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고택기행·50·끝]에필로그

    [인천 고택기행·50·끝]에필로그 지면기사

    옛집 등 48곳에 스민 생활의 흔적 되짚어인천시 "근대 건축물 보존·활용방안 추진"문화유산 재조명 의미있는 성과 이끌어내기꺼이 문열어 취재에 응해준 이들에 감사주거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의식주가 언급되듯이, 주택은 인간을 위한 피난처 즉 셸터(shelter)로서 태곳적부터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진화하면서 인간의 생활욕구도 변화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그 그릇이 되는 공간에 영향을 미쳐 형태를 결정하는 동인이 되었다.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임창복 저, 돌베개 간) 중에서.집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닌 여타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집으로 인해 계절에 대처할 수 있게 됐으며 정착할 수도 있었다. 건축은 곧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하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100년 전 건축물은 몇 채 남아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의 쓰라린 역사가 배어 있다는 이유 혹은 개발 논리에 치여서 근현대사의 흔적들은 사라져 갔다.경인일보의 2016년 연중기획 '(인천)고택 기행'은 이 같은 아쉬움 속에서 기획됐다. 인간 삶의 궤적이 스며든,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과 우리 삶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말로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 thereafter they shape us)."를 꼽는다.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0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지을 것을 약속하면서 한 연설의 일부분이었다.'고택 기행' 취재팀의 5명의 기자들은 올해 48곳의 근대 건축물과 옛집의 문을 두드렸다. 옛집에 들어선 기자들은 해당 건축물에 스민 인간의 삶의 흔적을 좇았다. 한반도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가장 급격했던 인천의 모습을 지켜봤을 건축물과 그곳을 거쳐간 시민의 삶을 들여다 본 것이다.연재의 마무리에 대해 고민하던 11월 초 인천시로부터 반가

  • [인천 고택기행·49]부평향교

    [인천 고택기행·49]부평향교 지면기사

    한때 인천을 거느리던 도시… 행정·국방 주요 역할1127년 창건 인천향교처럼 조선시대 중·고등학교홍살문→외삼문→명륜당·동재·서재 순으로 배치그 뒤 대성전엔 공자 등 5성위·유학선현 25위 봉안현재의 인천은 과거의 '원인천' '부평' '강화' 등 3개 지역이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인천'이라는 지명은 1413년 조선 태종이 현재 인천의 일부를 '인천군'으로 명명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됐고, 강화군은 940년 고려 태조 23년 '강화현'이 설치되면서 강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부평의 이름은 고구려 때 주부토에서 통일신라 때 장제군,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940년 수주, 1150년 안남도호부, 1215년 계양도호부, 1308년 길주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310년 부평부, 1413년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가 된다.고려 현종 때 원인천 지역은 수주에 속했던 소성현이었다. 부평은 지방관이 파견됐던 고을이었던 반면, 인천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현재와는 다르게 부평이 인천을 아래에 거느리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당시 부평은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 인천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를 담당하는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사기지 도시 구축계획에 따라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 부평은 따로 도호부가 설치됐을 정도로 독립된 역사를 간직한 도시였다. 인천이 문학산을 주산으로 하는 해양 권역에 자리 잡은 곳이라면 부평은 계양산을 주산으로 하는 내륙의 넓은 평야를 거점으로 한다.이 때문에 부평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행정이나 국방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오래전부터 한양에 인접한 드넓은 평야지대인 데다 항구와 인접한 곳으로 바다와 내륙의 접점에서 벌이는 수많은 행정이나 사업의 본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인천 남구 문학동에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것처럼 계양구 계산동 부평초등학교에는 '부평도호부청사'가 남아있다. 남구 관교동에 당시 공교육을 담당하던 '인천 향교'가 있었듯이 계양구 계산동에는 '부평향교'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20일 인천 계양구

  • [인천 고택기행·48]관동갤러리

    [인천 고택기행·48]관동갤러리 지면기사

    한개 동을 나눈 일본식 연립주택 '나가야'개항이후 속속 들어선 목조건축물 중 하나도다 관장이 두 채 사들여 살림집·일터로2013년 인천 정착 자국 추억 떠올라 '애착'가급적 재료·흔적 살려 살아있는 집 구현1883년 개항 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도시 인천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삶의 터전이었다. 일제시대 인천부 청사로 쓰인 인천 중구청 인근에도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집들이 지어졌다. 중구 청사와 3~4분 거리의 '인천관동갤러리' 건물 역시 평범한 일본 사람들이 살던 생활 공간으로 지어졌다.처음 일본인의 손으로 지어졌던 이 집은 공교롭게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 한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도다 이쿠코(57·여)씨의 살림집이자 일터로 쓰이고 있다. 관동갤러리의 주소는 인천시 중구 신포로31번길 38(관동2가 4-10)로 갤러리 이름의 '관동(官洞)'은 도로명 주소를 쓰기 이전 이 집의 주소인 법정동 관동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로명 주소 시행으로 쓰이지 않게 될 '관동'이라는 지명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겠다는 도다 관장의 세심한 배려로 붙여진 이름이다.지난 13일 이곳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가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 골목인지 저쪽 골목인지 다시 확인해야 해 찾기가 쉽지 않았다.통상적으로 갤러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눈에 띄게 지어져 동네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지만 이 갤러리는 주변 주택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돌출 간판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외벽도 화려한 장식 대신 회색 철판으로 얌전하게 꾸며져 있다.정면에서 보면 왼쪽 건물이 도다 부부가 사는 살림집이고 오른쪽이 갤러리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이 부부는 왼쪽 살림집을 2013년 3월 인수해 살다가 다음 해 1월 오른쪽 집을 추가로 사들여 1년여의 공사를 거쳐 갤러리로 꾸몄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지만, 이 집은 6채가 나란히 붙어 지붕과 벽을 함께 쓰는 한 동의 건물로 지어졌다. 번호를 붙이면 부부가 사는 곳은 2

  • [인천 고택기행·47]애관극장

    [인천 고택기행·47]애관극장 지면기사

    정치국이 1895년 세운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협률사'가 전신외부 1960년 건축 모습 '그대로' 벽돌조 단층서 수차례 걸쳐 증축지역 학생들 만남의 장소로 이름 떨친 경동에 남은 유일한 극장1883년 개항 이후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일본·중국 등 인근 국가를 비롯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사람이 몰리는 곳에 음식점이나 술집, 공원 등 유흥시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1888년 응봉산 일대에 자리 잡았고, 대불호텔이나 공화춘, 중화루 등 대형 식당들도 이 시기에 차례로 문을 열었다.1901년 당시 내리교회에서 근무하던 존스 목사(한국명 조원시)는 회고록에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7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수 개의 교회단, 수 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933년에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해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이보다 앞서 인천에 자리 잡은 극장은 지금의 애관극장에 세워진 '협률사(協律舍)'다. 협률사는 당시 인천 최고의 부호로 불렸던 정치국(1865~1924)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의 최초 극장이자 공연장인 것이다.협률사는 1908년 이인직이 개관한 원각사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으로 알려진 조선 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협률사'(協律社·인천의 협률사와 한자가 다름) 보다 앞선 1895년에 설립됐다. 강덕우 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1895년 당시 인천 거주 일본인이 4천148명이었고, 서울은 1천939명이었다"며 "당시 극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울보다 빨리 인천에 극장이 생

  • [인천 고택기행·46]동일방직 의무실

    [인천 고택기행·46]동일방직 의무실 지면기사

    서정익이 적산공장이던 동양방적 인수 '동일방직' 설립한옥형태 단층 목조건물 불구 전통·서양·일본식 '복합'소설 '인간문제' 대동방적 모델이자 女노동운동의 산실직접연관 없지만 근·현대 노동사 매개체 보존가치 높아일제강점기 인천은 대규모 공업지대가 조성되면서 전국에서 일거리를 찾는 인파가 몰린 산업도시였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천의 주요 도시 성격 중 하나다.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 조선이연금속, 조선화약공판 등 일본기업의 대규모 공장들은 일제강점기 말 '군수보급기지'로 활용됐다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미군정청에 귀속됐다. 미군정은 해방과 함께 일본이 남기고 간 이른바 '적산(敵産)공장'의 운영을 한국인 관리인을 내세워 이어갔다. 이승만 정권의 적산기업 민영화 방침으로 이들 관리인이나 기업인이 적산공장을 인수했고, 상당수는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있던 일제강점기 대규모 방적업체인 동양방적 인천공장도 적산공장이 되면서, 1955년 당시 동양방적공사 이사장 서정익(1910∼1973)이 인수해 동일방직을 설립했다. 서정익 전 동일방직 사장은 1932년 나고야공업고등학교 방직과를 졸업한 일본 유학파이자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다.서 전 사장의 조부는 개항기 조선인 상권수호활동에 앞장선 상인단체인 '인천신상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서상빈(1859∼1928)이고, 아버지는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 이사를 지내며 일본인 기업주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한 서병훈(1888∼1949)이다. 한때 종업원 수만 1천600여 명에 달했던 동일방직은 최근 인천공장의 사업규모를 대폭 축소하긴 했지만, 인천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토종기업 가운데 하나다. 만석동 동일방직 인천공장 내에는 공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한옥 형태의 건축물이 있다. 195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건물은 신입사원 교육실과 의무실로 쓰였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다. 약 258㎡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인 동일방직 의무실은 우리나라 전통

  • [인천 고택기행·45]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인천 고택기행·45]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지면기사

    우물 적고 수질 나쁜 인천 개항이후 물확보 비상일본인들이 상수도 건설 본격화 하면서 세워져수도국산 위치 제수밸브 보호 콘크리트 시설물돔지붕·첨탑 장식 등 외부와 달리 내부는 '단순'송현근린공원으로 재탄생 관광 자원화 큰 의미상수도 시설은 근대 도시가 갖춰야 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이다.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시설인 송현배수지의 1908년 준공은 인천사(史)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었으며 타지역에 비해 수질 또한 나빴다고 한다.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 확보가 최대 숙원으로 떠올랐다. 일제 때 발간된 '인천부사'와 1973년 발간된 '인천시사'에는 개항 이후 인천의 물 사정에 대해 이처럼 언급돼 있다."한때 인천 상수도 시설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재정은 여의치 않아 문학산 계곡에 수원지를 마련하고 수도 시설을 하려 했으나, 그 규모가 너무 적다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선박 급수도 초기에는 풍도에서 하였으나 후기에는 북성동에 우물 5개를 파서 그 수요를 전담케 하였다."이 같은 노력에도 불편함은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전국적으로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인천 거주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상수도 건설 계획이 본격화됐다. 1905년 나카지마(中島銳治·1858~1925) 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 공사에 착수, 1908년 송현배수지 시설이 준공됐다. 이어서 한강 연안 노량진에 있었던 수원지 정수시설이 1910년 10월 준공돼 그해 12월부터 급수가 시작됐다.수원지는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 지역은 서울 4대문 안과 용산, 인천 등 3개 지역이었다.당시 인천부청 조사에 따르면, 수도가 공급된 지 2년 후인 1912년 말 인천시민 중 수도 혜택을 받은 가구는 2천143가구로, 전체 가구의 2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여전히 우물에 의존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급수 인구는 7만명에 달했지만, 노량진 수원지의 취수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영등포 지역의 급수를 위한 송수관 연결

  • [인천 고택기행·44]초연다구박물관

    [인천 고택기행·44]초연다구박물관 지면기사

    다도 교육 박영혜 관장이 매입 후 2015년 꽃차 박물관으로 문 열어리모델링 과정 상량문 발견… 서까래·대들보 오래된 집 짐작게 해2층 높이가 1층보다 높고 한 건물 안에 여러가구 밀집 일본식 민가1883년 개항과 함께 일본, 중국 그리고 서양의 문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인천의 곳곳이 채워졌다.인천항을 통해 들어 온 배에는 이방인뿐 아니라 그들이 입는 옷과 음식, 문화, 생활습관 등이 함께 실려있었다.우리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국의 문물이었지만, 인천을 찾은 이방인들에겐 모든 것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방인들이 들여온 문물 가운데 주거 문화는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주거 문화가 급격히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의 주거 양식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서양의 주거 방식과 결합해 정착했다.인천 개항장 일대에는 외국인 거류지별로 각 국가의 특색이 반영된 주택이 들어섰고, 지금은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 당시의 숨을 품은 일부 건물들만이 남아있다.특히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개항 때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자국식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이후 이들이 떠난 뒤 남은 주택들은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남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역사의 흔적이 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인천 중구 신포로 39번길 8-1(송학동 3가 5-38) 적산가옥 가운데 하나를 활용해 꽃차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초연다구박물관을 찾았다.성인 남성 무릎 높이의 시멘트 담장 한가운데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정원을 따라 벽돌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올라 박물관의 문을 열면 울긋불긋 꽃차들이 담긴 병으로 채워진 한쪽 벽면을 마주하게 된다.초연다구박물관은 인천에서 다도(茶道)를 교육하던 박영혜 관장이 지난 2014년 우연히 이 집 앞을 지나가다 발견해 매입하게 됐고, 내부를 다시 꾸며 지난 2015년 초 문을 연 공간이다. 건물 외벽은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나무로 외벽을 둘러 깔끔하다. 오래된 건물임을 알기 위해선 2층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 2층 천장을 살

  • [인천 고택기행·43]해광사(옛 화엄사)

    [인천 고택기행·43]해광사(옛 화엄사) 지면기사

    6개 종파 포교위해 절 많이 세워… 도시개발 과정 대부분 사라져개항장은 땅값 비싸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운 답동 일대 자리잡아한국 사찰과 달리 門 없이 진입… 대웅전 1990년대 철거돼 아쉬움전쟁 희생자 등 위패도 안치 "일본 사찰 배치 잘보여줘 관리 필요"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외국인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믿던 종교도 같이 들여왔다. 일각에서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가장 먼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종교였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 때문에 부산이나 원산, 인천 등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한 지역들은 외국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불교, 프랑스에서는 천주교, 미국에서는 감리교, 중국인들은 중국의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들여왔다. 이에 따라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에는 답동성당을 비롯해 내동성당, 내리교회, 중화 기독교 교회 등이 잇따라 세워지게 됐다.그중에서 가장 활발히 포교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 불교다. 당시 일본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이 당시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연관돼 있다.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유신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도 막부 정권과 오랜 세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을 후원했다. 이에 새로 만들어진 유신 정부는 당연히 불교계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불교 역사상 유례없는 탄압을 받게 됐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당시 일본 불교계는 정치권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한다. 해외 포교를 위해 포교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세를 염탐해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당시 해외 이주와 식민지 개척 정책을 펼치던 유신 정부와 불교계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진종·정토종·일련종·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인천 등 개항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파됐다. 이에 전국에는 이들 6개 종파에 의해 167개의 사찰이 설립되게 됐다. 당시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인천의 사정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일본은 철도와 도로부설, 토지조사사업 등 수탈을 위해 각종

  • [인천 고택기행·42]조선기계제작소 사택

    [인천 고택기행·42]조선기계제작소 사택 지면기사

    1937년 설립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 전신근무자 수천명 주택난 해소위해 공급한 숙소대부분 철거됐거나 일본식에서 한국식 '변형'송현·화수동에 간부·노동자·기술자 주택 형태조선인 노동력 수탈 근로보국대 합숙소도 의미일본 전시 노동자 주택계획 파악 재조명 필요인천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는 1930년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조선기계제작소, 동양방직, 도쿄시바우라전기 등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섰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인천으로 모여들었고, 일본인들도 공장을 경영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1940년대 군수공장 역할을 하면서 설비를 확장한 조선기계제작소에만 5천여 명이 일했다고 한다. 만석동, 화수동 일대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당시 관공서에서 직원과 일반주민을 위해 주택단지(관영주택)를 공급했고, 공장들은 노동자 기숙사 등 사택을 지었다. 1930~1940년대 등장한 공장 사택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철거됐거나 일본식 건물이 우리나라 건물로 변형됐다. 원형의 모습을 제법 간직하고 있는 몇몇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 있는 공장 사택들은 일제가 남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당시 인천의 산업형태를 가늠케 하는 근대산업유산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지난달 29일 오전 이성진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와 동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공장 사택을 답사했다. 다양한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이 눈에 띄었다. 조선기계제작소 사택은 송현동과 화수동에 간부급 직원이 살던 집과 노동자가 살던 집 등으로 나뉘어 남아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1937년 설립된 회사로 인천 만석동에 자리 잡았다. 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의 전신이다. 광산용 기계와 선박 기계를 주력으로 생산했고, 1943년 일본 육군의 잠수함 건조 명령으로 조선소로 전환하게 됐다. 공장의 확충에 따라 인력도 자연스레 증원됐는데, 이에 따라 동구 화수동과 송현동에 근로자 숙소 99동을 신축했다. 일본인 숙소는 54동, 조선인 숙소는 45동이었다.

  • [인천 고택기행·41]미쓰비시 줄 사택

    [인천 고택기행·41]미쓰비시 줄 사택 지면기사

    부엌·방 2개 등 이어진 형태… 우물·화장실은 공용아침마다 '뒷간' 전쟁에 옆집 코 고는 소리 다들려강점기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사택으로 지어져1942년 경영악화로 미쓰비시에 공장과 함께 넘어가조선인 직원 1천명 달했지만 임금도 제대로 못받아이후 미군부대 근무자·무명 밴드들 모여들어 '북적'인천시 부평구에 삼릉(三菱)이라는 지명이 있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동수역 3번 출구에서 부평2동주민센터 방향으로 5분 가량 걷다 보면 나오는 동네가 삼릉이라고 불린다.삼릉이란 일제강점기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 물자를 제작했던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한자어로, 현재도 이 일대에선 이 지명을 이용한 상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삼릉은 미쓰비시 기업의 로고인 '세 개의 마름모'를 의미한다. 지난 24일 오전 10시께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미쓰비시 줄 사택 일대를 찾았다. 2m 정도 높지 않은 지붕들이 줄지어선 이곳은 태풍이라도 불면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건물은 가로 10m, 세로 30m 가량 되는 넓이의 직사각형 형태로 이어져 10가구가 한 건물에 촘촘히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한 가구 당 30㎡도 채 안 되는 공간인 것이다. 주택 곳곳엔 무너진 지붕과 구멍 뚫린 외벽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자아내고 있었다.미쓰비시 줄 사택은 하나의 건물에 10개의 가구가 이어진 연립 건물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줄 사택(社宅)'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0개 가구가 살 수 있는 연립 건물이 10개가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사택은 87채가 전부다.이 건물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건물의 한쪽 끝 칸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해 둬 주민들이 이용했다. 또 공용 우물이 있어 지하수를 퍼 올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건물 내부를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가면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 하나, 다다미로 된 작은 방 하나 등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다.1955년 미쓰비시 줄 사택에서 태어난 김재선(61) 씨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