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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50]'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씨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세상이 싫었다.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악밖에 없었다. 시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기 일쑤였고, 자신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를 꺾기 위해 무술교본을 독파하고, 샌드백을 두드리며 몸을 단련시켰다. 그런 방황의 세월을 거치며 20대 초반 우연히 경북 청도의 동문사에서 기거하던 중 인생의 변환점을 만나게 된다. 농부들이 보릿대를 베어서 반듯하게 단으로 만든 다음 산비탈에 쌓아 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농부들은 그것을 볏짚하고 섞어서 외양간에 깔아두기도 하고, 모자나 반짇고리, 베개문양 등을 만드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바로 '맥간(麥稈)공예'의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수원시 권선구 권선동에 위치한 맥간공예연구원에서 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53)씨를 만났다. 몇몇 회원들이 함께 모여 열심히 맥간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맥간(麥稈)'이란 보릿짚 줄기를 말하며 사람들은 흔히 '보릿대'라고도 부른다. 맥간공예 작품 만드는 것을 살펴보면 우선 작품의 바탕이 되는 밑그림을 그린 후 둥그렇고 길쭉한 보릿대를 평평하게 펴서, 도안 위에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인 뒤 목칠공예로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맥간공예를 세상에 내놓은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씨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다. "맥간 작품을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작업 공정상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공예입니다. 맥간공예 작품에서 뿜어내는 황금 빛은 보는 각도에 따라 광채와 분위기가 달라 입체감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이 맥간의 최대 장점이지요."사실 그가 보릿대를 이용해서 작품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 예술에 소질은 있었지만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냈고, 변변한 스케치북이나 물감 살 돈도 없었기에 자연물을 이용한 작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골노인들이 사용하던 담뱃갑에서 금·은박지를 분리해 그 위에 그림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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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9]1급 지적장애 극복 '스포츠'로 꿈 이룬 정승호씨 지면기사
[경인일보=강승훈기자]엄마의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낸 뒤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울음소리는 그리 힘차지 않았다. 가족 조차도 검은 피부에 바싹 마른 아기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여느 신생아와 확연하게 달랐다. 태어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목을 가눴다. 걸음마는 만 두살이 되도록 온전하지가 못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당시에는 의사소통조차 불편했다. 주위에서는 이런 그에게 정신병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부모는 희망으로 키웠다. 그러다 12살이 되던 해 지적장애 판단을 받았다. 그것도 가장 나쁜 1급이었다. 일상에서 적응이 힘들어 평생 보호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동안 성적은 항상 바닥에 머물렀다. 거의 꼴등이었다. 20년이 넘도록 혼자만의 세상에서 지내던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접하면서다. 비록 장애인 스포츠 분야지만 얼마 전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아쉽게도 세계 기록에는 불과 2초가 모자랐다. 이제 다음달이면 정식 대학생으로 거듭난다. '3전 4기' 도전으로 대학 합격증을 거머쥔 것이다. 장애를 극복한 주인공은 정승호(인천 중구 북성동·21)씨다. 이제 정씨를 아는 이들은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고 부른다.아버지 정성근(62)·어머니 이희순(55)씨는 가정과 식당에 LPG(액화석유가스)를 팔아 살림을 꾸렸다. 직업은 지난 20년 동안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먹고 사는 게 힘들어 늦은 밤 시간에도 주문 전화가 걸려오면 직접 배달에 나섰다고 한다. 크고 무거운 가스 용기를 지고 날랐다. 임신 사실을 안 것은 그를 가진 뒤 3개월이 흘렀을 무렵이다."승호 이전에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산부인과에서 한쪽 나팔관이 막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둘째 자녀는 갖기 무척이나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지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돈을 벌기 바빴어요. 그러던 차에 승호가 덜컥 들어섰던 겁니다."어머니 이씨는 1991년 봄을 이렇게 회상했다. 밥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꺼웠다. 임신 존재를 몰라 체했을 것이라 착각, 탄산음료를 마셨다. 게다가 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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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8]3대를 이어 건축사가 된 오산 동성건축 정진영 실장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종찬기자]얼마 전 건축사 자격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정진영(33·건축사사무소 동성건축 실장)씨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당당히 합격자 296명 안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건축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뒷모습을 좇아 쉬지 않고 달려온 20여년. '3대 건축사' 탄생이라는 영광보다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어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감격에 가슴이 더 벅찼다. 힘든 도전을 통해 젊은 나이에 대를 이어 인생의 목표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정씨의 삶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뒷모습은 처음부터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오산시 청학동 건축사사무소 동성건축 사무실에서 만난 정씨는 최근 발급된 건축사 자격증을 들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심스럽게 내보이는 자격증은 깔끔한 액자에 담겨 있었다. 천천히 자격증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흡사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듯했다. 정씨는 "남들이 볼 때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여기엔 내 꿈과 지금까지의 삶이 몽땅 들어있다"고 말했다.■ 인생의 목표는 항상 내 앞에 있었다=건축사 도전은 그를 숨쉬게 하는 인생 그 자체였다. 스스로도 "건축사 시험은 나를 시험하는 인내의 장이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듯이 실용적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건물을 짓는 게 내가 건축사로서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말을 이었다.정씨는 1977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사건(?)을 몰고 다니는 골목대장이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다가도 놀이시설과 벤치 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삽질(?)을 해서라도 자리를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지독한 말썽꾸러기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유년시절부터 공간을 설계하는 남다른 소질을 갖춘 될성부른 떡잎이었다.조금 이른 나이인 열 살때 정씨는 자신의 인생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건축사란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니 넌 나중에 커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주위에서 귀가 따갑도록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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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7]탈북여성 국내 박사 1호 이애란 경인여대 겸임교수 지면기사
[경인일보=이현준기자]'탈북여성 국내 박사 1호', '2010 미국 용기있는 국제여성상 수상자'. 이애란(48) 경인여대 겸임교수를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강의 준비에도 바쁜 그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설립한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의 원장, (사)하나여성회 대표이사 등의 역할을 맡으며 탈북자들을 위한 활동을 바쁘게 진행하고 있다. 탈북자로서, 다른 탈북자를 위한 활동과 후학양성에 힘쓰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에서 만난 이 교수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는 28일 서울 종로구청에서 예정된 '북한이탈 주민을 위한 설 축제' 준비에 분주한 그의 표정은 활기가 넘쳐있었다. 그녀의 활동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 활발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왠지 모르게 끌려들어갔죠.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라며 웃으며 운을 뗐다.그는 이어 "한해에 탈북자들이 3천명 정도 들어온다. 지금까지 2만명 정도가 되는데, 이중 여성이 8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다. 취업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요리를 가르치면 일자리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연구원과 부설 요리학원 설립이유를 설명했다. # 착하고 얌전한 아이 이애란, 하지만…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남들과 다름없이 컸고,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온실의 꽃 같이 연약한 아이였다'고 했다고 한다. 공부를 재밌어하고 나름 부족함이 없던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11살 무렵, '삼수'지역으로 추방됐다. 그의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삼수에서의 생활을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평균기온이 영하 30도 가까이 되는 무척이나 추운 지역이었다. 전기도 없었다. 학교에 가니 공부는 조금만 시키고, 일을 많이 시켰다. 고사리와 감자 등을 심고, 또 캤다. 땔감용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한번은 학교에 불이 났는데, 복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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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6]'2010년 건축사 자격시험' 최고령 합격 이용성씨 지면기사
[경인일보=민정주기자]"누군가는 저를 두고 자격증 귀신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공부 중독이라 하지만 저는 그저 겸허히 내게 주어진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26년을 하루같이 살았을 뿐입니다."10여년 전 고승덕 의원은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모두 패스한 '고시계의 제왕'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고시계에서 고 의원이 무너지지 않을 기라성이었듯이, 건설계에도 고의원이 울고갈만한 '자격증 종결자'가 있으니 바로 수원에서 건축사를 하고 있는 이용성(56·서원종합건축사 전무이사)씨다.지난 7일 이씨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2010년 건축사자격시험'에 최종합격했다.합격자 대부분이 70년대에 태어난 팔팔한 청춘(?)들이다보니, 54년생인 이씨는 '최고령 합격자'라는 생각도 않았던 타이틀이 더해졌다. 이씨에게는 이 타이틀 외에도 수많은 타이틀이 붙어있다.가장 널리 알려진 타이틀은 '국내 유일의 건축 관련 자격증 그랜드슬래머'다.이밖에도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겸임교수, 건축회사 전무이사, 경기도 명예감시원, 수원시 설계자문위원, 시민 대표감사관 등등 이력서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헤아려야 할 만큼 많은 타이틀을 가진 이씨는 왜 또다시 건축사 자격시험에 도전했을까.이씨는 출생 당시 수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제과점집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세명의 누나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이니 얼마나 귀여움을 받았을지는 안 봐도 짐작이 간다.그러나 3살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그 많던 재산을 사기로 모두 잃고만 어머니와 헤어져 외삼촌 댁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야했다.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 외삼촌댁에서 더부살이 하는 입장이 돼버린 이씨는 한창 자라고 공부할 나이에 도시락 한 번 싸갈 수 없었고 책 한 권 사볼 수 없었다.새벽 5시 반에 일어나 2시간동안 신문을 돌리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다시 석간신문을 돌린 후에야 지친 몸을 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씨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학교로 찾아오는 빚쟁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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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5]동양화가 기평 손영락 화백 지면기사
[경인일보=의정부/최재훈기자]"먹물이 내 몸에 스민지 30년. 작은 세월이 아니건만 발걸음도 빠르지 않는데 벼듬질 또한 무딘 가슴으로 수족에서 흘러나온 흔적들을 모아 보았다. 산의 맑은 정기를 계곡아래로 끌어내어 자연과 일상에서 동화 됨을 소재로 삼고…. 깊은 계곡속에 있다 하더라도 계곡이 깊은 만큼 더 높은 산을 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동양화가인 기평 손영락(59) 화백은 현재 몸 전신 연골파손이란 불치병과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산과 바위 등을 화폭에 담아내며 불치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과 불우한 이웃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현재 한국미술협회 동양화분과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 화백은 1953년 경주 (월성)손씨 23대손 율동파 종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사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일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해 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며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어린 시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손 화백은 항상 주머니에 대나무 꼬챙이를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땅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하지만 중학교 시절 어느 날 좌우측 신경마비와 함께 40도의 고열로 의식을 잃게 된다. 병원에서는 뇌수막염이란 판정과 함께 '병을 고친다고 해도 두 눈이 실명될 수 있다'며 그림 그리는 것을 자제해 주길 당부했다.그래도 그는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중·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학과에 합격했다.1년여 동안 그림에 열중하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학교를 휴학하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직성 척수염과 전신 경직으로 4년간 식물인간처럼 보내야 했다.그러나 부모와 가족들은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진한 가족애 덕분에 그의 몸은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소생의 기쁨도 잠깐, 1997년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마저 2년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기평은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부모님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돌아가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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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4]인천 '민들레국수집' 서영남씨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성호기자]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 남아 광주리 12개를 채웠다는 성서 속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하지만 옛날 성서 속의 이야기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매번 거짓말 같은 기적을 목격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 인천시 동구 화수동 266의 1 '민들레 국수집'이 바로 그곳.이 식당은 만우절에 생겨난 식당답게 밥값 대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만 하면 된다. 인사마저도 불편하면 안 해도 그만. 어느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는다. 정말 거짓말 같은 식당이다.이 기적 같은 국수집의 주인장은 한때 가톨릭 수사였던 서영남(57)씨. 그가 이곳을 꾸려온 지 어느덧 8년 가까이 지났다.노숙자들에게 따뜻한 밥을 나눌 목적으로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은 그가 당시 가진 전 재산 300만원을 들여 6인용 식탁 하나를 놓고 시작했다. 국수 6상자, 쌀 한 포대, 국그릇 10개, 국수그릇과 반찬그릇 20개 단출한 살림으로 시작했다.그랬던 국수집이 지금은 20명도 여유 있게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좋아졌다. 또 변한 게 하나 있다. 식당 이름은 '민들레 국수집'이지만 더 이상 국수를 나눠주지 않는다는 것. 서씨는 "밥은 배불리 먹어 지겨우니 국수 좀 달라"고 말할 때까지 밥을 고집할 생각이다.그가 인천 동구의 노숙자들을 거두기로 한 계기는 이렇다. 그가 수도원 생활을 청산하고 출소자 몇 사람과 송현동 달동네에서 기거할 때 우연히 동인천역을 지나며 배고픈 사람들이 비참하게 길거리에서 끼니를 때우고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했다.줄 세우는 사람들의 인정머리 없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는 노숙자를 보는 그의 맘이 편치 못했다. 게다가 배고픈 사람들을 앞에 세워 놓고 설교를 하고 밥과 국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기나긴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가슴이 아팠다.서씨는 "밥을 먹은 후에 설교를 하면 전부 가 버리기 때문에 먹기 전에 해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이 너무 슬펐다"며 "배고픈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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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3]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한꿈학교' 교장 김성원 목사 지면기사
[경인일보=최재훈·김종찬기자]"자유와 꿈을 찾아주면 모든 게 될 줄 알았습니다."탈북 청소년의 대부인 한꿈학교 교장 김성원(40) 목사. 그가 탈북 청소년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지난 1997년 중국와 태국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칠 때였다. 선교활동 중 우연히 만난 탈북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한결같은 꿈은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행이었다. 아이들의 간절한 꿈이 그에게 이어졌을까. 그때부터 그는 청소년들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시도했다.결국 김 목사와 만난 탈북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에서 중국이나 태국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나온 선교사들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하나 둘씩 보내졌고, 5년새 400여명에 이르는 탈북 청소년이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이 모든 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98년 탈북 청소년 7명과 함께 감시의 눈을 피해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싣고 밀항을 시도하던 중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순간 김 목사의 머리에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생각보다 '이 아이들의 창창한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해주는건 아닐까'라는 미안함이 밀려왔고, 전복된 배 근처에 있던 나머지 아이들의 손을 끌어 전복된 상태의 배에 의지해 강을 건너기도 했다. 2002년에는 탈북 청소년과 만나기로 했다 북한 공작원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이처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탈북 청소년을 위한 그의 의지와 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탈북 청소년들이 원하는 꿈 그것을 이뤄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잠시 선교활동 중간에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중국과 태국 지역의 선교활동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렇게 바라던 대한민국에서 탈북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꿈처럼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고, 결국 민주주의와 자유에 적응하지 못한채 탈선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그의 손을 거쳐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남북한의 커다란 사회적 이념 등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범죄의 유혹에 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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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2]이천에 둥지튼 청학서당 서재옥 훈장 지면기사
[경인일보=김선회기자]이천시 마장면 이평리, 와룡산(臥龍山)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언덕에 자리잡은 '청학서당(靑鶴書堂)'.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 9일 이곳을 지키고 있는 서재옥(48) 훈장을 만날 수 있었다.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비롯한 첨단기기가 판치는 요즘 시대에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상투 틀고 탕건을 쓴채 강의실에 홀로 앉아 "부생아신(父 生 我 身·아버지 날 낳으시고) 모국오신(母鞠吾 身·어머니 날 기르셨네)~"하며 낭랑하게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읽어내려 갔다.# 경기도와 인연을 맺은 청학동 훈장서재옥 훈장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청학동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 청학동을 '도인촌(道人村)'이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이 속세의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서 훈장 부친인 서계용(92) 옹은 6·25이후 청학동에 들어와 촌장을 역임하고 서당을 열어 실질적으로 이곳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서 훈장은 7살때 아버지로부터 사자소학, 추구,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 한문의 기초를 배웠다. 현대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자란 그는 스무살이 되자 청학동을 내려와 충남 부여에서 서암(瑞巖) 김희진 선생을 비롯한 한학의 대가들을 만나게 되고, 사서삼경 등을 익히며 한학자로 성장한다."어렸을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현대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나중에는 기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정진한 후 1980년대 후반에 고향인 청학동으로 다시 들어왔어요. 그렇게 된 계기가 있어요. 서울 양천향교에서 서당 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서울대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들이 '요즘 사제지간에는 정이 없다. 교수가 마치 직업안내자처럼 됐다. 그러니 당신은 단 한사람을 가르치더라도 제대로 된 제자를 길러라'라고 당부를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앞으로는 청학동 사람들만 전통을 지키며 살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이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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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휴먼다큐·41]인천 중구청 옆 '미니 이발관' 운영 천시강씨 지면기사
[경인일보=정진오기자]첨단 '헤어 디자이너'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연탄난로'를 고집하는 이발소는 과연 몇 곳이나 남았을까.누구나가 다녀야 하는 이발소, 특히 중년이라면 그 이발소에 대한 인상 한두 가지는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타일이 박힌 세면대, 면돗날을 벼리는 데 쓰는 가죽띠, 면도용 비눗솔을 비비는 연탄난로의 연통, 샤워기를 대신하던 머리 감기기용 조로 등은 옛날 이발소의 풍경을 대표한다.하지만 까마득한 이야기가 됐다.도심 한복판에서 아직도 연통에 면도용 비눗솔을 데우는 이발소가 있다. 인천 중구청 옆 '미니 이발관'이다.중구청에서 나와 왼쪽으로 실내경마장 건물 맞은 편에 있다. 정말 작다. 좁디 좁은 이 이발소에 연탄난로는 2개나 된다. 이발의자도 2개다.종업원은 이 집 주인이자 이발사인 천시강(69)씨, 1명 뿐이다.천씨 혼자서 이발도 하고, 머리도 감기고, 청소도 한다.인천에서만 이발을 한 지 40년이 넘었고, 이발소 밥을 먹은 것으로 치면 어언 53년이 지났다.'한 우물을 판다'는 말은 필시 천씨에게 딱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천씨는 50년을 넘게 한 가지 일만 고집했다. 해를 넘기면 칠순이 되는데, 2년 전까지만 해도 이발을 할때 꼭 넥타이를 맨 말끔한 차림을 고집했단다.단정함을 위해 이발을 하는 데 이발사가 먼저 단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천씨는 또 정기 휴일이나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이발소 문을 닫아 본 적이 없단다. 밥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플 때도 문을 열고, 손님을 받았을 정도라니 천씨의 이발사로서의 직업의식은 '투철' 그 자체다.이런 천씨에게 단골손님은 필수. 한 동네에 살다가 멀리 이사를 가도, 손님들은 천씨를 다시 찾곤 한다. 멀리 경기도 김포에서 오는 손님도 있었다.IMF 때 돈이 없어 이발을 못하는 사람이 늘자, 천씨는 근처 자유공원에 올라가 공짜로 이발을 해 주기도 했다. 입소문이 나 1998년 12월 최기선 당시 인천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10대에 시작한 일을 70이 다 되도록 계속 하다보니, '머리'만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