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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8·끝]인천의 중국경제교류협력, 그 발자취와 과제 지면기사
한중수교 이후 인천은 중국과 경제협력사업을 활발히 추진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단둥산업단지 조성사업이다. 인천지역 업체들의 중국진출을 지원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이 사업은 시작 10여년 만에 중단됐다. 하지만 지난해 단둥축구화 공장 설립으로 인천의 중국경제교류협력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중 양국은 올해 수교 20주년을 전후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공식협상을 시작한 자유무역협정(FTA)이 그것이다. 거대 중국시장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간 만큼 인천도 인천공항과 인천항, 경제자유구역을 바탕으로 환황해권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위치도■실패했던 인천의 중국진출1997년 2월 19일 중국 현지에 인천 단둥산업단지 지원본부가 개설됐다. 이 시점은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당시 발행된 경인일보 보도(1997년 2월 24일자 1면)를 보면, '등소평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대중국 진출사업은 차질없이 추진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둥산업단지는 시가 53억4천만원을 들여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연강개발구 금천공업지구내 44만여㎡의 부지에 대한 토지사용권 계약을 맺었다. 도로, 상·하수도 설치 등 기반시설 조성도 함께 진행했다. 또 기업체 입주수속에 대한 행정지원과 현지 시장정보 제공, 투자상담 등을 병행했다. 시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투입한 예산규모도 2001년 7천600여만원 수준에 불과하던 것이 2004년엔 1억9천900여만원으로 늘었다. 2001년까지 46개 업체에 37만9천600여㎡에 대한 분양을 마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둥산업단지 조성사업은 이후 표류했다. 시의 준비부족과 기업들의 입주기피가 주된 원인이었다. 2001년 말까지 총 46개 업체에 분양을 마쳤지만 2004년 8월까지 실제 이 곳에 입주한 업체는 8개에 불과했다.중국 정부로부터 "입주지연에 따른 무상환수 조치를 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기도 했다. 결국 시는 같은 해 46개 필지 가운데 16개 필지를 다시 단둥시에 팔았다. 시는 지속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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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7]짜장면과 공화춘 지면기사
한중 교류가 시작되며 음식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다. 짜장면의 시초를 두고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짜장면의 고향은 바로 인천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짜장면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음식점인 공화춘 이름이 사용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인천의 중국요리 짜장면과 공화춘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짜장면의 역사중국요리 짜장면은 한국의 대표음식 중 하나가 됐다. 졸업식을 마치고 온 가족이 짜장면을 먹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로 짜장면은 한국 외식문화의 시초가 되며 문화를 이끌었다. 배달음식으로도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짜장면. 한국인의 식생활에 결코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온 그 짜장면의 시작은 언제일까? 짜장면은 인천 개항(1883년)과 함께 중국 산둥지방 화교들이 인천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항에서 일하던 화교 출신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을 만들었고, 지금의 짜장면의 시초라는 것이다. 중국 요리는 조리법이 복잡해 대부분 조리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빨리 먹기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던 반면, 짜장면은 손쉽게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짜장면의 장점 때문에 화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짜장면은 일제시대 요정(고급 음식점)문화가 확산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된다. 고급 중식당들의 메뉴에 짜장면이 이름을 올리게 되고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인 중국 요리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가 계기가 됐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중국 산둥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했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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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6]차이나타운 그리고 화교 지면기사
인천속의 작은 중국으로 불리는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 차이나타운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모습은 더이상 인천 시민에게는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됐다. 한중 수교 이전 4~5곳에 그치던 이곳 차이나타운의 상점 숫자도 꾸준히 늘어 지금은 60여곳이 성업중에 있다. 지금은 인천의 대표 관광지가 된 이곳 차이나타운과 이곳을 지키고 살아온 화교들의 이야기를 돌아본다.■ 차이나타운 역사차이나타운의 역사는 130여년전 인천에 화교가 정착하면서 함께 시작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상인들은 청나라 군대에 물자들을 공급하며 조선 상인과 무역도 진행했다. 이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며 현재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 1만6천525㎡ 규모의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건립된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차이나타운'의 최초 모습이다. 인천에 조계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도 급증했다.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뒤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당시 화교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품과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사들여 중국에 보내는 방식으로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했다. 특히 인천 조계지내의 화상들은 전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을 키웠다. 1898년 의화단의 북청사변으로 중국인들이 피난차 한국의 인천으로 대거 건너오는 등 인천은 어느새 화교의 근거지가 돼 서울 다음으로 화교가 가장 많이 모여 살았다.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화교 사회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수도 베이징을 서방에 내주고, 타이완과 만주지역은 사실상 일본이 주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한국 화교들의 생활도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을 거치며 차이나타운은 거의 파괴되고 만다. 전쟁 후 화교는 한국에서 외면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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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새 점포 10배 늘었지만 양국간 이해는 부족" 지면기사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가 중국 아닐까요?" 인천 차이나타운의 번영회장 서학보(사진·53)씨는 "한중수교를 맺은지 20년이 임박했지만 두나라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며 "차이나타운의 점포수가 20년전과 비교해 10배로 늘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교 20년을 앞에 두고도 '상하이 스캔들'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양국간 교류는 늘어났지만 신뢰의 깊이는 그만큼 쌓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하지만 수교를 계기로 양국이 서로 알고자 하는 여건이 조성됐고 한국의 중국에 대한 편협한 인식도 많이 바뀌게 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서씨는 "중국의 6·25참전과 공산체제라는 현실이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고울리 없었다"며 "수교가 이뤄지며 중국을 바로 보기 시작했고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차이나타운의 화교 상인들이 한국에 뿌리내리고 열심히 살이가고 있다"며 "그만큼 한국의 소비자들도 중국을 더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덧붙였다./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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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5]인천, 중국 도시와 네트워크를 맺다 지면기사
인천은 한중수교 이후 중국 12개 도시와 자매, 혹은 우호도시 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교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톈진과는 내년 자매도시관계 20주년을 맞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선 이들 도시와의 관계가 단순한 친선교류가 아닌 실질적 경제협력 관계로 진일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인천, 중국 도시와의 연을 맺다인천시와 중국 도시간 우호관계가 돈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맺었던 한국과 중국과의 수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천이 개항을 한 직후엔 당시 청나라였던 중국과 무역을 중심으로 관계형성이 됐었지만 한국전쟁의 중국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로, 양국간 외교관계는 단절돼 왔던 것이다. 1992년 수교 직후 정부는 자치단체에 중국 도시와의 자매결연을 유도했다. 이 때 인천이 연을 맺게 된 것이 중국의 톈진이다. 수도와 인접한 도시고, 개항까지의 과정도 비슷했던 측면이 정부로부터 추천된 것이다. 그리고 1993년 12월, 마침내 톈진은 인천이 중국 도시와 연을 맺은 첫 도시가 됐다. 그로 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인천과 연을 맺게 된 중국 도시는 12곳에 이른다.이들 도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양국간 외교를 도시차원에서 뒷받침하고, 협력기반을 조성하는 관계인 '자매도시'와 행정, 문화예술, 체육, 청소년 분야 등 자유로운 분야에서 교류나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우호도시' 등이다. 인천은 톈진(1993년 12월), 충칭(2007년 6월)과는 자매도시 관계를 맺고 있고, 다롄(1994년 4월), 단둥(1995년 9월), 칭다오(1995년 9월), 옌타이(2007년 3월) 등 7개 도시와 우호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특히 우호도시는 시의회의 의결을 받지 않아도 교류분야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인천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해 선전, 창춘, 선양 등과는 우호도시 MOU를 교환한 상태다.인천은 이들 도시와 공무원을 상호 파견하고, 상대방 도시에 지진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시 재난지원사업을 진행하는 등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충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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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4]인천의 첫 중국 자매도시, 톈진(天津) 지면기사
한중수교 이듬해인 1993년 12월 자매결연을 체결한 인천과 톈진이 내년이면 교류 20주년을 맞게 된다. 톈진은 인천이 중국쪽 도시와 맺은 첫 자매결연 도시이기도 하다. 당시엔 인천과 톈진의 도시성격이 비슷하다는 정부의 추천도 있었다. 그동안 톈진과 경제부문과 공직부문의 활발한 교류활동을 진행한 인천은 내년 톈진과의 자매도시 결연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향후 한중FTA가 체결되면 두 도시간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인천시는 내다보고 있다.인천과 중국의 톈진은 공통점이 있다. 수도에 인접한 중요 도시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개항까지의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서구열강의 강요와 자본주의 시장체제라는 대세 속에서 인천과 톈진의 개항은 이뤄졌고, 두 도시는 곧 본격적인 근대도시로의 성장을 시작했다. 수도와 그 배후지를 시장으로 하는 입지조건은 개방을 요구하던 국가들에 의해 근대적 도시로 변모하게 됐다는데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개항, 톈진의 근대화를 이끌다강남대 강경락 교수의 '천진과 인천의 개항장 비교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톈진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군사적 압력에 의한 북경조약(1860년)에 의해 개항이 이뤄졌다.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톈진에 조계지를 수립하게 됐고, 곧이어 독일과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가 톈진에 조계지를 확정하게 됐다. 조계지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한 도시공간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도시기반시설의 확장을 필요로 하게 됐다.1860년 개항 이전까지 톈진에 있던 54개의 도로는 개항 이후 1949년까지 435개로 늘어났다. 개항 이전에 비해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도시를 구획하는 이항(里巷)의 건설 역시 1860년에서 1899년까지 651개가 건설됐다. 이후 1910년에서 1919년까지 718개, 1920년에서 1929년까지 1천11개가 만들어졌다. 1860년에서 1949년까지 약 90년간 이전의 7배에 달하는 3천923개의 이항이 건설된 것이다.도시공간의 확대와 병행해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도 급속히 진행됐다.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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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3]한·중 소무역의 등장 지면기사
1990년 9월 15일 인천~웨이하이(威海) 사이의 한·중 카페리 항로 개설과 동시에 한·중 간의 보따리무역(이하 소무역)도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한·중 카페리 운항 초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들여오던 '동인당 우황청심환'이 한국에서 입소문을 타며 인기품목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때부터다. 초창기 주로 화교들이 담당하던 보따리상(이하 소무역상)은 시간이 지나며 변화를 겪는다. 한·중 소무역은 비공식·비합법적 무역이지만 한·중 경제교류에 있어 결코 무시 못할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중 카페리와 함께 한 보따리무역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본다.■ 보따리상의 등장소무역상은 개인이 운반할 수 있는 소량의 물품을 직접 소지하고 국경을 넘어 다른 이웃 국가와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무역형태의 명칭이다.한·중 소무역은 수교 이전인 1990년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 개설과 함께 시작됐다.하지만 항로 개설 초기에는 이렇다 할 무역은 발생하지 않았다. 항로 개설 초기 카페리 승객 대부분은 한국 방문 목적을 가진 중국 동포들로 이들 중국 동포들은 주로 중국으로부터 한약재와 호랑이연고, 우황청심환 등을 가지고 들어와 판매했다.동인당 우황청심환과 중국 인삼은 한국에서 팔리기만 한다면 손쉽게 목돈을 챙길 수 있는 물품이었다.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은 중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 당시 유일한 한·중 뱃길인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의 경우,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 2천여명이 웨이하이에 머무르며 한국으로 향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초기 고국 방문객들이 휴대품으로 들여오는 양이 심하게 많은 경우에는 세관이 압수하기도 했지만, 운 좋게 세관을 통과한 물건들은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한국에서 판매됐다.한·중 카페리 운항 초창기 서울역과 남대문 등지에는 이들 동포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판매하는 노점이 제법 큰 규모로 열리기도 했다.현재 한국은 일본·중국·러시아 등과 소무역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현재 거래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당연히 중국으로, 중국과 연결되는 카페리 항로 중 10개의 노선이 집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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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2]한·중 해상교역 꽃피운 '카페리 항로' 지면기사
한·중 카페리 항로 개설로 중국과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인천은 한·중 카페리 항로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2011년 현재 전체 카페리 항로는 12개 선사에서 15개 항로가 운항중이다. 이중 인천항에 10개 항로가 집중돼 있을 정도로 카페리 항로에 있어 인천의 중요도는 상당하다. 수도권의 대중국 여객과 물동량 처리에 있어 중심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여년간 한·중 교류의 중심으로서 인천항 카페리 항로가 기여한 부분은 어떤 것들일까?■한·중 카페리 대 중국 물동량 창출을 견인하다.카페리 업계는 한·중 카페리 항로가 대중국 물동량 창출을 이끌어왔다고 입을 모은다. 수요가 공급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아니라 공급이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지난 20여년간 한·중 카페리항로는 국교 수립 이전부터 일찌감치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시작하며 양국의 교류를 확대하는 첨병 역할을 담당해왔다. 수교 당시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대중국 교역은 26배, 투자건수는 73배, 금액은 132배가 증가한 것으로 카페리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인천항의 한·중 카페리 항로 개설로 인해 인천과 중국은 바로 24시간 이내에 화물을 받을 수 있는 '핫(hot)-델리버리'가 가능해진다. 당일 통관을 원칙으로 하는 카페리선박을 통한 컨테이너 수송과 보따리상을 통한 물자 수송이 이 쾌속서비스의 핵심 역할을 했다. 화주 입장에서 볼때 매력적인 이 쾌속서비스는 앞으로도 당분간 카페리의 장점으로 인정받을 전망이다.물동량 측면에 있어서 한·중 카페리 개설로 시작된 물자 교류는 중국 현지의 임·가공 산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한국 자본의 중국 현지 투자도 이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게 된다. 카페리로 촉진된 활발한 현지 투자와 임가공산업의 발달때문에, 카페리를 통해 중국으로 원·부자재를 공급하고 이를 다시 한국으로 들여와 해외로 수출하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형태의 교역에서 촉발된 양국의 물동량 증가는 인천항뿐 아니라 한국의 전체적인 대중국 물동량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경쟁관계에 있는 정기 컨테이너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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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위동항운 초대사장 이종순 회장 지면기사
"위동항운 골든브릿지의 첫 취항은 한중간의 황금 다리를 놓은 것이나 다름없죠."위동항운의 초대 CEO를 맡아 18년간 위동을 이끌다 물러난 이종순(75) 회장(현 CK팬아시아씨에프씨 회장)은 첫 항해를 두고 이 같이 평가했다.'황금다리'를 세운 이종순 회장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주로 내린다. 이 회장 자신 또한 국내 첫 한·중 합작회사인 위동항운을 설립·경영한 경험과 이를 통해 한·중 양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실제로 첫 취항 당시 인구 20만명에 그치던 웨이하이는 지금은 300만명 가까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인천~웨이하이 항로의 성적표도 승객이 첫해 9천412명에서 2011년 14만8천414명으로, 물동량도 첫해 248TEU에서 지난해 5만1천770TEU로 크게 늘었다.그도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성공을 확신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미수교 적성국가인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히 크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이 사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을 '중공'이라 부를 정도로 적성국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였다"며 "심지어 북한측의 납치 위험도 100%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모두 첫 항차 탑승객에서 빠져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카페리항로가 개설됐지만 미수교 상태에선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았습니다."이 회장은 미수교 상태에서 양국 사이에 사람과 화물이 오고가는 기형적 상황이 한·중수교를 촉진하는 촉매제 노릇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 회장은 "위동은 전력적으로 미수교 상태에서도 입국이 쉬운 중국 교포들을 우선적으로 공략했다"며 "이를 계기로 교포들을 통해 한국의 경제발전상이 중국에 퍼지며 동포들의 고국 방문러시로 이어지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원활한 CIQ 서비스에 대한 요구와 중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기업의 요구들은 자연스레 양국의 수교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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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21]한·중 바닷길 이은 '카페리호' 지면기사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뤄지기 2년여 앞선 1990년 9월 인천과 중국은 먼저 인연을 맺었다.한·중 카페리(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수송하는 선박)를 통해 인천항과 웨이하이(威海)의 바닷길이 먼저 놓인 것이다. 이 바닷길은 정식 수교가 맺어지기 이전까지 단순한 가교 역할 그 이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중 카페리를 통한 인천항의 국제여객은 어느덧 100만 시대를 맞을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지난 20여년간 한·중 교류에 있어 적지 않은 역할을 해온 한중 카페리의 의미와 성장 과정을 살펴본다.■ 인천~웨이하이 역사적 항해의 시작1990년 9월 15일 오후 5시 인천항 제1부두에 중국을 향하는 기대에 찬 뱃고동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중 합작법인인 위동항운의 골든브릿지호가 인천항을 출발해 중국을 향하는 첫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이 항해는 인천~웨이하이간 항로답사를 위한 처녀출항이었다. 위동항운 설립에 참여한 6개 합작 선사 관계자와 당시 해운항만청, 세관, 검역소 등 관계자 126명 만이 골든브릿지에 승선했다. 일반 승객은 탑승하지 않았다. 당시 투입된 골든브릿지(Golden Bridge)호는 1975년 건조된 선박으로 총t수 4천317t에 여객 정원은 480명이었다. 16kt의 속력에 컨테이너는 69 TEU를 실을 수 있었다. 이날 출항에 앞서 취항식이 개최됐다. 취항식에는 이종순 위동항운 사장을 비롯해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 최고위원과 심재홍 인천시장과 진영일 인천지방해운항만청장, 유관기관 및 업체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해 역사적인 순간의 기쁨을 나눴다. 1949년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후 끊겼던 해상통로가 41년만에 열리는 가슴 벅찬 순간을 모두 함께 축하했다.■ 카페리 항로의 개설 배경한·중 카페리 항로는 1978년부터 시작된 한·중 경제교류가 그 바탕이 됐다. 양국간 경제교류는 1978년께 중국의 대내외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에 따라 시작됐다. 이 때부터 시작된 경제교류는 1979년 1천900만달러에 그치던 한·중 수출입 규모가 1990년 29억 달러로 크게 확대되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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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20]인위와 무위의 절묘한 조화 지면기사
죽의 장막이 걷히면서 13억 인구가 갖는 시장으로서의 잠재적 가능성과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하여 1980년대 이후 중국은 급격히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었다.그러나 교역량이 2천억달러를 넘어선 지금과는 달리, 개방 초기에는 이 새로운 관심의 대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고, 알려고 하는 탐구열도 그렇게 치밀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기 위한 시간과 자본의 투자에도 인색했다고 할 수 있다.우리의 이러한 대중국 접근태도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정치적인 상황, 땅덩어리는 크고 인구는 많지만 당장은 구매력이 그렇게 크지 않은 가난한 나라, 즉 약대국이라는 선입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아마도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너무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온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이미 친숙하고 잘 알고 있는 상대라고 하는 착각도 이러한 접근태도를 만든 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그러나 막상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 중국인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우리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고, 그 중에서도 그들을 상대해 본 이방인들을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국제적인 관행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들의 무원칙과 무매너에 관한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관성이 없는 무원칙한 태도는 무경우한 일이거나 상대에 대한 배려의 부족으로 오해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심지어는 상대를 골탕 먹이기 위하여 의도된 이중적 태도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것은 국제관계에서 거의 관행화되어 있는 예측 가능성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었다.그래서 초기에 중국으로 진출한 기업인들 중에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곤혹스럽고 난처한 경우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상식이 우리 입장에서는 몰상식으로 보이고, 그들의 관행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사기나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허다했던 것이다.우리가 그들의 대륙적 기질과 외형적인 호방함이 내적인 섬세함 혹은 치밀한 계획성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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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9]중국의 국제 정치전략 지면기사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중국의 외교전략은 중국내 정치적 의지가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다. 미 국방부가 최근에 미 의회에 제출한 '2012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앞으로 2020년까지, 21세기의 첫 20년을 중국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전략적 기회의 기간(period of strategic opportunity)'으로 설정했다. 이 기간에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에 필요한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조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 기간에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한 강대국들과는 가능한 직접 대결을 피하고, 한국 일본 필리핀 등 주변 국가들과도 긴장과 갈등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큰 전략을 세워놓았다.중국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마샤오톈(馬曉天)은 28일 홍콩 봉황(鳳凰)TV와 중국과 필리핀 사이의 해상영토 분쟁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 "중국군은 해상영토를 보위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현재 군사역량을 동원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으며, 군사력은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과 조선(북한)의 군대가 조업활동을 하는 중국 어민들을 납치하거나 조업활동을 방해하는 등 중국의 해양 주권이 빈번하게 도전받고 있으나, 중국은 어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나 외교부가 나서서 이 일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환구시보(環球時報 · Global Times) 등 관영매체들이 필리핀 당국이 황옌다오(黃岩島)에서 미군과 합동 군사훈련을 벌이는 데 격분해서 "인민해방군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흥분한 논조를 보여주었지만 중국군의 방침은 어디까지나 "해상영토를 방어할 능력은 갖추되 동원준비는 하지 않는 것"이 기본 전략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떻든 2020년까지는 미국 등 강대국이나 한국, 일본 등 주변국들과는 직접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중국 국가전략에 충실히 따를 것임을 마샤오톈 부총참모장은 분명히 한 것이다. 마샤오톈의 말에 따르면, 중국은 서해상에서 한국과의 조업권 문제로 마찰이 빚어지더라도 적어도 2020년까지는 어업당국이나 외교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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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8]남순(南巡)과 피서(避暑), 그 상징의 기막힌 역설 지면기사
강남의 정취를 즐기는 유람 겸 순시하는 것을 뜻하는 남순과 여름 더위를 피해 북쪽의 서늘한 지역으로 피서를 간다는 말은 태평성세의 여유로움과 낭만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말들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이 여유롭고 낭만적인 말은 상황에 따라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고, 압도적인 무력 과시를 상징하기도 하는 기막힌 역설의 의미를 가진 말이기도 하다.청나라 강희제는 이 상징의 양면성을 적절히 활용한 뛰어난 황제였다. 강희의 남순은 내부의 분란과 분열 혹은 소요에 대한 사전 억지력의 성격이 짙다는 의미에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모티브였다고 할 수 있고, 중국 공산당의 제4세대 지도부가 '평화'와 '발전'이라는 두 개념을 결합시켜 하나의 외교적 원칙으로 제시했던 '평화굴기론(平和굴起論)' 역시 남순과 피서의 변형된 아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패권주의로 흐르지 않으면서 강대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이 논리는 북방 유목민족들의 잠재적 도전에 대한 사전 억지력이었던 피서산장의 현대판 논리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왕조들은 대내적 통일과 권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 수단을 동원했었는데,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특히 북방의 유목민족에 관한 정책은 왕조의 안위와 직결되는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과제였다. 흔히들 중국사를 호한교체사라고 한다. 호(胡)라는 말은 한족이외의 이민족들을 통칭하는 용어이지만, 한족과 권력 혹은 왕조의 교체를 이룬 호는 주로 북방에서 중원으로 진입한 민족들이었다. 북위, 원 그리고 청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강희제는 국토의 동북쪽에 치우쳐 자리잡은 도읍 베이징과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을 순시하면서 민정을 살피는 남순을 재위 중 여섯 번이나 단행했는데, 이는 통일제국으로서의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내치정책이었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서의 국가통합정책과 이민족정책에 상당한 공력을 들였고, 이러한 사실은 남순이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함장되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면 드러나는 일이다.8세(1661년)에 즉위한 강희제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만주 기인(旗人)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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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다시보다'·17]'광둥모델 승리'가 예상되는 중국 국내정치 지면기사
중국 국내 정치는 '2012년 하반기'로 개최 시기가 확정 고지된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향해 비틀거리며 달려가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10월15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 제17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채택된 '공보(公報)'를 통해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2012년 하반기에 베이징(北京)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근들어 이른바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위원회 서기 사건과 관련 "중국공산당이 올 가을로 예정된 당 대회를 연기할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국내외 매체들을 통해 보도되고 있으나, 중국공산당 6중전회의 결정에 따르면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연내에만 개최된다면, 대회가 연기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전대(全大)'로 약칭되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는 우리 정당들이 개최하는 '전당대회'에 해당한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제1차 전대를 개최한 뒤 대체로 5년마다 한 차례씩 전대를 규칙적으로 개최해 왔다. 창당 91주년을 맞는 2012년에 18번째의 전당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은 중국공산당이 한 세기 가까이 전대 개최에 관해 일관성을 유지해 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0년말 현재 8천26만명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정당 중국공산당의 당원 숫자는 1921년 창당 당시 57명에 불과했으나, 1927년 제5차 전대때 5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당원숫자는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서 1945년 7차 전대때 121만명,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당시에는 448만명으로 불어났고, 1956년 8차 전대때 1천57만명, 1991년말에 5천만명이 됐고, 2010년말 현재 8천만명이 넘는 당원수를 자랑하고 있다. 1990년에서 1991년에 이르는 기간에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당들이 몰락하는 흐름속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당원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리는 당세 확장을 해왔다. 중국 공산당의 전국대표대회에는 전국에서 8천만명의 당원 가운데 선출된 3천명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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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6]한국과 중국 물류경쟁 및 협력 지면기사
동북아시아는 1980년대 이후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북한, 러시아, 몽골 등 6개국이 포함되며, 그 중에서도 한·중·일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경제협력에 있어 주체이자 핵심이 되는 세 축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한반도를 포함한 세 나라가 차지하는 국제 경제적 위상과 협력관계는 유럽과 북미대륙의 경제협력 관계에 비하여 미흡하며, 경제발전 수준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북한과 러시아, 몽골 등을 포함하여 생각하면 동북아시아 지역내의 협력 및 무역환경 조성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된다. 동북아시아에 상존하고 있는 정치 군사적 갈등구조와는 달리 경제적 협력과 교류는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한일 경제관계는 급속히 진전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은 일본의 전후모델과 함께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1978년 개혁개방 선언을 시작으로 실사구시와 정경분리의 원칙에 기초하여 다양한 경제협력정책을 펴고 있다.특히 과거 한중일은 안행형 발전모델(Flying Geese Model)에 따른 삼각분업체제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이 모델은 미국의 시장제공과 자금공여 등 적극적인 역할이 전제되었던 냉전시대에나 가능하였던 발전모델로 평가되고 있다.최근 한중일 경제협력을 위한 논의로는 1999년 11월 28일 마닐라에서 역사상 최초로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이때 한중일 경제협력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였다.경제통합 형태측면에서 보면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 중인 상태이며, 역내 산업기술 협력과 자유무역이 가능한 ASEAN이나 NAFTA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러한 물류경쟁 및 협력 현상의 배경이 되고 있는 동북아지역은 세계 전체 GDP의 17.5%, 세계인구의 23.6%, 세계 외환보유고의 51.7%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 20~30년간의 고도경제성장의 결과에 따라 유럽연합(EU) 및 북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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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5]한국과 중국의 물류발전사 지면기사
1875년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부산과 일본의 나카시키, 쓰시마 항로를 열어주면서 시작한 한국의 물류는 이후 러일전쟁(1904), 강제합병(1910), 일본의 2차대전 패망 및 해방(1945), 한국전쟁(1950)을 맞으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1960년대 해외원조와 제 1차·2차 경제개발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낮은 단계의 유통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고속도로를 포함한 사회기간망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한국물류 성장에 큰 의미를 주었으며, 이윽고 1970년대 초 컨테이너 부두가 한국에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긴 시간동안 힘든 역경의 시간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동안 압축성장을 보여 온 한국경제에 보이지 않게 큰 뒷받침을 해온 물류에 대하여 과연 언제부터 현대적 물류개념이 도입되었으며, 또 언제부터 본격적인 물류시대가 개화되었는지 궁금해진다.한편, 1900년대 이전 수도 베이징 인구 100만명을 부양하기 위하여 중국은 곡물이 재배되는 양쯔강 지역에서 베이징까지 약 1천600㎞의 운하를 건설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화려한 내륙수운의 시대를 구가하였다. 이러한 물류 전성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 이후 1978년까지 이어지는 여러 단계의 계획경제 시기를 거치면서 퇴색한다. 다양한 한계를 가진 계획경제 시기를 지나 1992년 중국은 드디어 사회주의에 시장경제체계를 도입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다시금 물류의 강자로 부상한다. 최근 세계의 공장으로 막대한 물동량을 창출하는 중국은 드디어 세계 물류의 구심점에 위치하고 있다. 물류 역사에 나타난 주요 물류현상을 따라 한국 및 중국물류의 시대별 특징을 살펴보다 보면 재미있는 물류 전이현상의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한국물류 역사가 미국과 일본에 비하여 길지 않은 까닭에 연대구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도별, 시대별로 발생되었던 물류의 중요한 사건을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에 물류가 전이되어 들어온 시점과 도입 이후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진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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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4]중국 패션의 세계화 >하< 지면기사
■ 중국 패션시장의 성장중국은 21세기에 들어와 2001년 WTO 가입,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개최 등 국제적인 행사들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가졌다.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는 개최국인 중국의 국가 브랜드 파워 향상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국제화 수준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내수 패션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 방직성 자료에 따르면 중국 의류시장은 지난 2010년 기준 전체 생산액이 1조1천800억RMB(약 216조원)로 전년 대비 28.7% 늘어났으며, 일반 소비재 신장률이 16.8%인 것에 비해 2배 가까운 수치다. 시장 구성은 유니섹스 캐주얼 40%, 여성 캐주얼 25%, 스포츠·아웃도어 10% 등 정장보다 캐주얼이 우세하여 전형적인 선진국형 소비 패턴을 보인다.중국 패션시장에서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유럽 유명브랜드 중심의 럭셔리 마켓이 성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자라, H&M, 유니클로, 갭 등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빠르게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 해외 브랜드들은 중국에서 의류 종목에 관계없이 상위 10대 브랜드 가운데 35%를 차지할 만큼 높은 영향력을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 로컬 기업들의 신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은 풍부한 자금력과 OEM 수출로 다져진 생산 노하우와 전국 각 성의 의류대리상들과의 긴밀한 유통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간 시장흐름에 편승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국내 패션기업들은 2000년을 전후해 여러 부문에서 경쟁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했으며, 현재 상하이에만 40여개 기업이 현지법인과 지사를 운영할 만큼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제일모직, LG패션, 코오롱, SK, 신성통상 등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랜드 그룹은 중국에서만 매출 1조원을 달성하였으며 계속 산하 브랜드들의 중국 진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경제 성장은 중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가져와 아웃도어 라이프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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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3]중국 패션의 세계화 >상< 지면기사
역동적인 경제 성장에 힘입은 생활 수준 향상, 내수 시장 확대, 시장 개방 가속화, 디지털 시대 도래 등으로 중국 시장의 판도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급변하고 있다. 세계적 고급 브랜드들은 엄청난 부와 소비파워를 자랑하는 중국에 앞다투어 대규모 매장들을 열고 홍보 및 마케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7년 이태리의 최고급 패션브랜드 펜디는 중국과 각국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여 중국 문화의 상징인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멋진 조명을 밝히고 중국을 테마로 한 패션쇼를 열어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켜 주었다.이것은 단순히 한 패션브랜드의 홍보전략이라기보다 세계 명품 소비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패션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국 패션의 세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션문화와 패션산업의 2가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아시아를 대표해 온 중국 문화최근 세계 무대에서 중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정치, 경제 뿐 아니라 예술과 패션을 비롯한 문화면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사실 중국 문화는 서양인들에게 오랫동안 노출되어왔기 때문에 낯선 문화가 아니다. 3~4세기에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 알려진 이래 중국의 가구, 도자기, 벽지, 의상 등은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궁중은 물론 대중들도 중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18세기 프랑스 잡지 하퍼스( Happer's)는 당시의 예술 평론을 실으면서 '중국풍' (Chinoiserie) 스타일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이 단어는 서양에서 중국 풍격을 구비한 예술품을 호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져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중국풍'의 주제는 서양의 예술과 패션에서 줄곧 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들에게 '아시아'하면 바로 중국을 연상할 정도로 가장 아시아를 대표하는 문화로 여겨졌다.■ 가장 중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그렇다면 중국풍의 발원지인 중국은 중국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재 중국은 문화산업을 발전시킴에 있어 중국의 특색을 부각시키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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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2]베이징의 3월 패션축제 지면기사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한국의 서울과 비교할 때 훨씬 북쪽에 있는데도 지형적인 특징이 분지여서인지 날씨는 서울과 비슷하다. 서울에서의 3월은 봄의 서곡을 나타내는 시기인 만큼 모든 일들이 겨울동안 움츠렸던 기운과 달리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데 베이징의 3월도 그런 시기이다.베이징도 이제는 세계적인 큰 행사가 많이 열리는데, 그중에서도 3월 말에 열리는 베이징 패션 전시회는 중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패션 페어(Fashion Fair)가 되고 있다. 파리 및 밀라노, 뉴욕의 패션 페어는 세계 패션의 유행을 감지할 수 있는 페어라고 한다면 베이징의 페어는 세계 상권의 중심이 중국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패션 시장 상권의 움직임과 거대한 중국 시장의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은 중국관을 비롯하여 세계 패션 선진국인 이탈리아, 프랑스뿐 아니라 일본, 한국, 마카오, 홍콩관 등 세계 각국에서 전시관을 열고 있으며 그 규모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1993년 391개 중국 국내 기업의 참가로 시작된 페어는 매회 열리고 있어 올해로 20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시아에서 제일 크고 세계적으로는 세 번째로 큰 패션 전시회가 되었다. 2011년의 페어를 보면 홍콩, 한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대만 등 20여개국 1천여개의 브랜드가 참가했고 참관 객수도 11만5천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시관도 규모면에서는 홍콩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참가기업 수도 70개 기업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리 패션업체에서도 중국시장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중국의 패션산업은 세계의 OEM 생산기지로서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기반을 조성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 세계 브랜드 옷의 라벨은 대부분 'made in china'로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디자인한 옷들이 중국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건비가 싼 나라로 생산기지가 이동하고 있어 라벨 표시도 중국 이외의 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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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인천 '중국을 다시보다·11]중국문화의 뿌리 '도교'>하< 지면기사
중국의 도교와 비교해서 한국의 도교는 어떠할까? 고대 도교에 대한 역사 기록의 한계로 인해 한국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도교가 민중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가령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대에 도교는 권신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복원궁(福源宮)을 비롯, 다수의 왕립 도관(道觀)이 건립되어 과의(科儀) 중심의 도교가 성행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도교는 유교에 의해 위축을 면치 못하나 그래도 전기까지는 국립 도관인 소격서(昭格署)가 존재하여 관방도교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조선 도교는 후기에 소격서마저 폐지된 후 전기의 일부 사대부 중심의 내단 수련도교로부터 민간도교의 경향으로 변화한다. 조선 후기 민간도교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수입된 민간도교이다. 명(明)으로부터 들여온 권선서(勸善書)와 관제(關帝) 신앙이 조선 후기 내내 크게 유행한 것이 그것이다. 둘째로 '정감록(鄭鑑錄)' 등을 중심으로 한 참위설적 민간도교이다. 도교의 기층적 의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흐름이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양반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몰락한 반체제적 사족 계층과 민중들 사이에서 왕조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점치는 참위설적 도교 사조가 유행하였다. 이 사조는 이후 왕조 통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민간에 더욱 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경래 난과 같은 반란 운동의 배후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반항적 민간도교 사상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재통합을 목표로 하는 민중 종교의 이념에 수용되어 이른바 신종교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립된 동학, 1901년 강일순에 의해 영도된 증산교 등이 그것이다.이들은 그 이념에 있어서 구세적(救世的)이고 교법에 있어서 주술적인데 이러한 성향은 과거의 태평도 및 오두미도 등 민간도교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기도 하다.얼마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