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지면기사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

  •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지면기사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지면기사

    캠프마켓 부지 옛 일제 병참기지감시속 두 노동자의 용감한 활동인천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은 일제의 핵심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조병창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1941년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일제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했다.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에선 소총과 포탄, 탄환뿐만 아니라 선박과 무전기까지 만들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같은 공정만 반복하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게 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채록한 자료를 보면 한 노동자는 부품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는 업무만 했다. 다른 노동자는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단순한 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무기 제조 종합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려고 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오순환은 조병창에 위장취업해 무기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조선 총독이나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자 했다. 오순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조병창 내에서 적발돼 실패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암시장에서 총기를 구매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황장연은 조병창에서 만든 무기를 빼돌리려 했다. 황장연은 동료 30여 명을 모아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했다. 또 임시정부 요원과 접선해 권총 3정과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했다.조병창 침투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부지로 징발당했다. '애스컴씨티'와 '캠프마켓'이다. 캠프마켓 부지반환을 앞둔 지금, 조병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지면기사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

  •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지면기사

    나수영 前면장 십시일반 기념비 건립보존회 만들어 후손들에 알리기 노력"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인천 용유도 마시안해변 인근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인천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3·1 운동인 '3·28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던 조명원(1900~1968)은 3·1운동 소식을 섬마을에 전했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다.나수영(91) 전 용유면장은 그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면장으로 일하던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비 제작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용유도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은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다"며 "당시 용유도에 살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부족한 돈은 주민 스스로 땅을 팔아서라도 채웠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꼭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나 전 면장의 노력으로 만세 함성이 울린 지 63년 만인 1983년 3월 28일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일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용유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후대에 계속 알리기 위해 '용유 3·1 독립만세 기념비 보존회'를 만들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인천 중구청도 2017년 추모공원 기념비를 보강했다. 서병구 보존회 회장은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며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 지역의 훌륭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

  •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지면기사

    '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1919년 3월의 독립운동은 인천의 작은 섬 용유도에까지 번졌다.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

  •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지면기사

    1907년 박영효 귀국 환영회 자리서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육혈포(六穴砲)'는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이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

  •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지면기사

    대한자강회 활동·인명의숙 설립 등 인천 근대교육운동 앞장 불구1천명 앞에서 목숨 끊어… 사이비 선각자 겨냥 '순교자 길' 택한듯의연금 모집·추모 잇따르고 그가 뿌린 '씨앗' 사립학교 개교 줄이어2000년대 중반 일생 복원 시작… 흩어진 조각 맞추기 과제로 남아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운동은 우리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자강론(自强論)'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계몽을 앞세워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정재홍(鄭在洪·1867~1907)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망국의 길목에서 친일로 변절한 개화파 박영효 앞에서 육혈포(권총)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일본으로 주권이 넘어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일세력을 향해 경고한 거였다. 그는 인천 근대교육운동의 선각자인 동시에 의열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지사로 기억되고 있다.서울에서 태어난 정재홍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인천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정재홍은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1907년 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몽단체다. 대중 강연과 교육기관 설립, 국채보상운동 등을 이끌었다. 당시 경기도에서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 강화, 남양 3곳뿐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에 소속된 인천항 유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했다.정재홍은 인재를 길러내야 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907년 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

  •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지면기사

    무차별 폭력 전국서 400건 발생이후 피습 자제·위문금 이어져항구도시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특히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인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일제 강점기, 1931년 7월 3일 인천시민들이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200명이 중국 농민과 충돌하고 박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인천에 전해지면서 애꿎은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던 거다. 이는 일본의 간계에 속은 중국 주재 조선일보 기자의 오보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화교에 대한 보복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400건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만 200명의 피의자가 검거됐고, 화교들은 인천을 떠나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 일은 아직도 인천 화교사회에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이때 인천의 애국지사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권평근(1900~1945)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상대로 이간계를 펼친 일제로 분노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이른바 '방향전환사건'을 계획해 중국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민중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일제에 침략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싸울 게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애국 동지들을 설득했다.권평근의 방향전환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인천 지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투쟁의 대상이 일제임을 명확히 재인식하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후 각계의 중국인 피습 자제 요청이 이어졌고, 인천 객주조합과 미상조합, 포목상조합, 신용조합 등이 중국에 사과했다.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인천상공회의소조차 중국에 위문금을 전달했다. 시민들도 기부금을 모집해 성의를 표했다.애석하게도 권평근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서 미군 환영행사 도중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일제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던 반쪽짜리 해방공간에서 그는 투쟁의 열매를 맛볼

  •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지면기사

    만주 만보산 한·중 농민 갈등, 무력충돌로 부풀려 보도중국침략 구실 '오보'가 인천發 화교습격 비극 초래…음모 알아차린 권평근 배일연설 계획 도중 체포돼 옥고1919년 강화서 독립운동 가담…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해방직후 미군 입항때 동원된 日경찰 총탄에 맞아 숨져1931년 7월 멀리 중국에서 날아온 '오보(誤報)' 하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창춘(長春) 만보산(萬寶山)의 동포가 중국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200명이 다쳤고, 병력까지 출동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의 호외는 화교가 많았던 개항도시 인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기사는 한·중 농민 사이 발생한 작은 충돌이 일본의 흉계에 의해 부풀려져 전달된 완벽한 오보였지만, 이를 알 길이 없던 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오늘날까지 인천 화교 사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만보산 사건'이다.결국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게 드러났고, 화교로 향했던 분노의 화살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습격과 항일투쟁이 비밀리에 계획됐고, 이는 반중(反中)이 반일(反日)로 바뀐 '방향전환사건'이라 불렸다. 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권평근(1900~1945)이다. 강화 출신의 그는 인천 노동계를 대표하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방향전환사건의 계기가 됐던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일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만주지방의 농장으로 이주시켜 한국인 보호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중국인들은 이런 이주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만보산 농장 지역에는 1931년 4월 한국인 200여 명이 이주했는데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계약 착오로 중국 지주의 땅을 침범해 충돌이 빚어졌다. 그해 7월 1~2일 중국

  •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지면기사

    보신각 인근 강화 출신 주인이 운영임정 관계자 접촉장소 등 기록 눈길일제강점기 강화도 사람이 서울 종로에 차린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아지트'였다는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출신 유경근(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와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던 '대동단'의 주역이었다.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 총책 역할도 한 독립운동가다. 유경근이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 비밀리에 여러 독립운동가를 접촉한 장소는 서울 종로 관철동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을 꾸렸다.1919년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진 유경근의 심문조서를 보면, 판사는 유경근에게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획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경근은 "여관 주인이 강화도 사람이라 강화 사람들은 그 여관에서 묵으므로 그곳에 가면 고향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자주 갔다"고 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 연통제 조직을 맡았던 강화 출신 윤종석(1896~1927)의 심문조서에도 판사가 조선여관은 경성에서의 조선독립운동본부가 돼 있었다고 언급한다. 윤종석은 "그러한 사실은 모른다"고 답했다.조선여관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특파원인 명제세(1885~?)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유경근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 톈진에서 국내로 입국해 찾아온 곳도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이 독립운동을 논의할 안전한 장소로 조선여관을 택한 것은 여관 주인과 '동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관철동 조선여관에서 1920년 9월께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무장계획단' 조직이 논의됐다는 기록도 당시 판결문에 나왔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0일자에는 평남경찰서 경찰이 의열단원을 잡기 위해 경성

  •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지면기사

    독립군 지원자 모집해 만주로 보내는 일 맡아밀정 때문에 붙잡힌 '대동단 사건' 징역 3년형만세시위로 검거 등 공훈록 내용 사실과 차이병보석 중 신한촌 망명… 러시아에서도 활동강화에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져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까지 계획했던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의 주역이었다.또 고향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교육자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유경근이 대동단은 물론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국내외 항일투쟁을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가 많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한 유경근의 행적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그 시점이 맞지 않는다.최근 유경근을 재조명한 몇몇 기록이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바탕으로 쓰이다 보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을 근거로 유경근의 행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는 명확하다.공문서는 유경근이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여러 관계 인물의 신문조서, 공판기록, 판결문 등 일제의 시각을 반영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1919년 3월 18일 유경근이 강화군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썼다. 이때 주모자를 색출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 문제로 보석됐다고 기록했다. 유경근이 강화 3·1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강화 만세시위 때문에 체포됐거나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유경근은 1919년 7월 21일 전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서대문감옥 병감(病監)에서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당시 44세였는데, 류마티스로 발로 설

  •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지면기사

    18세 글로 보기엔 매우 '논리정연'항일조직 지원 추정… 재조명 필요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 인천에서는 시내 중심가 상점들이 항일의 뜻을 표출하는 차원에서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이 활발했다.각종 자료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인천지역 철시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면서 상당수 상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는 당시 잡화상이었던 18세 김삼수(金三壽·1901~?)와 객줏집 사환이었던 15세 임갑득(林甲得·1904~?)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일 나이였다. 10대 소년 2명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1심과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삼수가 3심(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200자 원고지 약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가 아직 남아있다. 그 내용이 잡화상이 직업인 소년이 썼다고 하기엔 매우 논리정연해 눈길을 끈다. 김삼수는 상고 이유서에서 "지금 시대는 타인을 노예로 하는 자도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는 자도 없다"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평범한 상인의 철시투쟁까지도 견고한 논리의 항일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의미다.물론 상고 이유서 내용을 고려하면, 김삼수가 직접 쓰지 않고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김삼수와 임갑득을 지원한 항일운동조직이 있었고, 인천지역 철시투쟁도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 철시투쟁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세시위와 함께 일반 민중이 대거 참여했던 항일운동인 만큼 구체적인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김삼수의 상고 이유서 등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판결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지면기사

    1919년 학생 동맹휴업 이어 3월30일부터 실행18세 잡화상 김삼수·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폐점 안한 가게에 독촉 경고문 배포하다 '체포'인천물산 객주조합원·권업소원·포목상조합 등1926년 4월 순종 승하때도 철시… 봉도식 진행생계 걸고 日에 대항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인천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관문이었다. 당시 인천부는 일본이 '조선 안의 작은 일본'을 목표로 만든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인천부 인구 2만211명 가운데 44.4%인 8천973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인천 시내 중심에서는 3·1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6일부터 인천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며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곧 인근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졌다.3·1운동 때 인천지역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撤市)' 투쟁으로 항일시위에 동참했다. '작은 일본'이라 불린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생계를 접고 항일의 뜻을 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천 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만세운동이 이어지던 1919년 3월 30일부터 철시투쟁에 나섰다. 당시 인천은 내리(현 중구청 일대)부터 지금의 동구까지 시내 중심가를 이루며 상점이 모여 있었다.인천에서 철시투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김삼수(金三壽·1901~?)와 임갑득(林甲得·1904~?)의 상고심 판결문에는 3월 27일부터 인천 시내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3월 27일은 조선인 가게들에 3·1운동 때 맞춰 창간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철시하라"는 격문이 배포된 날이다. 인천부협의회 등 친일기관이 개점하라고 협박했지만, 3월 30일부터 조선인 상점 대부

  •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 김환옥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 김환옥 지면기사

    러시아 혁명 목격 사회주의 전향좌익활동 이력 탓 연구활동 부실1930년대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노동자들과 연대해 조선의 변혁을 꿈꾼 인물들이 있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 평등을 이상으로 삼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을 목격해 사회주의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김환옥(1914~?)은 인천 지역 공장지대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다.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김환옥은 당시 최대 공장 지대였던 인천 동구 일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서 근무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한 독서회를 꾸렸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권리를 되찾기를 바랐다. 만국공원(현 자유공원)과 인천 축항, 월미도 등에서 이뤄진 교육은 수십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김환옥은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인천 공장 지대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실린 그의 재판 기록을 보면 김환옥은 단순히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했을 뿐이었지만, 일제는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김환옥은 노동자들을 일깨움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의 변혁을 꿈꿨다. 그는 1930년대 어려움을 겪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노동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외친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실하다. 그의 활동 대부분이 노동운동이었고, 좌익 활동에 참여한 이력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조선의 노동자를 위해 활동한 김환옥을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으로 독립 실현하려 했던 김환옥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으로 독립 실현하려 했던 김환옥 지면기사

    일본 대기업 기계·자동화에 조선인 공장들 줄줄이 폐업사회주의 운동가들 동양방적 등 열악한 환경 파고 들어광주학생운동 동참으로 퇴학 당한 후 인천철공소 취직김근배와 독서회 꾸려 문맹률 높은 근로자들 교육 앞장적색노조 연루 '옥살이' 미군정시절에도 좌익으로 체포"한 끼 식사를 못 해 풀죽을 끓여 먹는 사람이 조선 땅에 한둘이 아니고 고무신 하나가 없어 거친 흙 땅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지천인데…"2007년 방영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대사 중 일부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나여경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1930년대 나라 잃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온갖 신산을 다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먼데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이역만리 떨어진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대공황 이후 일제는 '산업 합리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인이 소유한 대기업들은 거대 독점자본을 바탕으로 한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대기업의 생산 공정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조선인이 운영하던 중소규모의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됐고, 조선인들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조선인 17만명의 12.5%에 해당하는 2만여명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실업률이 높아져 일할 사람은 많다 보니,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계청이 일제강점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25년 93전이었던 보통 인부의 일당은 1933년 70전으로 24%나 줄었다. 1930년대 80㎏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22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일해도 쌀 2.5㎏ 정도 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던 셈이다. 일본 내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는

  • [독립운동과 인천·(32)]日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독립운동과 인천·(32)]日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지면기사

    인천공립상업학교 상급생에 속해 '광주 지지' 동맹휴학·강당 시위당시 주동자 대부분 훗날 좌익으로 전향… 지역서도 주목받지 못해개인 활동하다 조선공산당 공작위 함께 만들어… 구속 신세 되풀이남로당 소속 이두옥은 고향인 제주 4·3사건 가담 총살 당해 생 마감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앞선 두 독립운동이 고종·순종 황제의 붕어(崩御)를 계기로 민중이 들고 일어선 독립운동이었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과 일본인 학생들의 다툼이 억눌렸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이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게 촉매제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 열망의 의지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전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벌이거나 강당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94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인천에도 광주의 학생들에게 힘을 보탠 학생들이 있었다.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930년 당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두옥과 신대성을 포함한 시위를 주도했던 16명은 인천경찰서에 붙잡혔고, 이 가운데 12명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인천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두옥·신대성 등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부분이 훗날 좌익으로 전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천 지역 학생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1930년 1월 17일. 학교 행사를 위해 강당에 모인 전교생 앞에서 인천상업학교 상급생 학생들은 크게 외쳤다."지금 광주학생 사건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민족적인 면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다 같이 일어나

  • [독립운동과 인천·(32)]'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독립운동과 인천·(32)]'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지면기사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 끊어진 탓北에도 기록없어… 연구활동 필요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땅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정부는 이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광주에서 기념식을 열고 있다.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에서 5만5천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광주'라는 이름에 담긴 상징성 때문에 이들의 독립운동은 조명받지 못했다.1930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6명의 학생은 동맹 휴학을 벌이고, 전교생에게 '광주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참여를 독려했다. 이 사건으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두옥은 3·1운동 11주년을 맞아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담긴 격문을 배포했다. 이후 신대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다 한 차례 더 옥살이했다.안타깝게도 인천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두옥과 신대성이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영향으로 '빨갱이' 올가미가 씌워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두옥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돼 총살을 당했다. 신대성은 우익단체에 몰래 잠입한 혐의로 구속된 이후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이두옥과 신대성은 좌익 활동을 벌였지만,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이 끊겼기 때문에 북한에도 관련 기록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 이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인천에서라도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1)]강화 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1)]강화 만세운동 지면기사

    1919년 3월18일 1만명 모여 시위기독교 주도… 이후에도 8건 기록일제강점기에도 강화도는 역시나 항쟁의 공간이었다. 인천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강화도의 만세 시위다. 1919년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무려 1만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외쳤다.인천의 근현대사를 개항장 중심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자칫 강화도의 만세 시위의 위상과 중요성을 지나치곤 한다. 인천의 만세 운동 횟수를 헤아릴 때 강화도를 빼놓은 일부 자료들이 대표적인 예다. 대개 민족 사학자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인천의 만세 운동이 8건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개항장과 원인천인 문학산 일대에 한정된 오래 전의 인천이다. 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에서 주도했는데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 나온 강화도의 만세 시위만 해도 3월 18일 이후 8건이나 된다. 이병헌이 1959년에 내놓은 '삼일운동비사'에는 강화에서 일어난 10건의 만세 시위를 정리했는데, 같은 날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봉화시위까지 더하면 그 횟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강화도는 섬이라는 지역 특성상 거류 일본인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조계지가 있었던 인천보다 활발한 만세 시위가 가능했다. 대몽항쟁, 임진왜란, 병인·신미양요 등 과거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응했던 강화 주민만의 역사적 동질성도 이런 결집력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의 만세 시위는 인근 김포와 계양·부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그는 '결사대장'을 자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시위의 최일선에 섰다. 강화는 인천 독립운동의 뒷부분에 끼워넣는 '부록'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조봉암, 유두희 등 강화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이동휘 등 강화와 인연을 맺은 애국지사의 이야기, 구한말 의병운동까지 더하면 강화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날을 새도 모자랄 정도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지면기사

    길직·잠두교회 신도들 중심 3월 18일 '거사' 이끌어백마 타고 등장… 군수·경찰서장에도 '만세' 다그쳐마니산으로 피신했지만 부모 볼모로 잡혀 결국 체포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 '독립열망' 불 지핀 계기로출소후 대대적 환영인파 보도 눈길… 교육자로 지내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에 유난히 시달렸던 곳이다. 고려 시기 몽골 침입에 맞서 항전하던 전시수도였으며 조선 말기 두 차례의 양요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 주민들은 일본의 침략에도 분연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낸 구한말 시기부터 의병이 들고 일어섰다. 강화에서 벌어진 3월 18일의 만세 시위는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강화 길직교회 신도였던 유봉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강화로 돌아온 선두교회 출신의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강화 지역의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칼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유봉진은 3월 8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함께 비밀리에 시위 작전을 짰다.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 마을마다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쳤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를 보이며 동참을 호소했다.유봉진과 신도들은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작성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