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0(끝)]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황윤걸(85)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다.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 안석리로 개편됐다가 1958년 온천군 안석리가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자수성가했다. 부친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본가가 있는 최씨네 집성촌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했다.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9]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中) 지면기사
8남매 둔 황인옥씨 부부 친아들처럼 챙겨평남부대·육군 복무하다 건강 탓에 제대부친 따라 몇년간 부평 벽돌공장서 일해당시 사택을 본적으로, 회사 주소와 일치브로커 통해 의정부 미군부대서 15년 근무이후 서울 수유리서 통닭집 열어 큰돈 벌어인천으로 터전 옮기자 장사안돼 다시 서울로1980년에 돌아와 우유 보급소·대리점 운영도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앞바다 섬에서 동키 평남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황윤걸(85) 할아버지는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에 왔다. 약 400명의 대원이 용유도에 왔는데, 이 중 절반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황윤걸 할아버지 등 나머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부대가 육군에 편입될 때까지 용유도 24인용 막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용유도에서 새로운 부모님을 만났다. 1911년생 황인옥 씨 부부다."부대가 주둔해 있으려면 주민들 협조가 필요하잖아. 면장도 지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이 마침 황씨야. 그래서 나랑 결연이 됐어. 부모가 된 거야." 황윤걸 할아버지는 "슬하에 8남매가 있었는데, 나까지 9명이 됐다"며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처럼 잘 챙겨주셨다"고 덧붙였다.그때는 용유도와 영종도가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염전과 농경지 조성을 위한 소규모 매립만 있었는데, 1992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대규모 매립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됐다. 영종·용유지역은 기존 토지 면적보다 매립된 토지 면적이 더 크다. '인천 중구사'에 따르면, 1990년대 국가사업으로 공항과 배후 신도시 건설이 이뤄지면서 4천813만5천㎡ 규모의 해안 매립이 시행됐다. 이 일대에서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조성, 영종2지구 개발 등 지금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돌다리가 있어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 전망대 아래쯤에 돌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뒤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8]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上) 지면기사
한달간 환자 시늉하는 등인민군 되기 싫어 도망다녀노동당원인 담임선생님과전세 따라 서로의 피신 도와사범학교 들어가 신분 세탁교사 생활하다 월남 성공취라도 평남부대 대원으로환경 열악 위험한 작전수행가족들 두고 내려온 탓전쟁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향 인근 부대에 잔류전쟁이 길어질 줄도 모르고1953년 6월 용유도에 도착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황윤걸(85) 할아버지. 1951년 11월 고향에서 피란을 떠났는데, 한국휴전협정 한 달 전에야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1951년 겨울과 1953년 여름 사이의 오랜 기간, 황윤걸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민학교 교사 생활, 유격대원 활동 등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살이었다.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녔다.한 번은 '인민군 동원 지도원'과 싸움이 붙었고, 목 부위를 크게 다친 것처럼 속여 한 달 동안 환자 시늉까지 했다.부친은 인민군을 속이기 위해 3일마다 한 번씩 동네 의원에 가서 아들의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유엔군과 국군이 황윤걸 할아버지 마을을 거쳐 북쪽을 향해 진격했고,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노동당원이었던 담임선생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피란을 가자니 도중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거 같고, 자기 집으로 가자니 잡힐 것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은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계셨거든. 낮에는 내가 인민군에 안 가려고 파놓은 땅굴에, 밤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다"고 했다.담임선생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에서 통행증을 여러 장 끊어 담임선생에게 줬고, 담임선생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그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 치안대 직인이 찍힌 통행증 5~6장과 함께 보자기에 고구마와 밤 등 먹을거리를 싸서 드렸지.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7]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연평도 30㎞ 거리… 할아버지는 서쪽 온동리에 살아젓새우 많이 잡혀 말리거나 젓갈 담가 국내·외 유통외침 방어 진보 위치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용매도 회담 앞두고 터진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망둥어에 소주한잔으로 여생 보내 "신도가 제2 고향"차학원(76) 할아버지의 고향 용매도(龍媒島)는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이다. 과거부터 황해도 해주의 일부 지역이었던 용매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 때에는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중종(1531년)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해주목(海州牧)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설치됐고 그 영역은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 69리요,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다'고 했다. 용매도는 1938년 해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황해도 벽성군이 만들어지면서 벽성군 소속이 됐다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 놓이면서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소속이 됐다. 연평도와는 30㎞ 떨어져 있다.1942년생인 차학원 할아버지는 벽성, 연백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청단군이지만 복잡한 이력이 귀찮은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이라 대답했다. 1986년 이곳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용매도민회도 회칙에 공식 명칭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도민회'라 칭하고 있다.용매도는 동쪽의 진동리(鎭洞里)와 서쪽의 온동리(溫洞里), 섬 중앙의 한동리(寒洞里) 3개 마을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한동리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동산과 온동산이 황룡(龍)이 뒤틀어져 암룡과 숫룡이 맺어 있는(媒) 모양이라고 해 용매도라고 칭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온동리에서 살았다. 온동리는 300가구에 1천300여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온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여러 부속 섬 중에 육읍도(陸邑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곳이다. 겨울철에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6]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中) 지면기사
1960년대 초반 사진 DP점 '미광사' 취직숙식 해결돼 현상·인화작업 배우며 일해입대후 통신소대 배치 엉뚱한 지시 받아'남양사'로 불법 파견… '사진 업무' 수행결국 군인신분 민간인 행세로 체포 당해이후 베트남전 앨범제작위해 파병길 올라맹호부대 전쟁사 담긴 앨범 아직도 '간직'제대후 DP점 운영하다 목재사에서 새삶용매도 출신 실향민 차학원(76)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려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땅 9천900㎡을 맨손으로 일궜지만, 정작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땅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인천 도심으로 넘어가 싸리재에 있는 사진 DP점(店) '미광사(美光社)'에 취직했다. 'DP점'은 현상(現像·Developing)과 인화(印畵·Printing)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상은 필름에 담긴 잠상(潛像)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고, 인화는 종이로 사진을 뽑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E(확대·Expansion)'까지 더해 'DP&E'라고 했지만, 흔히 DP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DP점은 현상·인화만 하는 곳이라 가게에서 사진을 직접 찍은 뒤 현상·인화를 해주는 사진관과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된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에 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뭍으로 나왔다.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 최인진이 1999년에 낸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 신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수용한 것은 1882년 개화기 청년을 이끌고 중국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이 처음이다. 사진이 도입되기 전에도 '사진'이라는 말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9권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달마대사(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5]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上) 지면기사
작은 섬에 황해도 육지 피란민들 몰려 새우잡이 배로 수송 1·4후퇴때 부모와 동생들 먼저 떠나고 곡식 지키다 노모 모시러 온 청년따라 노모 대신 '작은 배' 타고 南으로 거처 옮겨 다니느라 국민학교 4학년만 4번 다녀 천주교 지원으로 '공생조합' 만들어 수십만 평 간척"매일같이 돌·흙짐 지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인천서 정년퇴직 후 돌아와… 당시 땅은 다 팔고 없어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닿는 섬 신도(信島). 일명 '삼형제섬'이라 불리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시도(矢島)·모도(茅島)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신도선착장을 빠져나와 차량으로 1㎞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도4리다. 올해 10월 기준 57가구, 인구 126명의 작은 마을 신도4리에 펼쳐진 너른 논과 폐염전이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의 실향민 차학원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고 신도에 정착해 맨손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2년생 말띠, 일흔 여섯이다.전쟁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발발했다. 황해도 육지의 피란민들이 용매도로 밀려왔고 작은 섬은 난민촌이 됐다. 용매도 청년들은 '난민수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우잡이 배로 난민들이 원하는 곳까지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등 남쪽 섬과 군산, 목포 등지로 수송했다.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용매도민회가 1997년 발간한 '용매도지(龍媒島誌)'는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는 가족과 자식을 찾는 소리,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는 비명소리, 먼저 배에 오르려다 바닷물에 빠져 텀벙대며 허우적거리는, 어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해변가에 버려둔 채 홀로 배에 오르는 비정한 장면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쟁 직후 용매도에는 북한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 조직은 상주하며 사상 교육을 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는 "선생들이 수업은 안 가르치고 맨날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가르쳤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조국, 우리는 자유조선 꽃다발에 아 그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4]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선교회활동 덕에 2003년 조평통 초청 '방북' 생존 알고도 밝히지 못해 어렵게 만남 성사신평휴게소서 재회 어릴적 얼굴 없어 '어색'동생이 할아버지 목 뒤 큰 점 알아보고 "확신""당시 단천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전씨 집성촌서 가장 큰집 농사도 짓고 '유복''지하의 박물관' 광산과 수력발전소로 유명'고향의 맛' 가자미식해는 지금도 즐겨먹어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는 2003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이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정식 초청을 받아 평양 등지를 방문했고, 꿈에 그리던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폭설로 도로가 막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고향 땅은 밟지 못했지만, 함경남도 함흥과 원산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여관인 '신평휴게소'라는 곳에 가서 사촌동생을 만났다. 피란 나올 때는 생존해 있었던 부모님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동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생사라도 알게 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진성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부모를 기리는 추도 예배부터 드렸다. 그동안에는 생사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부모님을 추모(追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할아버지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활발한 사회활동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천세광병원에서 나온 뒤에도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한민족통일선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단체가 북한 양로원, 고아원 등에 다년간 지원한 고마움의 표시로 조평통이 할아버지 등 4명을 공식 초청했다. 할아버지는 "기도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 따른 결과로 1985년부터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게 된 실향민은 전체로 따져봤을 때 극소수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지난해 발간한 '이산가족 70년(1945~2015)'을 보면 상봉을 요청한 이산가족 13만 명 가운데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실제 상봉의 기회를 가진 사람은 5천 명 내외로 전체의 4%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3]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中) 지면기사
1960년대 동부동장 맡아 공직생활 '첫 발'노점상 계도·장마철 굴포천 범람 애먹어10년뒤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으로 새출발지역 첫 CT 도입 등 '대표 의료기관' 성장병원비 비싸 진료 못받던 환자들 안타까워1982년 세광병원 창설멤버로 참여하기도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88) 할아버지는 30여 년간 인천의 동사무소 행정과 의료 현장 최일선에서 일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천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으로 볼 수 있는 인천기독병원(중구 율목동)에서 사무장(총무과장)으로 일하다가 인천세광병원(남구 주안동) 창설 과정에 참여한 할아버지는 1970~80년대 인천 지역의 의료환경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기억의 창'이기도 하다. 인천지역의 의료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기간 의료행정 경험은 소중한 사료가 된다.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동 사무소 동장으로 행정 일을 시작했다. 1961년 부평1동 동부동(현 부평4동)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동부동은 부평시장 등 상권이 발달해 1960년대 부평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다른 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동부동이 컸다"며 "직원 수도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부평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7년 발행한 '부평사'를 보면 1962년 12월 경기도 인천시 부평출장소 관할인 부평1동 동부동은 면적이 2.253㎢이었고, 3천121가구, 인구수가 1만6천857명이었다. 부평 지역 다른 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부평시장은 1962년 공설상설시장으로 설치됐고, 계속해 번창해 1971년 5월에는 사설시장인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부평자유시장의 대지 면적은 1천201㎡, 건평이 1천756㎡, 점포 수가 47개였다. 부평시장의 경우 미군부대와 연결돼 있었고, 1973년 미군이 대대적인 철수를 한 뒤에도 부평수출공단의 근로자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성황을 이뤘다. 휴일이나 명절 때면 '궤짝에 돈을 담기 바빴을 정도'로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당시 동 사무소 동장은 새마을운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2]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上) 지면기사
마지막 배 '매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거제로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같은 배 타고 피란몇십리 걸어 도착 "하룻밤 묵었다면 잡혔어""기중기 달린 어망에 담겨 승선" 증언 눈길장승포 초교·어망창고에 머물다 자원 입대대구 육군본부 행정병때 송해와 함께 근무부대행사 때마다 남다른 입담 자랑해 기억제대 후 부평서 결혼 60년 세월 떠나지 않아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전진성(88)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을 나왔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1만4천여명)을 구한 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를 보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중 부산, 일본 등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날에는 인천항에 들어와 탄약, 탱크 등을 해군 상륙함정(LST)에 실어줬다. 흥남철수 당시에는 부산에 제트기 연료를 운반한 뒤 작전에 투입됐다.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이 배를 탔고, 경남 거제에 온 지 2년 만인 1953년 1월 문 대통령을 낳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와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군사전문가들은 흥남철수작전을 현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Operation Dynamo)과 비교한다. 덩케르크 작전으로 33만8천명의 영국, 프랑스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는데, 흥남철수작전으로는 유엔군 10만 명뿐만 아니라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은 민간인 10만 명도 구출됐다. 두 작전은 모두 흥행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는 국내에서만 2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흥남철수작전은 역대 2위 누적 관객(1천420만명)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
-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1]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용당포항 조성 이후 1930년대 고속성장누정 '부용당' 위치한 도청 인근에 살아황해도 행정중심이자 최대 '조기' 산지뱃길 30㎞ 연평도, 인천 편입전 해주권평양과 함께 '냉면 본산'으로 꼽히기도김구·안중근 고향… 장길산 주요 무대소설 속 인물·상권 남·북이 얽히고설켜실향민 호성신(81)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도청 소재지 해주시(海州市)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황해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뉘었고, 도청도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에, 황해남도는 해주시에 따로 뒀다.하지만 호성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황해도 실향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북도'와 '남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6년 당시의 해주는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해주 남단 바다인 용당포(龍塘浦)에 근대 항만을 조성하는 축항공사가 마무리된 1930년 10월 이후부터,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같은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용당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수탈기지'가 됐기 때문이다.항만 조성에 이어 용당포항을 중심으로 황해도지역 철도망이 해주에 집결했다. 일본은 용당포항 조성 이전까지 황해도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이나 평안도 진남포를 통해 수탈해갔다.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를 보면, 해주 인구는 1930년 2만3천820명에서 1935년 3만447명, 1940년 6만2천651명으로 급증했다. 1930년대 인구 증가율로만 따지면 162.6%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살던 해주시 선산동도 황해도청이 멀지 않은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수였다고 한다."여기저기 건축 공사가 많아서 아버지 목수 일도 호황이었어. 논밭은 시내 외곽으로 가야 볼 수 있었고, 우리 동네는 기와집 촌이었어. 도로가 닦이면서 동네에 오거리가 생기기도 했지. "당시 황해도청은 옛 해주읍성 자리인 부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