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0·끝)에필로그]악기·무대 다 바뀌었지만 우리가 연주한 '우리 음악'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0·끝)에필로그]악기·무대 다 바뀌었지만 우리가 연주한 '우리 음악' 지면기사

    장구·거문고 등 중세까지 주체적으로 외국과 문물 교류했던 선조들개화기 들어 선진화 움직임에 일제 탄압… 전통 문화 설자리 빼앗겨인천 중심으로 시작된 근대음악 전파, 희미해진 기록·흔적 되짚어봐밀려드는 외래물결 자주적 수용 '해법' 100여년 역사속에도 고스란히 우리나라는 여러 번 외래음악을 수용했다. 고대에는 서역(西域) 음악을, 중세에는 중국 음악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에는 서양 음악과 접촉했다. 고대에는 불교가, 중세에는 유교가, 근대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외래 음악을 전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문화는 종교라는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중세까지 우리의 음악 교류는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일례로 중앙아시아의 음악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장구와 거문고를 창안했다. 인도 장단인 딸라(Tala)는 우리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등으로 유입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장단으로 분화했다. 우리 조상들은 외래음악을 수용하고 향악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세종대왕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궁중무용음악을 만들면서 외래음악인 고취악을 참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백제의 기악(技樂)은 외래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해 새롭게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기악이란 가면을 쓰고 연행하는 것으로, 백제는 기악을 중국 오나라에서 들여와서 체화한 후 일본에 전한 바 있다.근대에는 우리 음악과 체계와 사상적 기반이 완전히 다른 서양의 음악이 전래하면서 수용자에게 가해지는 파급력과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것을 학습해 빠르게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까지 가세하며 주체(반성)적 인식 없이 서양 음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도 일조했을 것이다. 더해서 우리 고유의 것을 탄압한 식민지시기의 일제로 인해 우리 음악은 설 자리를 잃는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수학과 합리성이 극대화된 서양 음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난 연유로 볼 수 있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9)]우리 음악의 비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9)]우리 음악의 비전 지면기사

    50여년동안 354차례 정기연주회 연 인천시향초창기 낭만주의 전반기 작품 주로 무대올려최근 20세기곡 초연… 지휘자·규모따라 변화경인일보는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 기념일이었던 2016년 6월 1일에 맞춰 시향이 가장 많이 연주한 작품을 조사한 바 있다. 인천시향 50년의 행보를 짚어보려는 게 기사의 의도였다. 초청 연주회와 송·신년 음악회 등 특별 연주회는 배제했으며, 50년 동안 354차례 열린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 1회 이상 정기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은 82개였으며, 그중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12회로 가장 많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11회였으며,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브람스 '교향곡 4번', 드로브자크 '교향곡 8번'과 '9번, 신세계'가 10회로 뒤를 이었다. 창단 초기 규모가 크지 않았던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등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2대 상임지휘자인 임원식(1919~2002)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처음으로 연주하면서 레퍼토리 확대를 꾀했다. 4대 지휘자인 금노상(66)이 부임하면서 4관 편성으로 거듭난 인천시향의 레퍼토리는 더욱 넓어졌다.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말러와 R. 슈트라우스를 선보였으며, 20세기 작곡가들인 버르토크와 쇼스타코비치, 오르프의 작품 등을 인천시향이 초연했다.인천시향 50주년 기념 연주회로 열린 제354회 정기 연주회에선 정치용 당시 예술감독이 R.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를 인천시향 초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 부임한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은 올해 교향악 축제에 인천시향과 말러 '교향곡 5번'으로 참여하는 등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시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인천시향이 100주년을 맞았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8)]연주회 공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8)]연주회 공간 지면기사

    창극·영화 상영하던 '국내 첫 극장 협률사' 등 1920년대 연주회 선봬공회당·시민관 바통 이은 시민회관, 1980년대엔 민주화 항쟁 장소로문예회관을 비롯 송도·부평·청라 곳곳에 확산… 다채로운 무대 기대1743년에 창단한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er)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이다. 당초 12명으로 시작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늘었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도 증가하면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그로 인해 카페로 연주회 장소를 옮겼으며, 이도 부족하게 되자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게반트하우스(의복협회 회관)로 옮겼다. 이와 동시에 단체의 상주 공간이자 오케스트라의 명칭으로 확정됐다.1884년이 되어서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 게반트하우스가 지어졌다. 뛰어난 합주력과 그에 상응하는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어서 지어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와 보스턴 심포니홀 또한 게반트하우스를 참조했다.게반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1977~1981년에 개축한 것이다.제물포를 통해 서양음악이 도래한 이후 인천에서도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20세기 초반 인천에서 연주회는 주로 교회와 극장 등에서 개최됐다.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1955)에 따르면 인천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공연장은 정치국이 1894~1895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협률사(協律舍)이다. 협률사는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으로 일컬어진다.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7)]합창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7)]합창 지면기사

    내리교회 성가대를 시작으로 市합창단·호산나 등 민간으로 전파음악계 거장 작곡가 최영섭·윤학원 감독 종교 활동하며 영향받아1970년대 '메시아 연합 연주' 단체들, 2016년 대축제로 다시 뭉쳐40~50대의 향수 불러일으킨 '…궤적'展, 역사적 관점으로 재조명전시회를 찾았던 음악에 관심 있는 40~50대 이상의 시민들은 전시회 자료들을 보며 "내가 몸담았던 합창단이다", "내가 이 곡을 불렀었지"라고 말하며 과거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전시 기획을 총괄했던 이주영 인천문화재단 개항장플랫폼준비본부장은 "전시회 제목에 나와 있듯이 '궤적'의 의미에 맞춰서 역사적 흐름을 조망하게끔 구성해야 했는데, 자료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면서 "인천 합창의 역사와 함께 인천 합창을 알리는 단초를 제공했던 전시회로 의미가 있었다"고 돌아봤다.전시회를 통해서 확인되는 인천 합창의 역사와 발전 과정은 그 자체로 '인천 문화'였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인천 중구 내동의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첫 개신교회다. 예배당에서 찬송가가 불리고, 이후 교세가 번창하면서 교회 안의 찬양이 민간으로 퍼져나가면서 '인천 합창 문화'가 구축됐다.내리교회 성가대는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가며, 지난 연말 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를 개최했다.(1월 4일자 9면 보도) 또한, 창단 연도가 오래된 합창단들의 건재와 함께 전쟁 후 지역에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90), 국내 합창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윤학원(81) 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등은 '인천 합창 문화'의 결실들이다.개신교 신자였던 최영섭과 윤학원은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최영섭은 내리교회 찬양대를 이끌며 '메시아'를 수차례 지휘했고, 윤학원 또한 변성기 이전까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자연스럽게 합창을 접한 후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52년 내리교회 성가대원이 주축이 돼 인천시합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6)]오케스트라, 시립교향악단 창단까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6)]오케스트라, 시립교향악단 창단까지 지면기사

    상륙작전 직후 최영섭 선생구국대 학생합창단서 지휘 '첫발'정훈관현악단·애협교향악단 등시향 모체가 된 단체로 보폭 넓혀전 편('작곡가 최영섭')에서 밝혔듯이 최영섭 선생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방공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서 포탄 맞은 인천 시내를 돌아봤다.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휘봉을 잡게 된다. (1월 11일자 9면 보도) 당시 선생은 상륙작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 사회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창영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들을 찾았다고 한다.신흥동 쪽을 지나는데, 인근의 장로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구국대 학생합창단이라는 완장을 두른 학생 40~50명이 찬송가를 4부 합창으로 부르고 있었다.지휘하던 젊은 사람이 최영섭 선생에게 다가와 누군데 유심히 지켜보는지 물었고, 선생은 작곡을 전공한 사람이며 화음이 잘 맞지 않는 합창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다고 소개했다.자신보다 지휘에 대한 이해가 클 것으로 여긴 젊은 지휘자는 간곡히 최영섭 선생에게 지휘를 부탁했다.선생은 고사를 거듭하다가 수락하게 된다. 최영섭 선생과 합창단은 2개월 정도를 매일같이 연습했으며 이를 통해 제대로 된 합창단으로 변모한다.이후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 모두 어려워진 사람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게 된다.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최영섭 선생은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보폭을 넓혀서 활동을 벌인다.결과적으로 지역 오케스트라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은 활동들이었다.전쟁 후 선생이 지휘한 육군정훈관현악단과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와도 같은 단체다.지역인재 토대 조례 승인 한달새1966년 시민관서 창단 연주회1·3대 상임지휘자 지낸 김중석"거쳐 간 모두가 시향의 역사"이에 앞서 인천관현악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이 1945년 창단 이후 2년 후인 1947년 12월 13일 인천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인천영화극장과 애관극장 등에서 연주회를 이어갔다. 인천관현악단은 김기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5)]작곡가 최영섭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5)]작곡가 최영섭 지면기사

    인천서 서울로 통학하며 음악 배워6·25 혼란속에도 시민·軍 위문펼쳐정전후엔 교향악단 지휘·교육 활동1961년 '그리운 금강산' 전국민 사랑지난해엔 90세 기념 공연·헌정식도"강화에 돌아가 사랑 보답하며 살것"지난해 마지막 달의 지역 음악계는 1929년 11월 28일 강화도에서 태어난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90세 생일을 기념한 연주회와 이벤트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예술가곡보존회와 K클래식 운영위원회 주최로 12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기념 음악회를 시작으로, 12일 인천 엘림아트센터에선 인천문화재단과 (사)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콘서트 '작곡가 최영섭,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를 개최했다.두 음악회 모두 대표작인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해 최영섭 선생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70여년에 걸쳐 구축된 선생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것이다.새얼문화재단은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의 메인을 '그리운 금강산'으로 장식했으며, '그리운 금강산' 연주 전에 "작품을 통해 고향 인천을 빛내고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한 선생에 대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은 각각 준비한 공로패를 증정했다.연주회 후엔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최영섭 선생을 기리는 '장미 헌정식'을 개최했다.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지용택 이사장은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것이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미 헌정식'을 기획·추진한 바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훈훈한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기자가 최영섭 선생을 처음 뵌 건 2007년 8월이었다. '인천인물 100人'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원으로서 선생을 인터뷰했다. 기사는 그해 8월 29일자 9면에 게재됐으며, 후일에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4)]한국전쟁기와 그 이 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4)]한국전쟁기와 그 이 후 지면기사

    내리교회 성가대, 1954년 '헨델 명곡' 국내 첫 완주혼란기 악보 필사 열정… 작년 28회째 무대 이어가인천상륙작전뒤 고향 돌아온 음악가들 '승리 염원'9·15수복 기념 '개선 대합창' 등 시대반영 연주회전후 최영섭 등 '애호가협' 중학생 백건우 협연도'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가 성탄절을 사흘 앞둔 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됐다. 내리교회 메시아위원회가 주최·주관한 연주회에선 헨델(1685~1759·독일)이 280년 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선보였다. 김종현의 지휘 하에 150여명으로 구성된 내리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대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해내며, 성전을 메운 청중의 갈채를 이끌어냈다.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는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2월 22~23일 이틀에 걸쳐 우리나라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내리교회 성가대는 한국전쟁 후에 처한 혼란기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전체가 빈곤의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지만,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의 완성 후 성가대원들의 노력으로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연주회(지휘·김춘하)가 열렸다. 2년 후에 개최된 제3회 연주회에선 후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인천 출신 음악가 최영섭이 지휘하기도 했다.이후 매해 연주회를 여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서 1986년까지 6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이어졌고, 지난해 28회째 연주회를 선보인 것이다.인천에서 '메시아' 전곡이 초연되기 직전이었던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역에선 음악회가 이어졌다. 국군과 연합군이 1951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한 이후 예술가들은 고향으로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3)]해방이후, 지휘자 임원식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3)]해방이후, 지휘자 임원식 지면기사

    자주적인 민족주의 음악 '화두' 역동적 시기남한 단독정부 수립후 분리공간서 남북 갈려의주 출신 임원식 하얼빈·동경음악학교 거쳐1946년 첫 고려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활동美 줄리아드음대 유학후 KBS 교향악단 창단1984년부터 인천시향 7년간 이끌며 기량 높여국내 음악학자들은 우리 음악사에서 해방공간(1945~1948)은 직후의 분리공간(1948~1950)이나 직전의 식민공간 보다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치하에선 일본과 서양의 음악언어를 익혀 지배권력을 형성한 식민주의자가 민족 공동체 구성원에게 식민지 언어로 의사소통하게 했다. 반면 해방공간에선 민족적 양심선언이라는 윤리성을 제기해야 했다. 체제분단이 굳어져 가는 냉전체계를 극복하고, 우리 음악에 대한 자주적 인식이 대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크게 훼손된 우리 음악언어를 자주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해방공간 우리 음악계의 과제였다. 이처럼 당시 민족음악론은 윤리·정치적인 면과 함께 미(美)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논의된 민족음악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각각 친미와 친소로 나눠 각자 사상에 부합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하는 길에 놓였다. 때문에, 분리공간은 훼손된 민족 정신과 정서의 정화 작업을 요원하게 만든다. 더해서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행보를 편 민족음악론자들은 월북·잠적하거나 체포·구금(처형)당하게 되고, 민족주의 음악언어는 금기어가 된다. 대신 새로운 정부에 편승한 음악인과 단체가 전면에 나선다.그 시기에 인천 음악계의 움직임은 자세히 살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 열린 음악회들이 신문 등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1945년 10월 이재민 돕기 음악회가 개최되고, 이듬해엔 영화학교 개교기념 음악대회가 열렸다. 또한 각종 현상음악회(콩쿠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가 열리고, 서울관현악단과 이화여대 합창단의 인천공연도 개최됐다. 1949년 최영섭 작곡발표회와 1950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인 인천교향악단의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2)]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2)]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지면기사

    '엡윗청년회' 인천 내리교회서 최초 결성을사늑약 항의시위 해산…1916년 재조직이후 국악연구단체 '이우구락부' 멤버로인천광역시는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인천역사문화총서 74)을 간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는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의 사실들이 담겼다. 간행 이후 시는 해당 건물이나 장소에서 자체 개발한 상징 아이콘 현판식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 시는 인천 중구의 내리교회에서 현판식을 개최했다.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린 자리였다. 더불어 '엡윗(Epworth)청년회'에 대한 현판식도 함께 열렸다. 엡윗청년회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한 감리교회 청년단체이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출생지가 엡윗이었다. 국내에서 엡윗청년회는 1897년 중앙 조직을 갖췄다. 이후 지역 교회로 전파되는데, 가장 먼저 엡윗청년회가 생긴 곳이 인천 내리교회였다.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게 빌미가 돼 엡윗청년회는 1906년 해산한다. 1916년 재조직 후 이전 회원에 신규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활동했다.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에 '인천엡윗음악강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인천남자엡윗청년회 음악부가 주최한 내리예배당 강연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사 상에는 회원과 함께 일반 시민의 참여도 독려하고 있다. 1920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을 펴내기도 했던 인천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우구락부는 우리 음악 연구와 공연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 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 기사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우구락부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지면기사

    조선시대 국가서 궁중의식 음악·춤 등 집중훈련갑오개혁후 관기 사라지고… 일제하 '권번'으로공창제 등 이미지 왜곡 불구 일부 '아이돌' 부상중구 용동권번 출신 장일타홍·이화자 등 유명세1930년대 민요·가요 레코드 녹음… 재조명 필요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바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가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고일 著 <인천석금> 중에서조선의 기생((妓生)은 악(樂)·가(歌)·무(舞)·시(詩)·서(書)·화(畵)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대변하는 예술가였으며 자유인들이었다.이들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돼 오늘날 '예술 영재교육'과도 같은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물론, 산술과 해외 문화까지 두루 섭렵했다.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기 제도가 사라졌으며, 일제는 기생을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 지었다. 또한 기생에게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하라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1915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이때까지만 해도 기생은 독립 자금을 몰래 마련해 전달하고, 지역 학교 신축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해 쾌척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생기면서 이들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지면기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지면기사

    국내 첫 서구식 교육기관, 1892년 영화학당순수 민간학교 첫 설립은 1903년 제녕학교각각 영화초교·창영초교로 현재까지 명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달 중순 전국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해마다 그렇듯 이른 시간부터 수험장 마다 배치된 각 학교 후배들은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선배들의 '수능 대박'을 기원했다. 후배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저마다 각종 구호와 힘찬 노래들로 응원전을 준비했다.(11월 15일 인터넷 보도) 이른 아침 시간에 모인 후배들이 목청껏 부르는 각 학교의 교가(校歌)들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학교의 모든 기를 모아서 응원을 보내니 힘을 내서 시험 잘 치르고, 학교의 이름도 널리 알려달라'는 바람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정신을 반영한 교가는 학생들로 하여금 애교심과 단결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학교의 교육관도 담고 있다. 교가는 학교의 의례나 체육대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때문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를 떠올리며 교가를 읖조리게 된다. 이처럼 학창 시절 부르는 횟수가 많은 교가는 학생들의 음악적, 심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수업 외 학교생활에서 부르는 교가의 교육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1. 황해바다 푸른물결 소리 들으며 우뜩솟은 문학산봉 바라 보라 보면서 배움의 길 닦고 닦는 대한의 딸들 이룩하세 주의 뜻을 우리의 땅에2. 샛별보다 슬기로운 우리 눈동자 뿌리깊은 백향나무 기상을 삼고 한데뭉쳐 진리찻는 영화 학도야 삼천리에 새벽종을 등불이 되세3. 푸른 마음 높은 뜻을 길벗을 삼아 빛내리라 영화학당 힘을 합하여 거룩하다 주의 이름 길이 받들어 우리겨레 이강산에 빛을 삼으리영화학당 교가 (1913년), <영화 백년사(1892~1992)> 발췌개항지 인천은 신교육 발상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이 1892년에 문을 열었다.(11월 16일자 9면 보도) 인천 관학의 효시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현 인천고등학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지면기사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지면기사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지면기사

    1885년 아펜젤러, 인천에 내리교회 세워"초기 양악 개신교 선교와 때를 같이 해"오늘날 찬송가 통한 전파 통설로 굳어져인천 영화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저녁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대공연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했다. 명칭(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 주자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는 2017년 11월 설립 이후 올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을 시작으로 5월 동구청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 축하 공연을 비롯해 내리교회 행사 등에서 연주회를 했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6회 춘천관악경연대회에선 은상을 획득했다.지난 1일 연주회는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연 첫 번째 무대였다.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는 역시 영화초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엘피스(헬라어로 소망을 의미) 합창단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영화 엘피스 합창단은 지난해 열린 제2회 인천시 어린이 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올해 인천 소방동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꾸미는 제임스 스웨어린젠의 '아이거(Eiger)'와 골드먼의 '치리오 행진곡'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금관5중주 무대와 영화 엘피스 합창단의 공연, 졸업생 임재인의 가야금 독주로 이어졌다.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와 영화 '미션' OST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김광진의 '마법의 성', 최완규 편곡의 '코리안 사운드 셀렉션'까지 연주를 마무리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앙코르곡으로 '마징가 Z 주제곡'을 연주하며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초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126년 전통의 영화초교 학생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자리였다.100년 앞서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 성가'"군악대 창설후 양악 퍼져" 능동적 시각도일제의 국악 탄압… 감수성 변화 앞당겨"서양음악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까"의 물음에는 3가지 정도의 답변이 존재한다.그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5)]애국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5)]애국가 지면기사

    강제개항속 나라사랑·응원 민심 담아 등장1896년 제물포 '전경택 애국가' 가장 빠른 시기 발표자주독립·부국강병·문명개화 내용… 10여종 이르러1902년 '대한제국 국가' 통합… 경술국치 이후 금지돼대부분 양악에 가사, 서구학습 선진화 시대정신 반영1882년 8월 2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그리스도 구세주대성당에선 차이콥스키(1840~1893)의 '1812년 서곡'이 초연됐다. 성당의 완공을 앞둔 1880년 당시 러시아 황제는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후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아울러 기념곡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추천을 받은 차이콥스키가 곡을 쓰기 시작해 한 달 여 만에 완성했다. 완공된 성당에서 열린 전승 기념행사에서 '1812년 서곡'이 초연된 것이다.매우 극적이며 악상의 전개가 절묘한 '1812년 서곡'은 내용상 전개로 봤을 때, 평화로운 가운데 서서히 전운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1부, 러시아군의 출진과 프랑스군의 침공이 어우러지는 2부,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벌이는 격렬한 전투 이후 러시아의 승리를 알리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3부로 구성됐다. 프랑스 혁명 때 작곡됐으며, 현재 프랑스 국가이기도 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군의 침공 때 단편적으로 드러난 이후 양국의 전투와 퇴각 때도 음악에 어우러진다. 반대로 러시아를 의미하는 민요들이 작품 요소요소에 나타나며, 곡의 클라이맥스에선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대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양국 국가를 활용한 전개는 20분이 채 안 걸리는 작품 속에서 서사적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며 이 작품을 표제음악의 걸작으로 올려놨다. 단, 프랑스에선 잘 연주되지 않는다. 국가(國歌)가 작품에서 활용된 예시를 들어봤다. 국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대표·상징하는 노래로, 그 나라의 이상이나 영예를 나타내며 주로 식전(式典)에서 연주·제창한다'이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가 쓴 '팔도 아리랑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4)]철도와 음악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4)]철도와 음악 지면기사

    한양을 작별하는 기적소리는/연화봉(蓮花峰)을 진동하며 작별을 하고/한 바퀴 두 바퀴는/차례로 굴러/종남산(從南山)의 단색은 등에 멀렀네번화한 좌우시가 다투어비키고/굉굉(轟轟)한 바퀴소리는 땅을 가르는데/대지를 울리이는 기적일성은/장엄한 용산역을 부수우는구나경부선과 경원선을 서로 나누어/한마듸의 기적으로 고별을 하고/웅장한 남한강의 철교를 지나/ 철마요람(鐵馬搖籃) 노량진에 다랐도다살같이 나타나는 장엄한 기차/어언 듯 영등포 잠간거치여/부산행 급행을 멀리 보내고/오류동 정거장 지내였고나넓고넓은 소사벌을 갈라나가면/ 소사역과 부평역도 차례로 거쳐/산넘고 물건너/급히달(達)하니/속하다 주안역도 지내엿고나원산(遠山)을 우구려 가깝게 하고/근산(近山)에 뻗치여 멀게 하면서/우렁찬 기적을 울리는 철마(鐵馬)/어언 듯 제물포에 다다랐도다 <경인철도가(京仁鐵道歌) 전문> 1899년 모갈기관차 노량진-제물포 첫 운행빠른속도·굉음·육중한 외관 당대인들 매료최남선, 日 철도가 모방 '경부철도가' 작사이어 경인·호남·경의 등 노선마다 노래로여행중 느낀 문명이기에 놀라움·경의 표현인천콘서트챔버 '발굴·연주회' 뜨거운 호응인천콘서트챔버는 1900년을 전후한 인천의 서양음악을 발굴, 연주회의 테마로 구성해 선보이고 있다. 근대 역사 속 인천을 무대로 한 '원더풀 동인천' 시리즈는 사료 발굴 및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무대에서 만나기 어려운 곡들을 해설과 함께 들려줘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지난 6월 16일 오후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선 인천콘서트챔버의 '원더풀 동인천-두 강이 만난 바다, 인천. 그 곳의 근대 음악 이야기'가 펼쳐졌다.인천콘서트챔버 이승묵 대표의 친절한 진행에 연주와 지역의 역사학자들인 강덕우·강옥엽 박사의 근대 인천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졌다.공연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연주와 해설에 귀를 기울였고, 곡이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 중 바리톤 박대우와 인천콘서트챔버가 연주한 '경부철도가'에 대한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연주 전 곡의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3)]인천 아리랑(下)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3)]인천 아리랑(下) 지면기사

    현재 다양한 공연 '헐버트 선교사' 공로곳곳 아리랑 채보 서양식 5선악보 담아국권회복도 헌신… 타계후 양화진 안장2017년 12월 인천의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은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3개 마당으로 구성된 '인천 아라리'를 선보였다. '인천 아라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7 전통예술 지역 브랜드 상설공연 지원사업'에 선정된 공연물이다. 3개 마당 중 마지막 마당은 '인천 아리랑'으로 구성됐다. 공연에서 잔치마당은 해안가와 농지가 공존한 과거 인천의 고유한 소리와 이야기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대적인 느낌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다. 전통 북과 꽹과리, 장구 등의 악기에 신시사이저, 일렉트릭 기타 등이 가세했다. 세 번째 마당의 '인천 아리랑' 또한 전통 경기·서도소리 선율과 이를 모티브로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재즈, 록 버전 등 3가지 형태로 부르고 연주됐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인 유상호 명창의 무대에 이어 재즈 보컬리스트 박가아의 공연, 정유천 밴드의 록 버전 공연까지 '인천 아리랑'이 다양한 형태로 무대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구전으로 전해지며, 130여년 전 개항지 인천에서 불린 노래를 오늘날 공연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B. 헐버트(1863~1949) 박사의 공로다.헐버트 박사는 당시 곳곳의 '아리랑'을 채보했다. 이처럼 서양식 5선 악보에 표기된 최초의 아리랑은 그가 쓴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에 담겼다. '코리아 보컬 뮤직'은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2월호에 수록됐다.헐버트 박사는 이 글에서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이 중요한 노래"라고 예찬하기도 했다.아리랑이 해외에 알려지고, 구전이 아닌 아리랑의 형태가 문서에 기록되면서 후대가 연구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당시 민요를 경시하는 풍조로 인해 아리랑의 가사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인천 아리랑 (上)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인천 아리랑 (上) 지면기사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에는 청년시절의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 감옥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철도 공사에 강제 동원돼 노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천 제물포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못 살겠네~".수감자들이 곡괭이질을 하며 지친 몸을 달래고자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인천 아리랑'이다. 노역 중 쉬는 시간에 중국인이 나눠준 자장면을 먹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연출한 이원태 감독은 영화 개봉 후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인천 아리랑'을 경인선 부설공사 장면에서 노동요로 쓰기 위해 고증에 공을 들였다"고 밝힌 바 있다.조미통상조약 당시 아리랑 애국가 역할예부터 한민족 하나로 이어주는 구심점영화가 세월에 묻혀 있던 '인천 아리랑'을 끄집어 낸 후 그해 12월 인천의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은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공연 3개 마당으로 구성된 '인천 아라리'를 선보였다. '인천 아라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7 전통예술 지역 브랜드 상설공연 지원사업'에 선정된 공연물이었다. 3개 마당 중 마지막 마당은 '인천 아리랑'으로 구성됐다. '인천 아리랑'이 무대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아리랑'은 우리 민족 모두가 즐겨 부르는 또 하나의 국가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로 있는 김연갑이 1994년에 쓴 <팔도 아리랑 기행 1>(집문당)에 따르면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티콘데로가(Ticonderoga) 호의 함상 군악대가 두 나라의 국가 대신에 국가 격으로 '양키 두들(Yankee Doodle)'과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미 선대로부터 전국적으로 불린 '아리랑'은 외국인들도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은 물론 해외 동포들과도 자연스럽게 하나로 만들어주며, 근래 들어선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는 국제경기에서 '아리랑'이 국가 대신 연주되기도 한다.'인천 아리랑'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

  •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프롤로그]1883년 항구가 열리고… 파도처럼 밀려온 '양악'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프롤로그]1883년 항구가 열리고… 파도처럼 밀려온 '양악' 지면기사

    제물포 개항후 첫 서양음악 수용·확산전통문화 대신 근대 신문물 체화 노력강점기~1960년대 시향 설립 역사조망인천의 지리·사회적 의미 들여다볼 것회화는 공간 속에서, 인위적인 공간 표상을 통해 작용한다. 음악 등 모든 역동적인(Energischen) 예술들은 연속적인 시간에서뿐 아니라 그를 통해, 즉 인위적인 음의 시간적 변화를 통해 작용한다. 시의 본질 역시 이러한 근본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시는 임시적인 기호, '힘(Kraft)'이라 하자. 그렇다면 형이상학에서 공간·시간·힘이 세 개의 근본개념이듯, 또한 수리적인 학문들이 이들 개념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듯이 문예 및 예술이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제작물을 제공하는 예술은 공간 속에서 작용하고, 에네르기를 통한 예술은 연속적인 시간에서 작용하며, 문예 혹은 오히려 유일한 문예인 시는 힘을 통해 작용한다.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최초의 비판적인 작은 숲' 중에서헤르더(J G Herder·1744~1803)는 18세기 독일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학자, 신학자였다. 평생 음악에 심취했던 인물이기도 한데, 고대 독일 민요를 복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며 연구를 통해 의미 있는 <민요집>을 펴내기도 했다. '민요(Volkslied)'라는 용어를 만든 인물이기도 한 헤르더는 음악을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문화와 교육의 원천 중 하나로 보았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식견을 훌쩍 뛰어넘는 음악에 대한 혜안을 보여줬다.헤르더의 사상은 후대 사상가와 작곡가들에 의해 확대 생산됐다. 그중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클래식(Classic)'으로 인정받으며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마찬가지로 우리 땅에선 우리(동양) 사상가들과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이 고래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1883년 제물포가 개항하면서 우리는 서양음악(이하 양악)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큰 소리를 경험했다. 무시무시한 대포 소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