜻해서 우리나라 프로야구팀들이 겨울철 전지훈련을 하러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섬 남부에는 고대 류큐(琉球) 왕국의 사적지가 있는데 이중 주목할 만한 것은 '슈리성터(首里城跡)'와 '다마우돈(玉陵)'이다. 이들은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본토에 편입돼버린 류큐(琉球) 왕국 오키나와는 원래 17세기까지 '류큐'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통 문화를 살펴보면 언어, 풍속, 습관, 신앙 그밖의 모든 점이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일본보다는 중국 남방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류큐라는 글자는 명실록(明實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1368년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해 왔던 몽골인의 국가 원(元)이 멸망하고, 한족의 국가인 명(明)이 건국되면서 그 여파가 류큐에도 밀려왔다. 명 태조 홍무제(주원장)는 건국 후 여러 나라에 사자를 보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고 그들에게 복속을 촉구했다. 류큐 왕국도 당시 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명나라에 순순히 조공을 바치며 청대(淸代) 말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갔고, 조선과 일본 본토, 동남아시아간의 무역 중계지로서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그러나 독립국가로서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왔던 류큐왕국은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현재의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보낸 군대 3천명의 침략을 받고 그들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1]베트남 후에 카이딘황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1]베트남 후에 카이딘황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 140여년간 베트남 응우옌(Nguyen)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는 1883년 프랑스에 점령됐고 1940∼1945년 사이에는 일본 점령하에 있었으며 1947년 4월에는 비공산계의 베트남 임시 행정위원회가 조직되기도 하는 등 근·현대사의 변화를 크게 겪은 곳이다.    그리고 1949년 7월 1일 새로 수립된 베트남공화국이 수도를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으로 정하면서 예로부터 중심지 역할을 하던 이곳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했던 도시였지만, 1946∼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초기에 유적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베트남전쟁 때인 1968년에는 베트공의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이때 많은 왕족들의 건물과 박물관·도서관·불교사원 등이 파괴됐으며,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재건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릉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딘 황릉'은 그런 후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상당히 보존이 잘 된 편이다.    중국의 명·청 황릉 중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이 서태후(西太后)의 자희릉(慈禧陵)이라면 베트남에서 최고로 화려한 능을 꼽으라면 단연 카이딘 황릉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랑스의 꼭두각시 카이딘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12대 카이딘(Khai Dinh·啓定帝) 황제는 동 까잉 (Dong Khanh·景宗) 황제의 아들로 1885년 10월 8일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푹 부 다오(Phuc Buu Dao)였다.    사실 동 까잉 황제 이후에는 타잉 타이(Thanh Thai) 황제와 쥐 떤(Duy Tan) 황제가 뒤를 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프랑스로부터 식민통치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고 만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랑스는 1916년 5월 18일 식민통치에 협조적이었던 부 다오를 황제에 앉히게 되고 그가 바로 카이딘 황제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0]베트남 후에 뜨득황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0]베트남 후에 뜨득황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한국과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 중국으로부터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사회·문화적으로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충효사상, 사농공상, 과거제도, 관혼상제, 풍수지리, 24절기와 십간십이지의 사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우리와 다른 기나긴 '식민역사'가 있다. 베트남의 고대사 전체는 중국의 식민지 시대였으며, 독립한 이후에도 수차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재식민지가 됐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에는 제국주의 프랑스가 베트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베트남의 근대사는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en·阮王朝)는 현재의 베트남 영토 형태로 전국을 통합한 최초의 왕조이지만, 프랑스에 주권을 빼앗겨 대중으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왕조가 됐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 '후에'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후에(Hue)'는 흐엉강(香江) 하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중국해와 매우 가깝다. 수도 하노이와는 540㎞, 베트남 최대 도시인 호찌민시와는 644㎞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은 역사·문화적으로 북부와 남부가 서로 별개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데,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점이 바로 후에인 것이다.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로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40여년간 응우옌 왕조의 정치·문화적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잉(Nguyen Phuoc Anh·嘉隆帝)'은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응우옌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외세를 이용해 세운 왕조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나라의 국정 간섭에 시달렸고, 결국 188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후에에 있는 병원, 역, 학교 등 유럽 양식으로 된 근대적인 건물들은 바로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다. 한편 후에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응우옌 왕조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이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은 생전에 거주했던 궁정을 능가하는 화려한 능을 제작했고, 건축 양식은 중국과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9]준화(遵化) 청동릉 2 - 자희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9]준화(遵化) 청동릉 2 - 자희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세계 열강들의 군사적·경제적 침략과 농민들의 저항, 시민의 성장 등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가고 있던 청나라는 서태후(西太后)라는 한 여인에 의해 되돌릴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어린 황제들을 대신해 4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황제 부럽지 않은 큰 권력을 행사했던 그는 신식 해군을 만들기 위한 국가예산을 자신의 별장인 '이화원(頤和園)'을 짓는 데 다 써버리는 등 사치와 낭비가 심했다. 결국 서태후의 통 큰 낭비 덕분에 청나라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276년간 이어져 왔던 청황조는 1912년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역사의 라이벌,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청나라 제9대 황제인 함풍제(咸豊帝·1831~61)에게는 3명의 황후와 1명의 황귀비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효덕현황후(孝德顯皇后)는 함풍제가 재위에 오르기 2년 전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효정현황후(孝貞顯皇后)와 세 번째 부인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는 권력을 앞에 두고 힘겨루기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효정현황후의 휘호는 '자안(慈安)'이고 효흠현황후는 '자희(慈禧)'인데 자안은 자금성 내정(內廷)의 동편에 있는 종수궁(種粹宮)에서 생활했고, 자희는 서쪽에 있는 저수궁(儲秀宮)과 장춘궁(長春宮)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흔희 자안을 '동태후(東太后)', 자희를 '서태후(西太后)'라고 부르는 것이다.   # 명·청 황릉 중 가장 화려한 자희릉(慈禧陵)   청 문종(文宗) 함풍제는 1865년 허베이성 준화시(遵化市)에 있는 청동릉(淸東陵)의 왼쪽 끝 '정릉(定陵)' 지하궁에 안치됐다. 그리고 함풍제의 부인이었던 자안, 자희 양 태후의 능은 함풍제의 능 동쪽에 위치해 있다. 정릉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자안릉(慈安陵)과 자희릉(慈禧陵)을 합쳐 '정동릉(定東陵)'이라 부른다. 정동릉은 1872년 착공돼 1879년 완공됐다. 자안릉 건설에는 은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8]준화(遵化) 청동릉 1 - 효릉·경릉·유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8]준화(遵化) 청동릉 1 - 효릉·경릉·유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탕산(唐山) 준화시(遵化市)에 위치해 있는 청동릉(淸東陵)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능묘군이다. 그런데 교통편이 안좋고 편의시설이 발달돼 있지 않은 탓에 관광객들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차로 125㎞ 정도 동쪽으로 달리다보면 갖가지 난관을 만나게 된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2차선 지방도로로 바뀌며 대형트럭, 삼륜차, 우마차, 자전거가 함께 달리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좁은 도로와 산을 굽이굽이 돌아 승용차로 3시간여만에 도착한 청동릉. 막상 능 입구에 도착해보니 그 끝이 도무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능원의 총 면적은 2천500㎢로 이곳엔 청대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 비빈(妃嬪)·왕자·공주를 포함해 총 161명이 묻혀 있으며 300개 이상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대규모로 조성된 청동릉은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청나라 황릉이 동서로 분리된 까닭청대의 황릉은 크게 세군데로 분리돼 있다. 청태조 누르하치와 2대 황제(태종) 홍타이지는 만주족의 근거지였던 선양(瀋陽)을 수도로 삼고 청(淸)의 기틀을 만들었지만, 통일된 중화제국을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운명해 선양에 묻혔다. 그후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인 3대 황제 순치제 (順治帝·1638~1661)는 이들의 뒤를 이어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대부분 평정하고, 1644년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을 통해 베이징(北京)에 입성, 수도를 베이징으로 바꾸게 된다. 명대에 이어 베이징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순치제는 1661년 베이징 동쪽에 있는 준화(遵化) 지역에 묻히게 되고, 이것이 청동릉의 시초가 된다. 나머지 왕들도 순치제를 따라 청동릉에 묻혔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순치제의 손자인 옹정제(雍正帝·1678~ 1735)는 이곳이 아닌 베이징 서쪽의 역현(易縣)에 별도로 자신의 능을 만든다. 이것을 '청서릉(淸西陵)'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풍수(風水) 때문이었다. 옹정제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7]선양 청복릉·청소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7]선양 청복릉·청소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중국 선양(瀋陽)은 랴오닝성(遼寧省)의 성도로 베이징, 상하이, 톈진과 함께 중국 4대 도시 중 하나다. 우리에겐 '심양'이나 '봉천(奉天)'이라는 지명으로 더 익숙하고, 만주족이 지배할 때는 '버드나무 울타리'라는 뜻의 무크덴(Mukden)으로 불리기도 했다. 17세기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홍기한 후금(後金)은 선양을 수도로 삼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오늘날 선양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만주족의 유산은 바로 이 시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이후 후금은 중국 전역을 지배하며 '청(淸)'으로 이름을 바꾼다. 19세기 말 선양은 러시아가 지배했고, 러일전쟁이후 1945년까지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 선양에는 청태조 누르하치의 능인 '복릉(福陵)', 2대황제 홍타이지의 능인 '소릉(昭陵)', 누르하치 선조 4대가 모셔진 '영릉(永陵)'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3개의 능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청나라의 기틀을 만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청태조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1559~1626)는 명나라가 기근과 폭정으로 혼란해진 시기, 주위 여진족들을 정복해 만주지방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후 선양에 도읍을 두고 나라를 세웠다. 여진족이 세웠던 금(金)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하고, 칸(汗·만주식 군주 칭호)으로 즉위한 것이다. 이후 그는 사르후(薩爾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했는데, 1626년 몽골에 원정을 나가 전투 도중 부상을 입은 뒤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 사망했고, 그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뒤를 잇게 된다.청 태종(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1592 ~ 1643)는 선양에서는 영웅대접을 받고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에 뼈아픈 상처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태조가 죽자 새로운 칸으로 즉위해 1627년 3만의 군사를 보내 조선군을 제압, 형제지맹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정묘호란). 1635년에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1636년 청군·몽고군·한족 군사 등 도합 12만 군사를 이끌고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6]베이징 명13릉- 2 정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6]베이징 명13릉- 2 정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1958년 9월 6일 중국 신화통신은 전 세계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타전했다. "명 13릉 가운데 하나인 정릉(定陵)이 발굴됐다. 능묘는 하나의 지하 궁전을 이루고 있다. 온통 청백색의 돌로 축조된 반달모양의 능묘 후전(後殿)에는 세개의 주홍색 관곽(棺槨)이 안치돼 있는데, 명(明)의 제13대 황제인 주익균(朱翊鈞)과 그의 두 황후(효단·효정황후)의 것이다. 시신주위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옥그릇, 그리고 100필이 넘는 채색 비단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비단은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금빛 찬란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비단은 실전(失傳)된 명나라때의 견직물 제작 기법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명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만력제'베이징에 있는 명13릉 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정릉'이다. 다른 능들은 대개 지상의 화려한 건축 양식만 볼 수 있는 반면, 정릉에서는 진시황 때부터 전설로만 전해지던 황제의 '지하궁전'이 실제로 발굴돼 많은 유물을 함께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릉은 '정릉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정릉의 주인공인 주익균(1563~1620)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 파견을 단행한 황제로 우리나라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1572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이듬해 연호를 만력(萬歷)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만력제(萬曆帝)'로 부른다. 만력제는 1620년까지 48년간 명나라를 통치했는데, 이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 중 가장 긴 재위기간이었다. 그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명대 최고 재상인 장거정(張居正·1525~82)에게 맡겼다. 장거정은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나랏일을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명나라는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1582년 장거정이 죽고 만력제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개혁정책의 후퇴가 나타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5]베이징 명13릉- 1 장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5]베이징 명13릉- 1 장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찾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톈안먼(天安門), 쯔진청(紫禁城), 완리창청(萬里長城) 등을 먼저 찾게 된다. 그런 연후에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명13릉(明十三陵)을 돌아보곤 하는데, 사실 명나라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명13릉뿐 아니라 완리창청과 쯔진청도 명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완리창청은 진시황 때에 건축한 오리지널이 아니라 명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명대에 개보수해서 만든 것이며,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溥儀)가 떠오르는 쯔진청도 사실은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 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명나라 최대의 능묘군 '명13릉'명13릉은 중국 베이징 북쪽 약 40㎞ 지점에 있는 창핑구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대(明代·1368~1644) 13명의 황제와 23명 황후, 1명의 귀비가 한데 묻혀 있는 능묘군이다. 이곳은 황제 13대의 능이 있기 때문에 '명13릉'이라고 통칭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구리시에 있는 조선왕릉의 최대 능원인 동구릉(東九陵)과 비교할 수 있다.현재 13개의 능이 모두 공개된 것은 아니고, 성조 영락제의 '장릉(長陵)',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신종 만력제 '정릉(定陵)' 등 3개의 능만 공개되고 있다. 이 중 특히 정릉은 내부에 숨겨져 있던 지하궁전이 발굴돼 호화로운 금은 그릇, 왕관과 장신구 등의 부장품이 출토됐으며, 지하묘실은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해놨다. 명13릉은 철저하게 풍수지리학자들의 계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이 거대한 능원의 동, 서, 북 3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는 용산(龍山)과 호산(虎山)이 마주 서 있어 마치 전체 능묘군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중국은 주(周)나라(약 BC 1066~BC 221년) 때에 이미 흙을 쌓아 올려 무덤을 만드는 법이 나왔다. 그 후 역대 제왕들은 저승에 가서도 생전의 지고무상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 능침의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명태조 주원장은 개국 후 난징(南京)에서 황위에 오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4]난징 명효릉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4]난징 명효릉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중국 난징(南京)은 장쑤성(江蘇省)의 성도다. 장강 하류 비옥한 삼각주 토지위에 발달한 탓에 예로 부터 강남 경제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며 모두 10개의 나라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동안 난징은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됐고, 신해혁명(1911∼1912) 당시 공화국의 임시정부로 엄청난 변화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사건으로 30만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현재 난징은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신흥공업도시로 성장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바로 이곳에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인 '명효릉(明孝陵)'이 자리잡고 있다.#'거지'에서 '황제'까지 오른 명(明) 태조 주원장난징시 중산(鐘山) 두룽푸(獨龍阜)에 있는 명효릉은 명나라의 첫 황릉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 황후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묻힌 명태조 주원장(1328~1398)은 참으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국 역사상 이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몽골족이 지배하던 원(元)나라 말기, 국가지도부는 천재지변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와 동시에 각종 공공사업에 대규모 노동력을 징발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어린시절 가뭄과 기근으로 부모형제가 굶어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주원장은 성장 과정에서 워낙 세파에 시달렸기 때문에 사람다루는데 있어서 수완이 좋았고, 각종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시킬 줄 았았다. 그는 불과 열 살 정도의 나이에 스스로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그뒤 행각승이 돼 회하(淮河) 유역을 떠돌며 걸식했다. 그후 홍건적이었던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됐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의 거점인 난징을 점령하게 된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3]진시황릉과 병마용 2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3]진시황릉과 병마용 2 지면기사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1974년 3월 29일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임동구 서양촌. 양신만(楊新滿)이라는 사람과 그의 동료 너댓명은 그들이 대대로 살고 있던 마을 남쪽의 감나무 숲에서 우물을 파다가 '쨍'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소리가 이상해 땅을 더 파고 들어가니 형태가 특이한 토기 파편들이 무더기로 발견된다. 바로 2천200년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진(秦)나라 대군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병마용'양씨 일행이 발견한 곳은 바로 진시황의 병마용 종장갱(從葬坑·부장품을 넣어둔 구덩이)이었다. 진시황릉의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병마용갱'은 그 안에 들어있는 병마용들의 위용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대 병종의 배치 및 병기장비, 전략과 전술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 찌를듯한 기세를 지닌 위풍당당한 병마용 대군은 그 옛날 한(韓)·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 등의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진시황제의 정예부대를 상징한다. 1974년 1호 병마용갱의 발견에 이어 1976년 1호갱의 북쪽에서 2호갱과 3호갱이 각각 발견됐다. 1~3의 숫자는 발굴 순서에 따라 붙인 것이다. 중국은 1979년 병마용갱 유적지 바로 위에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을 지어 관람객들이 이미 발굴된 병마용의 모습과 현재의 발굴 현장을 모두 지켜볼 수 있게 했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중국을 놀라게 했고, 나아가 전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자체 통계에 따르면 병마용 개방 이후 유치된 관광객은 5천만명에 달하며 그중 해외 관광객이 5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때문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 등 세계 각 나라의 지도자들도 병마용을 관람하곤 했다. 이들 중 특히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78년 병마용을 관람하고는 "현존하는 세계 7대의 불가사의가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며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면 진정으로 이집트를 여행한 것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2]진시황릉과 병마용·1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2]진시황릉과 병마용·1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꼽히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은 중국 뿐 아니라 세계 유명 여행지의 하나로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이곳은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돼 장안(長安)이라 불렸으며, 총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았을 만큼 역사, 문화, 경제, 교통이 발달했던 곳이다. 시안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지만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건 역시 '진시황릉'과 '병마용'이다.# 불세출의 '황제(皇帝)'가 잠든 황릉많은 사람들이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둘은 각각 따로 존재하며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우선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 (秦始皇帝)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시안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병마용(兵馬俑·병사와 말을 본뜬 인형이라는 뜻)'이라 부르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은 그와 1.5㎞ 정도 떨어져 있으며 1974년 시안 동쪽 외곽에서 발견돼 1987년 진시황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학자들은 진시황릉과 병마용이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둘은 무관한 것이 아니며, 병마용이 진시황릉을 보호하는 일종의 지하관문과도 같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막상 진시황릉 앞에 도달하면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야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조선왕릉 봉분 한개와는 비교도 안되고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보다도 몇십배 크다. 그도 그럴 것이 봉토 높이가 76m이고, 동서 폭이 345m, 남북 길이가 350m에 이르는 정방형의 거대한 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규모면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는 표현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광객들이 진시황릉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수백개의 계단을 따라 무덤을 오르는 것뿐이다. 정상을 오른다 해도 작은 기념품점과 진시황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 적힌 안내표지가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눈부신 영혼의 안식처 그 문을 열다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눈부신 영혼의 안식처 그 문을 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공자(孔子)는 2천년 전 '사사여생 (事死如生)', 즉 죽은 사람을 산사람처럼 대하라고 했다.중국 사람들은 한동안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렸다고 믿었던 황제(皇帝)들의 무덤을 그들이 살아생전 기거했던 황궁만큼이나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중국 황실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지관들을 동원해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터를 잡고, 화려한 목조건물과 거대한 석상, 빛나는 귀금속으로 치장하고 잘 정돈된 조경까지 갖춘 세계 최고의 황릉을 완성했던 것이다.진시황릉을 필두로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까지 이어진 황릉의 조성 양식은 같은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와 일본, 베트남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쳐 조선왕릉, 일본 천황릉, 베트남 황릉을 조영하는데 일조했다.경인일보는 2009년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대한민국의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지난해 9월부터 올 7월까지 11개월동안 '왕을 만나다'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에게 조선왕릉 40기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를 전달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조선왕릉은 단순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쳐 나간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희생이 깃들어있는 문화·역사 공간이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반면 잘 보존되고 있는 줄만 알았던 우리의 왕릉이 사격장과 목장, 때로는 국가정보기관 건물로 인해 크게 훼손을 당했으며, 그 복원 또한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이제 우리는 수만㎞에 달하는 긴 여정을 새롭게 떠나려고 한다. 국내 언론사 최초로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중국, 일본, 베트남의 황릉과 왕릉들을 연계해 둘러보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인 조선왕릉과 비교할 예정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장·단점을 배우고 돌아와 조선왕릉, 나아가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지구촌 곳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갈 길을 찾을 것이다.

  •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프롤로그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1]프롤로그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소중한 문화 및 자연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1972년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정해진다. 세계유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과 지구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자연유산', 그리고 이들의 성격을 합한 '복합유산'으로 구분된다.대한민국의 조선왕릉을 비롯해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 일본, 베트남에는 각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릉과 왕릉 수십여기가 존재한다. 경인일보 취재팀은 총 12회에 걸쳐 이들 황릉(왕릉)군을 돌아볼 예정이다.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는 능원 뒤에는 수천 수만 민중들의 땀과 피가 서려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발굴, 연구되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아 아시아의 황릉(왕릉)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비감을 안겨주고 있다. ┃편집자 주# 아시아 황릉(왕릉)의 기본이 된 중국의 황릉한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대국(大國)인 중국은 2010년 현재 총 40개의 세계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완리창청, 이허위안, 소림사를 비롯한 28개의 문화유산과 황룽풍경구, 구채구, 무릉원 등 8개의 자연유산, 그리고 타이산, 황산 등 4개의 복합 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분량이다. 이렇듯 중국은 풍부한 유·무형의 유산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지만, 2004년 이후 베이징에 있는 세계유산에 대한 대규모 보수작업을 벌여 2008년에 완료하고, 1985년부터 세계 문화·자연유산에 대한 보호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면모야말로 중국을 경제뿐 아니라 문화대국으로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이번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시리즈에서도 중국의 황릉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의 무덤 '진시황릉'에서부터 조선왕릉 설립의 참고 모델이 됐던 명·청 황조의 황릉 대부분을 다룰 예정이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