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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45]에필로그 지면기사
#상황 11636년 7월 경기도 풍덕(豊德·지금의 북한 개풍) 살던 안추원(安秋元)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13세 어린이였다. 병자호란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정은 강화도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겼다. 그러나 강화도는 함락됐고, 안추원은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선양으로 끌려간 뒤 한족 대장장이에게 팔렸다. 1644년에는 베이징까지 강제 이주해야 했다. 26년이 흐른 1662년 안추원은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혔다. 산해관에서 체포돼 얼굴에 죄명을 찍히는 자자형을 받았다. 그는 2년 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해 결국 성공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해 귀국한 안추원을 고향인 풍덕으로 보냈다. 하지만 풍덕에는 부모형제가 없었다. 숙식을 제공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제대로 된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 입국하자마자 다시 붙잡혔다. 조정은 청나라로부터 문책을 받을 것만 걱정할 뿐이었다. 안추원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차례나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건만, 조국은 그를 버린 것이다.#상황 2한국전쟁 정전협정을 체결하고도 6개월이나 더 지난 1954년 1월 20일 0시, 판문점의 인도군 관할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천 명의 반공포로가 일제히 석방됐다. 이들 중엔 박종은(朴鍾殷)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포로생활만 1천200여 일을 한 그다. 그의 기막힌 포로역정은 1950년으로 거슬러 간다.1950년 4월, 해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청년 박종은은 평양군관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북한군 징집을 피해 박종은은 단신으로 서해상을 통한 월남을 단행했다. 목숨을 걸고 내려온 38선 이남의 옹진군 동강지서에서 '위장 월남'으로 의심을 받고, 되돌아가야 했다. "월남하려면 가족과 함께 오라"는 지서장의 '협박' 때문이었다. 해주로 되돌아간 박종은은 함경북도 경성군 어량면 산골로 도망가, 토굴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추격대를 피하지는 못했다.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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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인천, '분쟁의 바다'가 되다 '그리고…'·44]전문가에게 듣다 지면기사
'분쟁의 바다' 인천, 더 나아가 '냉전의 마지막 무대'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가능한 것인가.경인일보는 2011년 연중기획 '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를 통해 전쟁의 상처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겨봤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인천 서해 5도 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 간 무력 충돌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게 있는지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국내외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은 각기 분쟁의 원인과 현 정부의 대북정책 등을 놓고 극명한 시각차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남북 간 교류 확대 필요성과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주변 강대국들의 역할에 대해선 비슷한 주장을 폈다. 또 인천이 남북 간 갈등 해결은 물론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구축해 나가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박태균 교수와 유호열 교수, 최진욱 소장, 도널드 커크 기자는 대면 인터뷰를 했다. 일본의 저명한 한국전쟁 전문가 와다 하루키 교수는 지난 11일 이메일 인터뷰를 실시했고, 일본어 번역은 함태영 인천문화재단 정책연구팀 과장이 맡아줬다.■인천 서해 5도 해상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화약고'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민감하다. 어떻게 보나.-박태균=NLL은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해상경계선에 대해 전쟁 당사자인 공산군과 유엔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결과다. 지금으로서는 남한과 북한은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조차도 NLL을 대체할 해상경계선을 새로 만들 의지가 없어 보인다. 북한은 그동안 분쟁을 일으켜 내적 통합을 추구하고 미국과 중국의 관심을 얻으려 했다.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도 그랬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1999, 2002년 서해교전(제1, 2차 연평해전)과 2006년 북한 핵 실험이 있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위기가 올 것이다. 북한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또 어떤가.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보다는 북한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만 취하고 있다. 남북 모두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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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인천, '분쟁의 바다'가 되다 '그리고…'·43]외신을 인터뷰하다 지면기사
2010년 11월 23일, 외신기자들의 눈과 귀가 연평도에 집중됐다.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소식을 접한 외신기자들은 긴급하게 취재에 돌입했다. 인천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평소 같으면 하루 1~2건에 불과하던 외신기사 수는 20~30건으로 급증했다.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당시 한반도에 있었던 외신기자들에게 "마지막 냉전 스토리를 취재하게 돼 '행운'이다. 부럽다"고 했다.인천이 왜 '세계의 전장'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CNN, NHK 등 해외 방송매체는 연평도 포격 소식으로 긴급 방송을 편성했고, 통신·신문 매체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머리기사로 다뤘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북한 포격에 대해 비난하며 남북한에 '즉각적인 자제'를 요구했다. 세계 각국 정상도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인구 1천750명에 7.29㎢ 크기의 연평도발 소식이 세계 언론의 톱뉴스가 된 것이다.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지 1년, 경인일보는 당시 현장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한 외신기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아직도 포격 현장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외신기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간 중 접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중국의 한 방송매체 한국 지국장을 맡고 있는 루 싱 하이(盧星海)는 일이 터지자, 본사에 보고함과 동시에 인천을 향해 달렸다. 처음 접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그는 "텔레비전에서 소식을 접한 뒤 기자의 감으로 일단 현장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충격일 뿐이었다. 1시간 동안 방송장비를 챙기고 취재팀을 구성한 뒤 바로 인천으로 출발했다. 가는 동안 라디오를 들으면서 새롭게 발견된 상황이 있는지 체크했다"고 했다.그는 아무 것도 단정하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남한이 선제공격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남한과 북한 모두의 입장이 맴돌았다. 연평도의 소식을 묻는 회사의 전화는 계속해 걸려왔다. 우선 급한 대로 전화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는 리포트를 했다. 그의 리포트는 곧장 머리기사로 긴급 타전됐다. 인천의 소식이 중국 관영매체에 소개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연평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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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인천, '분쟁의 바다'가 되다 '그리고…'·42]끊이지 않는 서해교전 지면기사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께, 인천 연평도 서쪽 22㎞ 지점 해상.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 1척(등산곶 684호)이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실탄이 장전된 K-2 소총을 들고 숨죽인 채 정조준 자세를 취했다. 북한 경비정은 소총 가늠자 구멍으로 인민군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흘넘버 684…." 각자 전투 배치된 위치에서 북한 경비정의 동태를 살피는 사이, 바로 옆 함교에서 故 윤영하 대위(당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정장, 소령 1계급 추서)와 이희완 중위(당시 부정장, 현재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그때였다. "콰과광!", "콰과광!"…. 북한 경비정에서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웅~" 하며 바람을 거세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빗발치듯 총탄이 쏟아졌다. 순식간이었다. 탄환 한 발이 왼손으로 쥐고 있던 총열 덮개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몸이 뒤로 나자빠졌고, 의식도 잃었다.월드컵 분위기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 북한군과의 교전 현장에 있었던 권기형(30)씨는 10여 년이 지났지만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지난 22일 오후 6시30분, 경북 구미시내의 한 커피숍. 검은 색 양복 차림의 권씨와 만났다. 문상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권씨는 교전 당시의 대화 내용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정장님, 살았나 확인해!" 함교 쪽을 향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눈앞은 온통 희뿌연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갑판 위로는 핏물이 흘렀다. 윤 대위와 이 중위는 쓰러져 있었다. 총탄이 뚫고 간 왼손에선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엄지와 검지 등 손가락은 뼈가 다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감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뿐이었다.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선체 곳곳에서 총탄 파편이 튀고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대로 있다간 몰살당할 것만 같았다. 함교 아래 갑판에 쓰러져 있는 윤 대위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맥박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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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인천, '분쟁의 바다'가 되다 '그리고…'·41]60년만의 전쟁 '연평도 포격' 지면기사
'쾅!', '쾅!', '쾅!' 고막이 찢기는 듯한 굉음과 함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포탄 파편이 튀고 불길이 치솟았다. 하늘은 온통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 '엎드려!' 누군가 진지를 향해 소리쳤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흔들리는 진동만 느껴질 뿐이었다.포격은 멈추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허벅지에 파편이 박힌 것을 알게 됐다. 충격이 컸던 것일까. 군복 바지가 피로 흥건해지도록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진지는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고, 파편에 맞은 후임병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고 있었다.전남 순천대학 2학년에 다니는 김용섭(22)씨는 연평도 해병부대 공병대원으로 있던 1년 전의 '악몽'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북한군의 연평도 기습 포격이 시작됐다. 평온하던 섬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북한이 남한 영토를 향해 직접 포격을 가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60년 만의 일이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4명(민간인: 고(故)김치백·배복철, 군인: 고(故)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연평도 포격 1년을 맞아 경인일보는 당시 포격 현장에 있었던 해병 장병들과 연쇄 인터뷰를 실시했다.북한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해병대 연평부대 예비역 병장인 김용섭씨는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파편이 허벅지에 박힌 것도 모를 만큼 멍한 상태였다"며 "훈련을 하던 도중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진지 안으로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고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김씨는 전역(12월 23일 제대)을 불과 한 달 남겨둔 상태였다. 그는 "북한이 본토를 공격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며 "겁도 났었고 다리에 통증도 심해졌지만, 후임병들이 더 크게 다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고 말했다.그는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진지 안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후임병들을 다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소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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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40]세계의 시각 지면기사
대한민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시각으로 나뉘어 평가되는 '한국전쟁'을 보는 세계의 시각은 어떨까. 러시아와 중국의 개방으로 많은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은 정리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일부 분야에서는 학자에 따른 미묘한 차이도 있고,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방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약간씩의 차이점이 있다. '스탈린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했느냐'는 부분에서는 극명한 시각차를 보이기도 한다.경인일보는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미국, 중국 등지의 대학 교수 3명과 지난 10월, 전화·이메일·대면 등의 방식으로 각각 인터뷰를 실시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캐스린 웨더스비=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일성은 소련에 의존했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소련의 승인없이) 북한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은 여러 가지 요인들의 결합으로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소련은 (패전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재무장에 나선)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소련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에) 가장 위협을 느꼈던 존재는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오는 압력을 막기 위해 한반도가 필요했고, 소련은 한반도를 가지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본다. 스탈린은 1950년 1월이 돼서야 전쟁을 승인했다. 전쟁을 승인하게 된 원인으로는 미국의 NSC68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승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미군의 철수가 일어났고, 일본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당시 분위기가 전쟁의 원인이 됐다. 그렇지만 소련은 북에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하지 않았다. 미군의 개입을 우려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세계 모든 국가가 세계2차대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세계 열강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까지 그냥 뒀다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사실을 경험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가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됐다.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했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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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9]끝나지 않은 논란 지면기사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 그리고 전쟁의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체결됐지만,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은 계속돼 왔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역은 한반도의 화약고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조차 NLL 영토선을 둘러싸고 한 치 양보없는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경인일보는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 전문가들에게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그 과정에서 A교수는 B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와 신문 지면에 함께 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인터뷰 요청을 일거에 거절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A교수가 거론한 B교수는 이날 경인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A교수는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펴고 있다"며 B교수를 비난했다. 한국전쟁과 분단 고착화,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한국전쟁이 빚은 우리 사회의 불신과 반목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전쟁의 기원부터 논란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이 무너졌다'. 소련제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이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은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학계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 증폭된 '내전'의 성격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에서 불거진 '국제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에 의한 북한의 일방적인 남침을 주장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을 일제시기 형성된 한반도 내 계급갈등이 해방 이후 폭발한 일종의 '내전'으로 본다. 그는 특히 해방 이후 좌우 이념적 대립의 상황에서 우익의 입지를 강화하는 편향적 정책을 쓴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과 남북 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국내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커밍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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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8]피해와 참상 지면기사
■ 무덤이 된 전선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국군이 손에 든 장비는 소총뿐이었다. 북한군의 포격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하루하루 부대원 수가 달라 보일 정도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전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밤에는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아군끼리 사격을 가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국군이 점령한 고지에는 북한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계곡에도 시체가 즐비했다. 참전용사들은 당시의 상황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표현한다. 사람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피가 바다를 이뤘다는 얘기다.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숨진 북한군의 모습은 마치 개가 불에 탄 형상이었다. 이런 광경을 본 군인들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군과 적군의 포격으로 항만과 철도 등의 도시기반시설이 파괴됐으며, 산은 벌거숭이가 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인천 월미도의 경우에도, 월미산의 높이가 낮아질 정도로 포격이 집중됐다고 한다.인천항은 물양장과 호안 350m, 갑문비 4매, 교량 3기, 상옥급 창고 1만8천262㎡, 공사용 선박 17척, 기중기 2대 등이 피해를 입었다.전쟁 중에는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병실이 부족해 부상자 대부분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걸을 수만 있으면 병실에서 나가야만 했다.아군이 생포한 포로는 짐이 됐다. 대부분 포로수용소로 보냈지만,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워 생포 즉시 죽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장병들은 인천 구치소 안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고 치를 떨었다는 증언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허영철(81·당시 해병대 삼등병조)씨는 "인천에서 북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며 "(북한군도)같은 민족이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너무나 비참하다"고 덧붙였다. 허씨는 서울 연희고지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는 "17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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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7]인물로 보는 전쟁 지면기사
1950년 6월 25일 새벽 2~3시. 북한 평양의 내각수상 김일성 사무실. 김일성을 비롯해 각료들과 공산당 중앙정치위원들이 모여 있었다.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남한 공격 명령을 찬성, 가결했다. 김일성은 "2시 전에 38도선 전 지역에서 남조선이 공세를 취했다는 보고가 있어, 반격을 명령했다"면서 그 반격 명령을 비준하는 내각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이 자리에 참석했었다는 전 북한 요인 강상호(姜尙昊)씨는 1990년, NHK가 한국전쟁 40주년 특별프로그램으로 제작한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밝혔다. 강씨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날까지도 전쟁이 언제 일어나는지 몰랐다고 했다. 강씨는 전쟁 직후 소련으로 망명했다. NHK 취재팀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러시아 현지로 가서 강씨를 인터뷰했다. NHK의 이 특별프로그램은 방영 이듬해인 1991년 '한국전쟁'이란 제목의 책(동아출판사)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3년 동안 좁디좁은 한반도에 세계 20개국이 뒤엉켜 200만명가량을 죽게 한 사상 최악 전쟁, 한국전쟁은 이렇게 '김일성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논리를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북한 주장은 설자리가 많지 않다. 러시아나 중국에서도 그렇다.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이고, 그 참화를 키운 사람은 또 누구인가. 한국전쟁의 상징도시 인천의 '인물'들은 그 시기 무엇을 했는가.■ 전쟁을 부른 사람들한국전쟁의 제1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김일성이 지휘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뒤에서 받쳤다.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까지도 중국보다는 소련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1950년 4월과 5월에 소련과 중국을 각각 방문해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자국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북한에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했고, 마오쩌둥은 미국의 참전을 우려했다.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뒤인 1945년 10월에야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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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6]승자도 패자도 없던 전쟁 지면기사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한 미군 병사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기대감에 부풀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더욱 기세등등했다. 중공군 참전을 우려하는 워싱턴 수뇌부의 경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고 사령관 맥아더에겐 곧 끝날 전쟁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은 이미 '운산' 일대에 매복해 있었다. 평양을 출발한 미군 병사들은 앞으로 어떠한 비극이 불어닥칠지 모른 채 다음 작전지역인 운산으로 향하고 있었다.너무나 쉽게 북한군에 밀려 국토의 90%를 내줬던 국군과 미군이 이번엔 거꾸로 너무나 쉽게 압록강 일대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는 '몰살'을 당했다. 미군이 중심이 된 아군이 중공군의 '전술'에 속아 평양 진격 이후 너무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전쟁발발 5개월 만에 뺏기고, 빼앗고, 다시 빼앗기고 하는 공방전이 숨가쁘게 펼쳐졌다.■ 전쟁이 시작되다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포성이 울려 퍼졌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었다. 소련제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은 국군의 38선 일대 주요 방어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속전속결'로 남하했다.전쟁 발발 소식에 남한 전역은 충격과 공포로 휩싸였다. 특히 38선에 인접한 수도 '서울'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퇴각하던 국군은 정릉, 미아리, 청량리를 잇는 서울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서울은 결국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국군은 28일 새벽 한강 교량들을 폭파한다. 북한군의 한강 이남 진출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그렇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 참전과 '낙동강 방어선'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도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한국전쟁 발발은 한반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든든한 우방국이었다. 자칫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었다. 확전을 우려한 백악관 참모회의에선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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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5]인천상륙작전, 전세를 뒤집다 지면기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한 땅의 90%를 순식간에 점령당해 벼랑 끝에 몰렸던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에 성공,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바다를 통해 상륙하겠다는 작전은 매우 대담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북한과 중국에 누출돼 서울 수복까지 상당 기간이 걸린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륙지점은 인천!'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33분. 미 제5연대 3대대 해병들이 인천 월미도(그린비치)에 상륙했다. 이들이 상륙하기 전, 이미 월미도는 불타고 있었다. 북한군의 진지·엄폐물·은폐물을 파괴하려고, 유엔군이 며칠 전부터 전폭기와 전투함에서 막대한 양의 포탄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해병들은 북한군의 큰 저항없이 교두보 구실을 할 월미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시각은 오전 8시. 이후 해병들은 소월미도로 이동해 약 3시간 만에 적군의 저항을 제압했다.인천의 '북서쪽 해안'(레드비치)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이날 오후 5시30분부터 이뤄진다. 만조를 기다린 것이다.레드비치로 상륙한 미 제5연대 1·2대대 해병들은 공동묘지와 응봉산, 항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블루비치로 상륙한 제1연대 해병들의 임무는 수봉산을 차지해 적군이 인천으로 들어오거나 인천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조류, 포연, 상륙작전 경험 부족, 적군의 공격 등으로 한때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레드비치 작전에 참여한 최석원(79·당시 해병대 삼등병조)씨는 "함상에서 그물망을 타고 상륙정으로 내려오는데 애로가 많았다"며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또 "지휘관만 알았지, 대원 아무도 인천으로 가는지를 몰랐다"고 덧붙였다. 16일부터는 월미도와 내항(옐로비치) 등으로 지원부대들이 상륙했고, 인천시내에서 적군 소탕작전이 진행됐다.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자리) 앞 광장에서는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렸다. 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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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세계대전의 효시(러일전쟁), 인천서 오르다·34]전쟁의 기운 지면기사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을 다룬 그의 책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서 지도를 25장 그려 넣고 있는데, 첫 번째 것과 마지막 25번째 것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5월의 한반도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의 한반도 모습이다. 언뜻 보면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비슷하다. 38선 아래위에 동서로 그어진 군사분계선(DMZ)과 그 가운데의 삼각점이 추가됐을 뿐이다.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핼버스탬은 삼각점으로 표시한 '폭 찹 힐'(Pork Chop Hill) 전투에 주목한다. 휴전협상 막판, 미군 포병대가 하루에만 7만7천여 발의 대포를 발사하면서 세계대전 사상 어느 전투보다도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던 곳. 미군과 중공군 사이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으면서도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 곳. 바로 이 폭 찹 힐이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라고 핼버스탬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면 한국전쟁의 상징도시는 어디일까. 단연 인천일 것이다. 유엔군이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바꾼 곳이며, 휴전 이후 현재까지 잇따르는 '서해교전'은 한국전쟁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실감나게 하기 때문이다.각종 기록을 종합해보면,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2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핼버스탬은 미군 당국의 자료 등을 토대로 공식 집계된 것만 한국군 전사자 41만5천 명, 부상자 42만9천 명, 미군 전사자 3만3천 명, 부상자 10만5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북한과 중공군의 전사자는 1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전쟁 기간에 학살당한 민간인도 4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방, 그리고 분단세계 20개국이 참전해 수백만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그 피해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전쟁은 1945년 찾아 온 해방과 함께 그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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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참극 '한국전쟁'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면기사
몇 년 전에 일본의 국제정세 전문가인 마스다 다카유키가 쓴 '한 눈에 보는 세계 분쟁 지도'란 책이 나왔다. 세계 각 지역에서 진행중인 분쟁의 메커니즘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세계 19곳을 꼽고 있는데, '남북한 문제'도 포함됐다. 한반도가 분쟁지역이란 얘기다.많은 전쟁 전문가들이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평가하는 '한국전쟁'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 중심에 인천이 있다. 잇단 서해교전이 있었고, 작년에는 급기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도발까지 자행됐다. 일거에 세계인의 눈이 한반도에 쏠렸다. 인천은 한반도의 '잠재적 화약고'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은 한국전쟁은 종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또 그 명칭조차 통일되지 못해 '한국전쟁'이니, '6·25전쟁'이니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원인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전쟁 당사국인 남북한, 서방 16개국, 중공과 소련 등 총 20개국이 참전해 20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전쟁, 60년을 넘게 끌어오는 이 전쟁, 이제는 끝내야 한다. 경인일보의 연중기획 '세계의 전장 인천, 평화를 말하다' 시리즈가 '한국전쟁'을 다루게 됐다. 앞으로 '한국전쟁'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7회에 걸쳐 싣는다./정진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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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세계대전의 효시(러일전쟁), 인천서 오르다·33]영·러·일 학자가 본 러일전쟁 지면기사
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한반도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러일전쟁을 연구하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많다. 러시아와 일본 등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전쟁을 보는 미묘한 차이가 읽힌다. 또한 러일전쟁과 '제국주의'니 '세계 0차 대전'이니 하는 용어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서로 이견이 있다는 점도 확인하게 된다. 반면, 당시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서로 경쟁한 결과가 러일전쟁이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 시작이 인천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경인일보는 러일전쟁을 연구하는 러·일 양국 전문가를 포함해 '제3의 시각'을 위해 영국인 학자와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는 7월 말부터 이메일과 전화로 했다. 지면 관계상 일부 질문 문항을 빼고, 분량은 줄였다. 일부 문항의 경우 3명 모두 답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인터뷰 전문(영문)은 인터넷 홈페이지 참조.■ 러일전쟁 발발 원인은 뭐라고 보나.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세계 열강의 각축전으로 보는지.-존 채프먼=1905(1904)년 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이유는 동북 아시아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려는 이웃국가들의 관료와 상인들의 야욕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점적 통제권을 가지려는 야욕을 좌절시키기 위해 1895년 개입했고 이것이 끔찍한 전쟁으로 변모하게 됐다.-파블로프=러일전쟁은 조선과 만주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던 두 라이벌 국가에 의해 촉발됐다. 따라서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의 첫 번째 총성은 1904년 2월 9일 4시30분에 제물포에 있던 포함에서 울렸다. 첫 번째 목표물은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한국사람을 의미하는 말)'였다.카레예츠는 서울 주재 러시아 대사 알렉산더 파블로프(Alexander Pavlov)가 비밀 통신원과 함께 뤼순항으로 보낸 배였다. 그는 배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이 당시 요시다 대위가 서울의 통신망을 끊어놓아 통신이 불가능했다. 일본 함대는 6대의 순양함(cruise)과 8대의 포함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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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세계대전의 효시(러일전쟁), 인천서 오르다·32]러·일전쟁 종결 지면기사
'0차 세계대전' 또는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 등으로 불리는 러일전쟁은 1905년 끝났다. 첫 전투는 인천(제물포해전)에서 있었으며, 마지막은 대한해협(쓰시마해전)과 울릉도·독도 해역이었다.전쟁 직접 당사국인 러·일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이후 역설적이게도 더욱 긴밀해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종결됐지만 전쟁이 시작된 땅, 한반도에서는 1905년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됐다. '보호국'이란 허울을 넘어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이 또 다른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 속에서 수많은 항거가 있었다. 또한 일본 편에서 나라를 파는 일에 앞장선 이들도 있었다.청일전쟁이 조선 식민지화의 서막이었다면 러일전쟁은 그 '종결자'였다.#국권피탈과 항거러일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나 일본은 각기 전쟁 명분으로 '조선의 독립'을 내걸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식민지화'에 착수했다. 반발도 거셌다. 국권을 통째로 빼앗기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조선 말 한반도에 머물렀던 미국인 교육가 H.B.헐버트가 1906년에 펴낸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신복룡 역주)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웅변해준다.야트막한 언덕 앞에 십자가 모양의 처형대가 세워졌고, 거기에 한국인 3명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처형된 끔찍한 장면과 이들의 사망사실을 확인하고 무심히 되돌아 나오는 일본 군경의 모습(사진 2). 처형당한 조선인들의 죄명은 일본의 무상 토지 몰수에 항거하여 철도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이 장면이 사진으로 공개될 수 있었던 것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항거'를 막고자 한 일본의 수법이었을 것이다.헐버트는 "(1905년의)일본인들은 한인들을 합법적 노리개로 생각했다"고 했다. 또 '군사적 목적'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전국 각지의 토지를 무단 점유했다고 했다. 여기에 항거해 일제의 철도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조선 백성을 마구 죽인 것이다. 이런 현실은 "1905년 동안에는 국민들을 일본인들로부터 또는 조선의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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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31] 세계대전의 효시 러일전쟁, 인천서 오르다 ③세계를 움직인 전투 지면기사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개전을 공식 선언한다. 이틀 전인 8일 '제물포 해전'을 도발한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했다.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게 한반도는 만주대륙 진출을 위한 발판이었다.일본의 한반도 침탈 야욕은 '한일의정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발발 움직임을 감지한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해 국가의 안위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수도를 점령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로 징발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일본의 한반도 병참기지화 전략은 적중했다. 특히 해상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대한해협이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러시아 해군 기지인 동해의 블라디보스토크항과 서해의 뤼순항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해군의 치욕일본 해군은 제1함대와 제2함대를 주력함대로, 제3함대를 예비함대로 편성했다. 제2함대는 제물포 해전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고, 제3함대는 러시아 함대의 대한해협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진해를 점령했다. 중국으로 향한 제1함대는 뤼순항을 공격했다. 뤼순은 러시아 해군기지가 있는 곳이자 만주 진출의 거점이었다. 일본 함대는 뤼순항 앞 해상에 상선을 침몰시켜 출입로를 봉쇄하거나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 사격과 기뢰 부설로 대응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는 오랜기간 뤼순항에 발이 묶이는 결과가 초래됐다.러시아는 뤼순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유럽 발틱 함대에서 새로운 함대를 구성, 파견키로 했다. 그러나 작전은 손조롭지 못했다. 1904년 5월 출정 명령을 받았는데, 이듬해 5월에야 극동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장난 함정을 수리하고 기나긴 항해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일본 함대는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뒤 진해항에 집결해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 지원 함대가 결국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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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29]러·일 전쟁의 시작 '제물포 해전' 지면기사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서 시작됐다. 일본 어뢰정이,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중국 뤼순항으로 이동하려는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호를 향해 수뢰를 발사한 것이다. 카레예츠호는 일본 어뢰정의 공격을 피해 제물포항으로 귀항했다.다음 날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호와 순양함 '바랴크'호는 인천 팔미도 해역에서 일본 군함과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 군함은 일본 군함과의 싸움에서 큰 타격을 받아 제물포항으로 되돌아왔고, 이 곳에서 병사들을 외국 함선으로 이동시킨 뒤 배를 침몰시켰다. 당시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상선 '숭가리'호 선원들도 배에 스스로 불을 질러 2척의 군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바로 '제물포해전'이다. 일본군은 제물포해전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사실상 한반도 제해권을 장악했고, 마침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무력한 조선인들은 인천 제물포항과 월미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군함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日, 전쟁 며칠전 조선 전신선 차단 러시아측 눈가려■ 인천에서 울린 러일전쟁의 서곡1904년 2월 8일 오후 4시 인천 월미도와 팔미도 사이 해상에서 포성이 울린다. 일본 어뢰정이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호를 향해 수뢰를 발사한 것이다. 카레예츠호는 한반도의 정세를 러시아 극동사령관에게 알리라는 임무를 받고 중국 뤼순항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앞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작심으로 병력과 물자를 조선으로 옮겼다. 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에는 조선의 전신선을 끊어버렸다. 일본의 이같은 조치로 인해 러시아는 전보를 보낼 수 없었고, 카레예츠호를 직접 뤼순항에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이들이 자국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인천 제물포항으로 보낸 것으로 알 수 있다.러시아도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던 듯하다. 일본 어뢰정의 수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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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28]전쟁전의 흐름 지면기사
러일전쟁은 '최초의 세계전쟁' 또는 '0차 세계대전'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러시아, 전쟁터가 된 조선과 청나라, 그리고 '전쟁 지원그룹'인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러일전쟁은 전쟁에 얽혀 있는 나라가 8개국이나 된다. 말 그대로 세계대전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터진 러일전쟁은 그만큼 원인도 다양했고, 그 결과도 엄청났다. 러일전쟁이 끝난 지 10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그 전쟁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시작됐고, 한반도가 목표였다는 점에 있다.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1894년의 청일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의 '연습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본 게임'인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은 10년을 준비한 것이다.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교토대 교수는 그의 책 '러일전쟁의 세기'에서 '20세기 전쟁을 특징짓는 발단이 러일전쟁'이었고,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대'를 열었고, 러일전쟁은 '인종전쟁으로서의 세계전쟁'이었다고 규정한다. 특히 그는 러일전쟁을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보조작이나 신문을 통한 국제적 여론조작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려 했던 선전전으로도 평가한다.이 세계전쟁의 끝은 '한반도를 누가 손에 넣느냐'였다.#조선을 노리는 긴박한 국제정세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은 인천에서 그 신호탄이 터졌다. 당시 상황은 국제적인 관심이 온통 '인천'으로 쏠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영국계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1874~1913)은 당시 조선을 방문, 러일전쟁 전후의 상황을 신랄하게 그린 책을 'KOREA'란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은 서구인의 '편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이 책은 지난해 말,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란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다.해밀튼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제물포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된다"면서 뛰어난 관찰력과 다양한 정보력으로 인천을 묘사한다.'1901년에는 93척의 군함이 제물포에 들어왔는데, 그 중 35척이 일본, 21척이 영국, 15척이 러시아, 11척이 프랑스, 5척이 오스트리아, 4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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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포성 '0차 세계대전' 지면기사
1904년 인천 앞바다에서 시작된 러일전쟁은 '최초의 세계대전'이다. 전문가들은 '0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련기사 9면러시아와 일본은 왜 인천에서 격돌했을까. 그것은 인천이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벌인 전쟁을 '세계전쟁'으로 평가할까. 그것은 바로 전쟁 관련국이 8개국이나 되기 때문이다.경인일보의 연중기획 '세계의 전장 인천, 평화를 말하다' 시리즈가 이제부터 인천에서 첫 포성이 울린 '러일전쟁'을 다루게 된다. 전쟁을 전후한 국내외 정세와 제물포해전의 상황, 전쟁의 양상과 결과, 그리고 이 러일전쟁을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등에 대해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싣는다./정진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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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27]미·러시아 학자들이 본 청일전쟁 지면기사
세계 각국에는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다. 한반도에서 펼쳐진 전쟁에 대한 전문가 역시 각국에 퍼져 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중국(청나라)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맞붙은 청일전쟁에 대해서도 전쟁 당사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있다. 전쟁은 늘 되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전쟁을 제대로 모르고 대비하지 못하면, 다시 그 전쟁의 피해를 당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경인일보는 '제3의 시각'을 살피기 위해 청일전쟁 연구자, 특히 러시아와 미국에 있는 학자들과 청일전쟁에 대한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 질문과 답변은 7월 20일 이후부터 주로 이메일로 주고 받았으며, 보완 차원에서 전화로도 얘기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한국' '조선' 등 사건이나 용어의 사용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의미를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해 그대로 싣는다. 지면 관계상 분량을 줄였다. 인터뷰 전문(영문)은 아래 참조.■청일전쟁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또 동학농민운동과 청의 파병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보나.-파추코프=전쟁의 직접 원인은 동학혁명을 진압하기위해 조선이 청에 파병을 요청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진짜 전쟁의 원인은 일본군이 중국을 한반도 밖으로 밀어내고, 한반도에서 중국이 가졌던 영향력을 차지하려고 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군이 파병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일본의 편리한 변명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자국의 영토를 넓히고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략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을 했음에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동학군은 전주를 점령한 뒤에 더욱 잘 싸웠다.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은 청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중국 영사관 위안 스카이(원세개)는 중국함선 '핑유안'(평원호)을 홍계훈에 빌려줬지만 동학군은 해안가에서 싸우지 않는 전법으로 대항했다. 동학군이 서울로 입성하는 것을 조선왕조와 고종은 제대로 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