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지면기사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

  •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지면기사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지면기사

    캠프마켓 부지 옛 일제 병참기지감시속 두 노동자의 용감한 활동인천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은 일제의 핵심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조병창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1941년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일제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했다.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에선 소총과 포탄, 탄환뿐만 아니라 선박과 무전기까지 만들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같은 공정만 반복하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게 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채록한 자료를 보면 한 노동자는 부품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는 업무만 했다. 다른 노동자는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단순한 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무기 제조 종합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려고 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오순환은 조병창에 위장취업해 무기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조선 총독이나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자 했다. 오순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조병창 내에서 적발돼 실패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암시장에서 총기를 구매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황장연은 조병창에서 만든 무기를 빼돌리려 했다. 황장연은 동료 30여 명을 모아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했다. 또 임시정부 요원과 접선해 권총 3정과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했다.조병창 침투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부지로 징발당했다. '애스컴씨티'와 '캠프마켓'이다. 캠프마켓 부지반환을 앞둔 지금, 조병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지면기사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

  •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지면기사

    나수영 前면장 십시일반 기념비 건립보존회 만들어 후손들에 알리기 노력"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인천 용유도 마시안해변 인근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인천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3·1 운동인 '3·28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던 조명원(1900~1968)은 3·1운동 소식을 섬마을에 전했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다.나수영(91) 전 용유면장은 그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면장으로 일하던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비 제작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용유도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은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다"며 "당시 용유도에 살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부족한 돈은 주민 스스로 땅을 팔아서라도 채웠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꼭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나 전 면장의 노력으로 만세 함성이 울린 지 63년 만인 1983년 3월 28일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일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용유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후대에 계속 알리기 위해 '용유 3·1 독립만세 기념비 보존회'를 만들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인천 중구청도 2017년 추모공원 기념비를 보강했다. 서병구 보존회 회장은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며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 지역의 훌륭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

  •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지면기사

    '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1919년 3월의 독립운동은 인천의 작은 섬 용유도에까지 번졌다.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

  •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지면기사

    1907년 박영효 귀국 환영회 자리서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육혈포(六穴砲)'는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이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

  •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지면기사

    대한자강회 활동·인명의숙 설립 등 인천 근대교육운동 앞장 불구1천명 앞에서 목숨 끊어… 사이비 선각자 겨냥 '순교자 길' 택한듯의연금 모집·추모 잇따르고 그가 뿌린 '씨앗' 사립학교 개교 줄이어2000년대 중반 일생 복원 시작… 흩어진 조각 맞추기 과제로 남아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운동은 우리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자강론(自强論)'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계몽을 앞세워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정재홍(鄭在洪·1867~1907)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망국의 길목에서 친일로 변절한 개화파 박영효 앞에서 육혈포(권총)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일본으로 주권이 넘어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일세력을 향해 경고한 거였다. 그는 인천 근대교육운동의 선각자인 동시에 의열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지사로 기억되고 있다.서울에서 태어난 정재홍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인천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정재홍은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1907년 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몽단체다. 대중 강연과 교육기관 설립, 국채보상운동 등을 이끌었다. 당시 경기도에서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 강화, 남양 3곳뿐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에 소속된 인천항 유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했다.정재홍은 인재를 길러내야 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907년 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

  •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지면기사

    무차별 폭력 전국서 400건 발생이후 피습 자제·위문금 이어져항구도시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특히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인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일제 강점기, 1931년 7월 3일 인천시민들이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200명이 중국 농민과 충돌하고 박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인천에 전해지면서 애꿎은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던 거다. 이는 일본의 간계에 속은 중국 주재 조선일보 기자의 오보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화교에 대한 보복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400건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만 200명의 피의자가 검거됐고, 화교들은 인천을 떠나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 일은 아직도 인천 화교사회에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이때 인천의 애국지사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권평근(1900~1945)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상대로 이간계를 펼친 일제로 분노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이른바 '방향전환사건'을 계획해 중국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민중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일제에 침략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싸울 게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애국 동지들을 설득했다.권평근의 방향전환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인천 지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투쟁의 대상이 일제임을 명확히 재인식하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후 각계의 중국인 피습 자제 요청이 이어졌고, 인천 객주조합과 미상조합, 포목상조합, 신용조합 등이 중국에 사과했다.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인천상공회의소조차 중국에 위문금을 전달했다. 시민들도 기부금을 모집해 성의를 표했다.애석하게도 권평근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서 미군 환영행사 도중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일제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던 반쪽짜리 해방공간에서 그는 투쟁의 열매를 맛볼

  •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지면기사

    만주 만보산 한·중 농민 갈등, 무력충돌로 부풀려 보도중국침략 구실 '오보'가 인천發 화교습격 비극 초래…음모 알아차린 권평근 배일연설 계획 도중 체포돼 옥고1919년 강화서 독립운동 가담…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해방직후 미군 입항때 동원된 日경찰 총탄에 맞아 숨져1931년 7월 멀리 중국에서 날아온 '오보(誤報)' 하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창춘(長春) 만보산(萬寶山)의 동포가 중국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200명이 다쳤고, 병력까지 출동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의 호외는 화교가 많았던 개항도시 인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기사는 한·중 농민 사이 발생한 작은 충돌이 일본의 흉계에 의해 부풀려져 전달된 완벽한 오보였지만, 이를 알 길이 없던 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오늘날까지 인천 화교 사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만보산 사건'이다.결국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게 드러났고, 화교로 향했던 분노의 화살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습격과 항일투쟁이 비밀리에 계획됐고, 이는 반중(反中)이 반일(反日)로 바뀐 '방향전환사건'이라 불렸다. 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권평근(1900~1945)이다. 강화 출신의 그는 인천 노동계를 대표하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방향전환사건의 계기가 됐던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일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만주지방의 농장으로 이주시켜 한국인 보호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중국인들은 이런 이주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만보산 농장 지역에는 1931년 4월 한국인 200여 명이 이주했는데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계약 착오로 중국 지주의 땅을 침범해 충돌이 빚어졌다. 그해 7월 1~2일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