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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100]'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 지면기사
일제 식민지 시절 어느 날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순수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한용단'(韓勇團)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미신'(米信)팀의 경기였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였던 셈. 그런데 경기가 진행되던 중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 한국인 청년과 당시 인천경찰서 검도사범이던 '청전'(淸田)이란 일본인 사이에 판정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편파판정으로 우승을 놓쳤다고 흥분한 한용단 응원단원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충돌사고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한용단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일본인 검도사범과 판정시비를 벌인 한국인 청년이 바로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 1896~1980)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국의 간디'로 통했던 인물. 삼연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마친 뒤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면서 형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이주했다. 청년 시절 인천에서 그의 애국·애족적 활동은 매우 왕성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용단 활동이었다. 삼연은 한용단의 단장을 맡아 야구단 결성에 산파역을 했으며, 아울러 후원자로서 온갖 정성을 쏟았다. 한용단은 성격상 항일학생운동 단체로서 스포츠를 통해 애국 투지를 불태웠던 인천 야구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한용단이 해체된 뒤 1926년에 고려야구단을 결성했는데, 이로써 한용단으로 시작한 인천 청년야구는 인천상우회(仁川商友會)와 고려야구단으로 이어지며 명맥을 유지했다.삼연은 또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이끌기도 했다. 이 모임은 한용단과 함께 당시 인천지역 학생 단체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단체로 꼽힌다. 삼연이 초대회장을 맡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원들을 꼽아보면 지나간 인천의 명사록을 방불케 한다. 인천의 원로 신태범박사가 최근 펴낸 '개항후의 인천풍경'(인천 향토사 연구회 발행)에 따르면 법무장관을 지낸 조진만(법학전문),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경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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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8]산재(汕哉) 고일(高逸)선생 지면기사
신문기자에겐 가난한 것이 자랑이다. 비굴하지 않고, 천만인 앞에 나가서 오직 정의를 높이고, 부정을 격멸하고, 현실을 폭로하고, 선악을 구분·비판해 한자루의 붓을 유일한 무기삼아 사회와 인생을 명랑화시키는데 사력을 다하는 것이 신문기자다. 인천지역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꼽히는 산재(汕哉) 고일(高逸)(1903~1975)선생은 기자의 사명을 이같이 정의했다.광무 7년(1903년) 음력 5월 6일 측량사였던 부친 고영희씨의 장남으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그는 4개월 뒤 강보에 싸인 채 경인선에 실려 '개화의 고동소리' 요란하던 인천으로 이주했다. 본래 호적명은 희선(羲璇)이었으나 후일 언론인과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逸이란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졌다.1915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사숙에서 한문을 수업하던 그는 1922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양정재학시절엔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곽상훈 등과 함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조직, 모임의 총무와 문예부장을 맡았다. 아울러 이 모임을 중심으로 '야구인천'의 상징이던 한용단의 창단(단장·곽상훈)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후일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당시 초인관(楚人冠)의 '신문지학(新聞之學)'을 열독하고 나서 등사판으로 간행된 학생잡지를 편집하면서부터다. 신교육령에 의해 양정고보 졸업 1년만인 1923년 전학과를 다시 졸업한 그는 당초 모교 교비생으로 일본에 유학하려 했으나 재단 사정으로 중단되자 연천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인교장의 황국신민화 강요에 항거, 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한 뒤 반년만에 사퇴했다.연천공립보통학교 교원시절 일화에서 그의 열정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틈틈이 부녀자학생들을 상대로 레미제라블 등 동서고금의 문학과 역사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그는 이를 위해 매일 숙직을 자청하는 열의를 보였고, 하루 70전의 숙직료를 받아 학생들을 '대접'했다. 그런데 하루는 대여섯명과 밤늦은 시각까지 교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난 다음날 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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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7]우현 고유섭 지면기사
“민족정신으로 조선의 넋과 아름다움에 영혼을 바친 미술사학자. 조선의 숨결을 쓰다듬어 가슴에 품었던 고미술 학계의 고독한 선구자···.”인천이 낳은 한국 미술사학 및 미학의 태두(泰斗)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을 일컫는 표현이다. 오늘날 한국 미술사와 미학의 물줄기가 우현서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만큼, 그가 이룩한 학문은 높고도 깊다. 우현은 암울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아무도 눈길을 돌리지 않던 우리 미술사와 미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의 전통을 살려 체계화한 유일한 학자였다. 우현은 특히 전국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아름다운 우리 문화의 숨결을 느끼려고 애썼다. 아마 일제라는 암담한 시대를 배경으로 그의 눈엔 고유의 전통미들이 더 애틋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우현은 40세의 나이로 개성 송도박물관 관사에서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 무려 1백50여편에 이르는 방대한 연구논문을 남긴 학문적 업적은 후세에 길이 빛나고 있다.우현은 1905년 2월 2일 인천부 용리(지금의 용현동)에서 태어나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학교)와 서울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국제대학(서울대학의 전신) 예과 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보성고보 시절 인천문화운동에 씨앗을 뿌린 '경인 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학활동에 참여해 '경인팔경', '해변의 살기' 등 인천을 소재로 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1927년 다시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1930년 3월 졸업과 함께 모교 연구실의 조수로 임명돼 3년동안 일했다. 자료수집 등을 통해 지식을 쌓고 기반을 닦은 그 때부터 우현은 학문연구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우현은 그 무렵 한국인 학술잡지인 신흥(新興)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세상에 공개했다.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 , '조선과 탑파 개설' , '고려의 불사(佛寺) 건축' 등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 논문은 우리 전통문화의 진수를 최초로 알린 미술사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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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6]송암 박두성 지면기사
“점자책은 쌓아두면 돌출부가 망가지니 꽂아서 보관하라….”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송암(松岩) 박두성(朴斗星)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다. 송암은 한글체계에 맞춘 점자 '훈맹정음'을 창안, 시각장애인들의 앞길을 밝혀주며 평생을 불행한 이들을 위해 살았다. 그는 점자를 연구하다 자신도 시력을 잃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점자책 보급에 헌신함으로써 오늘날 시각장애인들에게 '영원한 등불'로 추앙을 받고 있다.송암은 1888년(고종 25년) 3월 16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포리 516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살 때 강화 보창학교에 입학해 4년간 신학문을 배웠으나 1901년 대흉년이 나자 가족들을 부양할 겸 신교육을 더 배우겠다는 열망을 안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거기서 잠시 점원생활을 하던 송암은 그러나 뜻을 살릴 수 없자 다시 강화로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귀국한 뒤 평소 그를 아끼던 보창학교 설립자 이동휘 선생이 서울 한성사범학교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한성사범을 나온 송암은 어의동 보통학교에서 8년간 교편생활을 했다.그가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12년 일본이 유화정책의 하나로 제생원(濟生院:고아의 양육과 맹아 교육을 맡은 기관)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산하에 맹아부(盲兒部)를 둔 후 서울에 '한국관립맹아학원'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총독부는 교원 자격을 갖춘 송암을 적격자로 지명하고 어의동 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그를 1913년 1월 6일자로 제생원 맹아부 근무를 발령했다. 처음 시각장애인들의 교육을 맡은 그는 교재도 없이 말로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맹아부에 건의, 일본에서 점자 인쇄기를 들여와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송암은 일인들이 만든 점자론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그 언어를 잘 보전하고 있는 한 그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눈을 잃었으나 우리말, 우리글까지 잃어선 안된다”고 가르쳤던 그는 일인들의 눈을 피해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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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5]-장면박사(下) 지면기사
30여년간 군사독재의 막을 연 1961년 5월 16일. 제 2공화국 총리 장면은 서울 혜화동 깔멜수도원으로 도피했다. 그가 이 수도원에서 군사구테타를 피해 숨어지내던 운명의 40시간은 곧 역사의 반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긴박했던 그 당시를 운석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군인들을 피해 미대사관으로 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깔멜수도원으로 찾아가 친교가 있던 원장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나약했던' 상황대처 탓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 일궈낸 4.19 혁명의 열매를 고스란히 군사정부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국내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실업자가 250여만명에 달한 가운데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없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결국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대통령은 하야했고,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윤보선·장면의 제 2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2공화국 정부는 조각을 둘러싸고 자기지분을 늘리기 위해 신·구파로 갈려 '집안싸움'을 벌였다. 더욱이 민주당에 참여했던 정치인 중 상당수가 친일행적을 갖고 있는 등 태생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운석의 비서관이었던 송원영 전의원은 “제2공화국 조각 때 14명의 국무위원중 최소한 7명은 일제시대 관료거나 이름난 친일파로 구성됐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이렇게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가 국민들이 기대하는 개혁을 수행할리 만무였다. 특히 장면정권은 11월 개헌을 통해 '반민주 행위자 공민원 제한 법안'과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등 4개 특별법을 제정했으나 반민족행위자와 부정축재자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건국초기 반민특위가 친일파 처리에 실패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2공화국 정부는 출범 후 냉전체제 변화에 발맞춰 한국사회의 정치적 발전과 외교역량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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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4]장면박사(上) 지면기사
운석(雲石) 장면(張勉)박사(1899-1966) 역시 해방 후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정치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기구할 정도로 '가시밭길'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정치파트너에서 야당지도자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현대사 한 가운데서 몸부림친 운석은 '불운한 정치가'로 잘 알려져 있다. 4.19혁명의 과실을 지켜내지 못하고 군사정부에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타계한이후에도 '무능한 정치인'과 '민주주의원칙을 중시한 합리적 지도자'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장면박사는 세무공무원이었던 부친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사이에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적선동에서 출생했지만 그의 집안은 곧바로 인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운석은 인천에서 성장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유복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06년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이 곳에서 운석은 천자문을 비롯해 동몽선습·소학·대학·통감 등 한학은 물론 신학문을 두루 배웠다.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들어갔다. 이어 YMCA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에 진학, 3년간 공부한 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맨하턴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맨하턴대학과 시튼 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이들 대학에서의 공부는 훗날 운석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그는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이란 제하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대학생활에서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다.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첩경은 민간 교육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벌여나가야 하는 것임을 신념으로 갖게 됐다.” 이런 그의 신념대로 운석은 한국에 돌아 온 천주교 학교를 중심으로 20여년간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다.그러던 운석이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해방 이듬해 1946년 천주교 대표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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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3]죽산 조봉암(下) 지면기사
1948년 5월 개원한 제헌의회엔 무소속이 85석이나 됐다. 죽산은 이들 중 소장파 72명을 결합해 무소속구락부(無所屬俱樂部)를 만들었다.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행동통일을 도모하고 균등사회 건설에 매진한다는 게 취지다. 언론인 이영석씨는 “미 군정은 당시 정보보고서를 통해 죽산을 무소속의 리더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죽산은 제헌의회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국민경제의 균형발전, 생활의 기본수요 보장, 토지개혁 등 경제조항을 포함하기 위해 노력했다.죽산은 초대내각서 농림장관을 맡았다. 그의 이력상 파격인사로 분류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엔 “이승만(李承晩)정권이 자신들의 민주성을 부각하기 위해 미 대사관과의 타협속에서 이뤄진 것”(박태균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이란 추측과 농정개혁에 대한 죽산의 기대, 한민당 견제 등 설이 분분하다. 어쨌든 죽산은 농림장관시절 숙명적인 토지수탈 관행에 메스를 들이대는데 주력했다. 농민이 부담없이 농토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토지개혁법을 농지국 주관 아래 성안하도록 독려했다. 반대를 누르고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농민의 권익을 지켜줄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법과 농민신문도 이 때 선을 보였다. 죽산이 그 짧은 6개월동안 이룩한 농림정책은 “민초들이 처음 땅을 갖게 됐다”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농민들에게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위협을 느끼는 세력도 많아 견제가 몹시 심했다. 결국 죽산은 직권남용과 부당한 예산집행으로 몰려 장관자리서 물러난다.1950년 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서 죽산은 별다른 지역구활동이 없었는데도 중앙정치무대 활약상에 힘입어 인천 병구서 여러 경합자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죽산은 이후 2대 국회에서 두번이나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죽산은 “대통령은 조금도 생각이 없다. 그러나 명색이 민주국가에서 이승만대통령과 경쟁할 사람조차 없다면 국민이 불쌍하다…(중략) 이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후보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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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2]죽산조봉암(上) 지면기사
1959년 2월 27일 오후 1시 50분께 대법원 대법정. 김갑수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판결주문을 읽었다. “피고인 조봉암을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전세룡, 이상두는 각각 징역 2년에 처한다.”침묵을 깨고 몇 명인가 대성통곡을 한 다음에도 방청석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변호인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온 국민의 주목을 받았던 진보당사건 재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뜻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벌어졌지만 소용없었다. 재심청구마저 기각당한 채 사형도 일사천리로 집행됐다. 그 해 7월 31일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예순의 나이로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분명 굵었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일각에선 진보당사건을 '권부가 저지른 사법살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수십년동안 역사의 진실은 묻혀진 채, 이데올로기의 올가미를 쓰고 간첩죄로 숨진 조봉암이란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이승만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정치거목' 죽산의 고향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다. 지난해 11월 강화문예회관 대강당에선 죽산 탄신 100주년과 서거 40주년을 맞아 추모사업회 주비위원회가 마련한 기념강연회가 열렸다. '한국정치사에서 본 죽산 조봉암선생의 위상', '죽산은 간첩이었나', '농지개혁법안의 마련과 죽산'이란 주제로 강연이 진행됐다. 이에 앞서 10월에는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이란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다. 전향 남파간첩으로 사건수사에 참여했던 한승격씨는 인터뷰에서 “진보당의 정강정책이 북한과 일치한다는 혐의는 억지”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다. 7월에는 '한국현대사와 조봉암 노선'이란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으며, 그의 일제시대 독립운동행적과 해방 이후 정치활동을 담은 전집 6권이 출간됐다. 죽산의 사면과 복권 청원에도 여야 정계인사들의 서명이 줄을 이었다. 모두 죽산의 대중적 복권을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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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1]어시장 지면기사
인천에 상설형태의 어시장이 들어선 시기 역시 '인천개항'과 맞물려 있다. 개항후 1880년대 말 무렵부터 인천거주 일본인들이 늘면서 수산물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생선을 위주로 한 일본 음식문화에 따라 생선소비량이 급증한 게 주요 요인. 일본은 그러나 생선공급량이 달리자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1887년 6월 어류가 풍부한 남양-강화 근해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포어(捕魚)제한규정'을 만들어 어로권과 함께 판매권을 따냈다. '근대식' 시설을 갖춘 어선을 앞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고기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당시 일본인들은 30여척의 동력어선을 투입해 인천 앞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그에 따라 어획량도 점차 늘었다. 하지만 수산물 유통구조는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0년 서울에서 내려온 정흥택씨 형제가 어물객주(수산시장)을 개설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이들은 내리(중구 내동)에 상점을 차려놓고 근해 어업자들에게 물량을 공급받아 독점판매한데 이어 1902년 신정동(중구 신포동)에 상설 어시장을 개설했다. 한옥형태로 지은 이 어시장에선 주로 행상인들에게 생선을 도매로 넘겼는데, 직접 가서 좋아하는 생선을 골라 사가는 일인들도 상당수에 달했다.'인천 한세기'저자 신태범박사(89)는 일제 때 어시장 풍경을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게를 메고 다니던 행상인들에게 생선을 통째로 사는 게 통례였지만, 일인들은 대개 어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횟감을 떠가거나 토막을 쳐서 사갔다. 특히 어시장엔 도미, 농어, 광어, 방어, 장어, 왕새우 등 일인들이 좋아하는 생선은 많았던 반면 숭어, 조기, 홍어, 준치, 병어, 갈치 같은 한국인이 즐기는 생선은 별로 없었다.”정씨 형제의 어시장이 날로 번창하자 일인들도 경쟁적으로 어시장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 중엔 1905년 정씨 형제 어시장 바로 앞에 문을 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고객들이 적어 어려움을 겪자 판매전략을 바꿔 일인들을 상대로 값비싼 선어만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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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90]송도유원지 지면기사
인천 송도유원지는 도심에 위락시설이 별로 없던 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 수도권 시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가족·연인과 함께 '뭍'에서 해수욕을 하며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인공백사장과 소나무 숲,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싼 유원지 뒷편 청량산 등이 어울어져 한나절 휴식처로선 그만이었다. 송도유원지는 또 우여곡절 끝에 지난 4월 말 다시 개방한 '아암도'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안겨주면서 인천인은 물론 수도권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경기도 안양시에 사는 조정문씨(67·만안구 박달동)는 “당일치기로 놀러갈만한 데가 마땅치 않던 시절, 송도유원지는 경인선이나 수인선 열차를 타고 가서 낭만을 즐기던 곳”이라며 “해수욕도 할 수 있어 하루 가족단위 나들이 코스론 안성맞춤이었다”고 회상했다.송도유원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공백사장을 만들어 해수욕장을 개장했는데, 그 조성시기는 일제 때인 19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미도 임해유원지와 함께 우리나라 관광지 개발의 '효시'였던 셈. 하지만 송도유원지 역시 일제의 경제수탈에서 비롯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일본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군사적으로 초강대국 대열에 진입했고, 결국엔 대륙침략의 야욕을 키우기 시작했다. 협궤열차로 잘 알려진 수인선 건설도 그런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 인천-수원-여주를 잇는 수인·수여선을 통해 경기도 내륙의 질 좋은 쌀 등 각종 곡식을 인천항으로 수송한 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수인선이 1937년 개통되자 일제는 미곡 이외에도 이용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송도역 인근에 월미도 휴양지와 비슷한 관광지를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송도유원지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일제는 특히 그 무렵 대륙침략 전단계로 군사 요충지였던 월미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월미도 위락시설들을 점차 폐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또 다른 유원지가 필요했는데,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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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9]국내 최대사학 선인학원의 시립화과정 지면기사
지난 94년 3월 1일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교육발전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30여년간 인천 지역사회에 파행과 분규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선인학원 산하 14개 학교가 한꺼번에 시립대학과 공립 중·고등학교로 탈바꿈 한 것이다. 이같은 선인학원의 시립화는 숱한 희생을 감수하며 전개한 눈물겨운 학생들의 투쟁과 불의에 대항했던 교수·교사·직원들의 용기, 고장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시민들의 의지가 일궈낸 합작품이었다.선인학원의 역사는 멀리 40년대 '성광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천에는 성광중학교(47년 설립)와 성광상업고등학교(54년 설립)를 운영하는 '성광학원'이란 조그마한 사학재단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심각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 이 학원을 인수한 이가 바로 현역 육군장성인 백인엽씨. 그는 58년 7월 이 학원을 인수한 뒤 65년 3월에 학교법인의 명칭을 '선인학원'으로 바꾸고 산하 학교의 교명도 형제·가족의 이름에서 따다 붙였다. '선인학원'이란 명칭은 백씨의 형 선엽씨의 선자와 자기 이름의 인자를 합쳐 지은 것이었다. 산하학교에도 선엽씨의 호인 '운산'을 비롯 백인엽씨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흥' 등을 교명으로 채택했다.선인학원은 출범과 함께 국내 사학 발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그러나 이런 양적 성장의 이면에선 선인학원의 파행과 비리에서 비롯된 '인천 교육의 불행'이 자라고 있었다. '선인학원시립화성공사'(96년 3월 1일 발행) 등에 따르면 선인학원의 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군사 정권의 보호 아래 대외적으로는 인근 주민들의 재산권을 불법적으로 침해하는가 하면 치외법권적인 횡포를 일삼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례로 학교부지 확장을 위해 도화동 언덕 위에 있던 중국인들의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기도 했는데, 이 사건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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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8]인천야구의 역사 지면기사
'인천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야구다. 개항 후 갖가지 서양문물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인천은 국내 야구의 시발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부터 '구도(球都)'로 불릴 만큼 야구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이 컸고, 실력 또한 국내 아마야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했다.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길버트(Gilbert)에 의해서다. 그가 황성기독교청년단 회원들에게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이어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단과 독일어학교팀 간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가 훈련원 마동산에서 개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인천 야구의 역사는 '웃터골 운동장과 한용단(인천이야기 27편 참조)에서 시작된다. 현 중구 전동 제물포고교 자리에 위치한 웃터골은 일본 강점기 시민의 설움과 애환을 달래주면서 사랑을 받았다. 넓은 평지에다 주위 기슭이 훌륭한 스텐드 구실을 했던 웃터골 운동장에선 일본인들이 2세교육을 위해 1935년 인천공립중학교를 세울 때까지 인천 유일의 체육공원으로 많은 경기들이 열렸다.당시 한국인들로만 꾸린 인천 최초의 야구팀 한용단과 일본인 쌀거래소 직원들로 구성된 미두취인소 소속 '미신(米信)' 팀과의 야구경기가 유명했다. 한용단은 인천남상업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가 붐을 이루자 경인선을 이용해 인천에서 서울 양정·배재·중앙·휘문 등의 고등보통학교로 통학하던 한인 학생들이 1920년 만든 친목단체였다. 그 때 활동한 야구인 가운데 배재학당의 함용하·장의식, 휘문고보의 김정식 등은 일본팀에 맞서 전력보강을 위해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1924년 한용단과 미신간의 주말 결승전에선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한용단이 우승을 놓치자 흥분한 응원군중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 2년여동안 인천에서 '야구금지령'이 내렸다고 한다. 야구에 대한 인천시민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잇는 대목. 훗날 '구도 인천'의 명성을 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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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7]일제수탈서 비롯한 국내 철강역사 지면기사
국내 철강회사의 연대기 역시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인천 등 항만을 중심으로 철강생산기지를 구축, 군수물자 조달 등에 나서면서 철강산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해방 당시 남한에 남은 철강회사는 가네부치공업이라고 불리던 인천의 종연공업(鍾淵工業)과 강원도 삼척의 시천(是川-고레카와)제철 등 두 곳. 종연공업은 1938년 1월 일본의 이연콘체른이 인천시 동구 송현동 1의 11 해안지역에 설립한 조선이연금속의 후신이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물자 수송난에 봉착한 일본이 이듬해 12월 조선이연금속을 종연실업에 양도하면서 종연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종연공업은 그러나 일본이 패망할 무렵 자금압박으로 설비와 기자재 등의 도입이 지연되면서 시스템 구축에 실패하고 말았다.광복 후 종연공업엔 현장직 사원 몇 명만 있었을 뿐, 철강산업의 기술을 체득한 한국인은 없었다. 한국인에게 기술이전을 회피한 일본의 정책 때문에 한국인 고급기술자가 있을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다 1945년 8월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종연공업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 회사명이 대한중공업공사(인천제철의 전신)로 바뀌었고, 상공부 직할공장으로 운영됐다.그 때 종연공업 인천공장에서 간부로 일했던 이강우란 사람이 각계 인사를 찾아다니며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적극 알렸다고 한다. 그는 대한중공업공사를 정부지원을 받는 국영기업체의 모태로 삼아야 한다는 점과 인천에 철강산업체계를 세워야 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이승만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특별지시를 내리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면 국가부흥사업을 펼쳐야 하는데, 우선 그 기초인 철강소재의 공급을 위해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며 대한중공업공사에 제강시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이에 따라 외화지원이 아닌, 전액 국고지원으로 평로공장 시설비 5천900만환을 투자하고 평로공장 시설비로 1억200만환을 융자했다. 또한 대한중공업공사의 관리인제를 폐지하고, 이사관리제를 도입해 1953년 5월 15일자로 초대이사진을 임명하면서 국영기업체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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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6]인천의 노동운동 지면기사
'대우자동차 사태'가 인천은 물론 전국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공기업화 요구에 나선 노동계는 올들어 투쟁의 강도를 더욱 높이며 노동자 권익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노동계의 움직임은 곧 인천 노동운동의 현 주소를 가늠케 하는 지표로도 인식된다. 노동계에선 “대우자동차의 처리방향이 인천 노동운동의 성숙, 또는 퇴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한다.항만하역과 공업도시로 대표되는 인천은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오늘날까지 이처럼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래서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천을 아는 출발점이기도 하다.일제 압제에서 풀린 1945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조합원수 55만명을 자랑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끌고 나갔다. 전평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지역이 바로 인천이었는데, 부두노동자가 많고 일찌감치 일제시대부터 산업체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일제때 조선노동당 재건조직 인천책임자인 이승엽은 인천노동조합의 '적색노조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전평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천의 조직장악에 신경을 썼다.이 시기에 두드러진 사건이 바로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직(주)의 파업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해고자 복직과 종업후 외출자유, 8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나중엔 결국 美 군정의 무장력투입과 다른 노동자 및 시민들의 인천시청 농성합류로 이어지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훗날 “전평을 와해하고 대한노총을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군정측 음모에 맞섰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전평외에 소위 '우익노조'의 활동도 활발했다. 1945년 10월 율목동에선 '인천자유노조'(조합장·임귀섭)가 태동했으며, 곧 대한노총 분회, 대한노총 인천지구연맹으로 연결됐다. 인천 노동운동의 연륜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항운노조도 이 때 닻을 올렸다. 46년 3월 태어난 항운노조는 인천부두노조(50년),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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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5]요리집과 권번 지면기사
(인천이야기-85,요리집과 권번(券番))개항 이후 인천의 대중음식문화는 일본인과 청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 한동안 이들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서울보다는 인천 개항장에서 더 많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청관거리의 중국음식점과 함께 이렇다 할 일본식 '요리집'이 인천에 가장 먼저 상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개항 초창기만 해도 인천의 음식점이라곤 주막과 목로술집, 국밥집, 색주가집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외국인들이 급격하게 늘면서 대형 전통 한식집과 일본 요리집, 중국음식점 등이 앞다퉈 들어서 음식문화를 이끌었다.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요리집은 기녀(妓女)를 접대부로 고용, 술과 음식을 내놓는 형태로 우리 술집문화와는 아주 달랐다. 당시 일본인들은 '어요리(御料理)'란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요리집'이라고 불렀는데, 요리는 일본어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 또는 '마련된 음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외래어인 셈.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끌었던 대표적 일본 요리집으론 청일전쟁 이후 중구 관동의 일산루(一山樓), 조일루(朝日樓), 신생동의 팔판루(八阪樓) 등이 꼽혔다. 이어 일본 요리집이 속속 들어서 정착하면서 술과 음식, 예기(藝妓)는 대개 요리집에서 맡게 됐다. 이 때 예기를 관리하던 권번(券番)을 설치하고 1902년엔 공창격인 유곽을 허가했다. 권번이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리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권번에선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명단을 요리집에 보내 단골손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했다. 물론 예약도 가능했다. 신입기생은 권번에서 채용했다. 인물이나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해 채용했으나 여자아이를 기생으로 양성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1910년을 전후해 중구 용동에 용동권번과 용금루(湧金樓·조선각 전신), 화월관(花月館), 신흥관(新興館) 등이 성업을 이뤘다. 지금도 용동 마루턱에서 신신예식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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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4]부평수리조합 지면기사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에게 쌀은 생명과도 같다. 그래서 농민들은 쌀 한톨이라도 더 수확하기 위해 피땀 흘려 농사를 짓는다.이제는 대도시로 형성되어 있는 부평·계양·김포 일원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드넓은 평야를 이루며 양질의 쌀을 생산하는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들판 사이로 한강과 그 지천(支川)이 흐르고 있어 농사를 짓기엔 더 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일제시대엔 이 '김포평야'의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들판 곳곳에 물길을 만들고 수리조합을 결성했다. 지금은 농업기반공사에 흡수된 한강농지개량조합의 전신 부평수리조합도 그렇게 생겨났다. 식민지 침탈수단의 하나로 태동한 셈이다.1900년대 들어 식량부족으로 대량의 미곡을 수입하던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사정이 더욱 악화되면서 소위 '미곡소동'에 직면했다. 그러자 식량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우리나라 등 식민지로 눈을 돌리게 됐다. 계획적인 증식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주요 쌀 수입국이었던 우리나라가 1919년 엄청난 가뭄사태를 겪으며 논·밭 작물에 중대한 타격을 입자, 그 여파는 곧바로 일본에 미쳤다.일제는 이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농촌 곳곳에 수리사업을 추진하면서 수리조합 증설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1920년부터 '산미증산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일제는 당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국의 농업법을 한반도에 이식하는 한편 대규모 농업개발시책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자국내 모순을 탈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일제는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기에 앞서 이미 1906년 4월 1일 한국정부로 하여금 도지부령 제3호로 수리조합조례를 만들도록 억압하는 등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1917년 제령으로 조선수리조합령과 부령으로 동시행규칙을 각각 발표함으로써 수리조합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기준을 정했다.그 때 기록에는 “경인철도 소사·부평 양 역 사이 북쪽으로 대규모 논이 발달되어 있으나 마땅한 용수원이 없고 매년 한강의 범람으로 막대한 피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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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3]연평도 조기 파시 지면기사
지난해 꽃게잡이 어로한계선을 놓고 남북간에 교전까지 벌어졌던 옹진군 연평도는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조기잡이로 유명했던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기파시(波市)에 대한 내용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연평도는 조기의 황금어장으로 널리 알려졌다.조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가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하지만 최대의 어획고를 자랑했던 1920년대엔 조기를 잡으려고 수천척의 배들이 연평도 앞바다에 모여들고, 또 섬에 수만명이 몰려 장사진을 이뤘다는 기록으로 미뤄 그 양이 얼마나 됐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옹진군향리지에 따르면 매년 4월 하순이면 동지나해에서 서식하던 회귀성 어종인 조기 수억마리가 알을 낳기 위해 흑산도를 거쳐 연평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기는 이 때부터 연평도를 기점으로 황해도 해주와 옹진반도 순위도까지 30-40일간 회유하면서 알을 낳게 된다. 바로 연평어장의 조기 성어기다. 그 무렵 연평 앞바다는 '물반 고기반'일 만큼 온통 조기떼로 넘실댔고 조기잡이 배들은 풍어가를 부르며 귀항했다. 당시 연평도로 모이는 어선수만 무려 3천-4천 척에 달했다. 이들 어선은 잡은 조기를 배에 가득 싣고 섬에 풀어놓은 후 또 다시 바다로 나갔다. 이같은 작업은 파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이처럼 연평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몰린데 대해 수산전문가들은 “연평도를 중심으로 한 옹진반도와 해주 연해의 물이 얕아 조기가 알을 낳는데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다 한강을 비롯 임진강, 예성강 등의 강물이 흘러드는 곳으로 부유미생물이 많고 한류와 난류가 겹치면서 산란 조건이 그만이었다고 한다.조기파시 때 연평도 해안선 일대는 온통 조기저장탱크였고 조기를 말려서 엮어놓은 두름으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기가 지천인지라 아무도 남의 어획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섬 전체가 조기로 뒤덮이는 장관을 이뤘던 것이다. 옹진군지를 보면 1924년은 연평도의 조기어업이 전성기를 이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수산회에서 펴낸 5월의 어황기록엔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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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2]상수도 시설 지면기사
인천지역 상수도시설에 대한 첫 기록은 1905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역인사 40여명이 물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 급수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처음엔 문학산계곡에 1일 1인당 38ℓ를 1만4천여명의 주민에게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규모가 너무 작아 실현을 보지 못했다.그후 같은해 8월 당시 내무성 기사로 근무했던 일본인 나까시마(中島)박사가 서울 노량진에 수원지를 설치, 인천 일대에 급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상수도매설공사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자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정부에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 흥업은행에서 1천만원을 차입하라고 권유, 이 차관으로 경기도에 수도국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 8월 10일 인천 이사청과 신부이사관에 수도철관매설공사를 위한 공문을 하달, 11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1910년 9월에 준공, 12월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관리는 인천부에서 맡았다.인천수도 철관매설공사에 사용된 관은 직경 20인치 크기의 주철관으로 30.8㎞ 구간을 통해 인천 송현동 배수지(수도국산)로 물을 보낸 뒤 각급 기관과 가정으로 공급됐다. 이후 김포에 비행장이 건설되고, 부평지역에 공업용지와 일제 조병창이 조성되자 이들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인천송수관은 분기급수를 시작했다. 결국 조병창 등에 엄청난 양의 물을 보내다 보니 급수량이 달려 주민들은 물부족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어 해방과 더불어 국제공항으로 발전한 김포공항, 연합군이 집단으로 주둔한 부평 조병창지구, 대형선박이 수시로 정박하는 인천항 등으로 인해 물부족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일반 시민들에겐 격일제로 급수를 제한했다.해결책 마련이 시급해지자 당국은 인천~부평간 500㎜ 송수관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계획으로 부평펌프장 가압능력을 1일 1만6천입방미터에서 2만4천입방미터로 늘리기 위해 170마력 펌프 3대를 증설했다. 또한 노량진에서 부평까지 900㎜ 기존 송수관을 활용하기 위한 보수공사에 들어갔지만 낭패의 연속이었다. 국내에서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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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1]대중교통(下) 지면기사
“오라잇! 탕, 탕….”버스문을 치며 출발을 알리던 만원버스 안의 여자차장(안내양)들. 아예 문에 매달리며 달리던 남자조수. 그러나 이런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돈을 냈니, 안냈니 코흘리개 중학생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풍경은 아스라히 사라진 추억이다. 지하철, 택시도 '서민의 발'에 끼게 됐지만 원조는 아무래도 버스가 아닐 듯 싶다.우리나라에 버스가 처음 영업을 시작한 기록은 1931년 3월, 경기도 용인의 남상학씨가 '경수 자동차부'란 회사에서 서울과 수원간을 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서울에서는 '경성 유람 승합자동차 주식회사'가 세워져 서울시내 명소나 고적을 도는 관광버스를 운행했다.1940년 전국 자동차수는 버스 1천156대, 승용차 1천311대, 트럭 3천693대, 기타 1천220대로 총 7천326대였다. 그러나 전시체제이던 일제가 트럭은 물자수송에, 승용차는 운행통제로 각각 묶었으며 버스도 연료의 통제, 운전사 징용 등으로 내모는 바람에 운송사업은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전국의 버스는 760대, 1949년 1천2대였으며 전후인 1954년에는 2천542대로 늘었다. 1957년 5월 교통부는 운송사업의 면허를 통제하는 소위 '5.8라인'을 발표한다. 신규로 운송사업의 허가나 증차를 일체 불허했는데, 그 배경을 보면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가 웬 말이냐”란 '애국적인 지적'과 1년가도 버스 한 번 탈 기회가 없던 농촌사람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버스나 트럭을 보고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런 여론을 의식한 지방출신 국회의원들이 정부당국에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1950년대 중반 국산합승버스가 선보인 이래 1960년대들어 선진공업이 만든 마이크로 버스와 河東煥자동차 등 지금의 버스와 유사한 형태가 나타났다. 마이크로 버스는 요즘의 마을버스와 비슷한 규모였다. 하동환자동차의 경우 가운데 문이 없었고 앞쪽과 뒷쪽에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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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0]북한 남포를 다녀와서(下) 지면기사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인상이 아주 좋은 관리인이 로비에 서성거려 '소파에 앉아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자 머뭇거리다 자리에 앉 길래 대뜸 남쪽사람과 얘기하면 지적 받는냐고 물었더니 “일 없습니다”라고 하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필자가 북한에 관심이 많아 대성동 마을에도 가봤다고 말하자 자기도 군대생활을 대성동에서 하였다며 빙긋이 웃는다. 이름을 물었더니 전주 이씨, 권세 권, 영화 영자라고 하고는 전주가 전라남도이냐고 물어 전라북도라고 말해 주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안내원이 왔다.오늘 저녁에 전기만 나가지 않으면 남으로 갈 컨테이너 선적이 완료되고 내일 오전에는 남쪽으로 떠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오늘 저녁에 남측에서 한잔 사라고 해 예측 한데로하고 생각하며 저녁은 우리가 내기로 했다.그런데 농담인지 필자에게 “남쪽에 있는 우선생부인께서 북측에서 우선생을 무사히 내려보낼까 하고 걱정하지나 않을 까요”하고 안내원중 나이가 많은 김선생이 말했다.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을 것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그런한 말을 했는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저녁 시간이 됐다. 털게로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김정일장군을 추켜세우기 위해 이런 사례를 들었다. 압록강하류에 삼각 지대의 섬이 있는데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나 이 지역 주민이 고립돼 위험하게 되자 김정일장군께서 헬리콥터를 띄워 구했다는 자랑을 하였다.그래서 나도 한마디하기로 했다. 보릿고시절부터 자가용을 굴리는 시대,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서도 설명했더니 조용해 졌다. 자동차로 시내관광을 제의했더니 규정상 어려우나 토론을 한번 해 보겠다고 긍정적답변을 주었다.3월20일이 밝았다. 유난히도 화창한 봄날이었으며 대동강물은 더욱 반짝이며 서해로 흘러가는 것 같다.아침을 먹고 어젯밤에 선적이 끝났느냐고 물었더니 벌써 배가 출항대기선에 나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한동안 시내관광하자는 말을 기다렸으나 다른 말만 계속한다. 잠시후 선착장으로 안내돼 보트를 타고 안내원들과 작별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