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8]에필로그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8]에필로그 지면기사

    때로는 시로, 때로는 소설로다양한 인천지역 모습 만나는 계기매회 이야기 끌고 가는 캐릭터 등장시켜인천의 문학 뜻하는 '인문이'로 불러인류의 문화 '人文' 의미도 담아작가는 그 시대·환경·민중 앞에 서 있고작품은 그 시대·환경·민중의 거울 되어야긴 여정을 마치며기자와 기사도 그런 역할 할 수 있길 바라2014년, 1년 동안 인천을 실컷 읽었다. 취재팀은 그동안 매주 한 차례씩 이 꼭지를 만드느라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다시 펼쳐보니 부끄러운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문학을, 그 속에 담긴 인천을 가까이 했다는 자부는 크다.취재팀은 이 연중 기획시리즈를 통해 문학과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접점이 되도록 무던히도 애를 썼다.첫발을 떼던 날 지면에는 죽 늘어선 '인천의 책'을 바라보는 안경 낀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 캐릭터는 매주 모습을 바꾸었다.고려의 대문호가 되기도 했고, 조선의 인심 넉넉한 양반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갯가 사람들의 짠내를 붓에 담는 시인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검술을 익힌 임꺽정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옥살이 하면서 인천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백범 김구가 되어 인천을 다시 찾기도 했다. 돈이 없어 갓난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난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깨 처진 아버지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나라를 빼앗기고 힘 없는 조선 백성과 닮은 흑인으로 나와 그 아픔을 읊기도 했다. 수도권의 대표적 관광지로 부상한 월미도를 바라보는 부부가 되기도 했고, 인천 앞바다 등대 밑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기도 했다. 바닷가 섬 소년이 되어 놀기도 했으며, 빚덩이만 낚는 어부가 되기도 했다. 인천항 부두에서 등짐을 진 노동자이기도 했고, 또한 가련한 여공이 되기도 했다. 그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을 그린 노동 시인일 때도 있었다. 한반도에 첫 상륙한 미군이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그 미군에 몸을 팔아야만 했던 양공주가 되기도 했다. 발가락 잘리는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문둥이 시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이 되어 인천을 노래하기도 했다. 강화도의 갯벌을,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자연·삶·역사… 한편의 詩가 된 '강화' 지면기사

    '강화도 시인' 함민복(53). 강화 태생은 아니지만 1996년부터 줄곧 이곳에서 살았고, 강화 이야기를 시로 쓰고 있으니 '강화도 시인'이란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그의 대표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도 강화 이야기이다. 그는 영락없는 강화사람이다.함민복의 고향은 충북 충주 노은면 문바위라는 작은 마을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 부담이 없는 수도전기공고를 다녔다. 졸업 후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 정도 근무했다. 퇴사 후 뒤늦게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고, 대학 2학년 때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성선설' 전문)함민복은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의 시집과 '눈물은 왜 짠가' '미안한 마음'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등의 산문집을 냈다. 그는 강화 이야기가 듬뿍 담긴 '말랑말랑한 힘'으로 박용래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등을 받기도 했다.함민복은 서울 달동네와 친구 집을 전전하다 1996년 9월 강화군 동막리 월세 10만원짜리 빈 농가로 이사 왔다. 그는 "과거 마니산에서 내려다본 강화의 풍경도 생각나고, 집도 구하기 쉬울 것 같아 강화로 왔다"며 "역사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있어서 글쓰기도 좋은 것 같았다"고 했다.함민복의 글에는 갯벌의 소중함, 강화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벽 밖에서 못 박을 위치를 잡기 위해 망치로 벽을 두드린다. 아니, 그쪽 말고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기준을 바다로 삼는 이곳 사내들처럼, 나도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나아가 시를 좀더 짧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중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일부분)그는 '물울타리를 두른' 강화의 갯벌 위에 오늘도 시를 쓴다. 밀물이 들면 그의 시는 바다가 되리라. 함민복은 내년쯤 동시집을 한 권 낼 생각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7]'강화도 시인' 함민복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7]'강화도 시인' 함민복 지면기사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무엇을 만드는 법을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함민복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中함 시인 "강화도는 도서관이자 창작실" 20년 살며 문학적 소재 얻어서정·감성적 시어 잔잔한 울림… 개발압력·구제역 아픔 표출하기도관광객 유치 vs 경관 보전 딜레마 속 '원주민과 외지인 잇는' 다리 역할갯벌은 말랑말랑하다. 갯벌은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 하늘과 바다, 모두가 수평이다. 수직은 없다. 자꾸만 높아지는 빌딩이며, 내 것만을 돋보이게 하려는 네온사인이며 나를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갯벌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에 서면 높이 오르려 하는 인간의 수직 상승 욕망을 이해할 수 없다. 갯벌은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자궁과 같이 고귀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지난 12일 오후 3시 강화도 남단 갯벌에 섰다. 갯벌이 말을 걸어왔다.강화도에서 20년 가까이 살며 갯벌의 소중함과 가르침을 글로 쓰는 시인이 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53)이다. 그는 강화도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시어로 노래해 우리 가슴속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갯벌, 갯벌 속 어민, 구불구불 골목길 등 강화도의 모든 게 그의 문학적 토대다.강화군 선원면 한 찻집에서 만난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는 많은 생각을 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라며 "도서관이자 창작실이다. 글 소재를 주고 삶을 가르쳐 준 스승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또 "강화군 동막리에 살면서 문명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며 "층을 만들고 수직화되는 것의 대척점이 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쉽게 만들 것은/아무것도 없다는/물컹물컹한 말씀이다/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소금물 다시 잡으며/반죽을 개고 또 개는/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전문)강화도 남단 동막해변 인근에는 함민복이 강화도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감동적 서사… 노동문학 자리매김 지면기사

    1980년대 인천의 노동판은 이른바 '서사의 시대'였다.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고 할 말도 많았던 시기였다. 인천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문학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인천 주안5공단 세창물산 여공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은 방현석(53·본명 방재석)의 소설 '새벽출정'(1989)이다. 앞서 유동우, 석정남의 노동수기가 본격적인 노동자문학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새벽출정'은 노동자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안착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새벽출정은 스스로 꿈을 꾸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의식변화를 감동적인 서사로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며 "방현석은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진 뒤에도 꾸준히 노동 관련 소설을 발표했고, 노동자문학을 개척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방현석은 1985년 중앙대 문창과 재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들어 갔다가 유치장에서 해태제과 여공들을 만났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무권리·저임금의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무작정 인천으로 떠나 공장에 취업했다. 학생 신분임을 드러내지 않고 인천 노동현장에서 뒹굴기를 몇 해, 방현석은 전공을 살려 세창물산 여공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그는 "'정의'라는 언어가 능멸당하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괴감을 느꼈다"며 "그렇다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고민했고 노동자의 투쟁은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방현석은 1994년 인천을 떠나 모교인 중앙대 앞에서 잠시 서점을 운영했고, 2004년부터는 중앙대 문창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1년 신동엽창작상, 2003년 오영수문학상, 2003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그는 여전히 인천을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방현석은 "소설은 경험과 철학이 동반됐을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된다"며 "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인천 생활은 행운이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6]방현석 '새벽출정'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6]방현석 '새벽출정' 지면기사

    주안5공단 '세창물산 여공들' 파업 이야기 학생신분 감추고 노동자로 살때 소재 얻어 송철순 추락사 계기… 노동계 전체로 확산 위장폐업 이어 산업체 학생 노조탈퇴 종용 1989년 2월 구속될 각오로 결의 '새벽출정'문제 심각성 알리고 노동운동 활성화 불씨 1980년대 후반까지 인천 주안5공단에 있던 세창물산 여공들은 깡다구가 세다고 해서 '깡순이'라고 불렸다. 김깡순, 이깡순, 박깡순 식이었고 "저기 깡순이 지나간다"고들 했다. '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에 실린 방현석의 노동소설 '새벽출정'은 세창물산 깡순이의 투쟁일기다. 소설은 1988년 노조를 설립하고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며 투쟁하던 중 사고로 숨진 '송깡순' 송철순과 회사의 위장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다.도자기 인형 생산·수출업체인 세창물산 작업 현장은 시너, 석유 등 각종 유해물질투성이였지만, 환풍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가스 가마의 뜨거운 열기에도 선풍기 없이 근무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하루 평균 11시간의 노동, 거듭되는 피로에 쌓일대로 쌓인 감정들과 지치고 야위어가는 몸. 신경은 점점 더 예민해져 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졸립고 피곤한 몸은 자판기의 130원짜리 질 낮은 커피로 일으켜 세우고 거듭 쌓이는 노동의 피로로 몸은 썩어들어가는 듯하다.이 세창물산이 소설에서는 '세광물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난 5일 소설 속 노조위원장 '미정'의 실제 인물 원미정(53·여) 전 인천시의원(현 부평문화재단 이사)을 만났다. 10년 전 정치판을 떠난 이후 세창물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란다."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세창물산에서도 파업이 일어났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요구조건 중 하나가 '쌀밥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밥은 죄다 시커먼 밥(잡곡)에 오징어국은 '오징어가 지나간 국'이었죠."1988년 6월 세창물산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조 설립은 역설적이게도 전체직원 300명 중 50명에 불과했던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남자와 여자의 급여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남자들의 남녀차별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장소가 곧 詩' 변두리지역 풍경 생생 지면기사

    '반성의 시인' 김영승(56)은 1980년대 후반에 일약 스타급 시인으로 떴다. 1987년 민음사가 낸 시집 '반성'은 출간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소위 '저속한 언어'로도 좋은 시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김영승이 증명했다. 외설 논란 속에서도 이 시집은 꾸준히 팔렸고 현재까지 17쇄를 찍었다. 민음사는 1980~90년대 '민음의 시'가 배출한 대표 시인 중 하나로 김영승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반성' 이후에도 그의 시 쓰기는 계속되어 왔다. 지금껏 8권의 시집과 1권의 산문집을 냈다. 지훈문학상(2013년), 불교문예작품상(2010년), 현대시작품상(2002년) 등을 수상했다.김영승은 '반성의 시인'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욕설, 조롱, 풍자, 야유 등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시에는 '토포필리아(topophilia)', 다시 말해 '장소애(愛)'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천 남동구 구월동, 간석동, 중구 유동, 연수구 동춘동 시절의 풍경이 시편에 가득하다. 시인은 "장소가 곧 시(詩)"라고 말한다. 시의 초고를 동네별로 분류해서 보관할 정도다. 1980년대 이후 인천 변두리의 풍경이 생생하다. 더 넓게 보면 시인은 인천 도시 변천사의 굵직한 물줄기를 통과하며 시를 써왔다. 우리가 김영승의 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김영승 시 속의 시인과 이웃은 한결같이 가난하지만 그 가난을 묵묵히 견딘다. 그는 "사람들은 내가 가난하기를 원하겠지만, 건전하고 건강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가가 아니다"며 "가난한 상태를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통과하는 거다"고 말했다.그의 시집 8권 중 '반성', '화창'(2008년), '흐린 날 미사일'(2013년) 등 3권을 빼면 모두 절판됐다. 나남출판사는 나남시선으로 김영승 재출간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이르면 내년 봄에 시집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집뿐 아니라 산문과 미발표 원고, 콩트, 소묘 등을 묶어 낼 것이라고 한다. /김명래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5]김영승이 말하는 '시와 삶의 자리'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5]김영승이 말하는 '시와 삶의 자리' 지면기사

    판자촌 '붉은 고개' 위치한남동구 구월동에 살다초여름 거센바람 같은 개발 탓또다른 변두리 간석동으로비 새는 반지하, 잠수함 비유 눈길결혼 후 동춘동 임대주택 둥지그의 시편은 인천의 도시 변천사시인 김영승(56)은 가난했다. 어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 남구 용현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남동구 구월동, 간석동, 그리고 다시 중구 유동으로 되돌아갔다. 1990년대 중반 연수구 동춘동의 임대아파트를 얻기까지 가난한 시인과 그의 가족은 '도시 유목민' 신세였다. 그 고단한 여정이 김영승의 시(詩)에 녹아 있다. 도시에서 가난한 가족이 있을 곳은, 늘 변방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 "내 20대의 젊음이 맞물려 있는 곳"이라고 말한 남동구 구월동. 1980년 무렵의 구월동은 지금처럼 시청과 교육청, 경찰청, 고용노동청 등이 몰린 행정타운이 아니었다. 변변한 가게조차 없는 과수원과 농장뿐인 그저 그런 농촌 마을이었다. 일부 지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엄마들은 동네 과수원에 나가고, 청년들은 소래포구에서 하역 일을 했다. 불과 30년 전 이야기이다.가을인데 또 겨울인데 / 아무것도 없는데 // 콩깍지 턴 참깨단을 태워 / 까맣게 구운 감자 한 알 / 호호 불며 먹고 있는 젊은이 ('九月洞 金氏' 중에서)여름 내내 九月洞 동산 풀숲에서 꼬마들에게 매미나 잠자리를 잡아주며 / 동네 과수원 머리수건 쓰고 일하는 그 애들 엄마들한테 수제비나 얻어먹으며 / 道를 닦다가 ('술꾼이 있는 곳에' 중에서)구월동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 구월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됐다. 당시엔 '구월 신시가지'라고 불렀다. 중구에 있던 인천시청이 구월동 신청사로 옮겨 왔다. 도시의 중심축이 뒤바뀌었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인천시 신청사 오늘 개청'이란 제목의 1985년 12월 9일자 경인일보 기사는 구월동 청사를 "2000년대를 위한 이상적 도시 건설의 산실"이라고 썼다. 이날자 경인일보 관련기사를 보면 옛 시청사(현 중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파도·노을… 섬이 키운 소년감성 지면기사

    시인 장석남(50)은 인천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덕적도 서포리 해변의 파도 소리, 찬란한 노을, 바닷새의 울음이 '섬 소년'의 감성을 자극했고,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장석남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뭍으로 나와 송현초교를 다녔다. 인천남중과 제물포고를 거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그는 고교 시절에 신포동, 홍예문, 자유공원, 제일교회 옆 돌계단 등지를 걸으며 시인을 꿈꿨다.인천은 내 청춘의 유적지라고 해도 된다.(중략)이십여 년 전 청년기의 유적들, 그게 어디 내 추억만의 공간일까만 그 골목에서의 비틀거림이 그립고 푸근한 것은 내 뼈다귀에 그 거리가 새겨진 때문일 것이다.(산문집 '물 긷는 소리' 중 '한 장, 뱃고동의 지리부도')장석남은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그리고 김수영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미당문학상(2010), 김달진문학상(2012)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장석남의 작품에는 '인천'이 있다. '군불을 지피며' '기압골의 집' '내가 듣는 내 숨소리' '한진여' '솔밭길' 등은 덕적도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며 쓴 시다. 인천시내가 배경이 된 작품으로는 '소래라는 곳' '버스 정류장 옆 송월전파사' '송학동' '돌의 얼굴'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 등이 있다.장석남은 "내 작품에는 실명으로든 그렇지 않든, 심상의 고향은 인천과 덕적도에 닿아 있다"며 "소재가 인천이 아니더라도 늘 인천의 향기와 냄새, 리듬이 묻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 바다, 썰물과 밀물, 돛배, 뱃고동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장석남은 2003년부터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목동훈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4]덕적도가 키운 시인 '장석남'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4]덕적도가 키운 시인 '장석남' 지면기사

    20대에 등단… 시집 7권·산문집 2권 펴내유년시절 외로움 달래주던 공간이 모티브덕적면 북리는 한때 민어 파시로 명성 떨쳐홍예문·제일교회 옆 돌계단·자유공원 등옛 개항장 거리 거닐며 '시인의 꿈' 키워인천은 바다, 섬, 포구, 개항장, 빈민가, 노동판 들이 얽힌 공간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잘도 섞였다. 인천은 그만큼 다양한 문학적 모티브를 준다. 혹은 아름답기도 하고, 혹은 서민의 애환이 철철 넘치기도 하고, 혹은 민족의 아픔에 치를 떨게도 한다. 인천은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아프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 사무치게 한다.외지고도 외진 서쪽 바닷가 섬마을에 수줍음 많은 소년이 살았다. 파도소리를 듣고 자란 소년은 뭍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송학동 홍예문과 교회 옆 돌계단 등 옛 개항장 거리를 걸으며 시인을 꿈꿨다.덕적도 출신 장석남(50)은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등단해 어느덧 일곱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장석남의 작품은 고향인 덕적도와 인천에 닿아 있다. 지금도 그는 제주도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도 덕적도의 해변을 생각한다. 장석남은 "덕적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시 쓰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며 "지금도 유년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덕적도는) 내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밑그림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지난 22일 장석남의 고향이자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된 덕적도를 찾았다. 덕적도 도우선착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10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9시에 여객선을 탔으니, 1시간 남짓 걸렸다. 관광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2대의 공영버스(서포리행·북리행)와 횟집들이다. 길바닥에서 도다리, 우럭, 낙지, 소라 들을 파는 노점도 눈에 띈다. 도우선착장 건너가 소야도(蘇爺島)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섬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는 그 소야도다. 덕적도와 소야도 사이 해협을 '독강'이라고 부르는데, 이곳 물살이 여간 거센 게 아니다.덕적 독강 부두에서/우럭 회 썰어놓고 먹다/소주가 달다고 말하니 갑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동일방직, 노동자 문학의 시발점 지면기사

    노동자 문학은 노동자를 다룬 문학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든 문학이다. 노동자가 직접 겪은 희로애락의 이야기는 특별한 수사(修辭)가 없어도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1978년 동일방직 해직노동자들이 만든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가 꼭 그렇다. 부당 해고와 그에 맞서는 농성을 하면서 여공들이 직접 했던 말, 들었던 말, 속으로 했던 말을 한데 모았더니 하나의 연극 대본이 완성됐다. 아무리 외쳐도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연극이 되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희곡의 배경이 된 동일방직은 인천 노동자 문학의 시작을 알린 곳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30년대 근대 노동 문제를 다룬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동일방직의 전신 도요오(東洋)방적이 배경이었다. 인천을 대표하는 노동시인 박영근도 인천 만석동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동일방직 여공들과 만나면서 노동자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대본을 직접 쓰고 연극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던 동일방직 해직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산문과 시로 엮어 책을 내기도 했다. 해직노동자 석정남이 쓴 수기 '공장의 불빛'(1984·일월서각)과 정명자 시집 '동지여 가슴을 맞대고'(1985·풀빛)는 당시 대표적인 노동자 문학으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이후 인천 노동자 문학의 계보는 '쇳물처럼'(1986)의 정화진, '새벽출정'(1989)의 방현석 등으로 이어졌다.'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대본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에 일부 실린 것을 1992년 민족극연구회가 기관지 '민족극과 예술운동' 창간호에 전문을 소개하면서 재조명됐다.창간호는 지금 구하기 어렵지만, 민족극 연구자 이영미가 2011년 펴낸 '구술로 만나는 마당극' 제 1권에 대본 전문이 수록됐고, 해설도 곁들여져 있다.30여 년 전 연극은 사실 대본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엉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 위의 여공과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문학의 개념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공들이 관객의 마음을 훔친 이유는 관객이 공감하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3]노동자 문학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3]노동자 문학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지면기사

    똥물사건 등 동일방직 해고사태 다뤄대학생들 권유에 연극으로 '투쟁'대본은 해직자 석정남씨 일기장 바탕당시 제적생 박우섭 남구청장 집필노동자들이 살 붙여 능동적 의사표현분노·동지애, 민주주의사회 기틀로1978년 9월 22일 오후 7시30분 동일방직 해고근로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서울기독교회관에서 20대 초반의 여공 10여 명이 수줍게 무대에 올랐다. 인천 동일방직 해고사태를 다룬 연극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가 초연되던 순간이다.여공들은 긴장한 나머지 대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순서를 헷갈려 앞뒤가 뒤바뀌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21일 동일방직 회사 측이 노동조합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여공들에게 똥물을 뿌린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재연되자 무대에 오른 여공들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해설자:겨우 달아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여공에게까지 똥걸레를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직성이 안풀려 달아나는 여공에게 똥통을 머리에 뒤집어 씌웠습니다.여공3:경찰 아저씨 도와주세요!경찰3:야이 쌍년아! 입닥쳐! 있다가 말릴거야(똥을 뒤집어 쓴 그 여공만 무대에 남고 모두 퇴장한다)여공3: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여공2:어머니!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5막1장 中>여공들의 울부짖음에 관객석도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고, 무대에 올려진 현수막을 떼어 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동 삼권을 보장하라! 똥을 먹고 살 순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공연장이 시위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변을 감시 중이던 100여 명의 경찰은 소란이 나자 회관으로 난입해 관련자를 무차별 폭행하고 연행했다. 5막 16장의 이 연극은 이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거리로 내몰린 여공들이 왜 무대에 올랐던 것일까.36년 전 그날 연극무대에 오른 동일방직 해직노동자 석정남(58·여)씨를 지난 10일 충청북도 증평군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석씨가 동일방직에 다니면서 쓴 일기장은 당시 잡지 월간 '대화'에 소개되면서 이 연극 대본의 바탕이 됐다.1975년 3월 어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섬이 터전인 사람들 '그 고단한 바다내음' 지면기사

    문단에서는 이세기를 서해바다와 섬을 시적 대상에 포함시킨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1998년 등단한 이세기는 지금까지 2권의 시집을 냈다. '먹염바다'(실천문학사·2005)와 '언 손'(창비·2010)이다. 문단의 평가처럼 그의 시 대부분이 서해바다, 섬 이야기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직접 가보지는 못한, 그래서 낯익은 듯하면서도 왠지 서먹서먹한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백령도 등이 모두 이세기의 시가 되어 세상에 말을 건넨다.이세기는 틈이 날 때마다 덕적군도 곳곳을 찾아 나선다. 바다에만 의지해 그저 착하게만 사는 섬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세기는 그 속에서 문갑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안강망 어선 선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가 하던 일을 떠올리기도 한다.이세기는 "시에 등장하는 사람, 사건, 상황은 직접 만나고 경험한 것들이다"며 "27년만에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너무 황폐해진 모습에 놀랐다. 바다와 섬이 입이 없어 말을 못할 뿐 지난 시간 겪은 고초가 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입이 되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이세기의 시집에는 어업 노동에 관련한 우리말이 너무나 풍부하다. 작은 어업사전으로도 손색이 없다"며 "특히 바다를 관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세기의 시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의 내음으로 리얼하다"고 평했다.기자와 작년에 만났을 때 이세기는 덕적군도에 작은 집을 마련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아직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세기는 "누구도 눈길 주지않는 낮은 삶을 산다는 것, 보잘 것 없더라도 생명체이기에 갖는 귀중함이 어떤 것인지 섬에서 배운다"며 "시간이 갈수록 섬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꼭 섬에서 살며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박석진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2]이세기 詩를 통해 본 '섬이야기'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2]이세기 詩를 통해 본 '섬이야기' 지면기사

    작가의 문갑도 어린시설집안 간첩사건에 충격아픈 상처 詩로 쏟아내납북어민 인천 비중높아연좌제로 가족도 비참주홍글씨 수십년 몸서리한때 최고 어장 덕적군도그 많던 색주가 작부도밀물처럼 모두 빠져나가파시는 희미한 기억만…가진것 없는 이들의 터전점점 황폐해져 가지만섬은 엄연한 '삶의 현장'문갑도 선착장에서 바다를 보면대이작도, 소이작도, 영흥도의 늘어선 모습이한눈에 잡힌다.문갑도 선산 너머에는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들도멀리서 줄지어 엎드린 듯 보인다.'입동(立冬)'이던 지난 7일,덕적도를 거쳐 문갑도엘 갔다.'태생적 고향'은 문갑도이며'영혼의 고향'은 덕적군도라고 말하는시인 이세기(51)의 '글 밭'을 찾아서였다.덕적군도는 1950~70년대 국내 최고의 어장이었다.민어, 조기, 새우 등이 그물 가득이었다.그물을 내렸다 올리면 배는 곧 만선이 됐고,뱃사람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인천에서 배를 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이야기가 퍼졌다.인천의 섬과 바다에는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전국에서 물고기,아니 돈을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김진규(70)씨는 아버지 때부터 문갑도에서 배 사업을 크게 했었다. 김씨는 "지금은 문갑도에 70명 정도 살고 있지만 어업이 잘 됐던 1960년 후반에는 주민이 650명을 넘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도 꽤 많았다. 어족자원이 풍부했던 덕분에 사람도, 배도 문갑도로 몰렸었다"고 회고했다.바다가 늘 넉넉하게 베풀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태풍이 몰아쳐 어민의 생명줄인 배를 한순간에 망가뜨리고, 목숨마저 앗아가기도 했다. 김진규씨 집안도 태풍에 배를 모두 잃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덕적군도 바다에는 숨겨진 얼굴이 하나 더 있다. '납북어민'들에게 새겨진 간첩이란 '주홍글씨'다.그해에는 삼월에도 눈이 내렸습니다//가랑눈은 인적 없는 바닷가에 내리고/간간이 눈발이 날리듯/그해에//배를 타고 월북을 하였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반공법으로/월남에서 돌아온 매형은/목발을 한 채/이틀 밤을 묵고 섬을 떠났습니다//무서운 밤이 지났습니다 (…중략…) 배를 탈 수 없었던/털보 작은아버지와 넙적이 작은아버지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철거민·공장 노동자 소외된 자들의 고통 지면기사

    출간 이후 4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는 1970년대 철거민과 공장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개발에 밀려 갈 곳 없는 달동네 철거민들의 사연은 안타깝기만 하다. 밤낮 휴일 없이 일해도 소위 '최저임금'도 쥐지 못하고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난장이'는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을 상징한다.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고 소설은 1970년대의 어느 가족의 삶을 기록했다. 난쏘공의 난장이는 키가 117㎝, 몸무게는 32㎏이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는 난장이 아들의 독백은 1978년 메아리치기 시작해 아직까지 울리고 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 우리 문학을 논의할 때 하나의 뚜렷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고 서울대 김윤식 명예교수는 그의 '난장이론'에서 썼다. 조세희는 '끝까지 살아 독자에게 전달되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난쏘공의 동화같은 내용과 형식이 군사 정권의 검열을 피해갈 수 있게 했다.난쏘공에 등장하는 노동 착취는 경제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조건으로 이해되는 문제가 아닌 불법 행위가 됐다. 철거민 4명과 진압 경찰 1명이 숨진 2009년 서울 용산참사의 비극은 잊힌 지 오래다. 난쏘공에 등장하는 난장이는 이미 사라진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여전히 난장이가 산다. 주민 5명중 1명은 65세 이상 노인인 만석동. 공장 담벼락보다 낮은 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여전한 '난장이'다. 작가는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며 난쏘공을 썼다.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시대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아직도 난쏘공은 인쇄되어 팔리고 있다.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난쏘공 중에서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1]조세희 '난쏘공'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1]조세희 '난쏘공' 지면기사

    연작소설 12편 묶어 1978년 펴낸 '스테디셀러'주요 배경 '은강 = 인천' '기계도시 = 만석동'이젠 주민수 크게 줄어 활기잃은 공장지대삼남매 통해 인천지역 노동착취 현실 담아내지금도 임금 수준은 타지역보다 '열악'"배고파 우는 아이 방관도 폭력" 메시지 전해인천 동구 만석동은 면적 1.15㎢ 중 절반이 넘는 0.66㎢(59%)가 공장지대다. 두산인프라코어, 동일방직, 동아원, 삼미, 삼화제분, 한국기초소재, 혁진산업, 원일제강, 올파인텍 등 크고 작은 공장 50여 개가 이 작은 동네에 들어서 있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출퇴근 시간대 만석동거리는 공장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공장 숫자는 많지만 언제부턴가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 됐다. 공장지대로서의 활기마저 잃었다.지난 4일 만석동 주민 김선현(84·여) 씨는 "(1970년대에는) 사람이 말도 못했어. 젊은이들이 많았고. 정말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지"라고 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72)도 당시 인파의 어느 틈엔가 끼어 사람들을 관찰했을 것이다. '난쏘공'이란 줄임말로 더 잘 알려진 이 스테디셀러의 주요 배경인 '은강'은 인천이고, '기계도시'로 설명하는 공장지대는 동구 만석동이다.은강의 면적은 백구십육제곱킬로미터, 인구는 팔십일만 명이다.…(중략)…은강 공업 지대는 금속·도자기·화학·유지·조선·목재·판유리·섬유·전자·자동차·제강 공업이 성하고, 특히 판유리는 한국 최고의 존재로 교과서에 나와 있다. -<난쏘공 '기계도시' 중에서>조세희는 1975년부터 3년 동안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등 8곳에 연작소설 12편을 발표했고, 이를 묶어 1978년 6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작품의 배경인 은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된 '기계도시'는 1977년 6월 '대학신문'에 실렸다. 1977년 하반기 나온 인천통계연보는 인천 면적을 199.9㎢, 인구를 83만명(1976년 10월 기준)으로 기록했다. 한국판유리(한국유리공업) 공장도 인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수인선 협궤열차 배경… 80년대 사랑·이별가 지면기사

    '협궤열차를 아는가?'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조그마한 크기의 동차(動車)가 있었다. 운행 구간이 수원~인천이고, 궤간 너비가 표준보다 좁다고 해서 수인선 협궤열차다.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60년 동안 서민의 애환을 싣고 달렸다. 교통망 확충으로 이용객이 줄어들어 운행거리가 점점 짧아졌고, 결국 1995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협궤열차는 일제의 쌀·소금 수탈 수단으로 건설됐지만, 광복 이후에는 서민들의 발 역할을 했다. 협궤열차가 운행을 중단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섭섭해했다. 하지만 경제성 논리에서 협궤열차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68)은 1990년 계간지 '현대소설'에 단편소설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이 단편을 '협궤열차'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만들어 1992년 출간했다. 협궤열차를 배경으로 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다. 사랑과 이별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본연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어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소임을 다하고 종운(終運)을 맞이한 협궤열차.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같은 듯하다.이 소설은 1980년대 협궤열차 운행 당시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철교, 고깃배가 포구로 들어오는 장면 등 소래포구의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윤후명은 "경기도 안산에서 7년간 살면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포구를 자주 다녔다"며 "수인선에서 사람의 삶이 있는 곳은 인천이었다"고 했다. 또 "1991년 안산을 떠난 뒤에 협궤열차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매우 섭섭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지만, 어느 선까지는 놔둬도 됐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0]윤후명 '협궤열차'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0]윤후명 '협궤열차' 지면기사

    지난 22일 오후 1시께 찾은 인천 소래포구.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 끝을 자극했다. 때마침, 고깃배가 밀물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포구로 들어왔다. 갈매기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솟구쳤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어시장은 젓갈, 꽃게, 생선 들을 사러 온 사람으로 북적였다.포구를 가로질러 새로 놓인 철교 위로는 전동차가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2012년 6월부터 오이도~송도 구간을 오가는 수인선 복선 전철이다. 철교는 하나가 더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협궤열차가 다니던 것인데, 지금은 인도교로 쓰임새가 바뀌었다.어른 둘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철교 위를 열차가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협궤(狹軌)다.젊은 세대에게는 협궤열차란 말부터가 낯설 수밖에 없다. 1980년대 협궤열차 운행 모습과 소래포구의 풍경을 감성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이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68)이 1992년 출간한 장편소설 '협궤열차'다. 이 소설은 수인선 협궤열차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옛 애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등 협궤열차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 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중략…) 가을에 그 작고 낡은 기차는 어차피 노을 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1980년대 생활·통학열차 배경 이야기1937년 일제가 쌀·소금 운송위해 개통소금수탈 야욕 염전과 소래역 연결도1995년 '운행중단' 포구는 재래항 유지작고 느려 버스와 충돌하고도 넘어져유원지 나들이 등 잊지못할 추억남겨소래포구 근처에는 협궤열차 소래역이 있었다. 그 옛 역사가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변했다. 한적한 포구마을에 협궤열차 역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소래염전 때문이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경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70~80년대 억압된 민중·노동자 '해방'을 읊조리다 지면기사

    박영근(1958~2006)은 인천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대표 노동시인이다. 그는 펜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마지막 놓을 때까지 문학을 통해 억압된 민중과 노동자의 해방을 꿈꿨다.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이란 굶주림의 추억으로부터, 사슬의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는 '이 땅의 주인'이라고 했다.박영근이 인천에서 시를 쓴 것은 숙명에 가깝다.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 인천은 공장이 많아 전국의 노동자들이 몰려든 곳이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당연히 인천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지난 9월 27일 오후 인천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안치환의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래의 원작자를 기리기 위해 인천의 노동계, 문화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박영근이 1983년 발표한 '백제(百濟)6'의 시구를 고쳐 만든 노래다.박영근 기념사업회는 이날 그의 시비가 세워진 곳에서 창립식을 갖고 전집 제작, 문학관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도시 인천이 박영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그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견제 없이 견고해지는 자본주의사회에 일침을 가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바탕이 된 박영근의 원작은 이렇다.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주저앉아 우는 누이들/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솔아 솔아 푸른 솔아/샛바람에 떨지 마라/어널널 상사뒤/어여뒤어 상사뒤 …(중략)…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살아서 가다가 가다가/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네가 묶인 곳, 아우야/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가겠네, 다시/만나겠네. /김민재기자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9]박영근과 노동시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39]박영근과 노동시 지면기사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통해 관심가져군 제대후 노동현장 뛰어들어두번째 시집 '대열' 투쟁의지 드러내고탄압 속 '노동이 세상 움직인다' 외쳐민예총·민족문학작가회의 지회 설립 앞장2006년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 떠나"박영근은 인천이 꼭 기억해야할 작가"기름밥 세월 이십 년짜리 구닥다리 안전등도 없는 프레스란 놈. 개눈깔을 달았는지 제 멋대로 내려앉아 덜컥 손가락이 잡혔는데…. 병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이게 또 무엇이냐 죽일 놈들 일이 없으니 회사를 떠나라네….노동시인 박영근(1958~2006)의 두 번째 시집 '대열'에 실린 '여우발'의 일부다. 산재보상도 제대로 못받는 노동자의 하소연이 마음을 울린다. 그의 시 대부분이 이렇다. 박영근은 노동자 탄압이 극심하던 1970~80년대 공돌이·공순이가 돼 그들의 목소리를 시로 옮겼다.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박영근은 전주고등학교 1학년 열여섯 나이에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더 이상 필요없다"며 자퇴했다. 이후 혼자 서울로 올라가 영등포 신정동 뚝방촌 단칸방에 살면서 혼자 책을 읽고, 글쓰기를 읽혔다. 이때 박영근은 김지하, 고은, 황석영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지식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스무 살 무렵 인천에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를 만나면서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1978년 인천은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 종교계, 학생들이 한데 뭉쳐 회사와 국가의 조직적인 노동탄압에 저항하던 시기였다. 박영근은 2004년 쓴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에서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하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을 만날 무렵이었다. 거기서 그들의 일기며 투쟁일지와 '객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등의 나의 서투른 문학적 체험과 지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뜨거움 만큼 나는 늘 막막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은 자의 무력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노동자가 되었고, 급진적 운동이 시작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박영근은

  •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괭이부리말 아이들 '행복이란 무엇인가' 지면기사

    사람들이 여유가 없다. 나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들 한다. 14년 전에 나온 책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앞만 보고, 나만 생각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가만히 주변을 살피게 한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게도 한다. 인천의 대표적 빈민촌 괭이부리말과 그곳에 얽혀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참 따뜻한 책이다.행복! 모두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일 것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그 행복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작가 김중미는 '괭이부리말 아이들' 머리말을 배를 곯던 아이 얘기로 채웠다. 8개월 동안 같이 지내던 아이가 집을 떠났는데, 더 일찍 만나서 함께 했더라면 그 아이에게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마음을 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그 아이를 데려 온 뒤로는 세 끼를 꼬박 챙겨 주었는데, 그 아이는 행복해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배만 고팠던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고팠기 때문이라고 김중미는 생각했다. 그래서 후회가 된다고, 더 일찍 만났더라면 마음까지 채워주지 않았을까 하면서.그렇다. 행복은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다. 그래서 행복하기는 맘 먹기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말한다. 마음을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행복해지지 않는 마음과 정신이 가난한 우리들에게, 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꼭 맞는 '치유제'이다. 가난한 이들의 얘기에서 거꾸로 배고픈 마음을 채우게 된다.사는 게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혹시라도 더 갖기 위한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들고 괭이부리말에 한 번 가보자. 책장을 덮을 때는, 거기에서 돌아올 때는 내 맘이 든든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