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를 말하다

  • [문화, 역사를 말하다·(8·끝)] 반세기 넘는 농촌 기록의 역사… 평택 '대곡일기'

    [문화, 역사를 말하다·(8·끝)] 반세기 넘는 농촌 기록의 역사… 평택 '대곡일기' 지면기사

    "매일같이 조반 식사가 끝나면 동리 한복판 양지바른 곳에 모여 한나절이나 별수 없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요즈음 대화의 초점은 아산만 개발에 대해 정부에서 발표 이래 기대와 흥분으로 한나절이나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1974.2.2)", "조반 식사 후에 모처럼 만에 마을 가 보니, 마을 마당의 화제는 남양 간척지 관게(관계)로 분분하다. 옥천 청원 등을 차자(찾아) 다니면서 간사지 논을 대여 밭기(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1977.11.9)""뜻 없는 歲月(세월)이 如流(여류)하는 동안 우리의 後面(후면)에 남는 것은 歷史(역사)의 記錄(기록)이다" <'대곡일기' 1962년 1월1일자 중에서>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적는 개인의 기록을 우리는 흔히 '일기'라고 부른다. 대수롭지 않은 한 개인의 일상쯤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일기는 중요한 사료로 그 존재를 드러내 왔다.특히 일기는 전개되는 사건을 당일 기록함으로써 맥락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 어렵다. 이 때문에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제된 기록보다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특징도 있다.이러한 일기 가운데 반세기가 넘는 기간 농촌의 생활사를 촘촘하게 기록해 많은 이들로부터 놀라움을 자아낸 평택 '대곡일기'가 그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90세를 훌쩍 넘은 신권식씨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는 '대곡일기'는 평범한 농부가 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록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도 깜짝 놀란 '대곡일기'의 등장대곡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역사자료조사 사업 과정에 참여했던 정승모 당시 사단법인 지역문화연구소 소장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지역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현장을 다니던 정 소장이 우연히 신씨를 만나게 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기의 존재를 알게 됐다.일기를 본 정 소장은 깜짝 놀랐다. 평택의 한 집성촌에서 펼쳐진 반세기의 농촌 생활상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 일기의 가치를 일찌

  • [문화, 역사를 말하다·(7)] 용인의 역사와 함께한 '자연농원'

    [문화, 역사를 말하다·(7)] 용인의 역사와 함께한 '자연농원' 지면기사

    1974년 용인시의 산림 450만평(약 1천487만여㎡)에 대대적인 개발이 이뤄진다. 국토개발의 시범장으로도 불렸던 이 사업은 "쓸모없이 방치된 황토(荒土)를 황금의 옥토(沃土)로 탈바꿈시켰다"며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땀'과 '정열'로 심어진 개발 사례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유실수 단지와 종합양묘장, 양돈단지, 양어저수지, 과수 공원, 동·식물원과 어린이 동산 등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농원인 '용인자연농원'의 이야기다.지금은 '에버랜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자연농원은 우리나라의 레저·관광·여가 문화의 발전과 역사뿐 아니라, 1970년대 개발이 이뤄진 용인지역과 주민들의 역사와도 긴밀하게 엮여있다. 개발의 시대, 용인자연농원의 도전자연농원이 세워진 옛 가실리와 유운리, 신원리 등에 이르는 지역은 넓은 산야와 농지로 이뤄져 주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정부와 기업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추진으로 주민들은 이주했고 대규모 개발공사가 시작됐다.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동네 형들이 '개발간다'는 표현을 썼다. 산을 정돈하고, 나무를 심고, 벽돌을 나르고, 가래질하는 등 일종의 직장처럼 그곳에서 일하며 수입을 얻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옛 가실리·유운리·신원리 일대 조성전국서 일꾼 "동네 형들 개발간다 말해""농사꾼들도 농번기 짭짤한 돈벌이"농업만이 생계 수단이었던 이들에게 개발은 새로운 수입원이었고, 용인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일꾼들로 이 일대가 붐비기 시작했다.용인문화원의 포곡면지에는 당시 인근 주민들이 "저녁때가 되면 막걸리 한집에 줄 선 사람들이 엄청났다"거나 "농사꾼들도 농번기에 막일로 가담해 짭짤한 돈벌이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자연농원이 개장을 앞둔 시기 경인일보(당시 제호 경기신문)에서도 자연농원의 개발과 그 결과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토질이 척박한 고지대에는 소나무 대신 경제성이 높은 잣나무와 오동나무를, 토질이 좋은 곳에는 은행나무, 밤나무 등 소득이

  • [문화, 역사를 말하다·(6)] 화성 발안의 '마을방'에서 탄생한 소설… 이문구의 '우리동네'

    [문화, 역사를 말하다·(6)] 화성 발안의 '마을방'에서 탄생한 소설… 이문구의 '우리동네' 지면기사

    나는 놀던 물을 만난 것처럼 발안이 마음에 들었다.와서 한구석에 끼어 살았으면 싶었다.장터를 지나가는 내에 붕어와 피라미가 은어 떼처럼 반짝이는 것이어려서의 한내(大川)를 떠올리게 하면서 향수를 자아냈다.(중략) 동네가 어떤지, 집이 어떤지 가 보지도 않은 채로,장차 아니 곧 그 동네의 주민이 되기로,가다 말고 중도에서 선뜻 결정을 해 버린 것이었다.-이문구 '외람된 희망' 중에서우리에게 '관촌수필'로 잘 알려진 작가 이문구. 그는 한국농촌과 농민이 겪는 문제를 소설로 다뤄낸 대표적인 농촌(농민)소설작가이다.충남 보령 출신인 그는 소설에서 풍부한 충청도 지역어를 쓰며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모습, 그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1977년 별안간 화성 발안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이웃사촌의 깊은 정을 나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낸 작품이 바로 '우리 동네'이다.'우리 동네'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차츰 활기를 잃고 무너져 가는 농촌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김씨', '이씨', '최씨' 등 여러 성씨(姓氏)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린 연작소설이다."한 번 소설을 읽어 보라구. 거기에 주민들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 얼마나 재미있다고." 당시 발안에서 이문구를 만난 이웃이 말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이문구가 화성 발안으로 온 까닭이문구가 화성 발안으로 내려온 1977년 전후의 시간은 그에게 피로감이 쌓였던 시기이다. 우익문단, 진보진영 할 것 없이 시대의 탄압은 이어졌고 많은 작가가 쫓기거나 갇혔다. 경제적·심리적, 문단 내외적으로 힘든 시간을 가졌던 이문구에게는 쉼이 필요했고, 그런 그가 화성으로 이끌리듯 내려왔다.당시 발안에 살던 오익선(85)씨는 이 시기 발안 천주교 성당에서 농민교육을 하고 있었다. 보건복지부에서 가족계획시범지역으로 발안을 지정했는데, 보건진료소장으로 소설가 박광서씨가 부임했다. '시대의 탄압기'… 1977년 행랑채만 있는 헌집 이사이리가도 저리가도 사람

  • [문화, 역사를 말하다·(5)] '합창의 도시, 인천'

    [문화, 역사를 말하다·(5)] '합창의 도시, 인천' 지면기사

    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내리교회(인천 중구 내동)는 우리나라의 첫 개신교회다. 예배당에서 찬송가가 불리고, 이후 교세가 번창하면서 교회 안의 찬양이 민간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1892년 24세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의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된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한다.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다수는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게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들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현재 영화초등학교)이 그해 문을 열었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

  • [문화, 역사를 말하다·(4)] 인천의 오케스트라 역사와 연주공간들

    [문화, 역사를 말하다·(4)] 인천의 오케스트라 역사와 연주공간들 지면기사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인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Leipzig Gewandhaus Orchester의 시작은 17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2명으로 시작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늘었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도 증가하면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그로 인해 카페로 연주회 장소를 옮겼으며, 이도 부족하게 되자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어진 건물인 게반트하우스 (의복협회 회관)를 연주회장으로 사용했다.이와 함께 단체의 상주공간인 게반트하우스를 오케스트라의 명칭으로 확정했다.1884년이 되어서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 게반트하우스가 지어졌다.뛰어난 합주력과 그에 상응하는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다. 이 게반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1977~1981년에 개축한 것이다.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광복 직후 시작됐다. 1945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 교향악단이 창단했다. 2년 후 인천에서도 첫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인천 관현악단은 1947년 12월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가 창단한 순간이었다.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과 애관극장 등에서 공연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활동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기반을 닦았다.광복 2년후 23명으로 구성된 '인천관현악단' 탄생 12월에 첫 연주회홍예문 부근 '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지역중심 공연 공간시민관서 주로 활동한 '애협교향악단' 신진음악인 기회 마련 노력도인천 관현악단이 창단 연주회를 연 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이전 인천의 중심 연주 공간이었다. 1923년 홍예문 부근(현재 인성여고 다목적관 자리)에 2층 규모의 붉은

  • [문화, 역사를 말하다·(3)] 안산의 문화예술 꽃피운 '예술인아파트'

    [문화, 역사를 말하다·(3)] 안산의 문화예술 꽃피운 '예술인아파트' 지면기사

    건물이 얼마 서 있는 가운데 예술인 아파트가 가장 높게 솟아 있다. 동마다 채색을 달리하여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예술인 아파트 입주 안내가 수없이 날라오던 장본이 바로 저 아파트다. 유수한 예술인들이 신청을 했다고 어느 시인이 크게 떠들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구인환 소설 '춤추는 낙조' 중에서> 새마을운동 정신에서 출발한 예술인 아파트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경제와 사회·문화 전반에서 근면·자조·협동 정신과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바탕으로 전개됐다. 그 시절 예술인들은 소위 잘나가는 일부를 제외하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여건이 좋지 않았다. 이에 영화계 이신명 감독과 심우섭 감독, 이기원 감독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인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의 1차 목표는 예술인들의 '내 집 갖기'였다.이기원 감독은 "서울의 전셋값으로 지방에 가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했다"며 "당시 반월지구에 공단을 만들고 서울 인구 분산 정책의 특혜 등이 있어 안산에 아파트를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삼익건설이 1984년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1986년 본격적인 입주가 이뤄졌다. 복지재단 만들어 13개동 1458가구 최초의 20층 아파트 건립우여곡절끝 1986년 입주 '환경미화지구' 관광·견학 오기도 예술인 아파트는 13개동 1천458가구로 지어진 최초의 20층 아파트다. 원래 14개동이었는데, 쾌적한 주거환경을 위해 1개동을 줄였다고 한다. 네모 반듯한 복도식 아파트가 양쪽으로 줄지어져 있고, 중간에는 타워형 디자인을 채택했다.단순히 거주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창작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건립 취지였다. 이 때문에 미적으로도 남다른 모습을 자랑했다. 회색빛 아파트로 가득한 곳에서 동마다 분홍, 초록 다양한 색을 발코니 난간에 칠했다. 최초의 환경미화 지구라고 해서 관광도 오고, 주택 견학도 왔다는 것이 이 감독의 이야기이다.아파트는 예술인들의 편의성을 위해 서울까지 가는

  • [문화, 역사를 말하다·(2)] 시흥염전에선 지금도 소금꽃이 핀다

    [문화, 역사를 말하다·(2)] 시흥염전에선 지금도 소금꽃이 핀다 지면기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금'. 우리나라에서 소금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문헌을 통해 오래전부터 소금이 매우 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시대의 권력들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해 왔으니 말이다.그런 소금의 문화와 역사를 함께한 지역이 바로 시흥이다. 시흥에는 대규모 천일염전인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이 1920~193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시흥염전의 시초가 됐다.소금, 왜 시흥이었나 서해의 경기만 일대는 간석지(해안에 퇴적물이 쌓여 생긴 개펄)가 넓게 발달했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는 이 간석지를 소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나 염전으로 이용했다.시흥 일대의 갯벌은 경사도가 평탄하고 점토와 모래가 적절하게 섞여 있어 염전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는 데 유리한 토질을 갖고 있다. 소금판이 단단해야 물의 침투가 적고, 수분 증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주변에 큰 강이 없어 민물이 섞여들지 않아 해수의 염도가 높기도 했다. 한여름에도 비가 적고 일조시간이 길며, 봄가을은 건조하고 일조량이 풍부한 시흥의 기후도 염전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됐다. 지리적으로도 인천항과 가깝고 서울 등 소비시장으로의 유통이 원활할 수 있었다.보통 염전은 겨울을 지내고 봄부터 소금 생산을 준비한다. 3월 말쯤이 되면 소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4~6월 사이 소금이 가장 많이 나온다. 네모 반듯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겨 단맛이 나는 소금은 염부들의 술안주가 됐을 만큼 맛이 좋았다.시흥염전은 일본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전쟁 뒤에는 북측 실향민과 지역민들이 이 소금밭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소금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량도 함께 늘었다.사양길의 소금, 염전을 지키는 소금창고 산업화의 바람이 시흥에도 불던 시기, 염부들의 기억에서 1970~1980년대 소금은 그래도 '잘 팔렸다'는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갯골에 멍텅구리배(해선망어선)를 대면 질통으로 알소금을 날랐고, 이후에는 포장해서 배로 실어 날랐다. 그러다 작은

  • [문화, 역사를 말하다·(1)] 수원 연극, 과거를 잇다

    [문화, 역사를 말하다·(1)] 수원 연극, 과거를 잇다 지면기사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그 대화 안에서 문화는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여러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류와 함께해 온 문화사(史)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이번 '문화, 역사를 말하다' 연중 기획은 경인지역의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문화적 사건과 장소, 인물 등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격변의 시기와 함께 급속한 성장을 이룬 경인지역의 문화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고,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해주고 있을까. → 편집자 주 # 수원의 연극, 시작은 '학생들로부터' 신파극에서 시작한 신극사에서 경기도(수원)는 서울의 신파극단이 자주 찾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해방 전까지 경기도 자체 극단 활동은 찾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도내 극단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로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경기연극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수원이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수원의 연극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극단이 '화홍극회'다. 경기도 극단의 효시, 경기지역 연극활동의 모체 등으로 불리는 이 극단의 시작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수원농고에 우연히 연극반이 생겼는데, 열정적인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여 연극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화홍극회 이성룡 초대회장은 "선생님이 명동에 있는 다방으로 데려가면서 앞으로 연극 하고 싶으면 길을 알려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며 "덩달아 학교에서 지원도 해줘 연극에 입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학생들끼리 화장과 분장, 음악까지 해결해야 했다. 법원에 가서 판사복 본을 뜨게 해달라고 사정해 그려 입기도 하고, 수원역에 녹음테이프를 갖고 가 기적 소리 한 번 울려 달라고 기관사를 붙잡고 부탁하기도 했다. 졸업하기 전에는 천막을 쳐놓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각색해 연극을 하기도 했다. 수원농고 연극반 출신 뭉쳐1961년에 '화홍극회' 창립단원 20명 시작 '곰' 첫공연경기도 극단 연극의 '효시' 그렇게 연기에 대한 꿈을 갖고 대학에 진학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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