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8·끝]연중기획을 마치며-기자 방담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8·끝]연중기획을 마치며-기자 방담 지면기사

    인천, 현재, 시민,정체성을 담은'50번의 목요일'참석자 = 목동훈 차장, 김명래, 정운, 김성호, 홍현기기자지난해 여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인천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표준국어대사전은 인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중서부, 황해에 접해 있는 광역시. 서울의 외항(外港)으로, 해산물·흑연·금속·기계류 따위를 수출한다. 명승지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 해수욕장 따위가 유명하다'.인천의 현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인천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인천의 정체성을 주제로 기획시리즈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중, 그해 12월 경인일보 편집국에서 새해 기획물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2013년은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600년, 인천항이 개항된 지 130주년이 되는 해. 이 회의에선 지명 600년, 개항 130년을 맞아 인천의 정체성에 관한 연중기획물을 진행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경인일보 2013년 1월 10일자 1면에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첫 기사(프롤로그)가 실렸다. 이렇게 시작된 연중기획 기사는 12월 12일까지 매주 목요일자에 어김없이 게재됐다. 독자와 매주 목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약 50회 분량이다.연중기획은 크게 '키워드로 본 인천', '근대도시가 열리다', '제2의 개항 꿈꾸다'로 구성됐다.이름 600년과 개항 130년에 맞춰 구성한 것으로, '인천을 본다'는 제목처럼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인천 모습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인천시민들이 애향심과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제2의 개항 꿈꾸다'를 연중기획의 한 부분으로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연중기획의 출발은 인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10대의 시선, 문학, 향우회, 개항장 문화 등 여러 소재를 통해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본 인천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최원식 인하대 교수가 본 인천 지면기사

    정체성이란 말을과거가 아니라미래에 던지자고 제안하고 싶어요.정체성은 시민들이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경인일보는 2013년 연중기획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최원식(64)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를 지난 9일 오후 4시 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그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인천 토박이'로 30여년간 인하대에서 후학을 양성해 왔다.인천 문화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 교수는 인천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냈다.그는 인천을 '기회의 땅'으로 보고, 개항기 때 꽃을 핀 '개방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인천을 '서민도시'로 규정했다. 각지에서 몰려온 서민층이 이 도시에서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인천'은 어떤 도시인가요."인천은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잘 안 돼요.(인구 규모로)지금 3대 도시인데, 곧 2대 도시가 된다면서요.인천은 탈냉전시대를 맞으며 중국 교역을 뚫어서 양적으로 위상이 확대됐다고 할까, 기회가 왔잖아요.덩치도 커지고 좋은 조건을 가졌는데, 그것을 활용해서 양적인 성장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무엇인가가 한편으로는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문턱'을 싹 넘어가지를 못해 참 안타까워요."-인천이 잘 안 되는 건 무엇 때문인가요."인천시민들이 지금 우리에게 온 기회를 감당하고 이것을 더 앞으로 전진시킬 만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큰 비전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있지 않나 싶어요.괜히 '토박이 논쟁'이나 벌이고. 근대도시는 토박이가 아니라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새롭게 만드는 것이에요. 개항 이후 인천은 근대도시의 실험실 노릇을 했어요.일제의 압박 아래서도 뭔가 우리 것을 만들어 내고 정계·학계 등 각 분야에서 엄청난 인물들을 냈어요.이 도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노동자의 도시였어요.전국에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제2의 개항 꿈꾸다⑦ 해양도시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7]제2의 개항 꿈꾸다⑦ 해양도시 지면기사

    항만·철책에 가로막혔던 해안 친수공간 확장… 송도국제도시 고품격 '워터프론트 사업'영종도 준설토 투기장에 2조대 복합관광리조트 조성·아라뱃길 시민쉼터 정착'인천항=화물' 공식깨고 사람오가는 크루즈 거점항 변신"인천의 도시 정체성은 다문화성, 관문성, 해양성이 중층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해양성은 지문화적(Geo-cultural) 특성으로 장기 지속적이며 본질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인천의 고대 지명인 '미추홀'은 '바닷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지명에서부터 인천은 해양도시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도시는 해양 환경이나 해양 산업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바다에 거주시설이나 공항·항만 등을 건설해 해양의 공간 이용을 극대화한 도시라고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인천은 해양도시의 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인천은 140㎞의 해안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150여개의 유·무인도를 가지고 있다. 해양도시에 어울리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해양도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는 어디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인천보다는 부산을 먼저 떠올릴 것으로 예상된다.부산은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를 자처해 왔을 뿐 아니라 해양 관련 각종 기관과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반면 인천의 바다는 오랫동안 철책과 항만에 막혀 있어,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인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해 발전하기 위해선 인천이 가지고 있는 '해양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더욱 가까워지는 바다인천은 해안선을 끼고 있는 도시이지만 인천의 바다는 항만과 철책 등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인천 연안 곳곳에서 친수 공간을 확장하는 사업이 진행됐거나 계획돼 있다. 생활 수준 향상에 힘입어 해양 레저 스포츠도 활성화되고 있다.월미도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

  • 해양도시로 가는길 전제 조건은?… 분쟁 파도 잦아든 '평화로운 바다' 지면기사

    인천이 해양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조건은 '평화'다. 1999년, 2002년, 2010년. 제1·2 연평해전,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등 북한과의 분쟁이 발생한 해이다.최근 15년동안 북한과 네 차례의 분쟁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인천이다.이는 모두 인천의 섬 또는 인천 바다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인천 앞바다는 아직도 군사적인 불안감이 상존한다. 올해 초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대북 관계가 경색되자 백령도 등 서해5도를 찾는 관광객이 급감했다. 한중 카페리를 이용한 중국인 관광객도 줄어들었다.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평도 주민들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현재 '분쟁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인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진정한 해양도시로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은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평화가 전제되지 않은 바다에서의 생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은 "인천의 해양도시 비전은 남북간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없이 실현될 수 없다"며 "서해가 북한과 해상 분계선을 마주한 분쟁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이어 "해양도시와 평화도시는 서로 뗄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천의 발전과 인천시민의 안전 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고 했다./정운기자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⑥ 구도심 변화의 바람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⑥ 구도심 변화의 바람 지면기사

    ■우각로 문화마을개발 부진 '달동네'에 예술가 입주 마을전체가 작품 변신사회적기업 '행복창작소' 성공적 운영■괭이부리마을구성원 대부분 노약자 환경 열악기억을 살리는 주거지 재생 '100% 재정착' 작은 변화부터 시작인천 구도심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재개발 지연으로 슬럼화가 됐던 남구 숭의동 우각로마을은 예술인 문화공간으로 변했다.인천의 대표 쪽방촌인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서는 주민 100% 재정착을 목표로 한 주거지 재생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두 마을은 '개발 중심'이 아닌 '주민 중심'이 되는 사업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달동네에 예술의 숨결을'… 숭의동 우각로 문화마을재개발사업 지연으로 사람이 떠나고 있는 마을. 세 집 건너 한 집이 빈집인 마을.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한부모, 조손가정 등 저소득계층이 60%인 마을.인천시 남구 숭의동 109 일대 '우각로마을'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각로마을이 '우각로 문화마을'로 변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경인전철 도원역 뒤편에 위치한 우각로마을은 865가구 1천752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달동네'다. 우각로는 마을로 향하는 길이 소뿔 모양처럼 굽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재개발 사업이 추진된 지 십수 년간 별다른 진척이 없자 사람이 점점 떠나기 시작했고, 마을 주택 611개 동 중 152개 동이 공가로 방치돼 있다.빈집은 노숙인 쉼터로 활용됐다. 쓰레기가 들끓는 낡은 가옥에 비행 청소년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쪽방 빈집이 낡아 쓰러지면 사람이 살고 있는 옆집에도 큰 영향이 됐다.2년 전 여름 숭의1·3동과 남구의제21, 지역 예술인들이 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면서 우각로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빈집을 예술인들의 작업공간으로 활용해 이 지역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고,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2011년 11월 주민, 문화예술인, 행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⑤ 외국 도시 네트워크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⑤ 외국 도시 네트워크 지면기사

    500권의 책 인연 美 버뱅크시 '1호 자매도시'초기 전략적 접촉때 외국 선진도시 상대 안해줘위상 높아지면서 잠비아등 줄이어교류활동중 65%가 동북아 편중… 市 중장기 시스템 절실지난 9월 인천 송도컨벤시아.미국 버뱅크시, 중국 톈진시, 일본 기타큐슈시 등 세계 14개 도시 대표단과 UNOSD(유엔 지속발전가능센터) 등 UN기구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인천시가 주최한 '2013 인천 자매우호도시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정상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공동 선언문'을 채택, '기후변화 대응' '청정에너지 도입' '도시 협력 시스템 구축' 등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이들이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인천시가 구심점 구실을 했다.# 국제사회 변방에서 중심으로인천시가 처음 자매결연을 맺은 외국 도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시다.1961년 버뱅크시는 대한민국의 인천이라는 도시로부터 '책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평문화원의 이창근씨가 미국 각지에 책을 지원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버뱅크시는 이 같은 요구에 선뜻 영어로 된 책 500권을 인천에 기증했다. 산업화 초기 '궁핍한 도시 인천'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다.버뱅크시의 샤론 코헨 공공도서관 서비스 디렉터는 "인천의 요청에 버뱅크 주민들은 많은 책을 모았고, 이를 인천으로 보냈다"고 했다. 500권의 책을 인연으로 버뱅크시는 인천시의 '1호' 자매도시가 됐다.이후 인천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1983년), 알래스카주 앵커리지(1986년) 등 미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해당 도시 인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시민이 자매결연의 연결고리가 됐다고 한다.해외여행자유화 조치 시행(1988년), 중국과의 국교 수교(1992년) 등 여건 변화는 인천시가 자매결연 외국 도시를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인천시는 전략적으로 외국 도시들과 접촉했다. 선진국 주요 도시와 자매결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④ 국제기구 메카, 송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④ 국제기구 메카, 송도 지면기사

    관광산업, 컨벤션, 숙박업… 브뤼셀·제네바같은 선진 국제도시들이 지향하는 '서비스업 중심 경제구조' 따라 갈 수 있는 계기'시장 치적쌓기용' 과거 전시용 기구 내실문제 제기작년 10월 GCF본부 유치 '환산못할 유무형 효과'유네스코지정 2015 세계 책의 수도 선정 승승장구지난해 10월 20일 오후 GCF(녹색기후기금) 2차 이사회가 열리고 있는 송도컨벤시아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환경분야의 세계은행이라 불리는 GCF 본부 유치 도시가 결정되는 순간, "인천이 해냈다" "한국이 세계 환경 어젠다를 선점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는 목소리가 회의장 곳곳에서 들려왔다.산업단지가 많은 탓에 공업도시, 회색빛 도시 등으로 타지 사람들에게 각인돼 왔던 인천이 세계 환경 이슈를 선점하고, 이를 통해 도시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순간이었다.구호로만 앞세웠던 '국제도시 인천'이란 말이 이제는 말이 아닌 현실이 돼 인천시민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 GCF 본부에 이어 최근에는 세계은행 한국사무소까지 유치한 인천은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국제기구 하나가 도시를 바꿀 수 있다지난해 인천이 GCF 본부를 유치한 이후, 당시 이 업무를 담당한 청와대 관계자는 "인천이 제2의 개항을 맞고 있다"고 표현했다.1883년 인천항이 제물포조약(조선과 일본이 1882년에 체결)에 의해 개항된 이후 지금의 중구 신포동 일대에는 일본·청나라·러시아 등 각국 사람들이 거주하는 조계지가 형성됐다.외세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천으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와 경제, 도시계획 기술 등이 유입됐고, 이는 인천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데 큰 구실을 했다.철도, 우편, 전화, 통신, 등대, 기상 관측, 호텔, 정미소, 서양식 건물 등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제도와 문물이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인천에는 타 시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자리가 창출됐다.말 그대로 인천이란 도시의 근간을 바꿔 놓은 일대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하)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하) 지면기사

    세계 각지에서 인천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는 못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은 '남'이 아닌 '우리'의 범주에 들어와 살고 있다.이들은 인천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공장 노동자, 한 남자의 아내로 온 외국인들은 인천에서 성장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한다. 우리 이웃인 인천 속 세계 사람들의 삶과 꿈, 바라는 점 등에 대해 들어봤다.■ 다문화 가정 돌보는 파키스탄 출신 목사한국인 남편이 외국인 아내따라 영어 예배땐 뿌듯파키스탄 출신 아킬 칸(45) 목사는 인천시 연수구 인천순복음하모니교회에서 '다문화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1995년 인천에 온 칸 목사는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렸고 현재 13살, 8살 아들을 두고 있다. 아내는 '다문화 가정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이 교회 교인 중 다문화 가정은 약 30명이다. 그동안 이 교회를 거쳐 간 다문화 가정 수도 많다. 다문화 가정 중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가정불화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을 더 많이 지켜봤다.칸 목사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한국인 남편이 교회에 나와 외국인 아내와 함께 영어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칸 목사는 여럿이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는 풍경을 보고 한국 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인천에서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 칸 목사 생각이다. 칸 목사는 "예전에는 (내가)지나가면 다들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공장에서 일할 때 차별당한 일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면서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점점 더 인천이 다문화 사회가 돼 가는 것 같다. 어쩌면 20~30년 뒤에는 이민자 출신 대통령도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1인 4역 우즈베키스탄 결혼이주여성시부모님 모시는것 당연한 일… 경찰·병원찾아 통역봉사우즈베키스탄 출신 샤흘로 나르츠(31·여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상)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③ 인천 속 세계 (상) 지면기사

    산단중심 형성된 지구촌 다양한 문화 주택가까지 스며들어상점·식당·예배소… 논현동 원룸촌 '외국인 기숙사' 분포석남동 거북시장 유명·이슬람계, 옥련동 일대에 터전송도등 경제자유구역 거주 외국인 지역공동체와 융화 노력인천 속에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주변만 둘러봐도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을 접할 수 있다.그들은 인천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화를 싹 틔우고 있다. 인천은 기회의 땅이 됐고, 그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인천에 발을 내디뎠다.인천 속 외국인들은 인천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했다. 경인일보는 인천 각지에 자리잡은 외국인들의 삶을 쫓아가 봤다.이들은 라마단 등 종교와 관련된 기간에는 대규모로 모여 야외에서 기도를 한다. 이 기간에 인근 고깃집 주차장에서는 수백명의 이슬람인들이 단체로 예배를 보는 진풍경도 목격할 수 있다.중고차수출단지 이슬람 공동체는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지난 9월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암 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은 A(22·여)씨의 수술비 650만원을 자체적으로 모금해 지원하기도 했다.이들은 인천 구성원으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추석과 설에는 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후원품을 전달한다.이들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출신 쉐르자드 자키로브(35)씨는 "인천은 공항과 항구가 가까워 사업을 하기가 굉장히 편리해 많은 바이어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졌다"며 "인천의 일원으로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많은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인천 부평구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 2곳이 위치해 있어 많은 외국인들이 오간다.'부평 이슬람 사원'은 2004년에 건립됐고, '알후다 이슬람 사원'은 2009년에 세워졌다. 부평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이유는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인천부평경찰서 외사계 권태형 외사관은 "'부평 이슬람 사원'은 백운역과 부평삼거리역이 인접해 있고, '알후다 이슬람 사원'은 동암역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며 "교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하)-확산되는 문화공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하)-확산되는 문화공간 지면기사

    최근 이 지역의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젊은층이 소규모 카페 등을 개업하는 경우가 눈에 띄는데,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창업을 할 수 있다는 점과 개항장이라는 독특한 장소적인 매력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본다.십수년 전만 해도 침체된 구도심이었던 인천시 중구 개항장 일대 거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에 개관해 인천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인천개항박물관 등이 이 지역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여기에 점차 들어서고 있는 소규모 공방, 카페, 박물관 등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선보이며 이 일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지난 20일과 21일, 인천시 청일조계지 계단부터 신포시장까지 둘러봤다. 최근 새로 생겨난 많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100여m의 거리에 4개가 위치한 곳도 있었다.곳곳에 새로 생긴 공방과 박물관들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에서 공방 등의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한목소리로 "개항장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은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고 했다.# 문화향유 공간 '카페'개항장 일대에 가장 많이 들어선 것은 '카페'다. 하지만 이 지역 카페는 일반적으로 커피 등의 음료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일반적인 카페와는 달랐다.청일조계지를 가르던 계단 중턱에 위치한 '낙타사막'은 비어 있던 집을 매입해 2011년 개관했다. 내부 디자인을 주인 김홍희(45)씨가 직접했다. 각종 미술 서적을 읽을 수 있도록 북카페 역할을 하고 있다.2층에서는 종종 '소규모 영화제'가 열리기도 한다. 중구청 뒤편에 있는 '담쟁이넝쿨' 카페에는 다람쥐와 토끼, 이구아나, 여러 종의 새 등이 있는 '미니동물원'이 있다.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팟알'은 지난해 8월 문을 열었다. 19세기 후반 지어진 하역회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팟알' 외벽에는 이 건물이 등록문화란 것을 알게 하는 현수막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상) 아트플랫폼·근대문학관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제2의 개항을 꿈꾸다② 개항장 문화(상) 아트플랫폼·근대문학관 지면기사

    인천시 중구에 위치한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연중 전시회가 열린다. 현재는 '한일 영화홍보전단 비교전시회'가 진행 중이다.그리고 전시회와는 별도로 수십명의 입주작가들이 인천아트플랫폼에 마련한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맞은편에 한국근대문학관이 최근 개관했다. 지난 14일과 15일 두 곳을 찾았다.모두 개항기 건물을 리모델링해 활용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매년 입주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인천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으며, 인천근대문학관은 개항도시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근대'시기 만을 다룬 국내 최초의 문학관이다.# 소통과 교류의 공간, 아트플랫폼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전국 각지에서 온 레지던시 입주작가들은 인천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이 접한 인천을 그들만의 시각으로 재창조하고 있다.이퐁 작가는 백령도의 점박이 물범을 소재로 한 동화책 '백령도 점박이 물범 두올이'를 지난 8월 펴냈다.집필을 위해 백령도 현지 주민들을 만나고, 여러 지역을 답사하기도 했다.지난해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에 대해 "인천에서 학교를 나왔지만, 인천의 개항장거리에 대해선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며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고, 글을 쓰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그는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개항장 일대를 두고 "100여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쌓인 여러 층의 단면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개항기 사람들을 소재로 한 책을 구상하고 있다.신태수 작가는 서해5도를 그리고 있다. 지난해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백령도와 소청도, 대청도를 그리기도 했던 신 작가는 올해 연평도와 소연평도를 그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경상북도 의성이 고향인 그는 "내륙지방에서 생활하다 보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다"며 "인천에 와서 백령도 등 서해5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됐고, 분쟁지역이기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 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① 들어가는 글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6] 제2의 개항을 꿈꾸다 ① 들어가는 글 지면기사

    근대화 과정 떠받친 기둥 역할 불구광역 쓰레기매립지 등 '아쉬운 대우'GCF본부 유치 등 국제사회 큰관심남북교류 이끌 '평화거점도시' 앞장인구 300만 눈앞 '튼튼한 추진 동력'능동적 변화 지향 새로운 도약 준비인천은 한갓진 어촌 제물포에서 근대를 맞았다. 130년 전 일이다. 외국에 문호를 열고 최근까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에 항구와 공장, 주택이 들어섰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렸고, 전쟁 때문에 서해로 흘러온 실향민은 인천에 정착했다.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이 도시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단지는 국가 경쟁력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이처럼 역동적인 도시가 또 있을까.하지만 인천은 '서울의 관문'이란 구실과 이미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서울에 전력을 보내는 발전소가 인천 연안에 즐비하게 들어섰다. 경인고속도로는 인천 도심을 남과 북으로 갈랐다.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광역 쓰레기매립지가 도시 한복판에 버티고 있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은 인천으로 쓰레기를 보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2013년 인천은 '제2의 개항'을 준비하고 있다. 제1의 개항이 외세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었다면, 제2의 개항은 능동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무엇보다 추진 동력이 좋다. 인천의 공항과 항만은 확장 중이다.인천은 인구 기준으로 국내 3대 도시에 올랐다.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 창출 전망이 좋다.인천시 중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화콘텐츠는 도시를 살찌우게 하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세계와 대한민국의 '접점'이 됐다.접경도시인 인천은 향후 통일시대에 대비해 남북교류의 중심지로서 구실이 가능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제2의 개항은 여느 지자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밋빛 공약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내셔널 프로젝트로도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인구 300만 시대 눈앞… 2030년께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⑧산업단지 (下)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⑧산업단지 (下) 지면기사

    남동산단 2010년 승인 고시… 시·산단공 등 주도 7개 완료공동물류센터 95% 가동·민간 진행 QWL밸리 사업도 속도주안·부평산단 '확산단지 응모' TF팀 꾸려 3단계로 계획인천 내 산업단지의 역사는 대부분 40년이 넘는다. 이들이 조성된 시기의 산업단지 역할은 동종 업계, 공장의 집적화에 무게가 실렸다.때문에 공장 시설과 설비를 위한 공간 외에 편의시설, 문화시설, 주차시설 등의 필요성은 대두되지 않았다. 하지만 4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산업단지의 역할이 확대되고, 그 개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인천에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산업단지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구조고도화사업'이 시작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남동국가산단은 인천에서 가장 먼저 구조고도화사업을 벌인 곳이다. 이곳은 2009년 12월 반월·시화, 구미, 익산 등과 함께 구조고도화사업 시범단지로 지정됐다.남동국가산단의 구조고도화사업은 땅의 용도를 바꿔 산단의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한국산업단지공단 인천지역본부 주도하에 남동국가산단은 2010년 11월 구조고도화 계획 승인 고시를 얻어 총 12개 사업을 추진, 현재 7개 사업을 완료했다.구조고도화사업은 산단공, 인천시, 민간 등이 어울려 진행했다. 이들은 공동물류센터와 화물주차장, 주유소, 종합비즈니스센터, 보육시설, 아파트형 공장 등을 새로 지었다.이 중 산단공이 세운 공동물류센터는 2011년 운영 사업을 시작해 현재 30~32개사가 활용하고 있으며, 가동률이 95%에 이른다. 화물주차장은 남동국가산단 내 주차장 확보, 교통 불편 감소 등의 효과를 냈다.올해 6월과 9월 각각 문을 연 성강지식산업센터, 향기나눔이보듬이 어린이집도 남동국가산단 환경 변화를 이끄는 데 한몫했다.특히 소래·논현택지개발지구 내 1호 근린공원에 위치한 어린이집은 산업단지 내 워킹맘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로, 현재 65명의 아이들과 11명의 교사가 속해 있다.민간이 주도하는 'QWL(Quality of Working Life) 밸리' 조성 사업은 올 하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⑧ 산업단지 (上)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⑧ 산업단지 (上) 지면기사

    '인천 최고령' 부평국가산단 섬유·봉제업체가 주류 이뤄시간 지날수록 업종의 변화 주안산단 기계류 집적화 특징남동산단, 1980년대 LH 2단계로 공사… 입주경쟁도 치열인천에는 3개의 국가산업단지(국가산단)가 있다. 남동국가산단, 부평국가산단, 주안국가산단이 그것이다. 이 중 부평국가산단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산단이다.1960년대,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섬유, 봉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수출에 앞장섰고,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 '구로공단'이 탄생했다.수출 물꼬가 터지면서 구로공단 입주 희망자가 늘어갔고, 이는 금천구 가산동 일대 수출2~3단지, 부평국가산단(수출4단지), 주안국가산단(수출5~6단지) 조성으로 이어졌다.부평국가산단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수출5단지는 폐염전 지역을 매립해 만든 것이며, 수출6단지는 인천 비철금속공업단지로 땅 고르기 작업을 하던 중에 편입됐다.1960~70년대 조성된 부평국가산단과 주안국가산단은 '수출전진기지화'라는 목표에 걸맞게 우리나라 초기 수출 효자 품목인 섬유, 봉제 업체가 다수 자리했다.'똥물사건'으로 우리나라 노동사에 뚜렷한 기록을 남긴 동일방직도 부평국가산단 내 위치해 있었다.부평국가산단, 주안국가산단 등과 같이 40~50년 전 조성된 산단은 그야말로 같은 업종을 밀집시켜 놓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 만들어진 산단은 공장 부지 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땅이 없었다.2000년대 들어 국가산단에 대한 구조고도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근로자에 대한 처우, 근로 환경 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며 산단 내에도 근로자를 위한 복지공간과 편의시설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이외에도 부평국가산단과 주안국가산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업종 변화를 겪었다.산업 환경이 바뀌며 국가산단별 특성과 주요 업종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데, 특히 주안국가산단은 대우통신, 새한미디어, 로얄동도 등 당시 대기업으로 불릴 만했던 기업들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⑦경인선(경인전철)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 ⑦경인선(경인전철) 지면기사

    부설권 딴 미국서 중도포기 일본이 건설객차 6량 하루 2차례 왕복·90분 소요개통 초기 주안 염전·부평 미곡 수송서울로 경제력 흡수되는 '빨대효과'"철도는 문화적 충격" 작가 감수성 자극1960년대 복선화·1970년대 전철화 발전일본은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과 노량진을 오가는 철도를 건설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다.일본은 '식민지 수탈'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등 경제적·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조선에 철도를 놓았다. 철도가 수탈과 전쟁의 수단이었던 셈이다.반면 철도가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이와 같이 경인선에 대한 평가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경인선은 인천 도시공간 구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역사 주변에 주거지와 상업지역이 형성되는 등 경인선은 인천의 도시공간 구조가 단핵(單核)에서 다핵(多核)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경인선으로 인해 서울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서울이 인천의 경제력을 흡수하는 이른바 '빨대 효과'(Straw Effect)가 나타나기도 했다.빨대 효과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의 부작용 중 하나다. 하지만 경인선이 있었기에 인천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천의 도시공간·산업 구조가 변하다경인선은 인천의 도시공간 구조를 변화시켰다.인천항 개항 이전 제물포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개항 이후 일본과 청나라 등 각국의 조계지가 생겼고, 개항장 도시 개발에 근대식 도시계획이 적용됐다.경인선은 공유수면 매립과 함께 시가지를 확산시키는 촉진제가 됐다. 경인선 역사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됐다.이에 따라 인천의 시가지는 경인선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확산되는 형태가 됐다. 반면 역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도시화가 더디게 진행된다.1980~90년대 인천시 청사가 중구에서 남동구로 이전하고, 택지 개발, 산업단지 조성, 송도 공유수면 매립 등이 이뤄지면서 인천 남북 축에 시가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변화에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도 영향을 미쳤다.경인선 개통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下)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下) 지면기사

    1883년 인천해관 창설 '비자주적 관세행정'우편제도 1884년 분국 개국… 전화와 함께 일본과 이원화조선 첫 기독교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목사 1885년 부활절에 도착인천내리교회 새로운 사상 전파제물포로 들어온 서양의 물품들이 조선인에게 근대를 경험하게 했다면, 새로운 제도나 인프라는 제물포를 근대도시로 만드는 토대가 됐다. 새로운 종교는 전통적인 사고를 바꾸기도 했다.하지만 이 같은 제도나 인프라의 유입은 외국세력이 당시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려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근대적인 행정체계, 통신수단 등은 외국세력이 조선의 이권을 편리하게 가져가는 일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애썼지만, 근대 문물로 무장한 외국세력의 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국제적 기준에 맞춰 변화하는 행정개항과 함께 일본, 청나라, 서구 국가 등을 상대로 한 '근대적 의미'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각국을 오가는 수출입 화물에 대해 국제적 기준에 맞는 '관세업무'가 필요했으며, 이를 뒷받침해 주는 '통상사무'를 볼 기관이 필요했다.조선은 부산항 개항 이후 7년 만인 1883년에 관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무관세로 통관 절차를 밟았다.제물포에 인천해관(仁川海關)이 창설된 건 1883년으로, 부산항 개항(1876년)보다 7년이 늦다.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 직후 일본과 7년간 수출입물품에 대해 관세를 받지 않겠다는 '무관세 각서'를 교환했다.같은 해 부산이 가장 먼저 개항을 하고 두모진해관(豆毛鎭海關)을 설치했지만, 일본과의 무관세 각서 탓에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관세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의 중요한 수입이 되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 관계에 있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 정부는 이 같은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인천해관은 자주적인 관세 행정을 펼치지 못했다.조선은 해관 설치를 위해 청나라 해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묄렌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上)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上) 지면기사

    '유행의 최첨단도시' 제물포에 1886년 첫 성냥공장서구물질 서민층까지 확산 '근대화 천지개벽''세창바늘' 짝퉁까지 판치고 만병통치약인 '금계랍'도 선풍적 인기조선 만물상인 육의전 상권 붕괴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들여온 물품, 즉 '양품(洋品)'은 조선사람들이 서양의 근대적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양품이 조선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준 것은 물론 사고의 변화도 가져왔다.서양상인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개항장의 황금기를 열었다. 하지만 서양상인의 등장으로 500여년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장사해 온 조선상인들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제물포로 들어온 양품서양상인들이 화륜선과 철선에 가득 싣고 온 진기한 양품들은 개항장 제물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양품들은 하루 이틀 밤을 꼬박 새며 우마차로 경성에 당도하기 전, 제물포에서 먼저 소비됐다. 당시 제물포는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였다.제물포를 통해 들어온 획기적이고 다양한 양품들은 조선사람들의 일상에 천지개벽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기록에 따르면 1886년 제물포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생겼다. 부싯돌로 간신히 불씨를 만들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 아녀자들의 중요한 일인 시절에 나타난 성냥, 빨래를 손쉽게 해주는 양잿물 등은 여성을 전통적인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값비싼 한약을 이용할 수 없어 토속신앙에 의존하며 치료를 바랐던 각종 질환은 간단한 양약(洋藥)으로 금세 나았다.아주까리, 동백, 들깨 등의 기름을 짜내 등잔불을 켜 놓았던 조선에, 한 홉(약 0.18ℓ)이면 열흘까지도 불을 밝힐 수 있는 석유가 등장했다.양품들은 조선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편리함을 가져다줬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따른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사람들의 사고를 변화시켰다는 것이 학계 설명이다.인천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전문위원은 "양복(洋服)이 들어오면서 당시 신분을 나타내던 옷자락이 짧아졌다"며 "양담배로 인해 역시 신분의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下)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下) 지면기사

    이름아닌 '번호'가 신분증 역할 농장관리자 '루나' 채찍들고 감시독립운동·교육에 헌신적 모습… 1906년 '한인기숙학교' 첫 설립1907년 자치단체 '한인합성협회' 결성·2세대 '정체성 유지' 힘써지상낙원을 꿈꾸며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1세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사탕수수 농장에서 농장주 감시를 받으며 적은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지만 자식들을 가르치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돕는 데는 물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250만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이 됐다. 하와이 동포들은 이들을 '뿌리'라고 표현한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삶1903년 8월 고종이 각처에 붙인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공고에는 '기후 온화', '영어 교육', '학비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하와이 이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도 신도들에게 하와이를 '낙원'이라고 소개했다.현실은 달랐다. 하와이로 건너간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다. 당시 노동자들은 등록번호가 있는 '방고(Bangos·번호의 일본말)'라는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하루 10시간의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으며, 이민 초기 월급은 17달러 수준이었다.1905년 하와이 65개 농장에서 약 5천명의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탕수수 농장 관리자 '루나'들은 손에 가죽 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선임위원은 "미국 이민법에 계약이민은 금지돼 있었지만, 사실 이들(하와이 이민자)은 이민사업자가 세운 은행에서 뱃삯과 초기 정착비를 빌린 뒤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으로 갚아 나가는 계약이민자였다"며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으로 하와이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해 줬다"고 설명했다.올 4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조사 분석한 '하와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사진만 믿고 온 어린신부들 사기결혼 당하기도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사진만 믿고 온 어린신부들 사기결혼 당하기도 지면기사

    1905년 고종이 하와이 이민을 공식 금지하면서 '하와이 노총각' 문제가 심각해졌다. 1910년 인구조사를 보면 미혼 남성은 4천여명, 여성은 600여명이었다고 한다.노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비책이 바로 '사진결혼'이다. 하와이 노총각들이 자신의 사진과 뱃삯을 한국으로 보내면 중매쟁이들이 신부를 물색해 하와이로 보내는 것이다.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 700명의 여성이 신랑이 될 사람의 사진 한 장만 들고 하와이에 들어갔다.하지만, 나이가 많은 신랑이 젊었을 적 사진을 보냈기 때문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신부들이 40~50대 신랑을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중매쟁이들이 사탕수수 노동자를 '은행가', '실업가', '대학생', '애국지사' 등으로 속이는 경우가 많아 한국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진결혼'은 이혼율도 높았다고 한다.여성들이 하와이로 시집오면서 초기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됐고, 이들도 하와이 한인사회 개척에 앞장섰다. 이들 여성은 교회와 부인구제회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김민재기자

  •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上)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上) 지면기사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근대 문물 유입의 시발점이 됐지만, 한편으로 인천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했다.1902년 12월 22일 121명의 한국인이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간 것이 우리나라 첫 번째 공식 이민 기록이다.이후 1905년까지 7천여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이들은 낯선 땅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 공동체를 만들어 자녀들을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상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과정과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국내 최초 해외 선교사 홍승하를 소개한다.웨인 패터슨의 책 '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비롯, 국내외 하와이 이민 관련 서적과 논문을 참고했다. 하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1세대와 후손들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가자, 아메리카로!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배 '켄카이마루'가 한국인 121명을 태우고 나가사키로 떠났다.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121명 가운데 19명은 일본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은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이 중 16명은 병에 걸려 귀국길에 올랐고,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이들은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o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정도 일했는데, 당시 성인 남자 월급은 17달러였다고 한다.1900년대 초 하와이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과 우리나라의 열악한 정세가 맞물려 이뤄졌다. 여기에 미국 영사관 알렌(Allen) 공사가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업이 일찍이 이뤄져 1850년대부터 중국인을 비롯 일본인, 포르투갈인, 독일인 등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1897년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하는 조약이 체결됐고, 당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