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만세

  • [덕후만세·(10·끝)] 광주 얼굴박물관 김정옥 관장

    [덕후만세·(10·끝)] 광주 얼굴박물관 김정옥 관장 지면기사

    "우리 모두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의 주인공이에요."왜였을까. 김정옥 얼굴박물관장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며 진한 감동이 전해졌다. 그에게 얼굴박물관은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곳이었다. "문화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한 무대이고, 누구나 그 안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애당초 얼굴박물관은 현대인이 과거의 문화예술과 만나 인간적인 대화를 하는 공간으로 생각했어요." 연극계의 원로 연출가로 한평생을 살아온 그가 지난 2004년 박물관을 열었다. 40여 년간 꼬박 모아온 수많은 소장품 앞으로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계단이 자리한다. 박물관이면서도 극장이기도 한 '뮤지엄 씨어터'라는 특이한 공간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랜 시간 연극에 몸담았기 때문일까. 그가 '얼굴'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 만든 허구죠. 인간과 관계가 있는 건데, 그 소통의 중심이 되는 것이 얼굴이에요. 소통의 통로인 거죠."목각·도자인형·초상화 등 다양한 수집원로 연극 연출가… "좋아하니까 계속"아흔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소년 미소' 김 관장의 소장품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문관석, 동자석과 같은 돌사람(石人)과 목각·도자 인형, 초상화, 무속화까지 다양했다. 또 세계의 문화예술인과 배우들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어쩌면 각자의 개성을 가진 얼굴들이야말로 김 관장이 생각하는 가장 큰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 예술'이라고 한 김 관장은 각기 다른 표정을 한 소장품이 그래서 좋았다고 말했다. 첫 소장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제일 처음 산 것이 도자기였어요. 거리에서 옛날 도자기 몇 개를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리된 거였더라고. 외국에 유학을 가면서 우리 것에 관심이 생기게 됐고, 그 이후로 수집을 하게 됐어요."형편이 닿는 대로 모았다고 한다.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다지만, 좋아하는 것을 보면 사려고 노력했다. 싸게 파는 골동시장에도 자주 가고, 고

  • [덕후만세·(9)] 용인 한국등잔박물관 김형구 관장

    [덕후만세·(9)] 용인 한국등잔박물관 김형구 관장 지면기사

    "나? 박물관 할아버지지." 용인 한국등잔박물관 김형구 관장이 자신을 소개하며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그런 김 관장에게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관장님 호가 '등잔'이시라면서요?" 정말일까 싶지만 진짜다. 등잔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호를 그렇게 지었을까 싶었다."등잔이 돈이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중요성으로 따지면 최고죠. 등잔이 없으면 일을 못 하고, 인생의 상당 부분이 밤이 되는데…."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등잔의 쓸모는 사라졌다. 집집이 가지고 있던 등잔들을 버렸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혔다. 하지만 오랫동안 어둠을 밝혀줬던 중요한 물건이기에 김 관장에게 있어 등잔은 무엇보다 귀한 존재로 자리했다. 그래서 그의 인생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고, 평생을 등잔과 씨름하며 많은 역사를 알아내기도 했다.1969년 故 김동휘 '고등기전시관' 첫발도자기·가구·민화 등 1천여 수집·소장태어나 눈을 뜨면서부터 집 안에 보이던 게 모두 골동품이었다는 김 관장은 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엔 구닥다리들, 부서진 것만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지냈고, 그게 몸에 밴 사람인 거지."마치 박물관 같았던 집과 등잔의 소중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꾸준히 모아온 할아버지와 아버지. 김 관장이 박물관을 운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정해진 길을 따라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는 등잔을 포함해 도자기, 가구, 민화 등 3대에 걸쳐 수집한 1천여 점의 소장품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연대도 다양하다. 1대 관장이자 설립자인 고(故) 김동휘 관장은 1969년 자신이 운영한 산부인과 병원 2층에 '고등기전시관'을 개관한다.이곳은 지금의 한국등잔박물관이 만들어지게 된 첫걸음이자 소장한 유물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장소가 됐다. 이토록 오랜 시간을 지켜온 사립박물관이 있을까. 역시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2020년 조족등·화촉 경기민속문화재로"사회 문화에 기여… 꾸준히 나아갈것"지난 2020년에는 박물관의 유물 두 점이 경기도민속문화

  • [덕후만세·(8)] 김포 다도박물관 손민영 관장

    [덕후만세·(8)] 김포 다도박물관 손민영 관장 지면기사

    찻집보다는 카페가 더 흔한 요즘이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차(茶)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차와 예절에 대한 것은 말로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다도(茶道)'는 들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김포 다도박물관 손민영 관장의 말에 "맞다"며 맞장구친 이유였다."돌이켜보니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던 서당에서 어머니가 차를 만들어 손님께 대접했고, 저 또한 쓴 차로 기억했던 차를 이미 오래전부터 접하고 있었던 거예요. 차를 가까이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였던 것 같아요."다도 알리기 사명감… 20여년간 운영세계 돌며 규방문화 유물 3천여점 소장사실 손 관장은 생활예절 교수로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러다 관혼례, 제례 등에 모두 들어가는 차에 대해 4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전공을 가장 맛있게 살린 사람 중 하나이지 않을까'라며 웃어 보인 손 관장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평생을 쏟았다.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도 차의 존재가 확인되고, 고려시대 즈음엔 상류층이 즐기는 문화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재 이목 선생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다서(茶書)인 '다부(茶賦)'를 펴냈고, 다도박물관은 그런 인연으로 한재당과 선생의 묘지가 있는 김포에 자리하게 됐다.이제는 국내 대학에도 다도학과가 생길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지만, 다도와 관련한 시설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은 더더욱 그렇다.'사명감'은 손 관장이 박물관을 만들고 20여 년간 운영하게 한 원동력이다. 한 분야를 이토록 깊고 오래 연구하고, 가르치고, 알리는 일은 진정한 덕후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박물관에는 3천점 이상의 차와 관련된 소장품들이 있다. 찻잔과 다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과 그 시대의 배경이 되는 장롱 등 가구, 판자에 쓴 글씨, 달항아리와 같은 규방 문화를 나타내는 물건들이 한데 모여있다. 차에 관련된 도구를 모으기 위해서 갈

  • [덕후만세·(7)]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 한향림 관장

    [덕후만세·(7)]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 한향림 관장 지면기사

    가짜 만들면 더 많은 돈 들어가는 옹기속을일 없어 매력적… "청자나 백자처럼 반짝거리거나 정교하진 않지만 옹기는 우리 옆에 늘 있어 왔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요. 푸근하면서 편하고, 담담한 여백의 미를 가진 것이 옹기의 매력이죠."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 한향림 관장의 눈이 박물관 안팎에 가득한 크고 작은 옹기가 햇빛을 감싼 것처럼 반짝였다. "누군가가 이걸 모아서 보여줘야 한다면 내가 해야 하나란 생각을 했어요." 도예를 전공한 한 관장은 은사가 보여준 옹기에 대한 사랑과 우리나라의 옹기가 점차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수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가짜를 만들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옹기. 그래서 속아 살 일이 없다는 옹기는 한 관장의 남편조차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부부는 함께 옹기에 대해 공부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고, 지역별로 옹기를 수집하며 분석했다.전국 돌아다니며 지역별 수집 분석… 실용·예술미 갖춘 작품 850점 모아 박물관의 소장품은 1950년대 이전의 옛 옹기들과 무형문화재 장인들, 전국 팔도의 옹기장들이 기증해준 작품, 엄마와 할머니 세대가 쓰던 손때 묻은 옹기 등 850점 정도이다. 오래됐으면서도 기형이 완벽하고 문양이 좋은, 실용미와 예술미를 모두 갖춘 옹기가 한 관장의 컬렉션들이다.원하는 옹기를 찾아 전국 팔도를 누비다 보니 밖에 내놓지 않은,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내는 데도 능숙해졌다. 10년 전쯤 전라도와 충청도를 돌다가 들른 한 옹기 골동품점에서는 좋은 물건을 내놓지 않았던 주인의 방에서 이불로 덮어놓은 옹기뚜껑들을 찾아내 사오기도 했다. 한 관장이 예쁜 소장품으로 꼽은 '쌀함박'은 중국을 통해 백두산 관광지에 갔을 때 구석에서 먼지가 소복히 쌓여있는 것을 용케 찾아 사온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지역의 골동품점 사이에서 '파주 헤이리 옹기박물관의 옹기는 내가 다 넣었다'는 가짜뉴스로 손님들의 환심을 사려했다고 하니, 과연 한 관장의 옹기 컬렉션은 '꾼'들에게도 인정받는 가치를 지닌 것이 확실했다. 그만큼 까다롭게 옹기를 골라 모아왔다는

  • [덕후만세·(6)]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 한국희 관장

    [덕후만세·(6)]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 한국희 관장 지면기사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고 했던가. 화석과 광물 자료라면 단연코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의 한국희 관장이 "도에 ㄴ 받침을 좋아했는데 ㄹ 받침으로 바뀌었다"며 웃었다.돈이 돌이 된 곳, 10만여점의 화석과 광물 등 박물관의 소장품을 보고 있으니 굉장한 수집가로부터 이곳이 시작되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남편이자 설립자 김정우씨 수십년 수집전세계 희귀광물·화석 10만여점 소장 박물관의 토대가 된 이 소장품들은 한 관장의 남편이자 설립자인 김정우씨가 수십 년간 모아온 것들이다. 전세계 오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희귀 광물과 화석을 모았다는데, 브라질·페루·인도·마다가스카르 등 사람의 발길이 뜸한 저 지구 어딘가의 깊숙한 광산과 정글 등을 찾아다녔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 보물을 찾아 나선 인디아나 존스가 그려졌다. "남편이 목숨을 걸고 구해온 것들도 있어요.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고, 말을 타고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건너간 적도 있었죠. 무사하게 다녀와 달라 기도도 많이 했어요." 이러한 덕후 남편 옆에서 2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박물관을 이끌어 온 한 관장이지만, 처음부터 남편의 수집을 좋게 봤던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내의 입장에서 환상적이지만은 않았던 일이었다. 부부싸움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니 "둘이 같이 미쳐가더라"는 말을 듣게 됐다. 함께 수집하러 떠나면 이제 그만하자며 남편이 눈치를 줘도 한 관장이 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찾아가기도 어려운 곳에서 며칠씩 씻지도 못하고 생활하는 것이 힘들다가도 반짝이는 광물들을 만났을 때의 희망과 들뜸, 흥분은 그런 것을 모두 잊게 했다.박물관을 찾아오는 관객에게 예쁘고 신기하면서 학술 가치까지 있는 다양한 표본들을 보여주고 싶은 한 관장의 욕심은 돌에 빠진 남편의 '덕력' 못지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행복해 하는 것이 좋은 거죠. 특히

  • [덕후만세·(5)] 남양주 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

    [덕후만세·(5)] 남양주 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 지면기사

    남양주 모란미술관의 이연수(사진) 관장은 그냥 예쁜 것을 보면 좋았고, 누구보다 감성이 풍부했던 소녀였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그때와 비슷해요."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변하지 않은 미술에 대한 애착은 지난 30년간 미술관을 가꾸고 지켜온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2만8천여㎡. 넓고 파랗게 펼쳐진 잔디밭과 나무·꽃이 심어진 정원 사이에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작품 100여 점이 자리한 모란미술관은 조각전문미술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2만8000㎡ 정원에 국내외 100여점 자리日 '하코네 미술관' 모델… 30년간 가꿔 "세계 곳곳의 미술관을 다니면서 내가 운영해 봐야겠다 생각한 곳이 일본 하코네 미술관이었어요. 조각이 좋더라고요." 조각의 매력에 끌린 이 관장은 본격적으로 조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작가들과 인연을 이어나갔다.그런 이 관장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작품 중 하나가 그의 사무실에 있는 최의순 작가의 '빛'이라는 작품이다. 작품을 팔지 않았던 작가는 모란미술관에서 전시를 끝낸 뒤 이 작품을 이 관장에게 선물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관장이 전시하는 석 달 동안 매일 감상할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었다."작품에 대해 말한 적도 없었는데 선생님이 느끼셨나 봐요. 전시가 끝나는 날 작품을 주시는데 너무 좋아서 쓰러질 뻔했어요. 10년 동안 수장고에 넣지도 않고 매일 본 거죠.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을 소중하게 여길 것 같아요."최의순 '빛' 가장 특별 "10년간 매일 봐""더 바랄 것 없어… 떠난 자리 아름답길" 미술이 좋아서, 미술을 사랑해서 작품들을 보러 다녔고, 빠져들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보니 정도 들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사립미술관을 운영하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립미술관으로 자리 잡아 나가기까지 그만의 철학이 필요했다. 바로 '사람'이다."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배웠어요." 정말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이 관장은 작품을 선뜻 사지 못했다고 했다. 마음에

  • [덕후만세·(4)] 풀짚공예박물관 전성임 관장

    [덕후만세·(4)] 풀짚공예박물관 전성임 관장 지면기사

    "귀하게 생각하면 보물이고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에겐 쓰레기잖아요." 풀짚으로 만든 공예품에 대한 전성임(사진) 풀짚공예박물관장의 설명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풀짚 공예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사극의 영향인가? 퍼뜩 떠올린 풀짚 물건이라 하면 옛날 사람들이 신던 짚신, 비 올 때 쓰던 도롱이, 줄기로 엮은 바구니 정도였다. 주변에서 곧잘 볼 수 있는 풀로 만들어진 공예품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메주에 다는 새끼줄 하나 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손으로 만드는 것을 곧잘 해내던 전 관장이 단순한 취미에서 풀짚 공예에 깊이 빠져든 이유는 잃어버린, 또는 잃어가는 우리 기술에 대한 계승에 있었다. 어르신들 만나 재료 찾고 도구 등 수집 기록전주 골동품 가게서 본 망태기 직접 짜기도40년 세월 바쳐 비로소 '자료 구축' 역할 해내 오늘날 우리가 구입하는 나무줄기나 풀짚으로 짜서 만든 물건 대부분은 수입품이다. 과거 선조들이 풀, 짚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던 생활품은 도자기와 금속 등의 고급 공예품에 비해 평가절하돼 왔다. 전 관장은 "묶고 매는 기초적인 문화는 우리가 터득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누군가는 (이 기술을) 쥐고 있어야 한다"며 "잊혔던 조상들의 문화가 다시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일종의 사명감을 느낀 전 관장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짚 공예를 한 어르신들을 만났다. 산에 모시고 다니면서 재료를 찾기도 하고, 그들이 쓰던 도구를 기록하고, 풀로 엮어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공예품과 짚을 엮어내는 기술을 수집해 정리하는 것에 몰두했다.지방으로 자료조사를 다니던 시절, 하루는 전주의 허름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박물관에서도 보지 못했던 망태기를 만난 전 관장은 눈이 번쩍 뜨여 사고 싶었지만 주부에게 100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은 부담이었다. 그때부터 전 관장은 가게를 계속해서 들락날락했다. 끈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폭은 얼마인지, 무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 틈틈이 눈으로

  • [덕후만세·(3)] 김포 덕포진교육박물관 김동선·이인숙 관장

    [덕후만세·(3)] 김포 덕포진교육박물관 김동선·이인숙 관장 지면기사

    무릎이 삐죽 튀어나오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나무 장작을 넣은 난로가 따뜻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 풍금 소리를 청해 들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돼 보이는데 아직도 소리가 짱짱하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3학년 2반 교실에는 잊고 있었던 추억과 기억이 머물고 있었다.김포 덕포진교육박물관은 교사였던 김동선, 이인숙 부부가 집도 팔고 퇴직금도 털어서 만든 소중한 공간이다. "지금은 보물이 됐지만 그땐 쓰레기를 모아놓은 것 같았죠. 어떤 분이 '김 선생은 뭐하려고 이렇게 쌓아 두냐'해서 웃었더니 '부부가 같이 미쳤군'이라는 얘길 들었어요." 이 관장이 주변 사람들이 말렸던 교육박물관 탄생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교과서부터 작은 필기구까지 쉽게 버리지 못한 김 관장의 습성은 박물관의 밑천이 되었다. 김 관장이 교육과 관련된 물건을 소중히 모아온 데에는 '언젠가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박물관을 통해 아이들이 감성과 인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길 바랐던 것이다. 그저 하나의 바람에서 머물렀던 그 생각은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되자 더욱 확고해졌다.더는 교사생활이 불가능했던 이 관장은 학교를 그만두고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김 관장은 "그만두게 해서 미안하다. 학생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아내를 위로하고, 고향인 김포에 교육박물관을 세웠다. 3학년 2반은 이 관장이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았던 학급이다. 인터뷰를 위해 앉아 있던 교실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숙연해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뭉클했다.교과서부터 작은 필기구까지 한 데 모아불의의 사고 후 더욱 확고해진 교육 이념섬 폐교서 조개탄 구해오는 등 손때 가득 이 박물관 구석구석 김 관장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 섬에 있는 폐교에 가서 조개탄을 구해오기도 하고, 강원도의 학교에서 버리려 놔둔 책걸상을 새벽같이 나가 실어오기도 했다. 교과서나 옛 유물들을 기증해온 고마운 이들도 있었다. "옛날 물건을 보면 가슴이 떨리고 온몸에 경련이 난다"던 김 관장의 열정, 그런 남편

  • [덕후만세·(2)] 한국카메라박물관 김종세 관장

    [덕후만세·(2)] 한국카메라박물관 김종세 관장 지면기사

    보기 힘들다던 아마존 강의 핑크돌고래를 만난듯한 느낌이었다. (빙산의 일각이지만) 카메라 수집가로 유명했던 그의 전적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과천 한국카메라박물관에는 김종세 관장의 30여 년간 전 세계를 돌며 모아온 카메라와 렌즈 등 2만 5천여 점이 모여있다. 과연 이 수집의 처음은 어디였는지, 대체 이 많은 카메라는 어떻게 모은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시작은 평범했다. 군 제대 이후 김 관장이 돈을 벌어 제일 처음 산 것이 오토바이, 두 번째로 산 것이 카메라였다. 중고로 산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로 3~4년을 사용하며 취미로 사진동호회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보통 새로운 카메라를 사려면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파는 경우가 많은데, 김 관장은 한번 손에 들어온 카메라를 되팔지 못했다. 박물관의 역사는 어쩌면 그런 김 관장의 성격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악착같이 구하다 보니 어느새 경매장의 유명인사 종류별로 카메라를 사고 각기 다른 렌즈도 끼워보고 사진 찍어 비교해보는 재미에 흠뻑 빠진 김 관장은 형편만 되면 카메라를 사서 모았다.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카메라를 구하다 보니 어느새 경매장의 유명인사가 되고야 말았다. 동양인이 뭐하러 카메라를 이렇게 사는지, 장사하는 사람인지 묻기도 했어요."영국에 있는 친구를 통해 크리스티 경매의 카탈로그를 전해 받고, 사고 싶은 카메라를 구하러 1년에 2번씩 영국을 갔어요. 처음 경매에 갔을 때 맨 뒤 좌석에 앉았는데 앞에서 경매 번호판이 자꾸 올라가는 게 보이니까 꼭 사야 하는 것도 부담돼 손을 들지 못했어요." 그렇다.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다음에 경매장에 갔을 땐 경매사 앞 맨 앞자리에 앉아서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계속 손을 올렸죠. 이렇게 해야 뒤가 안 보이니까 압박감이 덜했어요. 다들 동양인이 뭐하러 카메라를 이렇게 사는지, 장사하는 사람인지 묻기도 했어요." 원하는 목제 카메라 갖기 위해 가게 통째로 사 그는 원하는 목제 카메라를 구하기 위해 베

  • [덕후만세·(1)] 파주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이영진 관장

    [덕후만세·(1)] 파주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이영진 관장 지면기사

    가끔 궁금했다. 덕후의 DNA는 타고나는 것일까. 경주마처럼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며, 월세를 왜 내는지 모를 정도로 길바닥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덕질을 했던 지난날의 나는 과연 덕후라고 할 수 있을까. 아, 물론 지금도 취미라는 이름의 덕질은 이어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진정한 덕후들의 세계는 여전히 미지의 대상이다.덕후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크고 작은 힘이 있다. 그리고 상당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뮤지엄'을 만들기도 한다. 경제관념이 약간 없고, 이상한 기질이 있으며, 이성적 판단이 잘 안 되는 그 괴짜 같은 덕후 관장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기획을 준비했다.세상의 모든 덕후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편집자주"지금은 손을 씻었어요." 파주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이영진(사진) 관장이 말했다. 더는 악기 수집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가능할까 의아해 하던 순간 이 관장이 다시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게 몇 개 있긴 해요. 파푸아뉴기니에서도 사야 할 악기가 있는데…." 그럼 그렇지. 30여 년을 악기 덕후로 살아온 그에게 수집은 무 자르듯 단칼에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얼마나 많은 악기가 있는지 박물관의 벽까지 촘촘하게 메워져 있었다. 모양도 소리도 제각각인 전 세계의 악기가 한 곳에 자리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악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해 왔다. 아름다운 연주로 즐기든, 종교적이거나 주술적인 용도로 쓰였든 인류의 역사에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구 상에 6천~7천개의 언어가 있는데, 언어로 민족을 분류했을 때 몇 개 민족(또는 부족)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모두 악기를 사용한다고 하니 그 다양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이미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1천여 개의 악기가, 또 이 관장의 그러한 열정이 박물관의 가치를 보여준다.1천여개로 박물관벽까지 가득 채워 이 관장의 악기 사랑은 1989년 사업차 모스크바 출장을 가면서 시작됐다. 그곳에서 이 관장은 주변 나라들에 여행을 다니며 생전 처음 본 악기들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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