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인물 100人·19] 박세림 제자 '청람' 전도진 지면기사
"인천은 스스로 대한 민국 서예계를 이근 거목을 버린 것입니다. 역사가 판단할 것이며 후세가 비웃을 일입니다." 청람 전도진(58·서예·전각가·사진)은 "스승의 서예 삶이 고향 인천으로부터 버림받고 대전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이 터져 몇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절이 지나고 사람이 잊혀진다지만 역사를 버려서는 안된다"면서 "선생님의 일생은 인천의 역사인 동시에 인천 서예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청람이 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동정 박세림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청람은 고등학교 다닐 무렵 동정과 처음 만났다. "중구 관동,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동정서숙이 있었어요. 무작정 붓글씨를 배우겠다고 이곳을 찾았고 당시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습니다." 그는 또 "선생님은 185cm의 장신에 몸무게도 90kg이 넘는 거구였다"면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상 예를 중시하고 노력하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덧붙였다. 청람은 늘 동정과 함께 했다. 여름철 산사를 찾을 때는 묵동(墨童)으로 함께했고 동정이 마지막 예술혼을 펼치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을 때도 함깨 했다. 그러기에 스승의 자취는 청람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직도 내 예술세계의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람은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스승의 서계가 대전으로 옮겨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유품이 지역에서 버림받은 채 종적을 감췄다"면서 "문화·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지역이라면 오히려 대접받는 곳에 스승의 자취를 남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인천인물 100人·23]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지면기사
■ 장증손녀 김민자씨 내외 "할아버지 업적·행적 자료 6·25전쟁때 소실… 아쉬움" "남긴 글이 없고 집에 보관중이던 자료도 6·25전쟁으로 소실돼 할아버지의 업적과 행적을 탐구할 수 없다는게 후손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의 장증손녀로 현재 인천내리교회 집사이기도 한 김민자(46)씨와 남편 김제준(47) 권사는 요즘 증조 할아버지의 자료 발굴에 열정을 쏟고 있다. 김기범 목사는 아내 박루시 여사와 사이에 7남매를 뒀다. 그러나 2명의 딸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혼란한 시기 월북했고 나머지 자손들 역시 생업에 몰두하다 보니 선친의 업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김씨 부부는 "증조할아버지께선 당시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미국에 유학보낼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들은 이어 "교회사와 한국기독교 연구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집안에 보관중이던 자료는 인천내리교회에 모두 기증했다"며 "선친에 관한 후손들의 고증과 기억을 사료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 김기범의 막내딸 김애마씨 美유학 이대 총장서리 역임… 숨겨진 근·현대교육의 '거두' 김기범의 2남5녀 중 막내딸인 김애마(1903~1996년·사진)는 김활란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한국 근·현대 교육의 거두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김애마는 선친이 설립한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이화학당(현 이화여대 전신)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화보육학교 교원으로 4년간 근무하다 193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에반스턴 내셔널교육대학에서 아동교육을 전공한 뒤 귀국해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39년 보육학교 학감으로 이화학원의 행정을 총괄하던 그녀는 1945년 8·15 광복 후 종합여자대학으로
-
[인천인물 100人·21] 이경성 수양아들 김달진 소장 지면기사
"여성잡지에 실린 미술자료를 모아 관장님께 보여드렸죠. 저를 보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더라구요." 석남 이경성이 수양아들이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는 김달진(50·김달진미술연구소장)씨. 그는 1977년 석남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석남은 홍익대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었고, 김 소장은 스물 한살의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우표, 깡통 등 닥치는대로 모으는 수집광이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주부생활', '여원'과 같은 잡지에 실린 명화 한 장씩을 뜯어서 모아 미술자료집을 만들었어요."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복궁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보고 미술자료 수집을 직업으로 삼시로 결힘했다고 했다.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 각급 박물관 관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는데 관장님만이 '홍대 박물관으로 한 번 오라'고 연락해주셨죠. 뛸듯이 기뻤어요." 이 인연으로 석남이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81)에 오르자 그는 미술관 자료실 임시직으로 특채됐다. 지금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더 끈끈한 부자지간이 됐다. 김 소장은 요즘도 일요일 마다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석남이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노인간호센터를 찾는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고, 부인도 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김소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죄송할 따름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관장님이 사람을 더 그리워하시는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
[인천인물 100人·22] 인천박문초교장 강경수 수녀 지면기사
인천박문초등학교 복도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교장선생님들의 사진은 개교 105주년을 맞은 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 학교의 설립자 겸 제1대 학교장인 전학준 신부는 이제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학교에 남아있지만 그의 교육이념은 학교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이 학교 교장인 강경수 수녀는 "전학준 신부님은 인천 초등교육의 선구자"였다며 "전 신부님의 투철한 교육적 사명감을 이어받기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교장은 이어 "특기를 계발하고 신장시키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종교교육을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은 박문교육을 차별화 시키며 박문초등학교를 인천초등교육의 선도자로 자리매김해주고 있다"며 이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가톨릭 정신을 토대로 학교를 설립한 분들의 교육이념이 학교 곳곳에 스며있기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강 교장은 이와 함께 "학교 설립 초기에는 박문학교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며 전 신부가 1906년 뮈뗄(제8대 조선교구장)주교에 보낸 편지를 소개했다. '학교에서 나온 돈은 매달 필요한 금액의 3분의 1만을 겨우 충당하고 있고 중요한 사업을 하려면 월 50원이 필요하다'며 지원을 요구하는 전 신부의 편지에서는 박문학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전 신부의 모습이 읽혀졌다. 이 학교는 현재 개교 100년의 역사를 담은 '박문 100년사' 발간을 추진중이다. 이 책은 인천의 은인이었던 전 신부를 새롭게 조명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인천인물 100人·25] 신순성 선장 손자 용석씨 지면기사
"제가 4살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아버지와 주변사람들로부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신용석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이 되면서 광제호 군함기를 자신의 침실에 숨겨둔채 일제 36년간을 고히 간직했었다"며 "아버지께서는 이 태그기를 1945년 해방되던 해 한국 기선취항식에서 일장기와 바꿔달라고 요구했었다"고 밝혔다. 신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한일합방 뒤에도 광제호를 잊지 못해 1917년 서울에서 지내던 가족들을 이끌고 광제호의 모항인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며 아버지와 자신이 인천사랑에 남다른 배경을 설명했다."의사로 명성을 얻었던 아버지께서 나중에는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향토사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이와함께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는 등 많은 일들을 이루셨다"고 밝혔다. 신태범 박사의 5남중 장남인 신씨는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강요없이 자유스럽게 자식들의 뜻에 맡기는 교육을 시켰다"며 할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자율적인 교육을 시켰던 가풍이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토박이답게 신씨는 아버지에 이어 현재 지인들과 함께 인천의 향토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등 인천사랑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신씨는 현재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사회부장, 논설위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
[인천인물 100人·35] 사숙(私塾)이란 지면기사
다소 생소한 의미의 '사숙(私塾)'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교육기관이다. 옛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뤄졌던 우리의 글방은 조선말까지 존속했었다. 이 글방은 경술국치 후에도 10여년간 지속됐으나 신식 과학 문명에 각성하고 중국의 위세가 축소되면서 자연도태됐다. 이 글방을 '서당' 또는 '사숙'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사숙에서 달마다 일정한 수업료를 내고 천자문에서 동몽선습 계몽편, 자치통감, 소삭, 사서오경을 배웠다. 따라서 사숙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나 사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재 서울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의 시초는 사립법률대학격인 '양정의숙', 휘문도 '휘문의숙'으로 출발했다. 사숙은 학과나 학년별로 나누지 않고 선생 한 사람이 두루 가르쳤다. 따라서 얼마되지 않는 월사금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골고루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 선생의 능력은 탁월한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누추한 방에서 1년 중 3대 명절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글소리를 내게 하는 혹독한 교육 훈련으로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까지 낳았다.
-
[인천인물 100人·끝]에필로그 지면기사
'인천 인물 100인'을 찾아 나선 지 3년이 넘어서야 그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2년을 예상했는데, 1년이나 더 끈 셈이다.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고 근·현대 시기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100명의 인물을 선정했다. 그러나 100명의 '인천 인물'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강화를 낀 인천은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유물과 역사적 인물을 배출했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특히 근·현대 시기의 인물사 연구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공간이나 6·25 전쟁 직후 좌·우 갈등이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탓에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거나 '기념'하려 하지 않았던 풍토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이름 석자나 짧은 인물 설명만을 갖고 무작정 취재에 나서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시리즈 연재 기간이 길어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매주 한 차례씩 싣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다보니 독자들의 불평도 있었다.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인천인물 기사를 모으는데, 기사 게재가 들쭉날쭉해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 괜한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독자에겐 빠뜨렸다는 지난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학생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것이 신문에 실렸는데, 어떤 게 맞냐는 식이었다. 연구자마다 시각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학생에겐 취재원이었던 연구자를 연결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나가는 동안 지역의 반응도 뜨거웠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주는 점에 고맙게 여긴다는 격려와 함께 누구 누구는 인천을 대표할 만한 사람인데 왜 아직 보도하지
-
[인천인물 100人·101]동양제철화학 창업자 송암 이회림 지면기사
"사업가는 모름지기 덕장(德將)이 되어야 한다. 지략이 좀 모자라고 용맹성이 뒤떨어지더라도 직원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키워 주는 아량이 없으면 기업은 흥하지 못하는 법이다. '기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조종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창의성 있는 인재가 없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화학 이회림 명예회장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中) 기업인이 존경받기 힘든 세상이다. 기업이 경제의 원동력이자 고용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비자금과 분식회계, 편법 증여 등 여전히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은 기업의 순기능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월18일 한 원로기업인이 타계했을 때 사정은 달랐다. 후배 경영인들은 물론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들까지 고인을 기리며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고인은 동양제철화학의 창업자인 송암(松巖) 이회림 명예회장. 향년 90세였다. 당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한 신문에 기고한 추도사를 통해 "비록 고인은 멀리 떠났지만 선생의 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케 하고 나아가 장래에 분단 철조망이 끊어지는 날 통일과 번영의 터전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서 어떤 이는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를 그의 호를 따 '송암대로'(松巖大路)로 명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그를 각인시킨걸까. 그리고 개성 출신인 그가 인천과 맺은 인연은…. #마지막 개성상인 송암은 1917년 개성시 만월동에서 태어났다. 13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한 그는 14세에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용과 근면성실,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1937년 건복상회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업가로서의 여정에 뛰어들었다. 송암의
-
[인천인물 100人·100]영문학자 오화섭 지면기사
인천 남동면 만수리에서 태어난 영문학자 오화섭(吳華燮·1916~79)은 미국 현대극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해 알린 선구자다. 그가 번역한 미국 번역작품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비롯해 손튼 와일더의 '우리읍내',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리동물원'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지금까지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당시 연극인, 영문학자들은 오화섭의 번역을 두고 '번역을 창작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조선일보 1973년 10월 25일자 5면)를 했다. 1960년대 오화섭과 함께 연극평론계의 '쌍두마차'로 불린 여석기(84)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은 지난 2005년 유영국미술문화재단과 실시한 인터뷰에서 오 교수를 '번역의 1인자'라고 표현했다. "62년에 드라마센터의 2회 공연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라고 있어. 오닐의 맨 마지막 작품. 그건 참 좋은 작품입니다. 그 오화섭씨가 번역을 했는데, 오 선생이 미국의 현대연극을 번역하는 제1인자고, 참 부드럽게 번역을 잘해요." 한상철 한림대학교 교수는 1989년 열린 '오화섭교수 10주기 추모 연세극예술연구회 공연'에 앞서 발표한 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 서민의 일상적인 대화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다…(중략)…무대에서 배우가 그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번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중략)…짤막한 문장 길이, 적절한 어휘의 구사, 다양하고 자연스런 어미의 활용, 우리말의 리듬과 억양을 그대로 살려가는 게 오화섭 교수 번역희곡의 특징이요, 장점이다." 오화섭은 해방 이후부터 극단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을 하며 번역 대본을 무대에 올리는 데 힘썼다. 일본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4살 연상의 첫 번째 부인 박노경(朴魯慶)은 극단 '여인소극장'을 창단(1948년)한 한국 최초의 여류 연출가다. 당시 오화섭은 '吳說'이란
-
윤일민 前인천연예협회장이 본 박경원 지면기사
"국내에서 두 개의 노래비를 갖고 있는 가수는 박경원 선배가 유일할 겁니다." 윤일민(71·사진) 전 인천연예협회 회장은 "한국전쟁 후 인천의 시대와 당시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별의 인천항'과 아름다운 포구에서 사는 어민들의 희망과 삶을 노래한 '만리포 사랑'을 부른 박경원 선배는 두 곡을 통해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이후 인천시와 충남 태안군은 박 선배의 노래를 기리기 위해 각각 노래비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윤 전 회장은 박경원의 노래가 당대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쉬운 멜로디와 가사를 꼽았다. "어렵지 않은 멜로디는 연주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쉬운 가사는 일반인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죠. 대중적으로 쉽게 연주되고 부를 수 있는 노래였어요. 그만큼 노래의 메시지도 쉽게 전해졌습니다." 그는 또 "연예인, 특히 가수들이 그렇듯 박 선배도 인생 말미 힘든 삶을 살았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쉼 없었다"면서 "노래에 대한 애정은 후배 연예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인천인물 100人·99]가수 박경원 지면기사
인천 월미도 문화의거리 한 편에 서 있는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10월 9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50여 년 전 탄생한 이 노래를 이렇게 술회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구름, 푸른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이별의 인천항'(세고천 작사·전오승 작곡)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인천 출신의 가수 박경원(1931.4.3~2007.5.31)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다. 당대 유행했던 곡들을 보면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각산 소식',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피란민들이 잃어버린 가족과 등졌던 고향을 찾는 분위기를 그린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이별의 인천항'도 이들 노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천의 사랑을 그린, 인천인의 노래 '이별의 인천항'이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이 노래는 23세의 가수 박경원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박경원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부유한 집이었단다.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박경원은 넉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시대 통념상 선친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박경원의 막내 동생 광원(64)씨는 "당시 예능인들을 딴따라라고 푸대접할 때였으니, 고지식하셨던 아버지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고 했다. "어머니
-
[인천인물 100人·98] 인천언론史 지면기사
1960년 대 이래 인천 언론은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과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말살 정책에 인천의 신문사들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기 일쑤였다. 1960년 대 인천에는 모두 3개 일간 신문사가 있었다. 1946년 발간된 인천 최초의 일간신문인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가 제호를 바꿈)을 비롯해 인천신문(1960년 창간, 현 경인일보), 경인일보(창간 연도 알려진 바 없음, 현 경인일보와 다른 신문) 등이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됐다. 윤전기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시설기준공표를 발표했다. 현 경인일보와 관련 없는 이름의 '경인일보'란 신문사는 이 때 문을 닫게 됐단다. 1966년엔 경기일보란 이름의 신문이 생긴다. 인천신문에서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역임한 김응태씨가 경기일보로 자리를 옮겨 폐간 때까지 편집인을 맡는다. 1969년 인천신문은 존폐 위기에 놓인다. 허합 사장이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허합씨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인천신문은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다. 인천신문은 수원에서 제호를 경기연합신문, 연합신문으로 잇따라 바꾼다. 당시 정권은 1973년 다시 언론말살 정책을 편다. 이름하여 '1도 1사'다. 언론인들은 1973년 8월31일을 '언론 사망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 날 언론통폐합이 강제로 이뤄진다. 김응태씨 등 많은 언론인들이 이 때 붓을 꺾었다. 송수안씨가 경영하던 경기매일신문은 창간 27년 만에, 경기일보는 창간 7년 만에 모두 문을 닫게 된다. 연합신문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등 3개 신문사가 통합된 것이다. 제호는 경기신문이었다. 그러다 1982년 지금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꾼다. 오광철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여러 과정을 거쳤으나 60년 창간한 인천신문은 경인지역 언론의 뿌리이며, 허합은 지금의 경인일보를 있게 한 장
-
[인천인물 100人·98]언론인 허합 지면기사
허합은 인천에서 경인지역 언론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신문(현 경인일보)을 창간했다. 그런데도 현재 인천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지역 원로 언론인들만이 기억할 뿐이다. 지난 2003년 그가 숨졌을 때도 그의 빈소는 인천이 아닌 막내 아들(허종)이 담임목사로 있던 대전 빈들교회에 마련됐다. 지역 신문사들은 대부분 영정사진 한 장 구하지 못한 채 그의 부고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 때, 지역 사회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당시 언론인들이 그를 '죄인' 취급했던 것이다. 권력과의 대립에 의한 '표적 수사' 결과물이란 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결국 허합은 억울함을 벗고 무혐의로 풀려난다. 그뒤 허합은 지역 언론은 물론 인천과도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허합은 1917년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출신 학교에 대해서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천 화양초등학교 졸업 후 경기도에 올라와 중·고교를 마쳤다는 말도 있고, 초·중·고교를 모두 서천에서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친척인 허숙(73·전 인천신문 기자)씨는 허합이 인천에 와서 한염해운에 입사한 뒤 1957년 쯤 퇴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이후 허합은 1959년 '주간인천'을 인수했다. 주간인천에는 '향토 언론계의 거목'이라 일컫는 김응태(당시 편집인)가 있었다. 허합은 김응태를 주간인천의 편집국장에 임명한다. 허합은 중구 사동 창고건물에 편집국과 업무국을 만들고, 1960년 8월15일 인천신문 첫 호(현 경인일보 지령 1호)를 발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인천신문 기자를 지낸 오광철(73)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경인일보가 언론 통폐합 날짜인 9월1일을 창간 기념일로 잡고 있는데,
-
아들 제중씨가 말하는 '아버지 유봉진' 지면기사
독립·애국지사의 아들 제중(62)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3남 1녀의 자녀를 올곧게 키운 뒤 경기도 남양주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난 때문에 어떤 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올 때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다. 3·1운동을 할 때는 아버님이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집은 제법 살았던 것 같은데 독립운동하면서 다 탕진한 탓인지 사는 게 매우 힘들었다"고 소회했다. 부친 작고 후 제중씨는 17세까지 어머니 행상 덕에 살았고, 1963년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워 자녀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주변에서 '아버지가 고위층과 많이 친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하도 어렵고 해서 (서울)효자동 모 국회의원 집을 찾아갔는데 반응이 냉담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절대 찾아가지 않았고 나 혼자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힘겨웠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유봉진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아들 제중씨 때문이었다. 자식을 늦게 본 탓에 자식을 제대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제중씨는 "아버지가 저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강화 합일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서울로 전학했다. 이화여대 입구로 이사를 했는데 전세방을 얻어 살았다. 제중씨는 전세금도 아버지가 남의 돈을 빌려 마련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유봉진은 서울에 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떴다. 어린 나이였지만 제중씨 기억엔 아버지가 남을 위해 산 봉사자로 남아 있다. 서울에 올라와 '제중한의원'을 운영하면서도 "돈없는 사람은 무조건 무료로 치료를 해줬다"고 했다. 특히 왕진을 많이 했는데 아픈 사람이 의원에 오는 것을 바라기보다 직접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도 했다. "강화에 있을
-
[인천인물 100人·97]애국지사 유봉진 지면기사
'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이끈 사건은 1919년 3·1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만세운동에 가담, 일본경찰에 체포돼 1년형을 언도받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징역형을 마치고 고향 강화에 돌아온 조봉암은 나라가 무엇이고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조봉암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실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이러한 자전적 고백과 함께 중요한 인물 한 명을 길게 소개한다. 강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진(劉鳳鎭). 조봉암의 사상형성기에 유봉진은 조봉암이 자신을 '애기패'라 규정할 정도로 감히 넘보기 힘든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걸어온 길'에 유봉진은 이렇게 소개됐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달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런데 유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맞는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선생은 마리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었어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했다. 유선생은 오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일 년 살았다.' 글에서 보듯 개화의 상징인 강화에서, 전국 3·1운동사에서 유봉진이 남긴 발자취는 대단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 재판기록 외에 더 많은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인 아들 제중(濟衆·1945년생)씨를 만났지만 그 역시 해방되던 해 태어나 3·1운동 기간에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한 기억을 쏟아놓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작성했다는 이력서를 소장하고 있어 거사를 치르게 된 동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력서는 1945년 12월 2
-
[인천인물 100人·96]前 인천상의 회장 채호 지면기사
1997년 11월21일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다. 'IMF 사태'의 시작이었다. 기업은 망했고 가장(家長)은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자살자가 속출했다. 대혼돈이었다. 온 나라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IMF사태는 1997년 중반 대기업의 연쇄 부도에서 촉발됐다. 한보그룹이 망했고 기아, 진로, 대농, 한라, 대우 등의 주인이 바뀌었다. 대기업 부도에 따라 은행들은 거액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다. 급기야 팽팽히 당겨진 금융발 뇌관은 터졌고 지역 금융계에 핵폭풍으로 몰아쳤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인천·경기의 유일한 지역은행이었던 경기은행이 '부실은행'의 명단에 올랐다. 경기은행은 이후 4개월여동안 중앙정부에 대한 탄원과 진정 등 인천지역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화, 동남, 대동, 충청은행 등과 함께 그해 6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경기은행 퇴출을 아쉬워했다. 그뒤 10여년이 지났다. 경기은행은 이제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이 경기은행을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채호(蔡浩·1909~1970) 전 인천상의 회장이다. 채호 전 회장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인천상의 회장(제5·6대)·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부평구 효성동 일대에 인천수출산업공단이 조성됐고 남구 주안 폐염전 부지에 제2단지가 들어섰다. 서울~인천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고 국철은 복선화되면서 운행 횟수를 대폭 늘릴 수 있었다. 인천항이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전면 도크화 사업이 추진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대기업들의 서울본사를 인천으로 유치하기 위한 운동을 활발히 벌여 인천제철(현 INI스틸)과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인천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율도화력발전소와 부평디젤발전소, 경인에너지 등은 지역의 수많은 공장에 풍부한 전력을 공급하며 힘을 보탰다. 인천은 이 기간 195
-
[인천인물 100人·95]배우 서일성 지면기사
"서일성, 그의 연기는 관록과 함께 노련하다. 열이 있으며 정이 흐른다. 토월회로부터 오늘에 성장하였다. 힘과 열을 가진 젊은 배우이며 미남자이다." 1939년 창립한 극단 '아랑(阿娘)' 팸플릿은 연기부 소속 배우 서일성(徐一星·1906?~1950?)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천 주안 출신으로 알려진 배우 서일성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황철(?~1961)에 비견할 만한 이로 평가받았다. 원로 연극인 장민호(82) 선생은 "서일성이 활동하던 당시 황철에 버금가는 배우였다는 평을 자주 들었어요. 워낙 중량감있는 배우였죠"라고 말했다. 연극인 고설봉은 생전에 서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준좌'의 중심 스타가 황철이었다면 서일성은 '호화선'의 중심 스타였어. 뚱뚱하고 커다란 몸집이었지만 몸이 유연했고, 발성의 일인자였지. 별명이 '만능 모범꾼'이었어. 무대에 오르기 15분전 분장실에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약 5분간 얼굴을 뜯어보고 명상을 하다가, 5분만에 분장을 마치고 등장했어. 그런데 그게 30분 분장한 사람보다 훨씬 나았지." 1937년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해 연극을 시작한 고설봉은 이후 '청춘좌', '아랑' 등의 극단에서 서일성과 함께 생활했다. 향토사 연구자 김양수(74)씨는 자신이 서울 예총 사무총장하던 시절 고설봉으로부터 서일성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기억했다. 고설봉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선생 집이 인천이면 우리 서일성 선생님 잘 아시겠네요. 제가 그분 밑에서 연기를 배웠어요. 참, 어른 중의 어른이셨죠. 동양극장 일대를 연극의 거리로 만들고 이끈 분이 바로 서일성 선생님이셨어요. 비극장면을 연기할 때 서일성 선생은 무대 옆 밑에 보관해둔 숯덩어리를 이용해 즉석에서 분장을 했어요. 비탄의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 고개를
-
[인천인물 100人·95]개항기 인천&연극 지면기사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인천 관객들이 공연을 보는 안목은 상당했다. 전국을 무대로 악극을 공연하면서 '흥행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던 김석민(金石民) 단장(전 한국예술문화진흥회장)은 인천 출신인 김양수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새로 연습한 악극을 무대에 올리기 전 인천 애관을 찾았어요. 악극을 본 인천 관객들 반응이 좋으면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래서 애관을 찾은 관객들이 차가운 반응을 보일 때면, 단원들은 근처에 있는 여관에 방을 잡고 악극을 새로 고치고 연습하기를 반복했어요. 그 여관이 완전 우리 집이었지요." 인천 중구 사동·경동 일대는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연극의 거리'였다. 인천시사(仁川市史)는 애관극장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189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인천좌(1897년), 가부키좌(1905년), 표관(1909년) 등이 공연장으로 활용됐다. 인천 출신 극작가 함세덕과 진우촌, 무대미술가 원우전, 연기자 정암, 서일성 등이 이 거리를 거쳤다. 이들은 하나같이 서울 무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였고, 연구자들은 이 시기 이들이 남긴 족적을 하나씩 재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인천 행적은 실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밝혀진 게 적어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
[인천인물 100人·94]제자 박송우씨가 본 황추선생 지면기사
"화가로서, 교사로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분이셨습니다." 1956~58년 인천송도고등학교에서 황추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 화가 박송우(66)씨. 박씨는 1957년 고2때 친구, 후배들을 모아 미술부를 창설했단다. 이 때 황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박씨는 "원래 기계체조를 하다가 선배들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며 "황 선생님에게 찾아가 미술부를 만들겠다고 하니깐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지원을 해줬다"고 회상했다. 황추 선생은 본인의 작품 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학생들의 교육에도 무진 애를 쓰셨단다. 박씨는 "그동안 한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석고 데생이 미대 입시 실기시험 과목인 것을 알고 당황했던 적이 있었는데 황 선생님이 직접 서울에 가서 비너스 상을 사가지고 오셨다"며 "그 때 석고 데생을 한번 해보고 시험을 봤는데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는 미술 재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던 터인데 황 선생의 도움이 컸다는 것이다. 그 뒤로 박씨도 인천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황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됐다고 한다. 그는 "황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면 저한테도 보여주시면서 의견을 물으시곤 했고 미국에 가서도 종종 연락을 해 미국으로 들어와 함께 지내자고 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황 선생님이 1993년께 한국에 와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 일일이 대화하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가셨었는데 1년뒤 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왠지 이전부터 (죽음을) 준비하셨던 것이 아닌가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제가 교사를 해보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개인 작품활동까지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는데 황 선생님은 항상 점잖게 여유있는 모습을 지니면서 그림에 매진했던 분으로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
[인천인물 100人·94]화가 황추 지면기사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인천, 게다가 먹고 살기에 바빴던 50~60년대.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천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치에 비해 지금은 이름조차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같이 활동했던 미술계 원로들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화가 황추(1924~1994). 누를 황(黃), 가을 추(秋). 황추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캔버스 위에 칠해진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풍경화를 집중적으로 그린 그의 그림 속에는 가을 분위기를 나타내는 노랗고 붉은 계통의 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다. 인천여성작가 연합회 고문인 김옥순(76·여)씨는 "황추 선생은 바다풍경이나 석양을 많이 그렸는데, 바다를 그릴 때도 해가 뜨거나 질 때에 붉게 물든 바다를 위주로 그렸다"며 "그러다보니 따뜻한 느낌이 나는 붉은 색조의 그림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미술협회 고문인 이철명(72)씨도 "황 선생이 마지막 전시회에서는 추상화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석양을 그려낸 풍경화가 대부분이었다"며 "노란색과 주황색 계통으로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려낸 투박한 스타일의 그림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을 생각해 일부러 붉은 색 위주의 화풍을 잡아나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름과 그림 모두 '황추'라는 단어로 드러낼 수 있을듯 싶다. 그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입선, 특선 등을 거머쥐면서 인천뿐만 아니라 중앙 화단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미술평론가 이경모씨는 "지금은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당시에는 국전이 작가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등용문이었고 황 선생은 여기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면서 국전 초대작가까지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