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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4]에필로그 지면기사
하포리 지석묘 무성한 넝쿨속 방치석조여래입상 군에서 체계적 관리삼국시대 성곽 덕진산성 상태 양호파주 민통선지역 마지막으로 취재산성·고택·절터·서원·관방유적 등6개월동안 도내 다양한 유물 재조명경기도 돌봄사업 현장서 확인하기도개인 소유 유산은 관리 소홀 아쉬워지난 8월 1일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하 민통선)안에 있는 문화재를 취재하기 위해 파주지역을 찾았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기획시리즈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조유전 원장, 김웅신 책임연구원,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들과 함께 한 이날 취재진이 만날 문화재는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지석묘(파주시 향토유적 제26호)와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의 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9호)이었다.먼저 하포리의 지석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지석묘가 민통선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포리의 지석묘는 가로 240㎝, 세로 225㎝ 규모다. 바둑판식 지석묘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지석묘가 위치한 곳은 인근에 임진강이 흐르고 구릉지가 형성돼 있어 선사시대 때 이 일대가 선사인들의 생활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하포리의 지석묘는 민통선내 군부대 인근 밭 한가운데에 펜스로 둘러처져 있었지만 취재진이 찾았을 당시 한여름이어서 무성한 넝쿨 등이 지석묘를 가리고 있어 지석묘를 찾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방문이 쉽지 않은 민통선내의 문화재 관리·보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한 대목이다.이어 취재진은 읍내리의 석조여래입상을 찾아가려 했으나 석조여래입상이 위치해 있는 해당 부대와의 취재협조가 원활(?)하지 않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민통선내 문화재 관리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석조여래입상은 군부대에서 관리대상으로 선정, 제를 지내는 등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대신 군내면 장지리의 덕진산성(경기도 기념물 제218호)을 찾았다. 덕진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덕진산성은 임진강의 북안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초평도와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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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3]북한산성 지면기사
지난달 성벽아래 고려때 세워진 중흥산성 기저부 확인군 초소·회각로도 발굴 축조시기 400~500년 앞당겨전란 대비 임시궁궐 등 역사·학술적 가치 큰 유적도, 복원 기초자료 확보 유네스코 유산 신청 탄력조선 유림 대표적 명소 누각 '산영루' 이달 재탄생시민 휴식공간 개방… 복합문화공간 탈바꿈 기대지난 7월 31일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에서 성벽 발굴에 대한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그동안 조선시대에 축조된 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던 북한산성에서 고려시대 성벽이 발견됐기 때문이다.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최초로 북한산성 대서문~수문 구간과 부왕동 암문 구간의 성벽절개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한 현재 성벽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세워진 중흥산성의 기저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로 북한산성 축성방법이 규명됐을 뿐만 아니라 중흥산성 기저부의 존재를 확인,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를 400~500년 앞당기게 됐다고 설명했다.이번 조사에서는 1745년(영조 21) 편찬된 북한산성 관련 지리서 북한지(北漢誌)에 기록된 성랑(군 초소)도 발굴됐다. 이와 함께 성에 설치된 회곽로(군사들의 이동로)의 존재도 처음 확인됐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향후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했고 북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하는데 힘을 실어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이번 발굴조사를 주관한 경기문화재연구원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은 경기도, 고양시와 함께 북한산성의 연구, 정비, 복원, 활용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산성이 지닌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발굴해 풍부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를 실시, 문화재 정비와 복원을 통해 북한산성 전체를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인 북한산성은 백제 개루왕 5년(132)에 토성으로 축조됐다. 이어 고려 우왕 13년(1387)에 중흥산성이 세워졌고 1711년 석성으로 개축되면서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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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향토학문기반으로 설립된 서원·향교 제향중심서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지면기사
서원(書院)이 유교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기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문화재청이 향교·서원의 활성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됐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여론을 형성하던 곳이다. 서원의 이런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유학 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됐다. 또 지역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시켜 왔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정치적으로도 성장해 중앙에 맞서는 지역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문화재청은 이런 향교·서원의 문화재 가치를 재발견하고 인문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전국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8월말까지 '2015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활용사업 공모에 들어갔다.추진 대상은 국가지정 및 시·도 지정 향교·서원 문화재다. 향교·서원을 과거 선현의 덕을 기리고 인재를 양성하며 옛 선비들의 지혜와 삶을 융·복합적으로 체험하는 살아 숨쉬는 문화사랑방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교육의례와 전통교육(체험), 문화유적과 인물사상(답사), 공간활용, 자료관 등 다양한 활용프로그램을 이용한 사업을 지원할 방침이다.문화재청은 이에 앞서 지난해 말 '향교·서원문화재 활용운영모델 및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문화재청이 활동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지정문화재인 향교 230건(국가지정 문화재 9건, 시·도지정문화재 221건)과 서원 169건(국가지정문화재 11건, 시·도지정문화재 158건)이다. 문화재청은 매년 지자체를 대상으로 향교·서원문화재 활용 공모사업을 추진, 2018년까지 120개 향교·서원문화재의 역동적·체험적 프로그램을 발굴해 지원키로 했다. 이를 통해 향교와 서원문화재가 경쟁력 있는 '생생활활(生生活活)'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그리고 향교·서원문화재 총서 발간과 전자도서관 구축, 교육사 제도 마련, 평생교육원 개설, 교재·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등 향교·서원문화재 활용기반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엄격한 성리학적 공간인 향교·서원이 주민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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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2]파주 자운서원·파산서원 지면기사
자운서원율곡 이이 기리기위해 1615년 세워이후 학자 김장생·박세채도 모셔한국전쟁때 파괴 1970년 새로 지어파산서원지역유생이 건립 현재 사당만 복원성수침·백인걸등 위패 모시고 제사파주시 법원읍에 위치한 자운서원(紫雲書院·경기도기념물 제45호)은 광해군 7년(1615)에 율곡 이이(李珥·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율곡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안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주변에 사임당 신씨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4호)를 비롯한 가족묘 13기가 있다.율곡의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은 세곳이다.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인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世居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다. 그의 호 율곡은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는 대단히 중요하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했다.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됐다.임진왜란을 앞두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 실시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자운서원은 효종 1년(1650)에 '자운'이란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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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1]안성 칠장사와 죽주산성 지면기사
648년 신라 고승 자장율사의 창건설궁예의 무예연마·병해대사 제자 임꺽정명부전엔 각종 설화 벽화로 남겨져 있어경기도 절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 간직혜소국사비·국보 오불회괘불탱 등 보존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위치한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경기도내 사찰 중 가장 많은 유물을 갖고 있고 궁예와 임꺽정 등의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특히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장원급제를 했다고 해서 지금도 수험생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인 칠장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칠장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시대 대선사인 혜소국사가 중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 안성 죽산 출생이다. 9세에 수원 광교사에서 충회대사에게 출가했다. 훗날 문종에 의해 왕사(王師)로 추대됐고 83세에 국사가 돼 칠장사에서 입적했다.칠장사의 원래 이름은 '아미산(峨嵋山) 칠장사(漆長寺)'였으나 혜소국사가 7명의 악인을 교화해 칠현(七賢)이 된 이후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칠장사는 여러차례 화재에 의해 소실됐다. 1383년(우왕 9)과 1506년(연산군 12)에 각각 중건됐다.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충주 개천사의 사적(史籍)을 칠장사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이후 칠장사는 크고 작은 보수와 중건, 이건 등이 꾸준히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웅전과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산신각, 천왕문 등이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채와 박물관, 혜소국사 비각, 일주문 등은 새롭게 지어졌다.칠장사에는 사찰의 오래된 역사만큼 중요한 문화재들이 많다. 국보 296호인 칠장사오불회괘불탱, 보물 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1256호인 칠장사 삼불회괘불이 있다. 이중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 혜소국사비(문종 14년, 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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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0]평택·화성의 관방유적 지면기사
서해와 육로·수로가 연결되는 요충지산성·봉수대 축조해 침입자 상륙 막아평택 안정리 농성 유일하게 보존 양호다른 성곽문화재 유실돼 규모만 짐작화성 당성 건물터·우물터만 남아있어 평택시가 지난 2004년과 2007년에 각각 발간한 평택서부 관방산성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아산만과 주변 지역은 내륙 수로와 육로가 서해 연안항로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으로 중요시돼 왔던 지역이다. 교통의 요충지는 곧 군사적 요충지가 된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는 서해에서 아산만을 통해 중부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꼭 확보해야 할 요충지였다. 따라서 곳곳의 야산에는 산성이나 봉수대를 축조해 적대적인 세력이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고자 했다.특히 남양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당항진은 대(對) 중국교역의 영향으로 삼국이 이 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당항진의 군사적 중요성은 다소 약화됐지만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했다. 고려 성종 12년경 아주(牙州·충남 아산시의 고려시대 이름)에 하양창(고려시대 세미(稅米)의 운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조창(漕倉)의 하나)이 설치된 이후 아산만은 조운(漕運)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고려 후기 이후 주변에 간석지가 농토로 개간되면서 점차 농업생산력이 확대됐고 인구도 증가했다.고려말 조선초에는 왜구의 약탈이 이 곳에 집중되면서 피해가 극심했다.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중앙정부에서는 이 지역의 해안방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곳곳에 성곽(城郭)을 축조, 왜구의 상륙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안성천 하구와 아산만 일대에는 당시에 축조하거나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분포돼 있다.1999년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 따르면 평택 서부지역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봉수(烽燧)대가 분포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곽들은 현재 간척사업 등으로 내륙 깊숙이 위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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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9]양주 회암사지 지면기사
회암사, 12세기경 궁궐과 유사한 양식으로 창건 추정폐사후 절터만 남아 1997년부터 유물 발굴·복원 공사회랑·장식기와 위용 가늠 부도탑 조각 석조미술 걸작유교와 갈등으로 퇴색된 수선도량 부흥 꿈꿔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사적 제128호)는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산자락에 위치한 절터다. 현재는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동안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절터 규모와 이 곳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는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그동안 10차례 넘게 발굴조사와 복원공사가 진행됐으며 현재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발굴조사 결과, 옛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가람(伽藍)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받고 있다. 회랑은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다.그리고 절터에서는 지붕 처마나 추녀마루에 올라가는 토수(吐首), 용두(龍頭), 잡상(雜像)과 같은 장식기와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들은 방화(放火), 호법(護法) 등의 의미로 궁궐의 중심 건물에만 올려졌던 조형물이다. 또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소조장식편과 보살상을 장식하기 위해 별도로 제작된 영락장식 등은 어느 사찰에서도 출토되지 않았던 유물들이다.여기에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출토됐다. 출토된 도자기 중에는 당시 궁궐이나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왕실사찰 등에서만 사용되던 왕실용 명문백자를 비롯해 사찰에서 기거하던 승려나 불교도들이 사용하던 조질백자까지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망라돼 있다.지난 2012년 발행된 '회암사지박물관 개관도록'에 따르면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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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8]다산 정약용과 번암 채제공 지면기사
'생활에 필요한 학문' 실학 정립 대학자남양주 마재마을서 어린시절·말년 보내생가 여유당서 형제들과 매일 경전 공부1925년 홍수로 떠내려가 1970년대 복원마을 중심부엔 다산과 부인 합장묘역조선초 창건 추정되는 수종사 자주 들러茶山실학(實學)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말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한 여러 개혁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농업 생산력과 새로운 상업이 발전하게 됐다. 당시 학문은 백성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지만 실학은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어서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런 실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그리고 번암 채제공은 다산 정약용의 정치적 스승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나주(羅州)고 호는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다산(茶山) 등이며 당호는 여유(與猶)다. 정약용은 17~18세기 실학(實學)을 종합한 조선 후기 대학자로 그의 생가와 묘가 있는 곳이 남양주 마재(馬峴)다. 마재마을은 그가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고향으로, 남양주 두물머리의 쇠내(苕川: 마재라고도 한다)다. 마재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을 앞으로는 한강이 휘감아 흘러가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마을의 동쪽 한강을 '두물머리(斗江)'라고도 한다. 양수리(兩水里)란 명칭도 양쪽물이 합쳐진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으로 두물머리의 다른 이름이다. 마재마을과 강 건너 보이는 분원(分院·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사이의 한강은 초천·초내·쇠내·소천·소내·우천(牛川) 등으로 불렸으며 강변에 우거진 갈대숲과 강물이 어우러져 생긴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는 15세에 과거시험을 본 후 부인 홍혜원과 결혼하면서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함께 고향인 마재마을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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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7]여주 고달사지와 신륵사 지면기사
■고달사지고달산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 신라 경덕왕때 창건 18세기말 폐사 추정고려 왕실 적극적 후원 사세 떨쳐… 터 훼손되자 발굴 조사·보존 작업원종대사혜진탑·석불대좌 등 웅장함 표현한 석조유물 사찰 위상 짐작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는 해발 400~5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다. 지난 2005년 편찬된 '여주군사(驪州郡史)'에 따르면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됐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고달사는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인 도봉원(道峰院, 도봉산 영국사), 희양원(曦陽院, 경북 문경 봉암사), 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어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특히 고달사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원종대사 찬유는 고려초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 고려 광종때의 불교 교단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려 도봉원·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三不動禪院)으로 삼고 977년(고려 경종2)에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달사가 언제 폐사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쓰인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돼 있어 적어도 18세기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달사지는 관련학계에서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식, 199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절터에 민가들이 들어서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절터의 파괴가 진행됐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 필요성을 인식, 1998년 고달사지의 정비 및 보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 전체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를 경기도박물관에 의뢰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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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6]용인과 안성의 고택 지면기사
이주국장군 생가 영조29년 건축 조선 살림집 특징 잘 간직목은 이색 후예 이자선생 옛집 '경기지역 주택 표본'인물 배출한 오정방고택 현재 오씨종부 거주문화재돌봄사업단, 수리·주변 상시관리용인이주국장군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은 오백 이주국(李柱國·1721~1798)장군의 생가로 전해지는 가옥이다. 이주국 장군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으로 1721년(경종1) 이곳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에서 태어났다. 영조 16년(1740)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 전해지는 관련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터 등이 전한다. 묘역은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이 가옥의 건축연대는 안채의 망와(望瓦·용마루의 끝에 끼어 그 마구리를 장식하는 암막새)에 기록된 명문을 참조, '건륭18년계유일조작(건륭)'이라고 돼 있어 1753년(영조 29)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채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장여 측면의 상량문을 보면 1990년에 중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현재는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연속돼 있으나 원래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하는 담장과 중문 채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이 분리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가옥의 입지와 채 구성, 공간 분할, 조경 수법 등에서 조선시대 살림집의 고전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고택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택에 거주하는 집주인은 이주국 장군의 후손은 아니다. 몇차례 매매를 통해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경기문화재단 부설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 돌봄사업단이 이 고택을 상시관리하고 있다. 최근 이 고택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문화재 돌봄 사업단 관계자들이 고택 앞마당의 쓰레기와 나무들을 정리하고 화단에 꽃씨를 뿌리는 등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문화재 돌봄사업단 관계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고택 안쪽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건물 외벽 등이 부서지거나 하면 바로 복구하는 등 항상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돌봄사업을 진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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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5]시흥의 선사유적과 문화유산 지면기사
북부·남서부·남부 섬전체 패총 다수 발견빗살무늬토기 확인 서해안 연구 새 지평능곡동유적 선사~조선 유물 다량 발굴수도권 최대 규모 신석기마을 가치 높아소래산 암벽에 마애보살입상 섬세·세련된 표현 기법조선 4대 문장가 장유선생 신도비 높이 2.65m 국내 최대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오이도(烏耳島). 오이도는 이제 섬이 아닌 육지다. 1922년 일제가 염전을 만들기 위해 오이도와 안산시간 제방을 쌓은 뒤부터 자동차가 드나드는 섬같은 육지가 됐다.오이도에는 지난 1960년대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서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패총(貝塚)을 간직하고 있는 오이도 유적(사적 제441호)이 자리잡고 있다. 섬 전체 곳곳에서 발견된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이뤄진 퇴적층 유적. 조개껍데기가 쌓였다고 해서 조개무덤·조개무지·조개더미로 부르기도 한다.# 시흥시 선사 유적= 오이도에서는 섬 전체가 패총으로 이뤄졌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오이도 패총은 크게 북부지역 패총군과 남서부지역 패총군, 남부지역 패총군으로 구분되고 있다. 남부지역 패총군은 신포도 패총으로 2개소다. 1988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됐으며 야외 노지(불땐 자리) 2기를 비롯해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및 석기, 골각기(짐승의 뼈·뿔 등으로 만든 도구) 등이 발굴됐다. 남서부지역 패총군은 살막 패총으로 3개소다. 1988년과 1999년 두차례에 걸쳐 조사됐다. 빗살무늬토기편·석기류 등 1천여점과 수혈 주거지(원시시대 살림집 형태의 하나로, 땅에 10~100㎝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고 위쪽에 지붕을 덮은 것) 3기, 야외 노지 3기 등이 나왔다. 북부지역 패총군은 안말 패총·뒷살막 패총·소래벌 패총 등이다. 뒷살막 패총은 2000년 조사했으며 적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석기가 발굴됐다.오이도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빗살무늬토기 확인으로 서해 도서지방 신석기 문화 편년(編年)의 새로운 자료를 보여줬다. 출토된 토기들 중에는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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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4]삼남길 지나는 수원·오산 지면기사
조선 육로교통의 중심축 삼남대로 복원한 도보길90.1km 경기 구간중 수원·오산 코스 문화유산 풍부서호천길엔 정조 효심 깃든 지지대 비각·노송지대인공저수지 축만제와 수인천 흔적 남은 중복들길독산성길엔 권율장군 이야기와 백제 고찰·공자사당삼남길은 한양에서 경기도를 거쳐 각각 충청 수영과 해남 땅끝마을, 통영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이었던 삼남대로를 기본 원형으로 한 도보길이다. 삼남길 경기도 전체 구간은 옛길을 고증해 원형을 확인하고 끊겼거나 사라진 도로 대신 걷기 좋은 대체로를 개척해 완성했다. 총 길이는 90.1㎞다. 삼남길 경기도 구간은 과천의 제1길(한양관문길)부터 평택의 제10길(소사원길)에 이르기까지 온온사, 인덕원터, 임영대군 묘역, 사근행궁터, 지지대비, 용주사, 독산성, 진위향교, 대동법기념비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옛 삼남대로는 정도전과 정약용이 나주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면서 걸었던 길인 동시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가기위해 자주 이용했던 길이기도 하다.■4 서호천길삼남로의 제4길인 서호천길은 골사그내에서 시작해 지지대비, 지지대쉼터, 해우재, 이목2교, 국립원예특장과학원, 여기산앞, 서호공원까지 이어지는 7.1㎞ 구간이다. 지지대고개는 정조가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걸음이 못내 아쉬워 자꾸 행차를 늦췄다는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곳으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고개이름을 늦을 지(遲)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로 부르게 됐다. 이 같은 정조의 효심을 본받고 추모하기 위해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807년에 지지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와 비각을 건립케 했다. 지지대비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지지대 각자가 음각돼 있고 계단 바로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지지대고개는 서울에서 수원을 연결하는 1번 국도의 수원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다. 광교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통과하는 국도로 '지지대비'는 고개 정상부에 세워져 있다.문화재는 아니지만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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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3]'유물의 보고' 연천 지면기사
'한반도 중앙' 예로부터 전략요충지 삼국시대부터 절벽 성 다수 축조구석기 연구학설 뒤집은 주먹도끼 발견으로 전곡리 세계적 유적 되다송시열과의 '예송논쟁' 유명 근기실학 사상가이자 예술가말년 고향서 저술활동… 집과 서원터 복원·콘텐츠 개발중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어 비옥한 토지가 발달한 연천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 육로와 수로가 발달한 교통의 요지로서 선사시대부터 한국 고인류의 발상지와 교두보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이었던 만큼 각 국이 영토전쟁을 벌였던 치열한 다툼의 현장이었다. 고려 수도인 개경과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으로부터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풍수적으로 온화한 지세(地勢)로 수많은 인걸을 길러냈다.■성#성(城)삼국이 각축을 벌이며 영토전쟁을 벌이던 시기, 고구려는 한반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연천지역은 초기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그리고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형성된 자연절벽(현무암 주상절리) 등 특수한 자연조건을 이용해 성들이 축조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이 성들을 계속 보수, 사용했다.호로고루(瓠蘆古壘·사적 제467호)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긴 삼각형 대지위에 조성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의 상류에 위치해 있어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위치한다. 평양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 코스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 우회해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차례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의 전차부대 등의 도하지점이 됐던 전략적 요충지다.은대리성(隱垈里城·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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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2]남한산성 지면기사
해발 500m 험준한 산에 12㎞ 성벽 둘러싸'한강유역·수도의 요새' 함락당한 적 없어삼국~조선시대 성 쌓는 기법 오롯이 축적왕의 거처인 행궁 복원공사후 2012년 개방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 6월말 결정올 6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남한산성(국가사적 제57호). 요즈음 봄을 맞아 많은 행락객들이 남한산성을 찾고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단순히 자연경관(청량산)만을 자랑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엔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어 문화답사 탐방객들이나 학생들도 많이 찾고 있다.남한산성에는 조선시대 20여개 행궁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이 있어 국가전란시 임시 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 조선시대 5군영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이자 광주 읍치를 관리하는 관아(행정)시설이 300여년간 운영되던 조선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도시였다.남한산성에는 유교, 불교, 천주교, 민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과 현절사(경기도유형문화재 제4호)에서는 매년 음력 9월에 광주유림에서 유교예법에 따라 제향식을 거행한다. 불교는 조선시대 10개 사찰중 현재 4곳(개원사, 국청사, 장경사, 망월사)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청량당(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에서는 매년 남한산성 대동굿보존회에서 대동굿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 남한산성은 300여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천주교 순교성지여서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남한산성 입구 주변에는 천주교 순교성지와 함께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유역 및 수도에 대한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단 한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하의 요새다.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가 넘는 성벽을 구축,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남한산성 본성의 규모는 둘레가 7천545m고 성 내부 면적은 212만6천637㎡다. 부속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만2천356㎞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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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프롤로그 지면기사
오랜 고난 견디고 인류곁에 남은 존재선조들 희로애락 오롯이 담아낸 그릇그속의 이야기 현재·미래세대의 자산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는 일 중요경기지역 유산 시대별·유형별로 소개경기도 돌봄사업 연계 보존·관리 점검사각지대 놓인 비지정문화재 특히 주목┃문화유산 헌장┃문화유산은 우리 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 문화의 자산이다. 유형의 문화재와 함께 무형의 문화재는 모두 민족문화의 정수이며 그 기반이다. 더욱이 우리의 문화유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재난을 견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곧 나라 사랑의 근본이 되며 겨레 사랑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온 국민은 유적과 그 주위 환경이 파괴·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은 한 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것을 다짐하면서 문화유산 헌장을 제정한다.1.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1. 문화유산은 주위 환경과 함께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1. 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재화로 따질 수 없는 것이므로 결코 파괴·도굴되거나 불법으로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1.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은 가정·학교·사회 교육을 통해 널리 일깨워져야 한다.1. 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1997년 12월 8일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의 삶, 즉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오롯이 담아낸 그릇이다. 문화재는 그것이 구석기 시대이든, 근대이든 시대 상관없이, 또 유형문화재든, 무형문화재이든 관계없이 그 당시의 예술과 과학, 종교, 도덕, 법률, 경제, 민속, 생활양식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는 오랜 역사속에서도 각종 고난을 견디어 내고 지금 우리 옆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문화재는 한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화재로 소실됐던 숭례문의 복원 과정을 보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숭례문은 아직도 부실 복구 문제로 시끄럽다.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